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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건강,사랑방/가볼만한 곳(여행)

경주(월성) 양동마을

by 연송 김환수 2009. 5. 10.

경주 양동마을에 대하여

 


교통안내 버스 승 하 차 : 경주역에서 승차->양동마을 입구 하차->마을입구에서 마을까지 1.2km도보버스번호 : 200,201~208,212,217버스 시내버스 이용 (7분간격, 40분소요) 운행회사 : 천마교통(054)776-8905, 한일교통(054)772-4885 승용차 : 경주역에서 22.2km 소요시간 30항공편 : 포항공항 19km, 울산공항 52km, 대한항공 1588-2001, 아시아나 1588-8000


월성 양동 마을은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지정민속마을이며,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포항으로 가는 길과 안강으로가는 갈림길(1강동대교 끝)에서 안강으로 회전해 들어가면 약1Km 정도 진행하면 우측으로 양동마을이라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습니다.  포항에서 영천방향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면 강동면을 지나 우측 갈림길로 접어들어 8km 정도 가면 우측으로 양동마을 이정표를 만날 수 있습니다.(2강동교 끝 부분에서 좌회전)  영천에서 포항방향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면 옥산서원을 지나 8KM 정도 가면 좌측으로 양동마을 이정표를 만날 수 있습니다.(2강동교 끝부분에서 좌회전)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하회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휘돌아가는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하는 마을이다. 그리고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단일 동성부락이지만,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의 두 씨족이 있는 집성촌이다.  하회에는 동제의 일부로 별신굿이 전해지지만, 양동에는 이렇다할 동제가 없고 23년에 한 번씩 정월 보름이나 추석 전후에 줄다리기하는 세시행사 정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동마을은 두 씨족의 집성촌인데,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하여 지금까지 세거(世居)하여온 여주 이씨와 월성 손씨 양대 문벌을 이루며 그들의 동족집단 마을로 계승하여왔다.  두 집안에서는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씨 집안에서는 동국 18현의 한 분이시고 좌찬성(1)까지 오른 회재 이언적 선생를 배출했고, 손씨 집안에서는 벼슬이 정 2품 우참찬에 까지 이른 우재 손중도 선생이다. 손씨 집안에서는 이언적이 10세 때 손중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하여,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씨 집안에서는 이를 부정하면서 두 가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고 한다. 양동마을의 형태를 보면 ''자형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설창산에서 내려오는 능선과 골짜기의 형태가 한자의 물()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안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대종가인 서백당과 무첨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깥쪽 골에는 손씨와 이씨의 파종가인 관가정과 향단이 위치한다. 이 마을의 가옥들의 형태는 ''자 형태이고 가옥의 위치를 보면 골짜기를 따라 가옥이 위에서 아래로 위치하는데 가장 위쪽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아래로 그 자손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옥의 규모는 내려올수록 작으며, 맨 아래에는 외거노비가 살던 '가랍집'이라고 하는 집이 있다. 이것은 당시 문중내의 위계를 반영한 것이며 유교적인 신분질서가 공간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양동마을도 현대로 접어들면서 600700채가 되었던 마을이 151가구 295채로줄어들었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100여 가구가 한꺼번에 줄어들었으며 공업화와 근대화로 그 수가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회마을과 더불어 규모와 질에 있어서 이처럼 우리의 전통가옥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무첨당]
 

 




* 무첨당은 보수공사 중
 
무첨당은 물봉골의 남향 언덕에 위치한 이씨 대종가의 별당채인데, 이언적 선생의 손자인 이의유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호가 '무첨이었다고 한다.
 
보통 별당은 외부인의 눈에 잘 안 띄고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두기 마련인데 무첨당은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별당이라기 보다는 큰 사랑채 격이다.
 
''형의 건물로 몸채는 가운데가 6칸 대청이며,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고 앞으로 나온 부분은 누마루로 구성된 간단한 구조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아주 작은 합각지붕인 반면 몸채 오른쪽은 박공면에 부섭지붕을 덧붙여 마감했다. 옛날 이곳에 대원군이 잠시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때 그가 쓴 '左海琴書'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 '左海'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것으로 영남지방을 뜻하며, '琴書'는 거문고와 책을 뜻하는데, '무릇 선비란 풍류와 알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향단(香壇)]
 

 
 
 
 
 
향단은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중종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전임하면서 그의 동생인 이언괄에게 물려주어 그의 손자인 이언관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고 이름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되었다. 향단은 일반 가옥과는 상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몸채를 ''자로 하고 여기에 ''자형 행랑채와 칸막이를 둠으로써 전체 평면은 ''자를 이룬다.
 
이것은 ''자가 ''자와 ''자가 합쳐진 모양이므로 하늘의 해와 달을 지상에 있게 함으로써 생기를 북돋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누리게 된다는 풍수사상 때문이었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의 기다란 맞배집으로 동쪽 두 번째 칸을 문으로 사용한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사랑채 정면을 나란한 두 개의 맞배지붕으로 마감하고 풍판을 달았는데 그 외관이 멀리서 보면 아주 멋있다. 안채는 두 개의 방이 안대청과 한 면을 접하면서 모서리끼리 만나고 있으며 각 방의 서쪽에는 부엌이 딸려있다. 그리고 특이하게 안대청이 안마당을 향하지 않게 하고 행랑채 지붕을 보도록 하였다. 아마도 안마당과의 기능적인관계보다 전망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대부의 검소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입지에 있으며 특이한 외관, 일반적인 격식을 과감히 벗어난 대담성 등은 그런 느낌을 만들어 준다.

 
 
[관가정(觀稼亭)]
 
 
 
 
 
 
 
 
 
 
 
 
 
관가정은 우재가 살았던 집으로 손씨 집안의 파종가이다.
 마을 입구의 첫번째 산등성이에 위치했으면서도 옆의 향단보다 눈에 띄지 않지만,  사랑채에서 마을 앞의 안강평야가 보이는 넓은 조망을 가지고 있다.  평면은 'ㅁ'자형에 앞쪽 좌우로 날개가 있는 형태로 중문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 사랑채
가 있고, 동쪽과 북쪽에 안채가 위치한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안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많이 낡은 느낌이
들고 관리도 허술하다.  
 
 
서백당(書百堂)]

서백당은 안골의 산중턱에 위치한 손씨 집안의 대종가이다. 이것은 마을의 입향조인 손소가 25세 때 지은 것으로 사랑채의 이름을 따서 '서백당' 또는 '송첨' 이라고 하였다. 행랑채,몸채,사당의 3영역으로 나누어지며,
 
그 평면은 행랑채가 ''자형, 몸채가 ''자형, 그리고 사당채가 ''자형이다. 몸채는 행랑채와 전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몸채는 오른쪽 안쪽의 한 단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당의 오른쪽에 사랑채 쪽에 작은 담을 쌓았는데, 이것은 여성들이 거주하던 곳과 구별하기 위해서 쌓아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조선시대의 양반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한 마당의 맨 오른쪽엔 손소가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500년 된 향나무가 있는데, 오래되어서 그런지 군데군데 시멘트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한 흔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여전히 잎이 푸르며 큰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서백당의 안채에 들어가 보면 맨 오른쪽에 작은 문이 있는데, 여기에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고 이곳에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풍수적으로 전해오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 우재가 태어났고 이언적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이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으니 손씨 집안의 사람들은 남은 한 사람의 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다만, 회재 이후로 외손이 큰 인물이 된다면 다른 문중에 현인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시집간 딸이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산만은 다른 집에서 시킨다고 하며, 외부인이 들어와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풍수 설화에 의하면 서백당(경주<월성>손씨 종택)의 집터를 잡아준 지관이 “이 곳은 설창산의 혈맥이 응집된 터라 3명의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3명의 위인 중 2명은 이미 태어났는데 손소 공의 둘째 아들로서 명신이자 청백리인 우재 손중돈 선생과 그의 생질로 해동 18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 그들이다. 이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으니 손씨 집안에서는 남은 한 사람의 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며, 회재 이후로 시집간 딸이 해산하기 위해 친정에 와도 이 방은 허락하지 않고 다른 일가 집으로 보낸다고 한다.

 

방문객에게도 부정탈까봐 절대 공개하지 않는 방이다. 그런데 서백당이 삼현지지라는 풍수설화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양동마을의 勿자형국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빼어난 길지이며, 안채의 뒤쪽으로 내려오는 지맥(地脈)이 그 기운이 넘쳐서 이를 땅속에 모두 감추지 못하고 지상으로까지 석맥(石脈)이 드러나 안채로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산실(産室)로 들어갔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산실(産室)은 서백당 중에서도 중심 되는 혈처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양동(良洞)마을의 지명은 초기에는 양월리(陽月里)의 좌편에 있다하여 양좌동(陽左洞)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하였다 하여 양좌동(良左洞)으로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의 양동(良洞)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 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마을은 그 규모나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 등에서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영국의 찰스황태자도 지금은 고인이 된 다이애나 비와 함께 1992년 이 곳을 방문했다 한다.

 

 

    

 

    결혼당시 다이애나 비                  월리엄, 해리왕자와 찰스 황태자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콘월 공작부인의 결혼식 직후 공개한 영국 로얄 패밀리의 모습.

왼쪽에는 해리 왕자, 윌리엄 왕자, 에딘버러 공작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오른쪽에는 톰과 로라 파커 보울스, 카밀라의 아버지 브루스 쉔드가 자리했다.2005. 4.11 


 

양동마을은 우리나라의 지정민속마을 다섯 곳 중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하회마을이 풍산류씨의 단일 동성부락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두 씨족이 이룬 집성촌마을이라 할 수 있다.

 

여강이씨 입향조인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 1463-1500)은 손소의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양동마을을 이룬 두 집안 모두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손씨 집안에서는 이조판서 우참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429) 선생이고, 이씨 집안에서는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의 한 사람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다. 그런데 숙질(叔姪)간이 되는 이 두 인물이 공교롭게도 모두 손씨 입향조 손소 공이 처음 터 잡고 살았던 지금은 당호가 된 서백당(書百堂)의 같은 산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500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온 유서 깊은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에 세워진 표지판에서 불과 1km 정도만 더 들어가면 되지만 이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雪倉山)에서 뻗어 외청룡을 이루며 달려와 솟은 호명산이 감싸고 있어 마을 입구에 완전히 들어서지 않고는 도로에서는 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호명산 모퉁이를 돌아 마을 입구에 들어서야만 여기서부터 양동마을이 시작됨을 알리는 일자(一字)로 길게 지어진 양동초등학교가 나타난다.

 

이 마을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기와로 지붕을 덮어 고풍스럽다. 초등학교를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다른 반촌과 달리 넓고 평탄한 명당이 아닌 마치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언덕배기에 집을 지어 반촌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가장 높은 언덕배기일수록 고색창연한 큰 기와집이 자리를 차지하고 그 아래로는 규모가 작은 기와집이, 맨 아래에는 초가집이다. 이는 제일 위쪽에는 두 가문의 대종가나 파종가이고, 그 아래에는 두 가문의 자손들이 살던 집이며 맨 아래에 위치한 초가집은 외거노비가 살던 ‘가립집’이 위치하여 반상에 따라 집이 위치한 높낮이가 다르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마을입구에서는 첫 능선자락에 펼쳐진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마을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는 없다.

 

풍수형국에서 양동마을은 ‘물(勿)’자 형국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文章峰, 161m)에서 갈라져 나온 4개 지맥(地脈)과 지맥사이에 이룬 골짜기 즉 두동골, 물봉골, 안골, 장태골이 ‘勿’자와 흡사한 모양을 갖추고 있음에 따라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이 네 능선에다 등을 대고 계곡에다 터를 잡아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펼쳐져 있어 마을 안에서는 능선과 우거진 숲에 가려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동마을을 제대로 살피려면 반드시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에 올라가야 한다. 더구나 풍수적으로 용맥의 흐름이나 이곳의 勿자 형국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성주봉에 오르면 양동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설창산에서 중출한 주맥이 세 겹으로 대(臺)를 이루면서 마치 물결치듯 파도가 밀려오듯 양동마을로 들어오고 있어 그 역량이 대단함을 보여준다. 이곳 풍수형국으로 알려진 물(勿)자와 흡사하다. 풍수에서는 ‘물(勿)’자형 형국을 좋은 양기(陽基)로 친다. 이는 勿자 자체의 글자에는 별 의미가 없으며 글자의 모양이 사신사(四神砂)가 잘 감싸고 있는 장풍국(藏風局) 형태가 되어 좋은 양기로 치는 것이다.

 

양동마을은 ‘물(勿)’자를 쓸 때의 획 순서에 따라 1,2,3,4번으로 번호를 붙이면 글자를 시작하는 곳이 주산인 설창산에 해당한다. 1획이 끝나는 지점에는 월성손씨 파종가인 관가정(觀稼亭)과 여강이씨 파종가인 향단(香壇)이 위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가정은 성주봉에서 보아 좌측능선에 등을 대고 있어 백호가 없으나 향단은 1획의 우측능선에 등을 대고 있어 향단에서 보면 관가정이 백호의 역할을 한다.

 

 

여강이씨 대종가인 무첨당(無添堂)은 3획의 능선에 등을 대고 있어 1획이 우백호가 되고 4획과 2획이 좌청룡이 된다. 월성손씨 대종가인 서백당(書百堂)은 3획이 안채의 안산 겸 백호가 되고 있으며 2획이 청룡의 역할을 하면서 크게 감싸면서 사랑채의 안산이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백당이 다른 집보다 잘 감싸져 있다. 실제로 양동마을에서 "손동만 가"로 부르는 서백당이 가장 吉地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세 명의 현인이 출생한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라고 한다.

 

양동마을의 풍수형국 ‘勿’자는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피 혈(血)자의 형국이 된다. 그래서 마을 입구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은 원래는 남향(南向)이었지만 동향(東向)으로 90도 돌려 새로 앉혔다고 한다. 당초의 남향은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한 피 혈(血)자의 형국으로 보였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초등학교건물의 좌향을 재니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정동향이다. 학교의 향을 돌린 것 말고도 이 마을의 勿자 형국 때문에 일제가 당초 이 마을을 통과하도록 계획한 동해남부선철도를 우회시킨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철도가 마을을 통과할 경우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한 피 血자의 형국이 되기 때문에 지금의 동해남부선 철도가 안강 들을 가로질러 이 마을을 향해 곧장 달려오다가 이 마을 앞에서 90도에 가깝게 우로 꺾어 수 km를 우회하여 놓게 된 것이다. 청화산인 이중환(1690-1752)의 저서 <<택리지>>에는 사람이 사는 곳을 정하는 기준으로 가장 먼저 수구(水口)를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무릇 수구(水口)가 엉성하고 넓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水口)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구해야 한다. 높은 산이나 언덕, 역으로 흘러드는 물이 힘 있게 판국을 가로막았으면 좋은 곳이다. 막은 것이 한 겹이어도 참으로 좋지만 세 겹, 다섯 겹이면 더욱 좋다. 이런 곳이라야 완전하게 오래 세대를 이어나갈 터가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중환이 주장하는 수구가 꼭 닫힌 곳은 결국 청룡, 백호가 잘 감싸주는 곳을 말한다. 양동마을은 勿자 형국이라 勿자의 1획에 해당하는 곳에 터 잡은 몇 집을 제외한 마을 전체가 계곡마다 터 잡고 있어 용호(龍虎)로 잘 감싸고 있다. 그래서 마을이 터 잡은 각 계곡마다 득수(得水)한 내당수는 각 계곡마다 좁은 하나의 수구를 만든다. 자연히 수구가 좁을 수밖에 없다.

 

이들 각 계곡에서 빠져나온 물들이 마을 가장 안쪽 계곡인 장태골에서 득수하여 마을 전체를 감싸고 좌수도우(左水到右)하며 흐르는 물과 합수하여 마을 옆을 우수도좌(右水到左)하며 흐르는 안락천(安樂川)으로 빠져나간다. 다음으로 양동마을의 들을 보면 안락천 너머로 기름진 안강 들이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때는 이 넓은 안강 들의 반이 양동마을의 손, 이 양 가문의 소유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역으로 흘러드는 물을 보면 마을의 백호자락을 감싸고 흐르는 안락천, 그 너머에는 기계천과 칠평천이 흐르고 있어 세 겹이나 된다. 풍수에서는 역으로 흘러드는 물은 마을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아주 귀한 물로 본다. 여러 겹의 역수가 겹겹이 가로 막으면 마을 안의 생기는 더 잘 갈무리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역수는 마을에서 보이지 않아야 이를 암공수(暗拱水)라 하여 더 귀한 물로 친다. 역수가 마을에서 보인다는 것은 청룡, 백호가 마을을 완전히 감싸지 못하여 수구가 엉성하고 넓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역수는 모두가 마을의 중심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공수다.

 

 

 

 

  

 

 

 

 

 

 

 

 

 

 

 

 

 심수정

 

  

 

 

 

 

 

 

 

 

 

 

 

    

 

 

 

 

 

 

 

 

 

 심수정

 

 심수정 위에서 본 모습 

 

 

 

  

 

 

 

 

 

 

 

 

 

 

 

 

 

 

 

 

 

 

 

 

 

 

  

 

  

 

 

 

 

 

 

 

 

 

 

 

 

 

              

아래사진은 인터넷에서 양동마을 사진을 스크렙하였습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ayam3390   흐르는 강물처럼

 

출처 : http://blog.daum.net/feelkssook  마징가 여행사진

 

 

 

 

 

 

감사합니다.

 

 

 

 

 

 

 

 

 

  

 

  

 

 

 

 

 

 

 

 

 

  

 

 

 

 

 

 

 

 

 

 

 

 

 

 

 

 

 

 

 

 

 

 

 

 

 

 

 

 

 

 

 

 

 

 

 

양동마을 안내문

 

서백당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조선 세조 21456

경주 손씨 입향조인 손소孫昭 1433~1484가 지은 경주 손씨 종택으로 소나무 처마라는 뜻의 송첨松簷으로도 불린다. 집터를 잡아 준 지관은 '삼현지지三賢之地의 기운이 있어 세 사람의 현인이 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 동안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이 태어났다. 집 이름인 서백은 종손으로서 인내를 기르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참을 인

1백 번을 쓴다’라는 의미에서 손중돈이 지었다.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렸고 사랑대청 옆 정원 쪽에 안과 밖을 상징적으로 구분하는 짤막한 담장이 있다. 정원에 있는 수령 6백 년 된 향나무는 집을 지은 후 심은 기념수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다.

 

관가정 觀稼亭

보물 제442호 조선 15세기말~16세기 초

'농사 짓는 풍경을 본다'는 뜻을 지닌 관가정은 앞면이 트여있어 안강 들판의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조선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우재 손중돈

愚齋孫仲暾 1463~1529이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사랑채인 누마루를 정자로 이용했다. 원래는 대문과 담이 없었는데 1981년 보수할 때 담장을 쌓고 일각대문을 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의 안채는 대문에서 볼 때 왼편에 큰 방과 마루를 둔다. 하지만 이 집은 오른편에 손중돈이 거처할 방과 마루를 배치했다. 그 이유를 손중돈은 '형이 일찍 요절했는데 왼편에 큰 방을 짓고, 내가 기거하면 동생이 형으로 바뀌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배치했다'고 말했다.

 

낙선당 樂善堂

중요민속자료 제73호 조선 중종 351540경주 손씨 입향조 손소의 셋째 아들 손숙돈孫叔暾 분가할 때 지은 집이다. 지금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손종로孫宗老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낙선당은 손종로의 호에서 이름을 따온 사랑채다. 대문채는 중앙에 대문을 두고 왼쪽에 마구간, 오른쪽에 행랑방을 만들었다.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 왼쪽에 곳간채가 있고 사랑채는 안채와 연결되며 왼쪽에 대청, 오른쪽에 사랑방을 두었다. 중문간을 지나 마주치는 안채는 ''자 모양으로 정면에 안방과 대청, 건넌방은 아래쪽으로 붙어 있다. 부엌은 북쪽 꺾어진 곳에 있고 아래쪽에 한 칸짜리 창고를 두었다.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에 비해 안채와 사랑채가 낮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수운정 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 조선 선조 151582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의 증손자인 손엽孫曄 1544~1600이 벼슬길의 뜻을 접고 학문 연구를 위해 지은 정자다. '물과 같이 맑고 구름과 같이 허무하다'는 ‘수청운허水淸雲虛에서 정자 이름을 따오면서 자신의 호도 '청허淸虛'로 했다. 임진왜란 때는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이곳으로 옮겨져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정자의 전면은 계자鷄子난간으로 두르고 마루가 높아 뒤쪽에서만 출입할 수 있다. 대청에는 팔각기둥이 있고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으로 장식됐다. 2칸 크기의 대청과 1칸짜리 방으로 꾸며졌다. 양동마을에 있는 여러 정자 중 경치가 가장 뛰어나다.

 

안락정 安樂亭

중요민속자료 제82호 조선 정조 41780경주 손씨 문중의 서당으로 여주 이씨 문중의 강학당講學堂 쌍벽을 이룬다. 정자의 기능도 함께 갖췄으며 대청 정면 윗부분에는 안락정, 대청 안에는 성산재聖山齋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세 칸짜리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의 앞면과 뒷면은 둥근 기둥이 세워졌으나 온돌방은 네모 기둥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대청은 여름에 시원하게 하기 위해 앞이 틔여 있고, 양 옆의 방은 추운 겨울을 대비해 온돌로 만들었다. 대들보는 적당히 휜 나무를 사용하였고, 세 개의 보를 사용해 전체가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입구에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초가집 행랑 한 채와 방앗간이 있다.

 

정충비각 旌忠碑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조선 정조 71783

조선 인조 141636 병자호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죽은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노비였던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손종로는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5대 손으로 광해군 101618 무과에 합격했으나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인조 121634 남포현감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경기도 이천의 쌍령전투에서 노비 억부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신은 찾지 못하고 옷과 관으로만 장례를 지냈다. 출입문 뒤편에 정충각을 세우고 우측에 작은 규모의 충노각을 배치했다. 네 면에 홍살을 세워 비가 잘 보이도록 했다.

 

무첨당 無忝堂

보물 제411호 조선 중종 351540무첨당은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1491~1553이 경상감사 시절에 지은 것으로 이언적의 맏손자인 무첨공 이의윤無忝公 李宜潤의 호에서 집 이름을 따왔다. 언적과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사랑채를 겸하고 있다. 살림채는 1508년 여주 이씨 입향조인 이번의 집으로 지어졌다. 무첨당 안에는 두 개의 편액이 있는데, '좌해금서左海琴書-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는 흥선대원군이 죽필로 쓴 것이다. 물애서옥勿厓書屋'은 중국 사신 조광趙光이 무첨당에서 선비들을 불러 모아 시험을 치렀는데 모든 선비가 최상의 점수를 받자 '물봉언덕의 학문하는 집'이라고 쓴 편액이다.

 

향단 香壇

보물 제412호 조선 중종 381543

조선시대 동방4현 중 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이언적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어준 집이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에게 물려주었고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됐다. 손자인 향단 이의주香壇 李宜澍 호에서 집 이름을 따왔다. 축대 위에 세워진 안채는 하인들의 공간인 행랑채와 쉽게 구분된다. 향단은 일반 집과 달리 중앙에 안방을 두고 주위에 방, 대청, 부엌 등을 배치했으며 안마당에서 하늘은 조그마하게 보인다. 원래 99칸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허물어져 56칸으로 줄었으며 1976년 보수됐다.

 

수졸당 守拙堂

중요민속자료 제78호 조선 광해군 81616

수졸당 이의잠守拙堂 李宜潛이 세운 것으로 여주 이씨 수졸당파의 맏이가 대를 이어 살아 온 집이다. 이의잠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손자다. 사랑채는 영조 201744에 수졸당의 6대손으로 대사헌을 지냈던 양한당 이정규養閒堂 李鼎揆가 증축했다. 남쪽 바로 앞에는 양졸당파의 맏이가 대를 이어 살아 온 양졸정이 자리잡고 있다. 두 집의 진입로는 서로 다르며 능선을 활용해 서로 보이지 않도록 지었다. 앞쪽에 사랑채와 대문채가 일자로 놓여 있고 그 뒤편에 안채와 아래채가 있어 전체가 앞을 '튼 ㅁ'자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문간채는 사랑채와 떨어져 지붕을 낮춰 세웠다. 사당은 안채 뒤쪽 언덕 위에 동쪽을 향해 있다.

 

두곡영당 杜谷影堂

향토문화재 조선 인조 141636

조선 선조 때 경상도 하양 현감을 지냈던 수졸당 이의잠守拙堂 李宜潛

영정이 봉안됐다. 이의잠은 하양 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 현민들은 그 보답으로 이의잠의 영정을 만들었으며 하양유림

河陽儒林

에서 모셨다. 그러다 경주유림

慶州儒林

으로 넘겨졌고 후에 이의잠의 후손들이 두곡고택

杜谷古宅

옆에 영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옮겼다. 담장과 함께 전면에 삼문을 설치했다. 내부에는 집채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공간을 개방하는 법식에 맞추어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의 사당을 지었다. 영당 뒤 언덕에는 동호정이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99일인 중양절에 추모제를 지낸다.

 

심수정 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조선 명종 151560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의 동생인 농재 이언괄聾齋李彦适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해 노모를 모셨다. 본래의 정자는 철종 때 소실되었고, 현재 정자는 1917년경 새로 지은 것이다. 기존에 있던 네 그루의 회화나무를 손상시키지 않고 집을 지어 나무와 건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름은 이언괄이 지은 한시의 한 대목에서 따왔다.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양동마을의 서당 기능을 맡았으며 마을의 정자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서쪽 방 옆에 난간이 있는 누마루를 두어 향단이 있는 아랫마을 일대를 바라보기 좋게 만들었다.

 

이향정 二香亭

중요민속자료 제79호 조선 숙종 211695

이 정자는 회재 이언적

晦齋李彦迪 6대손으로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二香亭李範中

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자 모양의 안채, '' 모양의 사랑채와 아래채가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안채의 꺾인 곳에 부엌을 두고 왼쪽으로 작은 창고인 고방과 아랫방, 앞쪽에는 안방, 안대청, 건넌방을 배치했다. 사랑채는 큰방 뒤로 부엌과 툇마루가 있는 서재를 꾸며 기능상의 변화를 주었다. 건넌방의 앞면과 옆면의 마루는 넓게 확장해 난간을 돌리고 있어 누마루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사랑채 오른쪽 끝에 중문을 만들어 안채로 드나들게 하고, 건물 사이는 담을 쌓아 이늑한 안채 공간을 만들고 있다.

 

상춘헌

賞春軒

중요민속자료 제75호 조선 영조 61730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5대손인 이덕록

李德祿 세운 사랑채다. 이덕록의 증손으로 예조 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한 이정덕李鼎德

증축했고 후손인 상춘헌 이석찬

賞春軒李錫贊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랑채 마당 동편에는 계획적인 동산을 꾸몄다. 안채와 사랑채를 앞이 '터진 ㅁ'자 모양으로 배치했고 앞에 ''자 모양의 행랑채가 있다. 본채 가운데에 안대청과 건넌방이 있고 안대청 왼쪽으로 찬방, 안방, 부엌이 있다. 큰 집들처럼 안대청과 사랑대청의 가운데 기둥을 둥글게 만들었다. 사랑마당 북쪽에 사당이 있다. 북쪽 돌 축대는 3단으로 꽃 계단을 조성하고 꽃나무를 심어 사랑채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성헌 對聖軒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조선 영조 81732

회재 이언적

晦齋李彦迪

11대손인 이능단

李能亶

분가할 때 지은 집이다.대성헌이란 '성주봉을 마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멀리 무첨당과 성주봉이 잘 보인다. 본채와 옆 채가 ''자 모양으로 붙어있으며 ''자 모양의 사랑채, 행랑채 등 세 건물이 모여서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대청과 툇마루가 붙은 사랑방으로 만들어 졌다. 행랑채에는 대문과 방, 가축을 기르는 곳이 있다. 각 건물은 소박하고 간결하여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다. 사랑채의 대청앞쪽은 두 칸에 여덟 짝 문을 기둥 없이 달고 네 짝씩 접어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두곡고택 杜谷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7호 조선 영조 91733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6대 손인 이식중

李湜中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양동 윗마을의 대표적으로 큰 가옥이다. 그 후 농재 이언괄

聾齋李彦适 14대손인 두곡 이조원杜谷李祖源

이 구입해 이사했으며 그 후손들이 '두곡고택'이라고 불렀다. ‘ㅡ'자 모양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 마당이고 왼쪽에 마구간채가 있다. 건너편에 사랑채, 아랫채, 안채가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본채 뒤편으로 방앗간채와 창고채를 좌우에 배치했다. 사랑 마당에는 산의 경사지를 그대로 두고 감나무 등 과일나무를 심어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다. 부엌 뒤 초가에 있는 디딜 방앗간은 마을에 몇 개 안 남은 것 중 하나다.

 

근암고택 謹庵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6호 조선 정조 41780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8대손인 이정수에 의해 지어졌으며 이정수의 증손자인 이희구가 홍릉참봉을 지냈기에 참봉댁으로도 불렸다.집 구조는 일반적인 ''자 또는 앞이 트인 ''자 모양을 따르지 않았다. 대문채 뒤편에 ''자 모양의 안채가 있으며, 그 오른쪽에 거리를 두고 사랑채를 배치했다. 이처럼 안채, 사랑채, 대문채를 각각 떼어서 배치한 경우는 드문데 각 건물의 규모는 작고 안채와 사랑채에는 둥근 기둥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20세기 초 사랑채가 소멸된 후 어색해 보이는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신축됐다. 안채 북쪽에 사당이 있다.

 

경산서당 景山書堂

향토문화재 조선 19세기 초

이 서당은 원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맏손자인 이의윤

李宜潤

배향하기 위해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에 세워진 경산서원이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강동면 안계리로 옮겨지면서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축소됐다. 그 후 1970년 포항제철 안계댐의 부지로 포함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서당과 관리사 부분으로 나뉘어 담장을 쌓았고 중간에 일각문이 설치되어 있다. 서당은 강당, 동재

東齋, 삼문 등 세 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끝에 한 칸짜리 방을 두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붙였다.

 

사호당 沙湖堂

중요민속자료 제74호 조선 헌종 61840

진사를 지낸 사호당 이능승沙湖堂 李能升

살던 집으로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능승은 회재 이언적

晦齋李彦迪

11대손이다. ''모양의 행랑채, 앞이 터진 ''자 모양의 안채와 여기에 ''자 모양으로 이어지는 사랑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자 모양 평면에서 사랑채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사랑채 앞으로 넓은 공간을 두어 그 기능을 강조했다. 안 사랑방과 사랑방 옆에 각각 누마루를 두고 있어 대칭으로 한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네모기둥을 세웠으나 안대청과 사랑대청의 앞면 가운데, 사랑방과 사랑대청 사이의 가운데, 사랑 누마루 앞 네 곳은 둥근 기둥을 세워 변화를 준 것이 특징이다.

 

강학당 講學堂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조선시대 고종 71870

여주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경주 손씨 문중의 서당인 안락정安樂亭 쌍벽을 이룬다. 대사간을 지낸 이연상李淵祥이 낙향하여 학생을 가르쳤다. 일반적으로 서당은 '-'자형 건물인데 강학당은 담장과 대문이 없는 ''자 형태로 두 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편에 온돌로 지은 안방과 오른편에 같은 온돌 형태의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 앞에는 마루방과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를 배치했다. 마루방은 여름에, 온돌방은 겨울에 사용했다. 왼편에 있는 행랑채는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백성들의 가옥 형태다. 뒤편에 양동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이 있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건너편에 있는 향단과 그 일대가 잘 보인다.

 

 

자료출처 :  http://cafe.daum.net/chasign 글쓴이: 아버지의 산

 

김동아 찬불가 모음
01. 와우정사 02. 갓바위 03. 꽃잎처럼 지노라 04. 산은산 물은물 05. 극락왕생 06. 유정무정 07. 구인사의밤 08. 장부의꿈 09. 아버지 10. 억새풀여정 11. 혜원정사 12. 추상 13. 황혼이어라 14. 산사의 풍경소리 15. 나를두고 가려무나 16. 아이야

 

 

 보너스  작품사진 등재 

출처 : 서재곤님 작품   http://www.btcphoto.com 

저작권이 있어 몇장만 소개합니다. 재곤님 양해바랍니다.   

 

작품명 : "환희" 

2008년에 울산 강양항에서 촬영한 사진이며 제25회 부산전국사진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입니다



 울산 태화강변
 
 
 
청도 소싸움    * 생동감이 있는데 소가 불쌍해 보입니다. 


불꽃 삼형제 (정홍권님 작품)  http://www.btcphoto.com 
 한국 철강협회 주최 "제10회 철의날 기념 철강사진공모전" 입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