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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건강,사랑방/가볼만한 곳(여행)

청계천 광통교(廣通橋) 이야기

by 연송 김환수 2009. 7. 25.

광통교 (廣通橋)

 

 

 

 

 

청계천 청계광장 찾아가기 : 1호선 시청역 4번출구, 종각역 5번출구,  5호선 광화문역 5번출구

 

 

 

 

 종로3가역, 종로5가역, 을지로3가역, 을지로4가역 청계천 접근 가능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으로 가는 큰 길을 잇는 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조선시대의 규모가 큰 다리였다. 

  

 

광통교 주변의 청계천 옛 모습

 

 1890년대 청계천 광통교

 

 종로에서 본 청계천 광통교 모습

  

 

  

 

 

원명은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라는 뜻의 대광통교이다. 뒤에 이 일대의 지명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 종로구 관철동과 중구 삼각동 사이에 위치한다.

 

당시 서울은 산허리와 계곡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도로를 내어 사람과 말이 다니기 위해서는 많은 다리를 놓아야 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다리였다.

 

처음에는 태조 때 토교(土橋)로 축조하였다가, 1410년(태종 10) 큰 비로 다리가 무너지자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의 묘인 정릉(貞陵)에 있던 12개의 석각신장(石刻神將)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다시 축조하였다. 1958∼1961년에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없어졌다.

 

 

 

 

 

 

 

 

2005.9. 24. 열린 광통교 복원제 행사 

 

 

 

 

 

 

 

 

태종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지위를 낮춥니다. 

(신덕왕후 :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 ·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그리고 정릉의 이전을 지시합니다. 신덕왕후의 무덤은 안암골로 갔다가 다시 현재의 정릉동으로 옮깁니다.  그냥 후궁의 무덤으로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덕수궁 옆 정릉이 있던 자리는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땅이름만 정동(貞洞)으로 남아 옛날에 정릉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태종10년(1410), 한양에 큰 비가 내려 청계천의 많은 다리들이 없어졌습니다.

임금은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았던 지금의 서린동과 광교를 잇는 튼튼한 다리를 놓게 합니다.

홍수 전에 나무와 흙으로 만들었던 다리를 튼튼한 돌로 만듭니다.

다리의 기둥을 정릉의 돌을 가져와 거꾸로 세웠습니다.

 

광통교 교각에 거꾸로 놓인 정능의 신장석(능석)

 

문양이 새겨진 왕비 무덤의 돌들은 다리의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널찍하게 만든 다리는 광통교(廣通橋)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정월 대보름날, 한양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 해의 액운을 없게 해 준다며 다리밟기 놀이를 하게 했습니다. 신덕왕후는 철저하게 능멸되었습니다.

현재 서울시 중구의 정동과 성북구의 정릉동은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 때문에 생긴 땅이름입니다.

 

신덕왕후...... 살아서는 영화를 누렸습니다. 죽은 후 그녀가 계획했던 일들은 허망하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과 사위가 배다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무덤조차 품격이 낮아지고 유린을 당하다가 겨우

제 품격을 찾았습니다.

 

 1895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제국이 되다보니 왕이 아니라 황제로 격상됩니다.

태조, 신의왕후, 신덕왕후도 황후가 됩니다. 신덕왕후는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가 됩니다.

 

신덕왕후의 정릉이 있었기에 20세기 서울의 팽창기에도 이 곳은 자연의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과밀화 된 정릉동의 공원 역할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광통교 기둥에 새겨진 '기사대준(己巳大濬)' 글씨. 이는 기사년에 대대적으로 준설공사를 한 후

새긴 것이며, 기사년의 정확한 시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는데, 영조(1749)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왼쪽 다리 기둥에 새겨진 계사경준(癸巳更濬) 글씨. 이 역시 준설공사를 한 후 새긴 것임을 뜻하며,

계사년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뉘어 있다.

 

 

거꾸로 놓인 정능의 신장석(능석) 

 

 

 

거꾸로 놓인 정능의 신장석 

 

 

 

 

 

 

 

광통교 기둥에 새겨진 경진지평(庚辰地坪) 글씨.

현재 장충단공원 내에 보존되어 있는 수표교 기둥에도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영조 36년(1760) 역시 다리 보수공사를 하면서 새긴 것으로, 세로로 새겨진 글씨의 높이를 따라

수위(水位)측정까지 할 수 있게 하였다.

 

 

 

 

거꾸로 놓인 정능의 신장석 

 

 

 

거꾸로 놓인 정능의 신장석 

 

 

 

 

 

 

 

 

 

2003년 7월 시작된 청계천복원공사의 일원으로 조선시대의 대광통교가 원래있던 자리에 광교가 새롭게 놓였다.

 

 

 1960년대 중반 청계천변을 가득 메운 판자집

 

 청계천 복개 결정 이후 상판을 얹기 위해 설치해 놓은 교량들 - 1968년

 

 청계고가도로 건설 이후에도 청계천 주변 판자집 - 1972년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쯤에 대광통교를 복원한 광통교가 놓여있다. 사람만 다닐 수 있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차량의 교통 흐름을 막지 않기 위해 원래 위치보다 상류에 배치하였다.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부분과 창덕궁 및 탑골공원에 흩어져 있던 부분을 찾아내 활용하여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폭포아래 물고기(피래미) 줄 맞추고 있는 모습

 

 

 

 

 

 

 

  

 

 

 

 

 2008년 하이서울 페스티벌 겨울 빛 축제가 열리고 있는 청계천

 

 

 

 

 

장통교 []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로 조선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인 장통방()이 있던 자리라 하여 장통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계천을 복개할 때 없어졌는데, 2003년 7월부터 추진된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 새롭게 건설되었다.

  

 

 1950년대 장통교 전경

 

 

   1937년 <사적과 미술>에 실린 스기야마 노부조의                        1890년대 청계천 광통교

   ‘서울의 돌다리’에서   (장통교 사진)

 

 

 

 

장통교 복원된 모습 

 

 

 

 

 

 

 

 

   

 

  

 

  

 

 

 

 

 일제 강점기의 수표교와 수표

 

 

 현재의 수표교

수표교가 놓여진 것은 1420년(세종2)으로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수표교의 원형은 1959년 청계천을 복계할때 장충당공원으로 옮겨졌다.

 

 

 

 

 

 

 

 

 

 

한양 지도 청계천의 옛 지도

 

 

---[준천사실의 준천시사열무도, 1760년]---- 영조의 참관 모습 목판화,---자료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과 기록문화 준천계첩의 한 면

 

 

1890년대 청계천의 모습

 

19세기 초 청계천 지도

 

 

광통교 답교놀이

 

 

 20세기 초 청계천 및 수표교

 

 

            1920년대의 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                광교 주변 , 1953

 

 

 196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 장면

 

 

-복개공사 모습 1960년대 복개공사가 진행중인 청계천 1960년대 초서울 동대문 인근의 청계천변

 

 

-1963년 무렵의 청계천변 청계천의 목조가옥 1960년대청계천 복개공사 장면

 

 

 

  복개 후 청계고가의 모습          2001년 동대문에서 청계천로를

                             바라본 도심의 모습

 

 

복원공사전 청계천주변 모습

 

광교 부근                       동대문구역 부근

 

 

삼일아파트 부근                 시설관리공단 부근

 

 

신덕왕후 [神德王后, ?~1396.8.13]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 · 방석 두 왕자

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본관 : 곡산 (또는 신천)

 

 

 

정릉위치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사적 제208호. 조선시대.

조선 태조 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

 

 

 

 

 

 

 

 

 

성(姓)은 강(康)씨이고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信川)이다.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1356년에 출생하였고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곡산(또는 신천) 강씨 가문은 고려시대 때 세력있는 권문세족이었다. 이성계는 1361년 홍건적 토벌하였고, 1362년 원나라가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사로 출병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1370년 원나라 동녕부를 원정하여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수도 개성에 진출하였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지방 토호라는 출신에 한계를 느끼고 개성의 권문세족 배경이 필요했던 이성계는 강씨 문중의 세력 신장에 도움이 될 인물로 점찍은 강윤성에 의해 강씨와 정략적인 혼인을 한 것이었다.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자 현비(顯妃)에 책봉되어 왕후가 되었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았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대담한 지략을 구상하였다.

 

이성계를 위험에서 구했으며 조선 개국의 지대한 공헌을 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썼으며 이와 관련해서 방원과 갈등이 깊었다.

 

정도전과 합세하여 둘째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1396년 8월 13일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되어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1398년 왕위를 노리는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 방석(왕세자)과 사위, 반대파 정도전, 남은 등이 살해되었다.

 

처음에는 도성 안 황화방(皇華坊) 북원(현 영국대사관 )에 묻혔으나 태조 이성계 사망 후 이듬해인 1409년 2월 강씨의 묘를 도성 밖 양주(楊州) 사을한록(沙乙閑麓)으로 이장하였다.

 

이성계는 강씨 사망 후 실의에 빠져서 직접 능(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조석으로 바쳤으며 1397년 1년여의 공사끝에 170여 간의 흥천사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조선 태종)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묘를 이장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왕비로 복위되고 순원현경(順元顯敬)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받았다.

 

광통교에서 다리밟기

 

옛날에 정월 대보름이 되면 임금님도 야금(夜禁)을 풀어서 도성 안의 백성이 다리밟기를 할 수 있도록 해서 광통교는 밤늦도록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2009.2.15일 서울 청계천 광통교 일대에서 81년만에 복원된   '다리 밟기'  행사가 재현되고 있다.

  1925년 중단되기 전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정월대보름 행사였던
  다리밟기는 답교라고도 하며 고려시대부터 정초에 자기의 나이  대로 다리를 밟으면   그 해에는 다리에 병이 나지 않고 모든 재  앙을 물리칠 뿐 아니라 복도 불러 들인다는 신앙적인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의 첫 왕비, 신덕왕후

 

- 경복궁 - 고문준 (궁궐지킴이)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입니다만 정작 우리 삶터 곳곳에서 만나는 유적들에 스민 우리의 옛이야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시민자원문화봉사단체인 (주)한국의 재발견의 ‘우리 궁궐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고문준 님의 글로 여러 궁궐들에 담겨 있는 우리의 역사, 문화에 대해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이 난을 통해 특히 어린 자녀들과 우리 궁궐을 다시 찾아 공부한 내용을 되새겨보신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경복궁에서 일어난 권력투쟁 사건 중에 가장 큰 사건은 이방원(태종)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난으로 이방원의 배다른 동생인 방번, 세자 방석 그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정조전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경복궁의 각 부분을 보기 전에 제 1차 왕자의 난과 조선의 첫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기구한 사연에 먼저 귀기울여보자

 

1. 기구한 운명의 신덕왕후

 

태조 이 성계는 고려의 풍습대로 고향에는 향처인 한씨(신의왕후)를 개성에는 경처인 강씨(신덕왕후)를 아내로 두었다.

 

첫 부인인 한씨는 6남 2녀-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경신, 경선-를 두었으나 1391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사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묻혔으며, 능은 제릉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부인인 강씨는 2남 1녀-방번, 방석, 경순공주를 두었다.

강씨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해인 1392년에 왕비가 되었다.

향처인 한씨가 태조가 등극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강씨가

조선 왕조의 첫 왕비가 된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1396년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 강씨 사후 2년 뒤인 1398년에 방원(제 3대 태종)이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때 신덕왕후가 난 배다른 동생인 방번, 세자인 방석과 세자를 보필하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살해 당한다.

태조 이성계는 이 난으로 방과(제 2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두 동생과 남편을 잃은 딸 경순공주로 하여금 여승이 되게 하였다.

경순공주가 출가를 위해 머리를 깎을 때 눈물이 뺨에 줄줄이 흘러내렸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정종이 즉위하고 도읍을 개성으로 옮기자, 태조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아내와 아들을 잃고 다시 돌아왔으니 실로 도성

사람들을 보기가 부끄럽다.

그러므로 출입은 반드시 밝지 않은 때에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

 

2. 후궁으로 지위가 격하되다.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안, 경복궁에서 가까운 황화방(지금

정동일대)에 두고,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 흥천사를 지었는데, 절이 170칸이나 되었다.

태조는 흥천사에서 재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침을 들었다고 한다.

지금 이 일대를 정동이라고 하는 데, 원래는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서 온

이름이다.

 

1408년(태종 8년)에 태조가 죽자, 다음 해에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 양주 사흘한록(서울시 성북구 정릉 2동)으로 옮기고,

능의 석물은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또한 왕비를 폐하고 후궁으로 지위를 격하하였다.

다음해 여름 홍수로 광통교가 유실되자, 그 석물을 광통교의 석축으로 사용한다.

  

 

 

 

 

 

 

 

  

청계천이 복원된 지금 광통교 아래로 내려가 보면, 신덕왕후의 능을 지을 때 봉분을 둘러쌓던 병풍석에 새겨진 구름과 12지 신상의 문양을 볼 수 있다.

개천 밑에 묻혀있어서 금방 쪼아낸 문양처럼 깨끗하다.

이 아름다운 문양을 보면 태조가 신덕왕후의 능을 짓는 데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아들이 세자가 되고,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으나, 죽은 후에는

두 아들을 잃고, 딸은 여승이 되었으며,

자신의 능은 파헤쳐지고 후궁으로 격하되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

게다가 후궁의 지위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태조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신의왕후 한씨의 신주는 같이 모셨으나,

신덕왕후 강씨의 신주는 종묘에 들어오지 못했다.

 

3. 신덕왕후의 원을 씻겨주는 비가 내리다.

제 18대 현종 10년(1669년)에 송시열이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 드디어 복위되었다.

260여 년 만에 종묘에 신덕왕후의 신주가 모셔지고 정릉도 복구하였다.

이 때 정릉에서 성대히 제사를 지냈는데 그 날 정릉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지니 이 비를 가리켜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며 ‘세원지우’ 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기 위하여 신주를 만들 장소를 논의하게 된다.

신덕왕후의 장례를 마치고 신주를 모신 곳인 혼전이 경복궁의 인안전이나, 그 위치가 확실하지 않아

 

평소 태조가 거처하던 침전인 강녕전 터에서 신주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경복궁의 강녕전 터에 차일을 치고 장막 안에서 신주를 만들었으며,

종묘 정전 제 1실 태조 실에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태조, 신의왕후, 신덕

왕후 순으로 신주가 나란히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다.

 

 

 

 

흥천사 (興天寺)에 대하여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절. 조선 태조 4년(1395) 신덕 왕후가 죽자 1396년 능지()를 정릉()에 정하여 짓고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동쪽에 세운 절로, 조계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후 여러 차례 소실된 절을1794년에 지금의 위치에 창건하여 신흥사()로 하였다가 고종 2년(1865)에 흥천사(興天寺)로 이름을 고쳤다.  

 

 

 

  

 

 

흥천사 종각의 편액. 위창 오세창의 글씨

 

흥천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정릉(貞陵)의 능사(陵寺)로 창건된 절이다. 절은 원래 지금의 중구 태평로 1가 서울시의회 건물 자리에 있었다.

 

 

▲ 옛 흥천사가 있었던 자리. 태평로 서울시의회 건물(2009.5.29 촬영)

정릉이 바로 그 옆, 지금의 중구 정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릉은 태조의 비 신덕왕후 강씨를 모신 능이다.

 

 

흥천사 (興天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왕이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지를 정릉에 조영()하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창건하기 시작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이 완성되었다. 창건과 함께 조계종의 본산이 되었고, 승당을 설치하여 항시 선()을 주관하는 참선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1398년 왕명에 따라 절의 북쪽에 사리전을 세웠다.

1410년(태종 10) 절의 탑을 보수하고, 1416년 기신재()를 지냈다. 1429년(세종 11)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아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고, 가뭄에는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왕실의 지원이 줄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사리전만이 화재를 면했는데 당시는 연산군의 악행과 폐불이 자행되던 때라 복구하지 못하고 불상과 기물만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로 옮겼다. 1510년(중종 5)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대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뒤 1569년(선조 2)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에는 승려 성민()·경신() 등이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846년(헌종 12) 구봉화상()이 칠성각을 세우고, 1849년 승려 성혜()가 적조암()을 창건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법당을 중수하고 1855년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865년(고종 2)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 하였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수()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새롭게 전각이 들어서면서 가람이 크게 확장되었다. 1933년 독성각이 불타자 이듬해에 재건하였고, 1942년에는 종각을 새로 지었다. 1959년에 칠성각을, 1967년에 용화전을, 그리고 1970년에는 연화대를 중수·신축하였다.

사찰 내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 있고,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 황태자 영왕의 글씨. 왼쪽 2번째 줄에 작은글씨 내용 '영친왕전하오세서'

순정효황후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일주문·종루·대방(만세루)·연화대·명부전용화전·북극전·독성각과 노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