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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구형왕릉 (한국형 피라미드)

by 연송 김환수 2009. 1. 4.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가야 제10대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덤. 사적 제214호.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며, 김유신(金庾信)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마지막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은 일반적인 봉토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턱에 층단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잡석을 사용해 앞면은 7단, 뒷면은 경사진 비탈을 그대로 이용해 층단을 만들었다.

 

평지에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고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앞면의 전체 높이는 11.15m이다. 셋째 단 동쪽 면에는 가로 42㎝, 세로 47㎝, 길이 65㎝의 감실(龕室)형태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나 내용물은 없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의 〈왕산심릉기 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인다. 이에 따르면, 이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 王山寺記〉에 구형왕릉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한다.

 

왕산사는 없어지고, 다만 이 무덤을 위한 재실(齋室)이 있어 여기에 있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목궤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옷, 그리고 활과 칼 등의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무덤 둘레에는 높이 1m 내외의 돌담을 쌓았다. 능의 정면 중앙에는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이라 새긴 비석과 더불어 혼유석·장명등·문인석·무인석·돌짐승 등 석물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 석물들은 최근에 만들어 배치한 것으로 무덤이 처음 만들어질 때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구형왕의 후손들이 1793년 덕양전(德讓殿)을 세워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史蹟篇-(文化財管理局, 1975)
≪참고문헌≫ 伽耶文化圈遺跡精密調査報告書-山淸郡·咸陽郡-(昌原大學博物館, 1987)
≪참고문헌≫ 산청의 전구형왕릉에 곤한 일고찰(李道學, 향토문화 5, 향토문화연구회, 1990)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가라국 마지막왕의 릉이라 전해지며 특이하게도 피라미드형식의 석총입니다.

지리산 한켠의 왕산이라 불리는 산자락안에 자리하며, 주변 지리산에는 이 왕실과 관련한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구형왕릉 윗부분은 타원형으로 되어있다 

 

 

  

 

    

 

 

 

                                                               덕양전 정문과 홍살문

 덕양전은 양왕과 계화 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 수정궁으로 왕릉 가까이 있었는데 고종 15년  덕양전으로 개칭하고 192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그 유래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가락기원491년)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그 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전화로 중단되었다가 서기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서기 1989년 숭선전(김해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여 서기 193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가락국 제10代왕 양왕(위 仇衡)과 왕비(위 桂花) 양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리는 덕양전(德讓殿) 이다. 그 유래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19년(가락기원491년)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 전화로 중단되었으며 서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서기 1898년 숭선전(김해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여 서기193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고 전한다.

 

 

덕양전 해산루

 

 

 

                                                                         비각

 왕산각

                                                                    영정 사당 ?

 

 망경루

 

 류의태 약수터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로는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을 "천인수"(千蚓水,萬蚓水라고도 함)를 먹어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의 류의태의 가르침 속에 무릇 물에는 서른세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는데 물을 가려써야 한다며 물 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 번째로 치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따뜻한 "한천수(寒天水)"로 감히 장복하면 반위(反胃: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겨울에도 왕산의 약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류의태 선행 활동시 한약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 (일명:약물통)의 약수는 돌너덜이 아래 자리잡은 서출 동류수(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는 곳이다. 류의태 선생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 (옛지명:産陰縣 丁台)마을에서 출생하여 당대 제일의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로 칭송 받았다.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의성으로 칭송받은 허준의 의학적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며, 특히 의술의 발전을 취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제공하여 해부학의 효시를 이룬 살신 성인의 위대한 의학자로 전해진다. 註 : "千年 頭骨에 千蚓水" 는 천년묵은 사람의 해골에 담긴 천년된 물을 이르며, 만년된 물을 萬蚓水라 함. 이렇게 알림판에 서술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