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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건강,사랑방/가볼만한 곳(여행)

인사동 및 탑골공원 돌아보기

by 연송 김환수 2009. 9. 2.

 한국적인 문화가 산재한 우리 인사동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인사동의 허산 화가님 소개는 명함으로

 

 

 

인사동 초입(탑골공원쪽 공연장앞)에는 허산이라는 인물화의 지존이 있다. 

 

초상화의 지존이라며 스스로 자부하는 허산 선생의 예술세계를 들여다 본다.

 

 

 

인사동 초상화 지존 허산 선생님 (선생님 모르게 살짝 한 컷)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 노무현 전대통령님, 박정희 전대통령님, 김연아 선수 등 등.....

 

 

 

상당히 잘 그린 초상화가 반사 빛 때문에 흐릿하게... 초상이 유엔본부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사동의 하루 내외국인 일일 관광객은 10만여명 방문 그중에 한명 본 매니저

 

인사동 변천사인사동
지금의 인사동 거리는 종로 2가에서 인사동을 지나 관훈동 북쪽의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인사동길은 종로에서 인사동 네거리
즉 태화관길과 만나는 곳까지였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이라 한다.


인사동 축제마당

1987년부터 시작된 인사전통문화축제는 충분한 볼거리와 흥미 거리를 제공하여 전통문화 명소로 인사동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사 전통문화축제는 인사동 지역의 번영을 기원하는 장승제로 시작되며 행사
중에는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 할 수 있는 이벤트도 많이 마련되어 있다.

인사동 문화장터민족 문화라는 것은 그 민족의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에 활용 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과거의 것을 무조건 추종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로 대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문화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생활에 필요하지 않는 죽어있는 옛 문화도 진정한 의미의
문화라고 볼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민족 문화는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변화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살아있는 민족 문화는 대중의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 발전되어 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사동은 살아 있는 전통문화의 거리라고 알려져있다. 특히 일요일마 다 형성되는 전통문화 장터는 그 현장을

실감할 수 있는거리화가 곳이기도 하다. 갖가지 전통문화 행사와 함께 전통문화 예술품들을 사고파는 현장이기 때문
이다. 문화 장터에서 거래되는 품목들은 다양하다. 각종 골동품, 그림, 소장품,
수공예품, 먹거리, 그리고 곱게 채색된 부채, 물레, 삼태기, 절구, 짚신, 고무신 등
각종 우리 전래 생활용품에서부터 도자기, 보석류, 장신구가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옛 생활 모습을 어린 학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 문화의 뿌리를 알게하는

현장학습의 장소로서의 역할도 허고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직접
만들어보게 하거나 잔칫날 떡을 치는 흥겨움을 직접 느끼게 해주는것,옛날 사람들이
사용한 등잔불과 짚신, 곰방대, 갓 등 우리 선조들이 사용한 생활도구들을 직접
대하고 만져봄으로써 한국인다운 한국인으로 만드는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인사동 문화 장터는 우리민족의 전통을 지켜가기 위해 시민들의자발적인 참여 속에 형성되고 발전하고 있는

 현장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런 특정한 구역을 형성하기도 어렵지만 하루 10만명에 달하는 동원 인력을
 끌어모으기도 힘들 것이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살아있는 인사동 문화 거리는 우리시대가 만든 우리의
소중한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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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입구(안국역 근처) 인사동 입구에서 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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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미술관 입구 경인미술관 및 찻집(실내와 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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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갤러리 입구에서 윗편가게 보온요, 사보당, 청도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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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표구 화랑 길거리 골동품(사거리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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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건설 보호수 사문당표구, 가니이트센터 입구  
인사동 화랑가/오세권  미술평론가
오늘날 국가의 역량은 대부분 경제력으로 판단할 수 있다. 문화정책은 복지정책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
에서도 문화정책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정책을 세운 만큼 피부로 와 닿는 효과는
없는 것 같다. 단지 더 나은 개선 이라는 명분으로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듯하다.   

미술문화계 내에서도 정부의 정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제도 개선을 위하여 많은 논의를 거쳐 일부는

개선하기도 하였으나 아직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하는 상태이다. 아직까지 일반 시민들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화랑의 기능을 서로 혼돈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동안 우리 시민들에게 미술문화가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였고 시민들도 미술문화를 많이 향유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박물관. 미술관. 화랑
박물관, 미술관, 화랑들은 나름의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나 역할에서 차이점이 있다 박물관은 자연물

이나 생산품 그리고 역사 자료나 예술품 및 학술적 자료들을 널리 수집하고 진열하여 보이는 곳이고,
미술관은 미술품만을 수집 진열하는 곳이다.


화랑은 '갤러리'를 뜻하는 것으로 미술품의 전시와 매매의 상업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을 말한다.  
미술관과 화랑의 차이점을 보면 미술관을 운영하려면 갖추어야할 작품수, 미술관의 크기와 인력 등이 법률
로써 정해져 있으며 상업적 운영보다 미술품을 수집하여 자료화하고 시민들에게 관람하게 하는 공공성을
우선으로 한다.


그러나 화랑운영에는 크기나 인력의 제한이 없으며 일반사업자 등록으로서 운영할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
현재 인사동 내에는 미술관은 없으며 모두가 화랑인셈이다.
가끔 화랑에 xx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으로 'xx화랑' 또는 'xx갤러리'로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

화랑은 미술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전시공간을 제공하기도 하며 미술품의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만든 작품을 관리하거나 작품을 매매하기도 하며 작가나 작품을 상업적
으로 광고하는등 실제적인 상업행위를 한다. 곧 작가는 미술품을 생산하고 화랑은 생산된 미술품을 전시하고
판매하거나 관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랑은 미술문화의 형성에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미술문화가 형성되는 진원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인사동 화랑의 위상과 역사
서울의 화랑가를 보면 대체로 크게 네 개의 지역 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강북으로는 '인사동'과 '사간동'

지역, 강남에는 '청담동'과 '신사동' 지역이 그것이다. 이러한 네 개의 지역군을보면 나름의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 인사동 지역은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많은 화랑이 있으며, 항상 작가와 관람객들이 붐비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미술품들이 매매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는 판매되는 미술품에
대한 공식적 통계가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지역역시 판매되는 미술품에대한 공식적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다른 지역들이 모두 판매를
위주로 하는 상업성이 전제된다면 오히려 인사동은 젊은 작가들이 전시를 많이 가지고 있어 상업성도 전제
되어 있지만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보여준다는 의미가 더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다른 지역들이 기획, 초대 전시가 대부분이고 기간도 신축성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지만 유독 인사동
만큼은 일주일 단위로 행하여지고 있으며, 대관화랑이 타지역보다 많기 때문이다.

한편 인사동에는 미술품 관련 상점이나 단체뿐 아니라 문학 단체와 옛 풍물 상점 그리고 골목 곳 곳에 자리

잡은 카페나 커피숍과 식당들이있어 다른 지역 화랑군에 비하여 일반 시민들이나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지역이다. 그러기에 인사동 거리는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와같이 화랑들의 오랜 전통이 있는 점
작품세계를 보여준다는 의미의 대관 화랑이 많은점, 일반 시민과 문화인들이 즐겨찾는 장소라는 점들은 타
지역의 화랑들에 비하여 특별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사동의 화랑군들은 대체로 1970년대 이후 현대적 상업화랑의 성격을 지니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대화랑이 1970년대에 관훈동 7번지에 문을 열고 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없지만 74년 문헌화랑, 76년 경미
화랑이 개관하였다. 76년 동산방화랑이 문을 열었으며 77년에는 선화랑, 83년에는 가나화랑,등 능력있는
화랑이 문을 열면서 화랑가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외 지금 강남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미화랑, 서림화랑, 예화랑, 표화랑 등이 모두 인사동에서 사간동의 국제화랑도 초기에는 인사동에서
문을 열고 화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기에 인사동은 한국화랑들의 근원적인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기 무렵 인사동 화랑가는 호황을 누리고 80년대말기에서90년 초반기에 이름있는 화랑들이 강남
지역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화랑가를 형성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인사동 화랑은 개업과 폐업의
순환 속에서 오늘까지 그 면모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자료출처/인사동 보존협회




 










 










 
화천[ 貨泉 ]
중국 왕망대(王莽代)에 제조된 동전(銅錢)으로 우리 나라 초기철기시대에도 사용되었던 화폐.
30여 종의 왕망전(王莽錢) 중 하나이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는 천봉원년(天鳳元年 : 서기 14)
에 화포(貨布)와 함께 처음으로 주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서≫ 왕망전에는 지황원년
(地皇元年 : 서기 20)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원전(圓錢)의 형태로 내부에 네모난 구멍〔方孔〕이 있고 구멍의 오른쪽에 화(貨)자, 왼쪽에 천(泉)
자가 배치되어 있다. 크기는 오수전(五銖錢)보다 약간 작은 지름 1촌(약 2.25㎝)이며, 무게는 5수
(銖: 5수는 약 3.19g)이다.
왕망대에는 10여 년(서기 7∼23)의 짧은 기간동안에 전후 4차례의 폐제개혁(幣制改革)이 단행되어
모두 37종의 화폐가 주조, 발행되었다.
제1차 폐제개혁 때에는 거섭(居攝) 2년(서기 7)에 대천오십(大泉五十)·착도(錯刀)·계도(契刀) 등을
주조해 전대(前代)의 오수와 병용하였다. 제2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원년(始建國元年 : 9)에 대천
오십만을 남기고 도폐류(刀幣類) 및 오수를 폐지하였고, 따로 소천직일(小泉直一)을 발행하였다.
제3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2년에 보화제(寶貨制)를 채용했으며, 대포황천(大布黃千) 등의 포화십품
(布貨十品) 등을 주조하였다. 마지막 제4차 개혁 때에는 천풍원년(天風元年 : 서기 14)에 새로이
화천과 화포를 주조하였다.
왕망전의 특징은 주조기술이 정교하고 미려하며 동질(銅質)이 양호한 점이다. 유통연대는 후한 광무
건무16년 (後漢光武華建武十六年 서기 40)에 다시 오수전이 부활할 때까지가 정식으로 유통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상당기간 비교적 많이 통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한 유적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화천과 같이 정확한 주조연대를 알 수 있는 화폐류가 출토되는
경우, 그 유적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고 당시 중국과 한반도가 하나의 교역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中國古代的錢幣(吳榮會, 考古通訊 56-4, 1956)
≪참고문헌≫ 中國歷代貨幣(北京, 1982)



신나라
(新, 8년~23년)은 전한(前漢)의 외척 왕망(王莽)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흥한의 기치를 내세운 후한에게 멸망한다.
왕망은 전한 황실의 외척 왕씨의 일족이었다. 전한 원제(元帝)의 황후인 왕정군(王政君, 또는 효원
황후(孝元皇后))의 숙부인 왕망이 계속되는 어린 황제들의 즉위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BC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그러나 평왕을
죽인 다음 2세(歲)의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황제에 즉위한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주례(周禮)》 등 유교 경전을 근거로 하는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고전에 입각하여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井田法)
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과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으며,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물가의 균형책과
전매제도(專賣制度)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하였고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하기도 하였다.
왕망은 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의 정책을 폈으나, 이와 같은 개혁 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흉노(匈奴)를 비롯한 대외 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잦은 재해(재위 2, 5, 11년의 황하 범람)와 호족 세력이 반발하여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적미(赤眉) ·녹림(綠林) 등의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또 지방의 여러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여 왕조 개창 15년 만에 적미군(赤眉軍)의 침공으로 왕망은 죽임을 당하고 신 왕조는 멸망
하였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집권하였다.
신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 호 성명 연 호 재위
기간
제1대 - 가황제(假皇帝)
(섭황제<攝皇帝>
건흥황제<建興皇帝>)
왕망
(王莽)
시건국(始建國) 9년 ~ 13년
천봉(天鳳) 14년 ~ 19년
지황(地皇) 20년 ~ 23년
8년~ 23년






 위는 노점상 아래는 옛날돈 가게 사진임
 
 상평통보 당백전으로 만든 가공전
당백전이란 : 흥선대원군 정권이 1866년(고종 3)에 발행한 화폐로
1866년 10월 우의정 김병학()의 제의에 따라 금위영에서 11월 6일 주조, 발행하여 1867년 6월 17일 중지될 때까지 주조총액은 약 1천 6백만 냥이었다. 당백전은 모양과 중량이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5,6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당백전 1매의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약 20배에 달할 정도로 대표적인 악화()였다.
 
조선정부가 이러한 악화를 발행한 것은 당시 국가재정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조선 후기 이래 국가의 재정지출이 날로 확대되는 반면에 재정수입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어서 정부로서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해야 했다. 더구나 대원군집권기(1863∼1873)에는 안으로는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경복궁 중건사업을 벌이고,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대를 증강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사업을 벌여야 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일시적으로 타개하는 방안으로 악화를 발행하여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의 차액을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정부는 당백전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려고 이 악화를 모든 공사거래에서 종래의 상평통보와 함께 통용하게 하고 각 관청에서는 경비를 지출할 때 당백전 2/3, 상평통보 1/3의 비율로 통용하게 하였다. 그 결과 당백전 발행 초기인 1866년 12월경에 7∼8냥에 지나지 않았던 미곡 1섬의 가격이 1∼2년 사이에 약 6배로  폭등하였다.
 
당백전 발행으로 말미암아 폐단이 매우 심하게 되자 정부는 1867년 5월 당백전 주조를 중단한 상태에서 서울과 서울 밖 각 관청의 공납과 사사로운 채무보상 등에 모두 당백전을 쓰되, 1냥(100푼) 이하 거래에는 상평통보, 1냥 이상 거래에는 당백전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그 유통영역을 넓혀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1868년 5월 최익현()의 상소로 당백전 통용을 금지시키고 말았다.
결국 당백전의 발행은 재정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물가앙등과 체제위기를 가져왔다.
 
 
 
 상평통보 당백전을 가공하여 만든 엽전이 15만원에서 25만원 어휴 구경만 했네.
그래도  가공안한 상태 양호한 당백전 하나를 건졌다.  
이번구입 엽전 13개에 기 보유 9개 이제 합이 22개 이제 끈이라도 구해서 옛날처럼 꿰어야 겠다. 
 
 
인사동에서 이제 당백전은 구경할 수도 없다. 옛날돈 취급가게에도 없다.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결국 이틀동안 발품을 팔아 겨우 한개를 구했다. 아래에 사진을 올려 놓겠습니다. 가짜로 만든(가품) 당백전도 5천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하나 구입하려다 포기를 했다.
 언제든지 마음먹으면 구 할수 있으니 지금 투자할 가치는 없다고 판단했다. 


별전이나 열쇠패, 당오전, 당백전 등 엽전에 채색을 하는것은 시각적으로 보기 좋기 위한것도 있겠지만 오행사상에 입각한 채색이란 것을 알려드립니다.


오행의 색상과 방위와 계절의 상징을 표로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기본빛깔은 5색이며 이를 혼합해서 수많은 빛깔을 낸다. 5색은 청·적·백·흑·황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 〈잡찬집(雜纂集)〉에 단청의 5색은 오행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청(靑)은 동(東)이며 용(龍)이고 계절로 봄[春]이며 5행으로 목(木)이다.


적(赤)은 남(南)이며 주작[雀]이고 계절로 여름[夏]이며 5행으로 화(火)다.


백(白)은 서(西)이며 호랑이[虎]이고 계절로 가을[秋]이며 5행으로 금(金)이다.


흑(黑)은 북(北)이며 현무(玄武)이고 계절로 겨울[冬]이며 5행으로 수(水)이다.




황(黃)은 중앙이며 계절로 토용(土用:환절기에 해당)이며 5행으로 토(土)이다.


위에 보듯이 단청의 오행사상에는 현세의 강녕(康寧)과 내세의 기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설명에 있듯이 근대에 와서는 단청이라는 개념이 건축물에 채색 하는


일 또는 그 상태를 일컬어 한정하여 쓰여지는 경향이 있으나 원래의 개념으로 되돌


아가 우리가 흔히 엽전 채색을 당채(唐彩)라고 하고 있는것을 단청(丹靑)이라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합니다.
 
단청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가지 색을 기본으로 하여 궁궐, 사찰, 사원 등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식 하는 것을 말한다.
 
단청은 단벽(丹碧)·단록(丹綠)·진채(眞彩)·당채(唐彩)·오채(五彩)·화채(畵彩)·단칠(丹漆) 등의 다른 이름이 있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단청장(丹靑匠), 화사(畵師), 화원(畵員),·화공(畵工).·가칠장(假漆匠),·도채장(塗彩匠) 등으로 부른다.




    常平通寶 當百 加工錢 50種組  화동양행 낙찰가  12,200,000  


  
  




  


  






 
 역사가 숨쉬는 휴식공간 탑골공원 
 







탑공원은 서울 최초의 공원으로서 원래는 원각사의 옛터이다. 이 절이 없어진 뒤 종은 보신각으로 옮겨지고
백탑과 비만 남아 황폐화된 것을 1897년 무렵에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파고다공원 또는 탑골공원이라고 불리
웠다. 1902년에는 공원 서쪽편 건물에 군악대가 옮겨 왔으나 1907년 군대 해산시 군악대도 해산되어 방치
되다가 1919년부터 경성 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1919년 3.1운동때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유서깊은 서민공원
으로 1983년 복원되어 주변이 정비되고 옛모습을 되찾았다.

탑골 공원은 종로2가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 공원이며, 행정상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번지 1호이다. 공원의 이름은 '탑골공원' 혹은 '파고다공원' 이라고도 하는데 행정상 공식 명칭은 '탑골공원'
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고려때부터 내려오던 고찰인 흥복사가 있던 곳이다. 흥복사는 고려 문종 23년 11월에
왕명에 의하여 창건 되었다고 하고,










  1902년부터 1903년 이태리 총영사로 재임한 까를로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1904년 출간)』
 
숙종 원년(1095년) 에 창건 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한성부
불자조의 기록을보면 "원각사는 중부 경행방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흥복사이다. 태조 때에는 조계종 본사
였으나 훗날 폐찰되어 공해전이 되었다. 세조 10년에 개창하여 원각사라 하였다." 조선실록에 의하여
태조 7년에 돌아가신 신덕 왕후의 대상제를 홍복사에서 지냈으며, 또 태종과 세조 때 여러차례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흥복사는 문종조 까지는 온전하였던 것 같다.


세조 10년에 효령군이 양주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열고, 밤중에 큰 재를 올리고 있는데, 온 세상이 대낫같이
밝아지면서 오색문무 속에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나타나고, 또 한개의 부처님 사리가 수십 개로 증식되었다
곧 사리를 흥복사의 함전에 올렸더니 또 수십 개로 증식하였다.


이에 세조는 세자와 효령대군 그리고  신숙주 등 많은 신하들과 직접 흥복사에 가서 절 이름을 원각사로
개칭하고 중수할 것과 회암사에서 증식된 사리를 모실10층 탑 조성을 명하여 폐허가 된 흥복사 터를 넓혀
원각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 원각사의 규모를 보면, 중앙에는 본당인 대광명전을 두고 그 왼쪽은
선당을 지었으며, 본당 뒤뜰에는 해장전을 지어 대장경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에는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고 서쪽에는 화원을 조성하였으며, 문으로는 적광지문, 반야문,
해탈문,이 있었으며 대종을 걸었던 법뇌각 그리고 음식을 장만하는 청인 향적료가 있어 그 규모가 굉장하고
장려하였다고 했으며 공사를 위하여 동원된 부역군사만도  2천1백명이나 되며 근처의 가옥이 철거된 것만도
이백여채나 된다고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각사는 조선 태조 때는 조계사 본사로 지정되는 사세를 가진 사찰이었으며, 조선실록에
의하면 세종이후로 성종까지는 많은 규모의 법회가 원각사에서 있었고 또 나라에서는 몹시 가문때에 많은
스님을 모아 기우제도 드리었다고 한다.

 
보호각이 없던 탑 사진종목 : 국보 제2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 : 1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종로구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
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층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拱包: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원각사지 10층석탑 모습(독립기념관 소장)- 퍼시벌 로웰이 찍은 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1883년~1884년 모습
- 퍼시벌 로웰의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
원각사지 10층석탑 모습(황철 소장)- 퍼시벌 로웰이 찍은 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
- 담장이 둘러쳐지고 출입구가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유리 보호각으로 보존되고 있는 모습
  이탑이 국보2호 : 원각사지 10층석탑


















여러각도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찍어보았으나 유리벽때문에 아름다운 모습이 반감되었다. 




 

                  

  

 

보너스 남산 사진

 

 

김구선생님 오른손에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앉길래 잽싸게 한컷

 

남산정상의 조형물 저녁시간 이라서 사진이 시원찮네요

 

 

 

 영원히 변치말자...  얼마나 지키고들 있을까 ?  남산의 명물입니다. 

 

 

 

 

 

 

 

 

 

 용도외 대량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자물쇠 본래의 목적은 아닐진데 업자들만 신났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