황간향교 (黃澗鄕校) 옛 황간고을 교육의 중심지 ~ 황간향교(黃澗鄕校)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1981년 12월 26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본래 조선 태조 3년(1394)에 황간현감으로 있던 하첨(河詹)이 황학루(黃鶴樓)를 세우고, 선현 봉사와 지역 유림의 교육을 위해 현(縣)의 뒷산에 창건하였던 향교이다. 그 후 현종 7년(1666)에 서쪽으로 2리떨어진 토성 안으로 이건하고, 영조 28년(1752)과 광무 5년(1901)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을 취하였다.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인데, 그 초석에 연화문(蓮華紋)이 조각된 것으로 보아 본래는 인근 사찰건물을 이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4성(聖)·10철(哲)과 22현(賢)을 봉안하고, 매년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지내고 있다.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익공식(翼工式) 건축이다. 이 외에 고직사(庫直舍) 등의 부속건물들이 있다.
황학루라 하였다가 경상도 관찰사 남공(南公)이 마치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하다 하여 명명한 가학루(駕鶴樓)가 앞에 있다.
황간향교 가학루
※ 황간 향교,가학루 찾아가기 (2008년말 기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황간 경유 구미로 가는 고속버스가 1일 3회 (6:40, 11:40, 16:40)운행한다. 단 황간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고속도로변에 정차하며, 황간터미널까지는 10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 서울역에서 황간역까지 무궁화호 열차 1일 4회 운행 (대전역에선 7회 운행)
* 대전(동부), 대구(북부), 김천에서 황간 행 직행버스가 드문드문 떠난다.
* 황간터미널에서 걸어서 15분, 황간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송천 건너 높다란 언덕 으로 솟아난 누각(가학루)이 있다. 바로 거기, 이정표는 없으나 찾기는 쉬움
* 승용차 이용시
- 경부고속도로 황간나들목 → 황간시내 → 황간교를 건너 바로 우회전 → 황간향교
* 황간향교 앞까지 차량 진입 가능하며, 주차는 향교 앞이나 가학루 입구 계단에 살짝~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 150 (황간향교 ☎ 043-744-2690)
♠ 향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 황간면 명칭 변천
○ 근거 : 황간 향교지, 황계지(黃溪誌), 신증동국여지승람
○ 명칭 : 소라현(召羅縣) - 황간현(黃澗縣) - 황계현(黃溪縣) -
황청현(黃靑縣) - 황간현(黃澗縣) - 황간군(黃澗郡) -
황간면(黃澗面)
※ 소라현 : 신라(新羅)시대에는 소라현이었으며 현의 읍 소재지는 광평마을
마을앞 소라천에서 현 명칭 유래
※ 황간현 : 신라 경덕왕때 황간현(黃澗縣)이라 칭하였음.
고려 현종때 경산부 소속
※ 황계현 : 읍 서쪽 석천(石川) 바닥의 황석 돌에서 신라때(경덕왕?) 유래
* 석천 : 황간면 우매리 앞 하천, 즉 반야사 계곡앞이 석천(봉황산 발원
남류하는 물)이며 원촌마을 입구에서 황간면소재지앞
초강천(민주지산 발원 물한계곡의 물)과 합류하여 월유봉앞
송천으로 흐르며 심천면 초강리에서 금강으로 흘러든다.
※ 황청현 : 조선 태종(太宗) 13년에 충청북도로 귀속.
태종 14년에 청산현과 합병하여 황청현
※ 황간현 : 태종 16년에 다시 분리 황간현
선조 26년 청산현(靑山縣)에 병합되었다가 광해 13년 황간현 복칭.
* 임진왜란 당시 충청병사를 따라 현감 박몽설이 사속을 인솔하여
진주성을 지키다 전원이 전사하여 관원이 없어져 청산현과 합병
하였다가 광해13년에 황간현으로 복칭되었다.
※ 황간군 : 1895년(고종32) 충주부 황간군으로 승격
1896년 충청북도 황간군으로 개편
※ 황간면 : 1914년에 황간면으로 강등 영동군에 편입되었다.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0리요, 북쪽은 경상도의 상주(尙州) 경계까지
14리에 이르고, 남쪽으로 영동현(永同縣)경계까지 16리에 이르고,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
계까지 20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영동현 영
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경산부(京山府)에 소속시키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
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경산부에 소속시켰다.
공양왕 2년에는 다시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본도(本道)에 예속시켰
으며, 14년에 청산(靑山)을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으로 만들었다. 16년에 각각 다시 복구시
키고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소라(召羅)ㆍ황청(黃靑)ㆍ황계(黃溪).
산천 황악산(黃獄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또 경상도 금산군조(金山郡條)에 보인다.
백화산(白華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또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 보인다.
산양암(山羊巖) : 장교천(長橋川) 서쪽에 있다.
극락산(極樂山) : 금화부곡(金化部曲)에 있다.
석천(石川) : 고을 서쪽 4리에 있으니, 근원이 속리산에서 나와서 산양암에 이르러 장교천과
합류(合流)했다.
장교천(長橋川) : 성 남쪽에 있다. 혹 대천(大川)이라고도 일컫는데, 근원이 무주(茂朱) 도마
현(都馬峴)에서 나와 황악산(黃獄山) 물과 합류한다.
토산 송이버섯[松蕈]ㆍ자기(磁器)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백화사(白花蛇)ㆍ꿀[峰蜜]ㆍ돌버
섯[石蕈]ㆍ안식향(安息香)ㆍ신감채(辛甘菜)ㆍ목적(木賊).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6백 46척이요, 높이가 7척이며, 안에 우물 하
나가 있다.
봉수 눌이산 봉수(訥伊山烽燧)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고성산(高城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한다.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 : 고을 동쪽 13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눌이정산에 호응하고, 서쪽
으로는 영동현 박달산(朴達山)에 호응하며, 북쪽으로는 경상도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에 호응한다.
누정 가학루(駕鶴樓) :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불에 탔는데, 성화(成化) 병오년에 현감(縣
監) 손번(孫蕃)이 중건(重建)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신흥역(新興驛)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불우 심묘사(深妙寺) : 절에 팔경(八景)이 있으니,
사군봉(使君峯)ㆍ월류봉(月留峯)ㆍ산양벽(山羊壁 바로 산양암(山羊巖)이다)ㆍ용연동(龍淵洞)
ㆍ냉천정(冷泉亭)ㆍ화헌악(花獻岳)ㆍ청학굴(靑鶴窟)ㆍ법존암(法尊巖)이다.
반야사(般若寺) : 백화산(白華山)에 있다.
건천사(乾川寺)ㆍ쌍림사(雙林寺)ㆍ대평사(大平寺) : 모두 황악산(黃獄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금화부곡(金化部曲)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옛날엔 금산(金山)에 붙였었는데, 뒤에
경산부(京山府)로 옮겨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여기에 소속시켰다.
연혁 선조 26년 청산(靑山)에 병합되었다. : 임진왜란 때 현감 박몽설(朴夢說)이 진주에 부
임하였는데,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광해주 13년에 복귀시켰다.
○ 금화 부곡(金化部曲) 동쪽으로 38리에 있다. 본래 금산(金山)에 예속하였는데 경산(京山)
으로 이속시켰으며, 공양왕 2년에 예속되었다.
토산 잣[海松子]ㆍ감ㆍ대추.
누정 관덕정(觀德亭).
예전 황간역
신축 황간역
황간역 전면 광장 모습
황간역 후면 모습 (승하차 하는곳)
대한의사 이건석선생 기념비(大韓義士李建奭先生紀念碑)
을사조약의 취소를 강경히 상소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이건석(1852~1906)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철종3년(1852)∼광무10년(1906)의 애국의사로서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외치며 순절)
1895년 을미사변때 국모를 시해한 왜적의 만행을 기호 유생을 대표하여 상소하였으며, 1898년 고종양위를 모의했던 안경수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궁궐 앞에서 조약취소를 상소하다 일경에 체포 구금되어 옥중에서 국운을 염려하며 식음을 전폐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구한말 애국지사 이건석
이건석은 한말의 애국열사로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성석(驅石)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어질고 의지가 굳었는데 학문에 전심전력하여 여러 방면에 박식하였다.
글 공부에 전념하느라 뒤늦게 22세에 결혼하였으나 청운의 꿈을 버릴 수 없어 가족을 고향에 남겨둔 채 서울로 올라가 학문을 계속하여 궁내부 주사(官內席 主事)의 벼슬을 지냈다.
이때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정치적 · 경제적 ·군사적인 침략의 마수를 뻗어오고 있을 때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1895년(고종 32년)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이에 유림과 애국지사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구국의 불길이 타오르게 되었다.
그는 국모를 시해한 왜적의 만행을 규탄하고자 기호 유생을 대표하여 여러번 상소를 올렀고, 1898년(광무 2년)에는 고종의 양위를 모의했던 안경수 등 친일파가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자 이들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처럼 그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1903년(광무 7년) 러 · 일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양국 중 어느 나라가 승리해도 피해는 우리나라가 입을 것이므로 호국의 방책을 세우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친일 세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다.
1905년(광무 9년)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승지 이석종과 함께 유생들을 이끌고 궁궐앞에 나아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우국충정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우기엔 이미 때가 늦었고 불가항력이었다.
이에 더이상 서울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차선책을 도모할 수밖에 있었다.
결국 을사조약에 동조한 조정의 매국노를 처단하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자객들을 모아 거사를 악속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거사 전에 이 모의가 발각되어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모의가 탄로된데 대하여 얼마나 비통해 하였는지 모른다.
그날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쓰러져가는 국운을 애통해 하면서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이때 부인 천씨가 정성껏 식사를 지어와서 간곡히 권했으나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나만 편히 먹고 지낼 수 있느냐."하며 이를 완강히 물리쳤다.
식음을 전폐한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 피를 토하고 기절까지 하여 일본 관헌이 주사를 놓아주고 약을 주려고 하였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바이니 구차한 삶을 더 살 필요가 없다." 고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을 졸라 순절하니 때는 1906년(광무10년) 5월 10일이요, 향년 55세였다. 일본 관헌은 그의 시체를 남대문 밖에 내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이응수는 동지들과 함께 지금의 노량진 앞 기슭에 시신을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이듬해 여름에 고향인 영동 황간의 동산에 안장하였다.
죽으면서 남긴 그의 유언이 그가 신고 있던 버선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의 애국 충절이 얼마나 간절했나를 말해주고 있다.
"슬프다. 죽음이여. 사람이 누가 죽지 않을까마는 마음대로 죽기도 어렵도다.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죽으니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내가 죽되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매국노를 죽이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함이 천추의 한이 되기 때문이다."
아들 이응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기로 결심하고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목숨을 걸고 활약하였다.
3 · 1 운동 당시 선두에 나서서 만세운동을 선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려 구속 되었으며 석방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권총과 폭탄 밀수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여러 해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이렇듯 목숨을 끊어 가면서까지 나라를 지키려던 이건석의 우국충절이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독립운동을 계슥한 그의 아들 이응수의 뜨거운 애국심과 그 갸륵한 충절은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건석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은 1948년 경북 김천에서 숭의계(崇儀契)가 설립되면서 시작됐고 성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영동군에서는 황간역 앞에 그의 공적기념비(사진)를 건립하고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또 정부에서도 같은 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영동군 황간역 앞에 ‘대한의사이건석선생기념비’가 세워졌고 1987년 5월 황간면 연화리에 있던 묘소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인물지」「내고장 전통 가꾸기」「한국독립사」
황간향교 대성전
황간향교 명륜당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에 있는 향교. 1394년(태조 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666년(현종 7)에 토성 (土城) 안으로 이건하였고, 1752년(영조 28)과 1755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872년(고종 9)에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향교 홍살문과 외삼문(外三門)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5칸의 명륜당,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초석이 연화문(蓮花文)으로 조각된 것으로 보아, 사원건축양식과 정자·주택 건축양식이 절충된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明倫堂)
명륜당 예전 사진
대성전 예전 사진
향교의 중심건물인 대성전(大成殿)
연화문(蓮華紋) 초석
내삼문(內三門)과 대성전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성전 중앙 (공자 위패, 영정)
건물 가운데 제단에는 유교의 중심 인물인 공자의 위패가, 좌우로는 맹자, 노자 등의
중국 성현(聖賢)들과 율곡 이이, 중봉 조헌(重峯 趙憲) 등의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
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 우측
대성전 좌측
일반적인 향교 대성전의 위패 봉안도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향교 남쪽 담장 밖에 화장실과 나무땔감들
소장전적은 판본 14종 116책, 사본 3종 4책이 있으며, 이 중 ≪양사당신인경서전장절목 養士堂新印經書傳掌節目≫·≪청금록 靑衿錄≫·≪향교사물등록 鄕校事物謄錄≫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향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참고문헌≫ 太學志 ≪참고문헌≫ 永同郡誌(永同郡, 1968) ≪참고문헌≫ 文化遺蹟總覽 上(文化財管理局, 1977)
황간향교 시 대: 조선시대 유 형: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0호 (지정일 : 1981-12-26) 주 소: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 150-1 관 리: [관리자] 이경환 [전화] 043-744-2690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황간향교는 태조 3년(1394)에 마을 뒷산에 세웠으나 현종 7년(1666)에 흙으로 쌓은 성안으로 옮겼다. 영조 28년(1752)과 고종 9년(1872)에 수리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과 고직사 등의 부속건물이 있는데 앞쪽은 배움의 공간, 뒤쪽은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전학후묘의 배치형태를 따르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으로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해 여러 성현들을 모시는 제사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집이다. 또한 주춧돌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사원건축양식과 정자·주택양식이 절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책들은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향교(鄕校)는 본래 조선(朝鮮) 태조(太祖) 3년(1394)에 현(縣)의 뒷산에 창건(創建)하고, 현종(顯宗) 7년(1666)에 서쪽 2리인 토성(土城)안으로 이건(移建)하였으며, 영조(英祖) 28년(1752)과 고종(高宗) 광무(光武) 5년(1901)년에 중수(重修)한 바 있다.
건물(建物)의 배치(配置)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인데, 그 초석(礎石)에 연화문(蓮華紋)이 조각(彫刻)된 것을 보아 본래는 인근 사찰건물(寺刹建物) 을 이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5성(五聖) 22현(二十二賢)을 봉안(奉安)하고, 매년 춘추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있다. 강당(講堂)인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익공식(翼工式) 건축(建築)이며, 이 외에 고직사(庫直舍) 등의 부속건물들이 있다.
가학루(駕鶴樓)
경부선 기차를 타고 황간역(대전과 김천사이)을 지나다보면 언덕위에 있는 보이는 누각이 가학루(駕鶴樓)이며 옆에 황간 향교가 있다.
황간향교, 가학루 오르는 계단
저 푸른 언덕 위에 그림처럼 솟아난 아름다운 누각, 가학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황간향교와 이웃해 있다. 1393년(태조 1년) 황간현감 하첨(河詹)이 세웠다고 하며,
15세기경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남공(南公)이 이곳에 들려 마치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
니는 듯 하다며 이름을 가학루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광해군 시절에 황간현감 손번(孫蕃)이 다시 지었으며 1716년에 현감
황도(黃鍍)가 개와(蓋瓦)를 보수하고 정조 때 현감 이운영(李運永)이 중수, 1930년 영동군수
김석영이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가학(駕鶴)이란 이름이 누각의 이름 중에 최고로 좋은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널린 누각 중에
그 이름을 취한 누각이 제법 널렸기 때문이다. 누각은 잠시 머리를 식히며 바람을 쐬며 시 한
수 짓는 휴식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자연을 벗삼고 신선을 꿈꾸던 옛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담
긴 곳이기도 하다.
가학에는 '천지의 시초를 초월하고 도의 본체에 혼합되며 바람을 타고 날개달린 신선이 된다'
는 도교(道敎)풍의 의미도 담겨져 있다고 한다.
경상도관찰사 남공(南公)이 썼다는 가학루 현판
누각에는 시인묵객들이 남긴 현판들이 앞다투어 걸려있다.
가학루 동쪽에는 표석 4개가 있는데
한결같이 가학루와 그 주변 풍경에 대한
찬양시들이 적혀있다.
경부고속도로 김천에서 추풍령을 지나 황간IC를 통과 하기전 오른편 산 언덕에 보이는 누각이 가학루(駕鶴樓) 이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때 현감 손번과 구장원이 중건하고 숙종 42년 현감 황도가 기와를 보수하고 정조때 현감 이운영이 중수하고 1930년에 김석영 군수가 다시 중수하였다.
황간향교 앞에 있는 이 누각은 조선 태조 2년(1393)에 황간 현감 하첨이 창건하였는데 뒤에 경상도 관찰사 남공이 마치 학이 바람을 타고 떠다니는 듯하다 하여 가학루라 편액하고 이첨이 기문을 썼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때 현감 손번과 구장원이 중건하고 숙종 42년(1716) 현감 황도가 기와를 보수하고 정조때 현감 이운영이 중수하고 1930년에 김석영 군수가 다시 중수하였다. 건물구조는 목조 단층의 정자로 정면 4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집이다.
일반적으로 서원과 향교에는 누각이 있고 그 누각은 서원,향교의 담장 안에 위치하는데 황간향교는 가학루가 담장 밖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지형적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학루는 4x3의 단층누각이었는데, 일반적으로 홀수칸을 지향하는 건물의 성격에서 벗어난 것이 의아했다. 확인결과 주심포와 익공계공포가 적절히 섞여 있는 독특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 공포양식의 변화를 적절하게 반영해 주는 곳이라 하겠다.
경치 좋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진 가학루. 이곳에서 시를 읊고 자연의 경치를 만끽했을 선비들의 여유가 느껴진다.
향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좀 특이한 구조다. 외삼문과 내삼문.. 그리고 명륜당과 대성전.. 끝.
황간향교는 다른 향교와는 달리 동재, 서재, 동무, 서무, 기타등등의 건물 시설이 없다. 담장안에 위치한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뿐이다.
황간은 조선시대에 '현' 이라는 가장 작은 지방행정구역으로 황간현으로 조선시대에는 지역적으로 엄격한 구분을 두어 대도호부, 도호부, 주, 목, 부, 군, 현 의 단위에 정치적인 차별을 두었다.
향교의 경우 대도호부-주의 경우 정 4품의 관리를 파견하고 80여명의 학생을 가르쳤고, 도호부-부-목의 경우 정 5품의 관리를 파견하고 50여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며, 군-현의 경우 정 6품의 관리를 파견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황간향교의 경우 현에 소속된 국가교육기관으로 정 6품의 관리가 파견되어왔으며, 30여명의 학생들이 가르침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향교였다.
또한, 명륜당의 경우 자세히 살펴보면 건물이 5x2 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마루로 사용되었고, 양쪽의 1칸씩은 온돌장치가 있어 숙소로 이용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즉, 황간향교의 경우 지형적인 요소와 현에 소속된 향교라는 점에서 독특한 건물 배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내삼문 뒤로 보이는 대성전은 아담한 크기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최근에는 야외 교육기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박한 꽃문양의 기와와 당초문이 보이고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것이특징이다.
향교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하겠지요. ㅋㅋㅋ
황간의 가볼만한 곳 소개
월류봉 (月留峯)
높이는 400.7m이다. 깎아지른 절벽산인 월류봉아래로 물 맑은 초강천(草江川) 상류가 휘감아 흘러 수려한 풍경을 이룬다.‘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라는 뜻의 월류봉(月留峯)이란 이름처럼 달밤의 정경이 특히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이 일대의 뛰어난 경치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하였다.
한천팔경은 제1경인 월류봉을 비롯하여 사군봉(使君峯)·산양벽(山羊壁)·용연동(龍淵洞)·냉천정(冷泉亭)·화헌악(花獻岳)·청학굴(靑鶴窟)·법존암(法尊巖)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 월류봉의 여러 모습을 지칭한 것이다.
화헌악은 월류봉이 진달래와 철쭉으로 붉게 물든 모습을 가리키고,
용연동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沼)를 말하며,
산양벽(산양암)은 월류봉의 가파른 절벽을 이르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 황간현(黃澗縣) 불우조에‘심묘사(深妙寺)의 팔경(八景)’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 바로 한천팔경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한때 이곳에 머물며 작은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였는데 월류봉 아래쪽에 우암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한천정사(寒泉精舍,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와 영동 송우암 유허비(충청북도기념물 제46호)가 있다.
월류봉
한천정사 입구
한천정사 우암 송시열 비각 우암 송선생 유허비
왼쪽 건물은 우암 송시열 비각, 가운데 정자는 월류정
가을단풍
월류봉
백두대간상에 있는 삼도봉 서편 민주지산에서 북상한 산맥이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석천변에 이르러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의 명산으로 한천 팔경의 수려한 절경을 형성하고 있다.
월류봉은 표고 365미터의 동쪽 제 1봉을 칭하는데 절벽의 정상에 달이 머물다 간다는 곳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의 주무대 였던 월류봉 추억도 많았고 그 시절이 마냥 그립기도 합니다.
약 30년전까지 그곳에는 금과 은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 지금도 가보면 산허리 중간 중간에 채굴하던
굴의 모습이 남아 있으며 옛 영광을 아쉬워 하는 것 같다. 장소는 아래사진 펜션자리가 금광이고 펜션뒷편의
산이 금을 채굴하던 곳으로 갱도가 여기저기에 있었습니다.
금광산을 운영한 시절에는 펜션(광산)자리에서 초강천(냇물) 건너 산까지 구름다리가 놓였고 건너편 산
여기 저기에 금을 캐기위한 갱도가 있었는데 지금도 확인이 가능할 것입니다.
산책코스로는 이곳 월류봉이 있는 원촌마을에서 위의 사진 펜션 정문앞 오른쪽길로 약 2km
초강천(송천) 계곡을 따라가며 멋진 주변경관을 볼수 있는데 외지인과 현지인도 잘 모르는 곳이지요.
평지니까 힘들지 않고 산책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원래 이길은 국도를 가로지르는 지름길로 옛날 교통편이 없을때 조상님들이 많이 이용하시던 길이에요.
2km 가다보면 국도변에 있는 용암마을(누룩바위)이 나옵니다. 일명 상용암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되돌아 오시면 되겠지요.
윗글에 대한 보충 설명 => 중앙왼쪽 한반도의 서해안 지형이 산책로에 해당됩니다.
되돌아 오시지 않고 3km정도 국도를 따라 진행하면 하용암(당저) 마을이 나오며 상주시 모서면과 영동군
용산면으로 진행할수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용암초등학교가 있던 마을입니다.
지금은 관광지로 사진의 이곳 월류봉이 소개되고 있지만 예전 학생들의 소풍지는 이곳이 아닌 사진의 펜션
오른쪽 뒷편인데 펜션정문 바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길이 있는데 150m 정도 가면 시냇가의 넓은 모래사장이
소풍지 였는데 지금은 모래사장이 많이 줄어들었으며 지형도 조금 변하기는 하였습니다.
그 장소 건너편 절벽에 금을 캐기위한 갱도와 중턱에 작은 불상도 누가 모셔놓았는데 지금도 있는지 궁금
하기도 합니다.
1973년도
금과은 채굴하던 갱도 {펜션(광산)입구쪽}
절벽 중간에 보이는 굴은 금을 캐던 갱도
등산로 산중턱에 있는 청학굴 (금광갱도)
등반로 곳곳에 울긋 불긋한 바위돌 이것은 금 또는 철 성분( 앗 천기누설)
월류봉(月留峰)의 정상에서 내려본 한반도 지형
강원도 영월 선암마을 : 한반도 지형
강원도 영월군 서면 옹정리 산 180번지 선암마을
영월에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선암마을이 있다.
마을 남쪽의 숲길을 지나 전망대에 서면 우리나라 입체지도와 같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암마을에서 시작되는 서강이 동강을 이루기 위해 굽이쳐 내려가면서 만들어 놓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 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신기한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반야사 [般若寺] http://www.banyasa.com/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지장산(地藏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720년(신라 성덕왕 19) 의상(義湘)의 십대제자 중 한 명인 상원(相源)이 창건하였다. 일설에는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예로부터 이 일대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절 이름을 반야사라 하였다. 반야(般若)는 바로 문수보살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절이 들어선 지장산이 백화산(白華山)이라고도 불리므로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설도 있다. 1352년(고려 충숙왕 2)에 중건하고, 1464년(조선 세조 10) 세조(世祖)의 허락을 얻어 크게 중창하였다. 세조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9일 동안 법회에 참석한 뒤 신미(信眉) 등의 청으로 이 절에 들러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했다고 한다.
세조가 이 절에 들렀을 때의 설화가 전한다. 세조가 대웅전에 참배하자 문수동자가 나타나더니, 세조를 절 뒤쪽에 있는 망경대(望景臺) 영천으로 인도한 후 목욕을 하라고 권하였다. 세조가 목욕을 시작하자, 문수동자는 왕의 불심이 지극하므로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사라졌다.
그 뒤의 연혁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고, 1993년 대웅전을 중창한 뒤 요사를 세워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극락전·산신각·백화루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1993년까지 대웅전으로 쓰이된 건물로 1975년 중수한 바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선 중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대웅전은 1993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하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 한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불상 뒤에는 영산회상도와 신중탱화·감로탱화가 있다.
유물로는 요사에 있는 신중탱화와 삼층석탑이 유명하다. 신중탱화는 화기(畵記)에 따르면, 본래 보국사(輔國寺)에 있던 것으로 1890년(고종 27) 응상(應祥)이 그렸다고 한다. 이 탱화를 누가 언제 이 사찰로 옮겨왔는지는 알 수 없다.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에 세워진 것으로, 1950년 성학(性學)이 절 동쪽 500m 부근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세웠다. 전체 높이 315cm이고 조성 양식으로 보아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절 남쪽 100m 쯤에는 부도 2기가 전하는데, 그 중 하나는 탑신 위에 원반 모양의 옥개석을 놓고 그 위에 원통형 석재를 올린 것으로 형태가 매우 독특하다. 이밖에 왕이 죽었을 때 그 영위를 봉안하는 영위판(靈位板)과 문수동자가 탔다는 목각사자 등이 전한다.
찾아가시는 길
반야사 (왼쪽 절벽위는 문수전)
삼층석탑(보물 제1371호)
1972년 초등 5학년때 반야사, 검정고무신 보이시나요
문수전
문수전 아래 석천의 가을단풍
반야사 반야교 아래
망경대 위의 반야사 문수전
반야사 대웅전 앞 도로에 있는 사람모습 나무
문수전에서 내려본 모습
문수전의 문수보살상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추풍령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고
세상의 삶에는 두루 저마다의 길이 있다. 산다는 게 또한 아주 먼길 가는 일이라고 버릇처럼 주억거리면서 오늘도 사람들은 쉴 틈 없이 저마다의 길을 간다. 멀리 떠나도 길이요, 멀리서 돌아와도 길이다. 떠난 사람만이 머물 수 있고 머문 사람만이 떠날 수 있으니 장차는 떠남도 머무름도 모두 길이다. 아, 마침내 세상에 길 아닌 것이 없으니 천지간의 그 많은 행차들은 도대체 어느 곳에 닿아 쉬는가. 저 하늘 어디에는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어가서 가면 다시 오지 않는 목숨들도 있다 하니 참 부러워라.
지금 또 길 떠나는 이들은 다시 오는가, 아니면 영영 안 오고 마는가? 때때로 거기,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으로 가자. 가서 한 세상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이나 되고, 솔가지 무성한 숲을 헤치는 바람이나 되어 쉬어 가자. 하룻밤쯤 자 고 가자. 본래 온 바 없어 이내 갈 곳 없는 구름처럼. 때때로 그와 같이 와서 그와 같이 가는 바람처럼. 몇 날이 지나가도 헛헛하여 돌아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매양 그 길 어디쯤을 시작이라 하고 내내 그 길 어디쯤을 끝이라 하면서 정녕 우리 지난날 수없이 매듭지은 그 허다한 마디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송천 강변의 천년 옛절 반야사
상주 땅 모동에서 오도치(吾道峙)를 넘어 영동의 황간에 닿기 전에 백화산을 휘돌 아 흐르는 송천에 기대어 앉은 옛 절이 반야사다. 원효의 제자 상원이 창건한 반야 사는 백두대간의 봉황산과 국수봉에서 갈래 친 두 산줄기가 각각 송천에 막혀 이마 를 맞대는 협곡에 자리잡은 천변(川邊) 도량이다. 남한강의 신륵사나 소양강의 청평사가 강언덕에 있으나 물에서 제법 멀고, 포항의 오어사가 비록 물가에 있으나 호반인 것에 견주면, 반야사는 금강의 물줄기 송천의 여울로 바투 바깥 마당을 삼는 절이다. 행여 장마에 큰물이라도 지면 제 아무리 고승이라도 절간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겠다 싶을 만큼 위태롭다.
산천이 두루 위험하니 절집의 아름다움이야 새삼 들먹일 일이 아니다. 수리의 둥지같이 오만한 벼랑 끝의 암자가 때로 그 어질증으로 아름답듯, 강변의 위태로운 옛 절이 어찌 수려한 풍광을 뽐내지 않았으랴. 다만 얼마 전 시멘트로 지은 요사채가 옛집으로 남은 불당 한 채와 천년 묵은 삼층 석탑을 무안하게 하더니, 이제는 대웅전도 새로 짓고 전에는 없던 큼지막한 시비(詩碑) 하나가 산문의 옛 부도 곁에 놓였다. 게다가 시비와 더불어 세운, 시비를 세운 후손의 공덕비가 참으로 볼썽사납다. 조상의 시비를 세우는데 공덕이라니, 어느덧 반야사도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절이 되고 말았다.
寄宿僧房久 절에 와 묵은 지 오랜데
心無顧草廬 집 생각이 전혀 안 나네
山光侵座碧 산빛에 물든 자리 푸르고
竹影入簾疎 대그림자 성글게 발에 어렸다
靑磵響幽谷 맑은 물소리 골짜기에 그윽하고
白雲行太虛 푸른 하늘엔 흰구름이 두둥실
居僧紊已罷 스님은 이미 공부를 끝냈는데
床在讀殘書 읽던 책이 상 위에 남았구나
시비에 실린 국당 박흥생(1374-1446)의 시 <반야사>다. 시비보다 큰 공덕비를 세우는 후손과는 달리 국당의 시는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읽게 만드는 깊이가 있었다. 그의 시집에 발문을 썼다는 서거정이 “티끌 먼지를 벗어나 참으로 도가 있고 덕이 있는 시”라 했다는데 고개를 끄덕일만 하다. <반야사>의 마지막 구절은, “따슨볕 등에 지고 유마경을 읽노라니/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구태여 꽃밑 글자를 읽어 무엇하리오”로 끝나는 만해의 <오세암>을 떠올리게 한다. 공덕비만 아니라면 반야사의 명물이 될 법도 한 시비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황간의 애향비 회도석(回櫂石)
황간(黃澗)은 본래 신라의 소라현이다가 지금의 이름을 경덕왕 때 얻었다. 민주지산 (해발 1242)에서 발원하는 물한계곡의 물과 삼봉산(해발 930)에서 발원하는 고자리의 물이 장교천을 이루며 황간을 지나 달도 쉬어 간다는 명승 월류봉에서 송천에 몸을 싣는다. 그 장교천의 물빛이 누렇다 하여 예로부터 황간이라 하였으니 황계 (黃溪)와 더불어 모두 이미 신라 적 이름이다.
장교천이 반야사를 지나 흘러온 송천과 만나기를 저만치 앞두고 희한한 푯돌이 하나 서 있으니 이름하여 회도석이다. 말 그대로 풀어 ‘뱃머리를 돌리라’는 뜻이다. 『영동군지』를 보니 황간 현감 이운영이 18세기 무렵에 세우고 글씨는 충주 사람 박시화가 썼다. 여느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비석도 그렇거니와 전서 또한 까막눈으로 보아도 아주 잘 쓴 글씨다. 회도석의 사연인즉, 광교천에 배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배가 내처 하류로 흘러가니 황간의 기운을 밖으로 실어내는 꼴이다. 또한 풍수의 눈으로 보면 황간 땅이 이미 떠나가는 배의 형국이라 회도석을 세워 그 뱃머리를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회도석은 근처에 버려져 있다가 얼마 전에 제 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흘러가는 산 천의 배를 비석의 주술로 돌린다는 옛이야기도 그럴 듯 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너나 없이 대처로 떠난 고향의 젊은이들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정성스레 회도석을 복원했다 한다. 덕분인지 한 동안 늘어만 가던 버려진 논밭이 차츰 줄어들고 있단다. 그리 하여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귀향을 두고 황간 사람들은 꼭 시절 탓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먼길 떠나간 이들이여! 부디 뱃머리를 돌리시길.
4번 국도에 비는 내리고
황간을 떠날 무렵 개였던 빗방울이 다시 듣는다. 추풍령이 나누어 금강에 보태는 골물이 광교천으로 흘러드는 어름의 동산 위에는 조선 태조 무렵에 처음 지었다는 가학루(駕鶴樓)가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 추녀깃을 세웠다. 황간에서 추풍령 고갯마루는 20리 길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골짜기 논밭은 거의 대부분이 포도밭이고, 그 포도밭 틈새로 부르면 들릴 듯 사이좋게 경부선 철길과 고속도로가 국도와 함께 나란히 달린다. 그 모든 부산한 풍경 위로 바야흐로 우거진 녹음이 봄비에 더욱 짙어 사방은 사뭇 깨끗하고 정갈하다.
황간을 떠나 시오리 남짓한 길섶에 자리잡은 사당은 임진왜란 때에 추풍령을 넘어 오는 왜적과 싸우다 죽은 의병장 장지현(1536-1593)을 기리는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추풍령 오룡동에서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4만의 왜군과 싸우다가 2천의 의병과 함께 죽었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뜨락의 오랑캐꽃을 들여다보다가 사당을 떠나 산모롱이 하나를 돌아서니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 이제 칠팔 년이 지났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 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추풍령의 명물인 할매 갈비로 점심을 먹고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노래비가 서 있는 고갯마루로 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집 뒤안의 뽕나무가 그 경계이고 텃밭의 두둑이 또한 그 경계이다. 마을은 하나 인데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청도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 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내륙 한양 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 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재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 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 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 6로에서 각각 지로 (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잇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 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 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 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경상 우도의 과거길, 괘방령(掛榜嶺)
추풍령 고갯길 남쪽은 지금은 김천시가 된 봉산면이다. 봉산면에서 김천길을 버리고 백두대간과 나란히 서면 길은 외줄기로 천년 옛절 직지사로 간다. 워낙 찾는 이가 많아 이제는 ‘일방통행’이 되어버린 직지사 길에서 문득 마음을 바꾸어 다시 백두대간을 향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로부터 황악산(해발 1111) 발치를 타 고 넘는 고개가 괘방령이다. 이름부터가 그렇듯 사람 발길로 친다면 괘방령은 추풍 령보다도 한결 부산했던 고개이다. 방(榜)이란 본래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나 붙는 것이니까.
추풍령은 관로였다. ‘되도록이면 포도청 앞은 피해 가는 게 상책’인 풍습은 예로부터 이어진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폐습이다. 별 켕길 게 없는 나그네도 으레 관리들이 들끓는 역로를 피해 한가한 샛길을 찾기 마련이다. 늘 구린 게 많아 부러 트집을 잡는다면 ‘털어 먼지 안 날 리 없는’ 장사꾼들이 그랬고, 구태여 역졸들의 농짓거리가 되기 싫은 천한 백성들이 그랬다. 또 있다. 이름도 하필이면 추풍이라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은 모두 추풍령을 마다하고 한사코 괘방령을 넘었다. 과거길 에 ‘방에 붙는다’는 말은 얼마나 반가운가. 사위(taboo)란 본래 갈수록 태산이라 나중에는 인근에 부임하는 관리까지도 관직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추풍령 을 피하고 괘방령을 넘었다.
괘방령은 그렇게 추풍령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고개였다. 지금은 그 괘방령에도 포장길이 뚫렸다. 고갯마루에는 흔히 추풍령의 장지현과 함께 이야기되는 박이룡 장군의 사당이 있고, 더 내려가면 참 아름다운 숲속의 천덕 분교가 있다. 박이룡은 퇴각하는 왜군을 맞아 수 없이 많은 승전보를 남긴 황간 출신의 의병장이다.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할 적에는 추풍령을 넘었지만 퇴각로는 괘방령이었고, 한국전쟁 때에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으로 진격했던 북군의 퇴각로 또한 괘방령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덥고 배부를 적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춥고 배고픈 시절이 오면 문득 생각나는 고개, 괘방령은 그런 고개였다.
김하돈 글 『함께 사는 길』(98/6월호)
황간의 애향비 회도석 (回櫂石)
황간의 애향비 회도석 (回櫂石)
가로 40㎝, 세로 131㎝, 폭 28.5㎝ 의 화강암
배바위
장교천(물한리 발원)이 반야사를 지나 흘러온 석천(봉황산 발원)과 만나기를 저만치 앞두고 희한한 푯돌이 하나 서 있으니 이름하여 회도석이다. 말 그대로 풀어 ‘뱃머리를 돌리라’는 뜻이다.
월류교앞 회도석
회도석 안내문
회도석 뒤에 보이는 월류봉
주행봉에서 바라본 황간 석천 끝부분에 월류봉이 보인다.
백화산 주행봉은 풍수지리적으로, 황간에서 보면 쌀등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떠나가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황간의 정기가 빠져나가는 형상으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회도석"을 세움으로써 노를 저어, 떠나가던 배를 되돌리려고 하였답니다. 유실되어 방치되었던 "회도석"은 다시 복원해 놓았습니다. "주"자는 "달릴 주"자가 아니고 "배 주"자를 쓰고 있습니다.
『영동군지』를 보니 황간 현감 이운영이 18세기 무렵에 세우고 글씨는 충주 사람 박시화가 썼다.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없는 비석도 그렇거니와 전서 또한 까막눈으로 보아도 아주 잘 쓴 글씨다.
회도석의 사연인즉, 광교천에 배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배가 내처 하류로 흘러가니 황간의 기운을 밖으로 실어내는 꼴이다. 또한 풍수의 눈으로 보면 황간 땅이 이미 떠나가는 배의 형국이라 회도석을 세워 그 뱃머리를 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회도석은 근처에 버려져 있다가 얼마 전에 제 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흘러가는 산 천의 배를 비석의 주술로 돌린다는 옛이야기도 그럴 듯 하지만 사람들은 다만 너나 없이 대처로 떠난 고향의 젊은이들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정성스레 회도석을 복원했다 한다.
덕분인지 한 동안 늘어만 가던 버려진 논밭이 차츰 줄어들고 있단다. 그리 하여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젊은이들의 귀향을 두고 황간 사람들은 꼭 시절 탓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먼길 떠나간 이들이여! 부디 뱃머리를 돌리시기를.................
유래
상주에서 내려오는 물과 장교천이 합류하는 곳의 약 50m 장교천 상류 배모양의 바위에 관한 2가지 전설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하나는 이 바위가 장교천을 둥둥 떠내려오자 빨래하던 아낙네가 이것을 보고 놀라 '바위가 떠내려온다'라 고함쳐 그 자리에 멈춰버려 만약 이 바위가 그대로 떠내려와 월류봉과 부딪쳤다면 황간 고을이 왕도가 되었을 것이라는 전설과 다른 하나는 이 배바위가 장교천을 거슬러 올라 남성리까지 올라가면 황간이 크게 번창한다고 하나 부정한 사유로 인해 멈춰 돌아섰기 때문에 이를 되돌리기 위해 회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황간면 신흥리 장교천변에 세워진 회도석은 황간수(潢澗守 :황간현감) 이운영(1778년 가학루 중수 1781년까지 재직)이 작은 못을 파고, 그위에 글씨를 새겨 세운 비를 말한다. 구전에 의하며 풍수지리적으로 황간의 정기가 배바위를 타고 흘러 내려간다고 보아 회도석을 세움으로써 노를 저어 배바위를 되돌려 황간의 번영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는데 유실되어 인근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1996년에 복원하여 제자리에 세워졌다.
황간 (黃澗)
현재의 위치와 범위
읍치 위치 :
충청북도 황간면 신흥리고을 범위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매)·상촌면(상)·황간면(황), 용산면(용)-백자전리·청화리, 추풍령면(추)-계룡리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봉)-광천리·덕천리·상금리·신암리·예지리·태화리, 대항면(대)-덕전동·복전동·향천동
지도의 지명찾아보기
한자 | 한자소리 | 불리던이름 | 현재위치 |
駕鶴樓 | 가학루 | - | (황)남성리 |
客舍 | 객사 | - | (황)남성리 |
乾川寺 | 건천사 | - | (매)어촌리 |
掛榜嶺 | 괘방령 | - | (매)어촌리 |
南面 | 남면 | - | ☞ |
南面倉 | 남면창 | - | (봉)태화리 |
冷泉 | 냉천 | 참샘 | (황)원촌리 |
訥伊項烽臺 | 눌이항봉대 | 누리산·느릅산 | (추)계룡리 |
梅下面 | 매하면 | - | ☞ |
白華山 | 백화산 | - | (황)우매리 |
三道峯 | 삼도봉 | - | (상)물한리 |
揷峙 | 삽치 | 삽재 | (황)서송원리 |
上村面 | 상촌면 | - | ☞ |
西面 | 서면 | - | ☞ |
石橋山 | 석교산 | - | (상)흥덕리 |
石川橋 | 석천교 | - | - |
所伊山烽臺 | 소이산봉대 | (봉대산) | (황)광평리 |
松溪書院 | 송계서원 | - | (매)수원리 |
松峴 | 송현 | 솔티·소재 | (황)원촌리 |
衙舍 | 아사 | - | (황)남성리 |
吾谷面 | 오곡면 | - | ☞ |
龍淵臺 | 용연대 | - | (황)원촌리 |
牛峙 | 우치 | 솔티 | (황)원촌리 |
月留峯 | 월류봉 | - | (황)원촌리 |
邑內面 | 읍내면 | - | ☞ |
臨淸樓 | 임청루 | - | (황)남성리 |
長川橋 | 장천교 | - | - |
鼎岩1) | 주암 | - | (황)원촌리 |
倉 | 창 | - | (황)남성리 |
秋風嶺 | 추풍령 | - | (추)추풍령리 |
寒泉書院 | 한천서원 | - | (황)원촌리 |
鄕校 | 향교 | - | (황)남성리 |
華岳樓 | 화악루 | - | (황)남성리 |
黃岳山 | 황악산 | - | (상)궁촌리 |
면의 상세 정보
南面(남면) :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덕천리·상금리·신암리·예지리·태화리, 대항면 덕전동·복전동·향천동
한자 | 한자소리 | 불리던이름 | 현재위치 |
可幕里 | 가막리 | 가매기 | (봉)태화리 |
可幕柳器店里 | 가막유기점리 | 가매기 | (봉)태화리 |
可城里 | 가성리 | 가재 | (봉)신암리 |
可店里 | 가점리 | - | - |
高道巖里 | 고도암리 | 고대미 | (봉)신암리 |
坤川里 | 곤천리 | - | (봉)광천리 |
舊藍田 | 구남전 | - | (봉)덕천리 |
金化沙器店里 | 금화사기점리 | - | (봉)상금리 |
金化店里 | 금화점리 | - | (봉)상금리 |
都山里 | 도산리 | - | (봉)광천리 |
敦睦里 | 돈목리 | 돌목 | (봉)광천리 |
馬甘里 | 마감리 | - | - |
馬田里 | 마전리 | - | (대)복전리 |
方下峙里 | 방하치리 | 방아재 | (대)향천동 |
上里 | 상리 | - | (봉)상금리 |
細松里 | 세송리 | - | (대)덕전리 |
松羅谷里 | 송라곡리 | - | (봉)광천리 |
枾木里 | 시목리 | 감나무골 | (봉)광천리 |
新藍田 | 신남전 | - | (봉)덕천리 |
新村里 | 신촌리 | 새삼골 | (봉)신암리 |
汝里洞里 | 여리동리 | - | - |
龍背里 | 용배리 | - | (봉)덕천리 |
立石里 | 입석리 | 선돌 | (봉)예지리 |
井浦里 | 정포리 | 샘재 | (봉)덕천리 |
中里 | 중리 | - | (봉)상금리 |
太平里 | 태평리 | - | (봉)태화리 |
下里 | 하리 | - | (봉)태화리 |
梅下面(매하면) :
영동군 매곡면 강진리·공수리·돈대리·수원리·어촌리·유전리, 상촌면 임산리
한자 | 한자소리 | 불리던이름 | 현재위치 |
江津洞里 | 강진동리 | - | (매)강진리 |
坤德里 | 곤덕리 | 건덕리 | (매)유전리 |
功須洞里 | 공수동리 | 공숫골 | (매)공수리 |
官基里 | 관기리 | 관터 | (상)임산리 |
官基店里 | 관기점리 | 관터 | (상)임산리 |
橋洞里 | 교동리 | 다릿골 | (매)돈대리 |
九萬里 | 구만리 | - | - |
敦大里 | 돈대리 | 돈대 | (매)돈대리 |
銅店里 | 동점리 | 퉁점 | (매)강진리 |
暮煙臺里 | 모연대리 | 모른대 | (매)수원리 |
物如大里 | 물여대리 | 물여대 | (매)강진리 |
沙也洞里 | 사야동리 | 새별 | (매)공수리 |
桑林里 | 상림리 | - | (매)돈대리 |
楊州里 | 양주리 | 양주골 | (상)임산리 |
漁村里 | 어촌리 | 오두니 | (매)어촌리 |
梧里洞里 | 오리동리 | 오리골 | (매)공수리 |
院村里 | 원촌리 | 서원마 | (매)수원리 |
林山里 | 임산리 | - | (상)임산리 |
見龍里 | 현룡리 | - | (매)돈대리 |
上村面(상촌면) :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대해리·둔전리·물한리·상도대리·유곡리·하도대리·흥덕리
한자 | 한자소리 | 불리던이름 | 현재위치 |
道大里 | 도대리 | 도대 | (상)하도대리 |
物閑里 | 물한리 | 물한이 | (상)물한리 |
盤店里 | 반점리 | - | (상)상도대리 |
白如大里 | 백여대리 | - | - |
上弓村里 | 상궁촌리 | 웃활골 | (상)궁촌리 |
石峴里 | 석현리 | 돌고개 | (상)대해리 |
宣化峙里 | 선화치리 | 선화티 | (상)상도대리 |
雪五味里 | 설오미리 | 설보름 | (상)흥덕리 |
柳谷里 | 유곡리 | 버드실 | (상)유곡리 |
二老里 | 이로리 | - | (상)하도대리 |
竹谷里 | 죽곡리 | 대실 | (상)유곡리 |
車踰洞店里 | 차유동점리 | 수레너미 | (상)상도대리 |
土項里 | 토항리 | 흙목·흘목 | (상)대해리 |
下弓村里 | 하궁촌리 | 아래활골 | (상)궁촌리 |
西面(서면) :
영동군 용산면 백자전리·청화리, 황간면 금계리·노근리·서송원리·용암리·우천리·회포리
한자 | 한자소리 | 불리던이름 | 현재위치 |
曲巖里2) | 곡암리 | 누룩바우 | (황)용암리 |
金雞里 | 금계리 | 진개 | (황)금계리 |
老隱里 | 노은리 | 노근 | (황)노근리 |
唐底里 | 당저리 | 당저 | (황)용암리 |
陶洞里 | 도동리 | 도골·독골 | (황)우천리 |
木花谷里 | 목화곡리 | 목화실 | (황)노근리 |
栢子洞里 | 백자동리 | 잣밭골 | (용)백자전리 |
西松院里 | 서송원리 | - | (황)서송원리 |
新儀店里 | 신의점리 | - | (황)서송원리 |
安大里 | 안대리 | 안대 | (황)노근리 |
如洞里 | 여동리 | - | - |
牛川里 | 우천리 | 쇠내 | (황)우천리 |
竹田里 | 죽전리 | - | (황)금계리 |
靑化里 | 청화리 | - | (용)청화리 |
回浦里 | 회포리 | 구미·후미 | (황)회포리 |
梧谷面(오곡면·오리실면) :
영동군 매곡면 광평리·노천리·옥전리·유전리·장척리, 추풍령면 계룡리
한자 | 한자소리 | 불리던이름 | 현재위치 |
巨皮洞里 | 거피동리 | - | - |
廣坪里 | 광평리 | 너분들 | (매)광평리 |
內洞里 | 내동리 | 안골 | (매)노천리 |
德谷里 | 덕곡리 | - | (추)계룡리 |
寶賢里 | 보현리 | - | - |
上赤良里 | 상적량리 | - | - |
石亭子里 | 석정자리 | - | - |
安寧里 | 안녕리 | 안니이 | (매)옥전리 |
五里谷里 | 오리곡리 | 오리실 | (매)유전리 |
玉田里 | 옥전리 | 구삿 | (매)옥전리 |
泥村里 | 이촌리 | - | (매)장척리 |
藏尺洞里 | 장척동리 | 장자울 | (매)장척리 |
中赤良里 | 중적량리 | - | - |
檜谷里 | 회곡리 | 저실 | (추)계룡리 |
邑內面(읍내면) :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남성리·마산리·소계리·신흥리·우매리·원촌리
한자 | 한자소리 | 불리던이름 | 현재위치 |
槐村里 | 괴촌리 | - | - |
校村里 | 교촌리 | 향교골 | (황)남성리 |
南門里 | 남문리 | - | - |
南城里 | 남성리 | - | (황)남성리 |
馬山里 | 마산리 | 말미 | (황)마산리 |
栢子洞里 | 백자동리 | - | - |
上東部里 | 상동부리 | - | (황)신흥리 |
上西部里 | 상서부리 | - | - |
邵溪里 | 소계리 | - | (황)소계리 |
松溪里 | 송계리 | - | - |
瑟峙里 | 슬치리 | 슬실티 | (황)우매리 |
新興里 | 신흥리 | - | (황)신흥리 |
艾橋里 | 애교리 | 쑥다리 | (황)소계리 |
完亭里 | 완정리 | - | (황)우매리 |
牛馬里 | 우마리 | 우매 | (황)우매리 |
牛峙里 | 우치리 | 소재·솔틔 | (황)원촌리 |
院村里 | 원촌리 | 한천 | (황)원촌리 |
土閑里 | 토한리 | - | - |
通川里 | 통천리 | - | (황)남성리 |
下東部里 | 하동부리 | - | (황)신흥리 |
下西部里 | 하서부리 | - | (황)신흥리 |
각주
1) 鼎은 舟를 잘못 옮겨 쓴 것이다.
2)
曲은 麯을 잘못 옮겨 쓴 것이다.
황간 [黃澗]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 2, 2012. 11. 30., 국립중앙도서관)
--------------------------------------------------------------------------------------------------------------------------- 본문관련 추가자료 설명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오산 화성궐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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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오후 10:21:00] | ||||||||||||
우리나라 2대 공자사당, 국내 유일의 공자박물관 공자의 후학 양성…전통이 살아있는 공간 시민과 호흡…인성․서예교육․전통혼례 등 공서린 심은 은행나무…화성궐리사의 역사
오산 화성궐리사(경기도기념물 제147호, 오산시 궐동 147)는 노성의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제2대 궐리사 중 하나로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1792년(정조 16년)에 창건됐다.
공서린은 서재를 세운 뒤 근처에서 잘 자란 은행나무를 골라 서재 앞에 옮겨 심고 은행나무 가지에 북을 매달아 학동을 불러 모으거나 면학을 독려했다. 얼마 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서재는 폐허로 변했고 그가 심었던 은행나무도 말라 죽었다. 그로부터 200여년 뒤인 1792년(정조 16)의 어느 봄, 공서린과 명을 같이 했던 죽은 은행나무 자리에서 새 나무 한 그루가 싹을 틔웠다. 은행나무는 사람이 심고 가꾸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싹을 틔우기 어려운 나무로 다른 은행나무의 씨앗이 싹을 틔운 것으로 볼 수 없기에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예언했다. 그해 10월, 정조는 수원 화성을 쌓고 주변을 둘러보던 중, 문득 이 은행나무를 발견하고, 원래 이 자리가 공서린의 서재가 있던 자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조는 공자의 후예가 후학을 양성하던 유서 깊은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공자의 성묘를 이곳에 세우라고 명을 내렸다. 아울러 공자의 고양인 궐리촌을 상징하기 위해 마을 이름까지 궐리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정조는 성묘가 완성되자, ‘화성궐리사’라는 사액(임금이 사당, 서원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액자를 하사하는 일)을 내리기까지 했다. 새로 태어난 나무는 그로부터 200년이 넘는 세월을 궐리사와 함께 살아왔다.
역사진행형인 화성궐리사 화성궐리사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85호로 지정된 석전대제를 공자의 사망일인 5월11일과 탄신일인 9월28일에 지내고 있다. 제례의식은 현재까지 꾸준히 유지하고 있으나 그 역사는 2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1871년 궐리사가 고종 8년에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심하게 훼손된 것을 유림들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1993년 경제문화교류사절단으로 내한한 중국곡부시 인민정부 허전준 시장이 공자의 성상을 기증, 1994년 공자의 성상을 모실 수 있는 성상전이 건립되었다. 이후 공자의 행적을 적은 성적도(도유형문화재 제62호)와 기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자문화전시관, 그 아래 양현재 건물이 차례로 건립됐다. 또한 올해는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행단을 건립할 예정이다. 정기훈 도유사는 “화성궐리사는 오랜 기간 동안 유림과 마을주민들이 지켜온 역사”임을 강조하며 “역사의 흐름에 맞춰 화성궐리사는 지킬 것은 지키고 변화할 것은 변화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소중한 장소로 거듭날 것이다”고 밝혔다.
시민과 호흡하는 화성궐리사 화성궐리사에는 현재 유도회원 80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청년부, 여성부, 홍보부, 총무부로 조직되어 있다. 유도회는 유림(유학을 신봉하는 무리)을 조직화한 것으로 성균관과 함께 유학의 요람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한 궐리사 내에서 집전되는 제례를 주관하는 집례의원격인 장의가 있으며 유사들 등 대표를 도유사로 칭하며 현재 정기훈 씨가 도유사를 맡고 있다. 화성궐리사는 매년마다 시민들을 위한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공자의 사상을 가르쳤던 양현재에서는 지금도 공자의 사상을 이어가기 위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방학을 이용한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비롯해, 부녀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예교실, 우리가락배우기, 장구 교실이 무료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올해 말에 준공될 행단에서는 전통혼례가 치러질 예정이다. 장구교실을 진행하고 있는 오산시향토경기소리단 박선자 단장은 “역사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궐리사에서 옛조상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통을 시민들에게 전수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정기훈 도유사는 “행단이 완공되는 올해 가을부터는 시민 누구나 화성궐리사에서 무료로 전통혼례예식을 치를 수 있게 됐다”며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시민들과 호흡하는 화성궐리사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국내 하나뿐인 공자문화전시관 성상전 삼문 좌측에 단아하게 서 있는 공자문화전시관은 1997년 준공된 시설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공자와 관련된 단독전시관이다. 전시관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2호로 지정된 궐리사성적도(도유형문화재 제62호)판각이 소장되어 있으며 공부자를 상징하는 각종 문헌과 행적을 담은 전시물이 일목요연하게 진열되어 있다. 또한 중국 곡부에서 가져온 제기용 그릇과 공자의 제자 72명이 그려진 칠십이현도가 소장돼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공자의 성적도 100편을 50폭 병풍에 그려 넣은 병풍성적도와 칠십이현도를 실물화한 칠십이현도 모형제작도를 대성전 앞에 진열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또한 논어에 표현된 공자상을 그대로 그린 그림도 눈에 띈다. 공자문화전시관에 다양한 자료가 있을 수 있는 것은 화성궐리사와 중국공자유물전시관이 지속적으로 교류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말 포은문화제로 방한한 중국공자유물전시관 공상림 부관장은 화성궐리사를 방문, 공자와 관련된 기증했다. 그는 “화성궐리사의 공자유물전시관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공자의 유물만 전시하는 단독 전시관으로 그 의미는 크다”며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공자와 관련된 유물을 더 기증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한 실정이라 안타깝다”고 전했다. 궐리사 역사 -1792년 정조 16년 ‘화성궐리사’ 창건 -1871년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 -1894년 훼손 23년 만에 석전대제 봉함 -1901년 성묘 건립하고, 성적도 108도 수입, 보존 -1974년 성적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2호로 지정 -1993년 중국 곡부시 인민정부 허전준 시장 공자 성상 헌증 -1994년 성상전 완공 -1997년 공자문화전시관 준공 -2009년 6월10일 행단 기공식 정은아기자(hosh6321@choll.com) |
노성 궐리사 (魯城 闕里祀)
노성(魯城)에 있는 궐리사 (闕里祀)이다. 궐리사(闕里祀)란 공자(孔子)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영당(影堂)을 말한다. (소재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궐리사(闕里祀)라는 이름의 유래는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이름, 궐리촌(闕里村)에서 인용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궐리사는 4 곳 ..즉, 강릉, 제천, 화성 그리고 이 곳 노성(魯城)에 있었으나 현재는 수원 화성과 이 곳 노성의 두 곳이 남아 있다.
이 곳 노성에 있는 궐리사는 1687년 (숙종 13)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건립하려고 준비하다가, 2년 후 그가 사약(賜藥)을 받고 죽게 되어 이루지 못한다.
그 후 1716년 송시열의 제자들인 권상하(權尙夏), 김만준(金萬俊) 등이 현 위치에서 서쪽방향으로 노성산(魯城山) 아래에 세우고, 다음 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 후 1805년 (순조 5) 관찰사(觀察使) 박윤수(朴崙壽)가 이 곳으로 옮겨 놓았다.
용도가 무엇인지 모를 기둥에 궐리(闕里)라고 음각되어 있다.
궐리(闕里)의 뜻은
①중국 산동성(山東省) 서남부의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출생지로 그의 가묘(家廟), 사당(祠堂) 등이 있음. 공자의 사당을 뜻하기도 함.
[참고어]: 궐리사(闕里祠). ②공자(孔子)를 의미함.
노성 궐리사 (魯城 闕里祀) 자료출처 :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533
기타사진 자료
궐리사성적도목판(闕里祠聖蹟圖木板)
- 서지
- 유형문화재 제62호
- 1974년 9월 26일
- 1904년
- 오산시 궐동 152
공자를 모신 사당을 궐리사라 하는데, 오산의 궐리사는 노성의 궐리사와 함께 우리 나라에서 2개뿐인 궐리사 중의 하나이다. 원래 이곳은 중종 때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孔瑞麟)이 서재를 세워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정조가 1792년에 사당을 지어 공자의 영정을 모시게 하였다. 정조는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할 정도로 궐리사에 관심을 보였다.
성적도의 목판은 피나무로 만들어졌고 모두 60장이다. 한 장의 크기는 세로 32㎝ 가로 70㎝ 두께 1.5∼2㎝ 정도이다. 이 목판을 써서 책을 찍어낸 것으로 보이는데, 그 간행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사료적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 있는 유일한 공자의 성적도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Seongjeokdo, Gwolli-sa: The Korean term seongjeokdo refers to an artwork that depicts the life of Confucius. one of the descendants of Confucius brought this wooden block of seongjeokdo from China and re-carved over it in 1904. This wooden seongjeokdo is significant in that it is the only seongjeokdo of Confucius that still remained in Korea. (Tangible Cultural Treasure of Gyeonggi-do No.62)
노성 궐리사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
1978년 12월 3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孔子)의 영상을 봉안한 영당(影堂)으로 기와로 된 정면 3칸, 측면 3칸, 면적 약 1,564㎡의 건물이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원래 1687년(숙종 13) (宋時烈)이 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716년(숙종 42)에 (權尙夏)·김만준(金萬俊)· (李健明)· · (金昌集) 등 제자들이 아래 궐리촌(闕里村:현 위치의 서쪽)에 궐리사를 건립하고 이듬해에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791년(정조 15)에는 송조5현(宋朝五賢)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805년(순조 5) (朴崙壽) 등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중건 당시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일명 춘추사(春秋祠)라고도 한다. 궐리사는 강릉·제천·오산에도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과 오산에만 남아 있다. 유림에서는 선인들을 높이 받들고 가르침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모여 석전(釋典)을 봉행하고 있다.
황간면 금계리 고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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