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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건강,사랑방/가볼만한 곳(여행)

진시황릉

by 연송 김환수 2009. 4. 8.
 
 
 

 

 

 

 

 

 

 

 

 

 

 

 

 

 

 

 

 

 

 

 

 

 

 

 

 

<진시황릉(秦始皇陵)>

 

. 진시황릉(秦始皇陵)

 

◎ 진시황(秦始皇)

성 영(). 이름 정(). ()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繚)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 ·위() ·초() ·연() ·조() ·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아방궁(阿房宮)과 리산산[驪山] 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趙高)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 진시황릉(秦始皇陵)

서안에서 여산 화청지1)를 지나 동쪽으로 1km 더 가면 거대한 봉분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진시황의 능묘이다.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다. 「사기」<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통일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 현재는 지상의 흔적이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2)와 순장묘3)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묘가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능묘는 진시황이 죽은지 3년만에 그의 통일 제국과 함께 항우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 황릉의 발견 1974년 황릉의 동쪽에서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농민이 우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던 중에 양지발(楊志發)이라는 청년이 3 29일 곡괭이로 내리친 순간 병마용의 첫 번째 파편이 출토되었다.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팠더니 머리 부분과 팔 다리 조각들이 나오자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뒤 함부로 출토품을 가져가다가 지면에 5미터 밑에서 녹슨 청동화살과 3개의 쇠뇌가 발견되었다.

 

아무리 파도 우물이 발견되지 않고 유물들이 발견되자 수리시설 담당자이던 방수민(房樹民)이 작업을 중지하고 현 문화원에 사정을 보고하였다. 그 후 문화관 관장 외 2명이 그곳을 방문하였다. 도용 3개를 살펴보고 진시황릉 봉토 주변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데 1.2km나 떨어진 곳이라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채 조심스레 복원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두 달 뒤 신화사 기자인 린안온이 이 문화원을 방문했다가 출토된 도용을 보고 놀라며 1974년 6월 24 기사한편을 작성하였다. 이 기사로 인해 모택동과 주은래를 비롯한 최고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그해 7 4일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 황릉의 구조 1호 용갱

발굴이 진행되면서 많은 도용이 출토되었지만 유물과 주인과의 관계를 알 길이 없었다. 그때 구리극4)()이 발견되었다. 전체길이 2.88미터로 머리부분에 ‘삼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 라는 진귀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시황제 즉위 초, 여불위가 권력의 절정에 있던 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가. 이것의 출현으로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부장품이라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되었다. 거기에 또한 진의 청동 병기 제조기술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발굴작업을 하고 있을 당시 한 백발 노인의 나타나 용갱의 가장자리를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발굴팀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노인의 알려준 위치에서 탐사를 시작하였다. 1년뒤 용갱 전체가 파헤쳐졌다. 노인의 말이 매우 정확했던 것이다.

 

그 후 1년여간의 발굴 작업을 통해 동서 230m, 남북 62m, 총 면적 1 4,260m2의 병마용갱이 파헤쳐졌다. 병마용은 모두 3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도용은 8천여 점, 도마는 몇백 필, 나무전차는 백여 승, 그리고 대량의 청동병기가 발견되었다.

 

비록 2천여 년 동안 황토속에 매장되어 완전하진 않지만 그 방대한 군영의 자태는 여전히 당당한 장수의 풍모를 잃지 않고 있다보병들이 대부분인 갱 속의 무사용(武士俑)은 하나하나의 표정과 머리모양 등이 모두 다르며 화살통속에 청동화살까지 들어있었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초상을 조각하는데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가 발전하면서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에 이르면 인간의 형상에 대한 그림이나 조각이 전대에 비해 대단히 활발히 이루어진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조형은 토템이 퇴색하고 사상이 중시되면서 인간이 존중을 받는 세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런 전통예술이 진나라 말기 극심한 전쟁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그 문명이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2호 용갱

이 용갱이 발견될 당시 병마용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1호 용갱 전시관의 기초공사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북동쪽으로 20미터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2호 용갱은 L자형의 지하건축물로 길이는 96m, 너비는 84m, 깊이는 5m, 총면적은 6m2 1호 용갱의 절반 정도였다.

 

갱 안에는 89대의 나무전차와 2천좌이상의 도용과 도마, 몇 만점의 청동병기가 매장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등 서로 다른 병과(兵科)로 이루어진 대형 군진으로 대부분이 보병인 1호 용갱과 구별되었다.

 

최전방에는 궁노병이 배치되어있었는데 가볍고 어깨로 활을 잡아당기는 사수인 인강(引强)과 무겁고 발로 활을 당기는 사수인 척장(跖張)으로 나뉜다. 최전방에 궁노병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전쟁에서 궁노가 특별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백여개의 쇠뇌(활과 비슷하지만 활과는 달리 먼 거리를 쏠 수 있음)가 발견되어 고대병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궁노병의 오른쪽은 방대한 전차군진이 자리 잡고 있다. 가로세로 8열의 64대의 전차로 이루어져있는데 각 전차의 갑옷 입은 도용이 3개씩 있다. 좌우는 전투병이고 중앙은 운전병인셈이다. 3명 모두 일치형 갑옷인 전포(戰袍)를 입고 어깨와 팔뚝을 덮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보호대와 목에는 네모모양의 동정을 무릎아래는 보호대를, 착용하고 방에는 네모나고 입구의 코가 가지런한 신발을 신었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상투를 틀고 그 위에 둥근모양의 흰모자를 쓴 다음 그 위에 긴관을 올렸다.

 

백좌 가량의 기병도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복장은 보병이나 전차병과 달랐다. 붉은색의 매화가 그려진 작은 모자를 쓰고 딱 붙는 상의와 끝자락이 오므라드는 긴바지를 입고 단화를 신었다. 이것은 민첩하고 과감하게 기습공격을 하는 기병의 전술적 특징 때문이다.

 

, 진나라 시대의 악부종(樂府鐘)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높이가 13.3m, 양쪽의 선( : 앞의 뾰족한 부분)사이의 길이가 7.2cm, (

: 위의 납작한 부분)사이가 5.8cm, ( : 매다는 곳의 위쪽 부분)의 넓이가 6X4.8cm였다. ( : 무에서 고까지의 거리)과 고에는 금박에 뿔 없는 용의 무늬를 넣었고, ( : 한가운데 무늬 띠)사이와 종대(鐘帶 : 종 중앙에 돌기가 있는 부분) 또한 금박에 구름무늬가 있었다.

 

무늬가 매우 세밀하고 호화스러웠으며 땅속에 2천여년동안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후에 섬서성 박물관에 1급 유물로 소장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출토된 지 10여년 뒤인 1986 10월 분실해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3호 용갱 1976 5 11, 1호 용갱의 북서쪽 25m 지점에서 3호 병마 용갱을 발견하였다. 3호 용갱은 1

2호와 달리 무엇인가가 밝혀졌다. 전체면적은 3m2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건축형태가 매우 특이해 내부구조가 요()자로 수수께끼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3호 용갱은 도용과 도마의 머리가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일부나 파편등도 남아있지 않아 보존상태가 매우 나빴다. 

발굴하면서 이곳이 고대 군진 지휘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 고고학사의 유일한 발견이었다. 3호 용갱의 건축양식, 전차와 말의 특징, 도용과 병기의 배열 등은 고대 전쟁과 출정전의 의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3호 용갱을 보면 진나라군대는 지휘 기관이 독립되어 전체 군진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독립시킨 것은 지휘관이 면밀한 작전 방안을 작성하거나, 적진을 한눈에 파악해 전쟁 시 유리하게 하기 위함이다.

 

전차와 말이 있는 방에서 채색화가 그려진 전차 한대가 출토 되었는데 1호 용갱과는 달리 화려하고 선명했을 뿐더러 왼쪽에 채색화가 그려진 덮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도용의 숫자도 1호 용갱의 3명과 달리 4명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지휘자 전용차로 추측된다. 그리고 도용의 배열이나 병기분포, 그리고 사용방식 또한 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1

2호 용갱의 도용은 작전대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3호 용갱이은 무사용은 좁은 길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태로 배열되어있다. 그리고 호위 병사들이 지녔을 칼날이 없는 병기인 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경비나 호위를 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다른 용갱에서 발견되지 않은 동물의 뼈나 사슴뿔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의식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4호용갱

발견 당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갱도였다.

 

▶ 마구갱과 희귀동물갱

무릎을 꿇고 앉은 형상 옆에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 쟁반 등 다른 형상의 도자기들이 있었고 도기 쟁반 안에는 검게 부식된 뼈와 벼와 볏짚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말의 뼈가 있었다. 뼈에 남아있는 새끼줄의 흔적으로 보아 분명 말을 생매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구갱은 남북으로 세줄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도기쟁반, 구리 고리, 쇠도끼 등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또 마구갱과 비슷한 부장품 31좌를 발견하였는데 그것 또한 남북으로 3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말의 뼈는 아닌 작은 뼈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사슴과 새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마구갱이 진시황의 말사육장이었다면 희귀동물갱도 분명 궁정의 화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순장묘 1976 10, 탐사 팀은 17좌의 순장묘를 발견하였다. 그 중 8좌에 대해 시굴작업을 단행했다. 묘의 매장구조는 모두 경사진 갱도가 나있는 갑()자 형태였다. 묘의 특수한 구조는 묘의 주인이 황실종친이나 귀족이나 대신인 것은 나타낸다. 그리고 금

구리

칠기 비단 등도 발견되었다. 이런 순장묘들 안에는 유골들이 흐트려져 있고 이마에 화살을 맞은 두개골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강제로 살해당한 뒤 매장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 동거마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동거마(銅車馬 : 구리로 만든 수레와 말) 1980년 거의 모든 발굴이 끝나갈 때 쯤 발견되었다. 2호의 동거마가 발견되었으며, 흙더미에 형태가 일그러져 있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한 거마가 완전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은장식품은 윤기가 나고 금으로 된 물건들은 빛이 나고 있었다.

 

동거마가 출토된 곳이 개인의 보리 경작지였는데 그 주인이 입장권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보면서 훼손의 위험이 생기자 1개 소대 병력의 군인을 진입 시키려다 실패하고 여러 협상 끝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동거마는 실제 크기의 2분의 1 정도이고 매우 호화스러운 장식을 하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란 2천년의 시간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초기 발굴 모습

 

 

 

 

 

 

 

 

 

  

 

 

진시황릉(秦始皇陵)의 아홉 가지 해결되지 않은 의문

아래 글은 호련왕(胡連旺) 진시황릉구대미단(秦始皇陵九大謎團)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진시황릉의 배치(3D로 작업한 진시황릉의 전체적인 구조)

기원전 259년 음력 정월. 비범하게 생긴 사내 아이가 조나라의 한단에서 태어났다. 그가 바로 중국역사상 첫번째 통일왕국을 창립하게 되는 진시황이다. 그는 13세에 진나라의 왕에 오르고, 22세에 옹성(雍城)에서 성인식을 가지고, 정식으로 친정을 하게 되며, 39세에 나머지 6국중 마지막으로 남았던 제왕건을 포로로 잡으면서 통일을 이룩하였다. 이후 50세가 되던 해에 사구평대(沙丘平台, 현재의 하북성 거록현)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의 진릉(秦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신비로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삼보고사(三輔故事)>>의 기재에 의하면, 초패왕 항후가 관중으로 들어온 후 30만명을 시켜 진릉을 도굴하게 하였다고 한다.

 

발굴과정에서 갑자기 한 마리의 금기러기가 묘에서 날아나왔으며, 이 금기러기는 남쪽을 향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200여년이 흐른 후인 삼국시대인 보정원년에 어떤 사람이 금기러기를 장선이라는 관리에게 바치는데, 장선은 금기러기에 쓰인 글자를 보고 이것이 바로 진시황릉에서 날아간 그 금기러기라고 판단한다는 등 신비한 전설은 진시황릉에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여산(驪山)의 자락에 놓인 진시황릉은 봉토의 북쪽으로는 침전과 예의건축들, 사관건축들이 있고, 봉토밖에는 10킬로미터의 내외성벽이 있으며, 봉토의 주위 및 동서남북에는 수백좌의 지하배장갱(地下陪葬坑)이 있다.

 

처음으로 진시황릉에 대하여 기록한 사람은 사마천이다. 그는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진시황릉에 대한 160자의 글자를 남겼다. <<사기>>에 따르면 무덤의 높이는 50여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의 치수를 환산하면 현재로 말하면 115미터 정도가 된다.

 

1961년 서안의 문물관리소에서 측량하였을 때의 진시황릉의 분묘높이는 약 43미터였고, 1982년 다시 측량한 결과는 55.05미터였다. 아마도 이천년간의 세월이 흐르면서 높이가 절반 정도로 줄은 것으로 생각된다.

 

1974년 3월 29일 농민에 의하여 발견된 병마용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다시 진시황릉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병마용이 그렇게 큰 규모일 것이라고는 농민은 물론이고 고고학 전문가들도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병마용 배장갱만 보더라도 2만평방미터에 달하고 사람, 말모양의 도용이 8000여건에 달하며, 청동기는 10만여건에 달한다.

 

이후 20년간의 연구로 진시황릉의 동쯕에서 백여좌의 말 배장갱, 17개의 배장묘를 발견하고, 황릉의 서쪽에서 31좌의 진금이수(珍禽異獸) 배장갱, 1개의 말 배장갱, 61좌의 소형묘갱을 발견하였다. 10대의 채화동차마, 목차마는 지궁의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진시황릉 북쪽에서 하나의 비교적 큰 동물배장갱을 동쪽 내외성벽사이에서 개갑갱, 백희용갱등을 발견하였다.

진시황릉과 관련하여 해결을 기다리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첫째, 지궁(地宮)은 얼마나 깊이 있는가?

 

최근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진릉 지궁은 동서로 260미터, 남북으로 160미터, 총면적이 41,600평방미터로, 국제규모의 축구장 5개 넓이가 된다고 한다. 지궁은 수혈식(竪穴式)이라고 한다.

 

사마천의 기재에 의하면 "천삼천(穿三泉, 세 개의 지하수를 뚫고 내려갔다)"고 되어 있고, <<한구의(漢舊儀)>>에 의하면 "이심이극(已深已極, 깊이가 끝까지 갔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기재로 봐서는 더 이상 깊이 팔 수 없을만큼의 깊이로 팠다는 말이다.

 

물리학자인 정조중(丁肇中) 선생은 여기에 흥미를 느끼고, 현대의 하이테크기술을 활용하여 진명(陳明)등 3명의 과학자들과 같이 연구하여 글을 썼는데, 추산하기로 진릉지궁의 깊이는 약500미터에서 1500미터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숫자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1000미터라고만 쳐도, 진시황릉에서 북쪽에 있는 위하(渭河)까지의 낙차보다 더 깊다. 이렇게 되면, 지하수를 배수하는데도 문제가 될 뿐아니라, 위하의 물이 지궁으로 흘러들어올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만, 현대과학기술을 활용하여 이런 추측을 해보았다는데는 의미가 있다.

 

현재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전문가들이 진릉지궁의 깊이에 대하여 여러가지 연구를 한 결과로는 지궁입구에서부터 실제깊이는 약 26미터정도이고, 진나라때의 지표면에서는 약 37미터가 될 것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크게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본다.

 

둘째, 지궁에는 몇개의 문이 있는가

 

2002년 9월 17일, 사람들은 텔레비전 생방송을 통하여 고고학자가 피라미드내부공간을 조사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이 첫번째 석문에서 로보트를 집어넣은 후, 예상밖으로 중간에 석문에 가로막힌 바 있다. 진릉의 지궁에는 몇 개의 묘문이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는 <<사기>>에 이미 답이 적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기>>에는 "일이 끝나고, 이미 묻었다. 중선을 닫고(閉中羨), 외선문을 내렸다(下外羨門), 모두 닫겨서 공인과 장인들이 같혔으며, 다시 나온 자가 없었다"

 

관과 부장품을 중문 안에 놓아둔 다음에, 공인과 장인들이 중문안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돌연 중선문을 닫고, 하선문을 내렸다. 이로볼 때 내선문(內羨門)이 하나 더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지궁에 3개의 문이 있을 것이라고 개략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사마천이 중선문은 "닫았다"고 하고, 하선문은 "내렸다"고 표현을 달리한 점이다. 이로써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중선문은 여닫을 수 있는 문이었으나, 외선문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선문도 중선문과 유사했을 것이고, 세개의 문은 아마도 일직선상에 있을 것이다.

 

셋째, "상구천문, 하구지리(上具天文, 下具地理)"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진릉지궁에는 "위로는 천문을 구비했고, 아래로는 지리를 구비했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고고학자는 "상구천문는 묘실천정의 회화나 조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 달, 별등을 그렸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진릉에도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최근에 서안 부근에서 발견된 한나라묘에서도 천문과 지리의 벽화를 볼 수 있다. 위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해, 달, 별의 모양을 그리고, 아래에는 산과 내를 대표하는 벽화를 그렸다. 이로서 추단하면, 진릉지궁의 위에는 아마도 28성수도가 완벽하게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수은을 대표로 하는 산천지리를 배치하였을 것이다.

 

넷째, 지궁에 "수은(水銀)"을 묻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시황이 수은으로 강, 하, 바다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기>>, <<한서>>에 비슷한 문자가 있다. 그러나, 능묘에 수은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여기에도 하나의 답을 제공해주고 있다. 지질학자인 상용, 이동 선생은 두번에 걸쳐 진새황릉의 흙을 채취하여 측정하였는데, 수은이상반응이 나타났다. 다른 토질에서는 수은반응이 없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바탕으로 <<사기>>에 기재한 진시황릉내에 수은을 묻었다는 기재는 믿을 만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궁에 왜 대량의 수은을 묻었는지에 대하여는 북위의 학자인 여도원의 해석은 수은은 강, 하, 대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지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수은은 산천지리를 상징하여 상구천문에 대응하는 하구지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다섯째, 지궁에 보물은 얼마나 묻었을까?

 

"기진이보가 가득 묻혔다"는 말은 사마천이 한 말이다. 사마천보다 조기의 대학자인 유향(劉向)은 일찌기 이렇게 탄식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고이래로, 시황제처럼 묻은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궁에는 어떤 기세진보가 묻혀 있을 것인가?

 

<<사기>>에 명문으로 기재한 것은 "금안(金雁)", "주옥(珠玉)", "비취(翡翠)"등이다. 그 외에 어떤 희세의 보물을 묻었는지는 알 바가 없다. 80년대말 고고학자들은 지궁서측에서 하나의 대형 채색동차마를 말견한 바 있는데, 차마의 형태가 정황하고 장식이 정교한 것은 드물게 보는 것이었다.

 

지궁의 바깥에도 이렇게 정교한 부장품이 묻혀있다면, 지궁안에는 어떤 보물이 묻혀 있을지 상상할 수 없다.

 

여섯째, 진시황은 동관을 사용했을까? 목관을 사용했을까?

 

진시황은 어떤 관을 사용했을까? <<사기>>, <<한서>>에는 명확하게 기재하고 있지는 않다. 사마천이 남긴 글에는 단지 문구 하나 "하동이치순(下銅而致[木+享])"(구리를 내려 관에 만들었다)는 모호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진시황은 동관을 사용했을 것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문헌기재에 따르면 반드시 동관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기>>, <<한서>>의 기재에 따르면 "구리를 제련하여 그 안을 공고히 하고, 그 바깥을 칠했다", "주옥으로 두르고, 비취로 장식했다", "관의 아름다음이 더이상 뛰어날 수 없다"는 등의 문구가 있는데, 바깥을 칠한다거나 비취로 장식하려면 목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동관이나 석관이라면 이런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나라이전이나 한나라때까지의 기록을 보면,  "황장제주(黃腸題湊)"의 대형 나무목관을 쓰는 것이 천자의 특권이었다. 스스로 삼황오제보다 공이 뛰어나다고 본 진시황이 황장제주의 대형나무목관 이외에 딴 것을 썼을 것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일곱째, 지궁에는 빈 공간이 있을까?

 

현재의 고고학적인 조사로 발견한 것은 진릉의 지궁은 수혈식이라는 것이다. 묘내에는 아마도 황장제주의 대형목관이 있을 것이다. 만일 수혈식 목관묘라면, 묘도(묘에 이르는 길)나 목관위는 모두 흙으로 밀봉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묘실은 바깥이 둘러싸이고 더 이상 공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릉을 만든 당시의 재상 이사(李斯)는 "착지불입, 소지불연, 고지공공, 여하무상(鑿之不入, 燒之不燃, 叩之空空, 如下無狀: 개략적인 의미는 뚫어도 들어가지 않고, 태워도 불타지 않으며, 두드려도 비어있고,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같다)라고 한 바 있다. 이사의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특히 두드려도 비어있고라는 부분은 외각이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사의 이 말은 스스로 황제에게 말한 것이므로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로써 추단하건데 가운데가 비어있지 않을까 하고 있다.

 

문헌기재를 근거로 추정하기로는 아마도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것도 큰 공간이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고고학적 조사가 아직 지궁의 주요부위까지는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지궁내부가 비었는지 채워져 있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여덟째, 자동발사기가 있는 것인가?

 

진시황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장치를 한 것으로 나온다. <<사기>>에 따르면 "진릉지궁에는 장인을 시켜 기계활화살을 만들게 하여,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쏘도록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장치한 것은 자동으로 발사되는 석궁일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최초의 자동도난방지장치가 될 것이다.

진나라에서는 일찌기 연속 3발을 쏘는 석궁을 개발한 바 있다. 당시에 지궁에 장착하였다는 기계활도 아마 이런 석궁일 것으로 보인다.

 

외부의 물체가 부딪치면 자동으로 화살이 발사되게 되어 있을 것이다. 2200년전의 진나라 때 어떻게 이런 고도의 자동발사기를 만들었는지도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아홉째, 진시황의 유체는 완벽하게 보존되었을 것인가?

 

1970년대 중반에 장사 마왕퇴의 한묘에서 발견된 여자시체는 사람을 놀라게 하엿따. 그 시신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지금까지 드문 것이었다. 이로써 어떤 사람들은 진시황의 유체도 완벽하게 보호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시신보호기술에서 본다면 진나라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서한때의 여자시신이 그렇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진나라때도 시신을 보호하는 방부기술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진시황이 순시도중에 사망하였고, 사망시기가 한여름이었다는 것이다. 시체를 운반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냄새가 나기 시작하여, 시체냄새라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조고와 호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복을 잡아오게 하여 그 건복을 시체와 같이두어 시신냄새임을 모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50여일의 장거리를 운송하여 9월에야 비로소 함양에서 발인하게 된다.

진시황이 죽은 때로부터 묻힌 때까지는 약 2개월의 시간간격이 있는데, 당시의 시신보호경험으로 보면 시신은 반드시 죽자마자 처리를 시작했어야 하고, 약간만 시간을 놓치면 시신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해버린다.

 

아무리 선진적인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진시황의 시신이 완전하게 보존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발굴중인 모습

 

 

 

 

 

 

 

 

 

 

 

 

 

 

 

 

 

 

 

 

 

 

 

 

 

 

진시황(秦始皇)과 병마용(兵馬俑)

 

1. 중국의 첫 황제


석가모니가 고인도에서 탄생한지 약 300년이 된 후, 중국 북방의 한단(邯鄲)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수십 년 후, 역사적인 인물로 중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그가 바로 세상에서 이름난 진시황제이다.
진시황은 성이 영(嬴), 이름이 정(政)이며 기원전 259년에 태어나 기원전 210년에 죽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전국 7웅이 할거하며 패권을 다투던 전국시대 말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초(子楚: 장양왕)로 진 소왕(昭王)의 손자이며 안국군(安國君: 효문왕)의 아들이었다.

 

당시 변화무쌍한 할거전쟁의 와중에서 각 제후국간에는 상호 제약과 외교적 전략의 필요로부터 흔히 자기의 아들이나 손자를 다른 나라의 인질로 보내어 상대방의 신임을 꾀하곤 하였다. 당시 진의 안국군에게는 자녀가 매우 많았다. 그 중 자초는 적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었으므로 진나라 궁중에서 별로 중요시되지 못했다. 때문에 진과 조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자초는 조나라에 인질로 파견되었다.
그 무렵 조나라 한단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 안국군의 부인 화양부인 그리고 자초에 대한 투자)는 정치적 두뇌와 전략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불위와 자초와의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그의 애첩이었던 조희(趙姬)가 자초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난 아들이 바로 영정(嬴政)이다.
자초는 귀국한 후 진나라의 왕위를 계승하여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영정을 태자로 삼았다. 기원전 246년 장양왕이 병으로 죽자 나이 어린 13세의 영정은 진나라 왕이 되었다. 이때 정치의 실권은 여불위가 중부(仲父)로서 장악하고 있었다.
기원전 238년 영정이 22살이 되자 기년궁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손수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영정은 노애를 살해하고 태후를 연금하였으며, 여불위도 파면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때 이사(李斯), 왕관(王綰), 왕전(王翦), 위료(尉繚), 몽염(蒙恬) 등이 있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에 이르기까지 진나라는 원교근공(遠交近攻)․분심이간(分心離間)․각개격파(各個擊破)의 책략으로 10여 년간의 가혹하고 처절한 전쟁을 거쳐 韓․趙․燕․魏․楚․齊 6개의 제후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수립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영정은 자신의 공이 삼황(三皇)보다 높고 오제(五帝) 보다 크므로 삼황과 오제를 겸할 수 있는 용어로 황제(皇帝)라는 용어를 만들고 본인이 처음이므로 시황제라 하였다. 그리고 상․주(商周) 이래의 분봉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중앙에는 3공(승상 어사대부 태위)․9경을 설치하여 직접 황제의 명령을 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문자의 통일(소전체와 예서)과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였으며, 화폐도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하였다.

 

한편 흉노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장성을 수리하고 정리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치도(馳道)를 건설하여 유사시 신속하게 병력을 지방으로 보내어 진압하도록 하였으며,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으며, 모든 무기를 거두어 종거동인(鐘鉅銅人) 12개를 만들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순행도중 사구평대(오늘날 하북성 광종현 경내)에서 죽었다. 그리고 2세 황제로 호해(胡亥)가 등극하였다. 진시황의 장자 부소(扶蘇)의 사망과 몽염의 반란은 오히려 2세 황제 호해의 등극에 많은 의문점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기 이사열전에서 보여지는 진시황 사후 이세 황제 호해의 등극과정에서 보여지는 음모설이 나돈 것이 아닌가 한다. 이어 진승 오광(陳勝․吳廣)의 농민기의로 진제국은 붕괴되기 시작하여 15년만에 멸망하였다.
2. 병마용의 발견과 진제국의 군단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동현 안채향 서양촌의 양배언(楊培彦)․양지발(楊志發)․양전의(楊全義) 등 농민은 마을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자기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 남쪽 감나무숲 가운데에 관개용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여기서 세계 제8대 기적이라는 진시황 병마용이 발견되었다.
1호 갱(숙위군 주력) : 이 갱은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 14,260평방미터로 3개의 병마용 갱중 제일 큰 갱이다. 갱내에 6,000여 점의 토용․토마와 40여 승의 목조 전차를 안치, 전차와 보병을 혼합 편성한 장방형 군진이다. 이 군진은 선봉, 주력, 후위, 익위 등 4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갱의 가장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3열 경장비 보병용으로 매열 68점, 도합 204점이 있다.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고 속발을 하고 다리에 행전을 매고 손에 궁노를 든 이들 토용은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선봉부대이다. 선봉부대 뒤에는 격리토담에 의해 11개 동․서 향의 통로로 나뉘어져 있는데, 38종대의 전차․보병이 서로 엇갈아 배열되고 있다. 이들 토용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정강이에 대발을 치고 손에 창․戈․긴 창․戟 등 병장기 및 소량의 궁노를 들고 있는데 중장비한 갑사에 속한다.

 

이들은 전차와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력으로 기세가 반석같고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갱 내의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무사용이 각각 남․북을 향해 1열로 서 있는데 군진의 좌․우익 측으로 그들의 임무는 적군의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다. 군진의 제일 후단에는 대군과 등을 지고 서쪽을 향해 서있는 무사횡대로서 군진의 후위이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적들의 배후기습을 방어함으로써 대부대 진군시 후방의 근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2호 갱(고대 군진) : 2호 갱 군진은 1호 갱의 동단 북쪽에 위치하며 1호 갱과 약 20m 떨어져 있다. 갱의 평면은 곡척형(曲尺形)으로 동서 길이 124m, 남북 넓이 98m, 면적이 약 6,000평방미터이다.

 

시추 및 시굴자료의 추산에 의하면 이 갱내에는 전차에 메인 토마 350필, 기병용 안마 116필, 각종 무사용 900여점, 도합 1,400 여졈의 토용․토마와 89대의 목제 전차가 있는데, 보병․기병․전차 3개 병종을 혼합 편성한 곡진을 이루고 있다.

 

포진방법은 4개의 작은 진을 ‘ㅁ’자형으로 잇달아 구성했다. 첫 번째 작은 진은 노병(弩兵)진으로 곡형진의 최선봉에 위치, 도합 330여명의 弓弩手로 구성되었다.

 

그 중 약 160명은 갑옷 중장비를 한 궤사(跪射) 토용으로 8개 종대로 나누어 진중에 자리해 있다. 그 둘레에는 약 170여 점의 전포 경장비를 한 입사(立射) 토용이 진을 에워싸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적이 쳐들어 올 때 서기도 하고 꿇기도 하면서 번갈아 사격할 수 있어서 화살이 빗발치듯한 정세를 조성하여 적들이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두 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우측에 위치, 64대의 전차로 구성, 전차마다 3명의 전사가 타고 있는데 1명은 어수(御手), 2명은 갑사(甲士)이다. 전차의 앞․뒤로 수행하는 예속 보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집중된 순 전차편대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작은 진은 곡형진의 중부에 위치, 전차․보병․기병으로 구성된 진이다. 이 진은 19대 전차를 위주로 하고 260여명의 보병을 보조로 하며 동시에 8명의 기병을 후미로 하였는데 군진의 편성이 매우 원활하다. 마지막 작은 진은 곡형진의 좌측에 위치한 기병진으로 108명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를 보조로 하였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머리에는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으며 몸에는 흉부와 배부를 보호하는 짧은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활,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쥐었는데 날렵하게 보인다. 전마는 피둥피둥 살이 찌고 안장과 다래가 비치되어 있다.

 

이런 기병들은 전쟁판에 뛰어들기만 하면 행동이 번개처럼 빠르고 동작이 선풍처럼 날쌔며 불의에 출격하여 적을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하고 용감하게 돌진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을 넘나들며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리는 신기한 위력을 보유하고 있다.
3호 갱(군막: 지휘소) : 3호 갱은 1호 갱 서단 북쪽에 위치, 1호 갱과 25m, 동쪽의 2호 갱과 120m 떨어져 있다. 총면적은 500평방미터도 안되는데 갱 안의 면적은 가장 크고 병용이 제일 적다.

 

토용 66점, 전차를 끄는 토마 4필, 목제 전차 1승이 출토되었다. 갱 내의 무사용은 전투대형에 따라 편성된 것이 아니라, 남․북 2개 곁채에 분포되어 있는데 손에 의장병 병기인 동수(銅殳)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 채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지휘관을 보위하는 경위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이 갱에서는 또 제사․기원을 위한 살생후의 사슴뿔․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3호 갱이 보통 군진이 아니라 옛사람들이 일컫는 ‘군막(軍幕)’, 즉 현대인이 말하는 사령부의 소재지임을 알 수 있다.
※ 중국고대 사회에서의 군대를 좌․중․우 또는 상․중․하 3군으로 편성하는데 진나라 때에도 역시 이러하였다. 진나라 병마용 갱의 배치를 총괄하면 3호 갱의 지휘부, 1호 갱은 오른쪽에 있는 우군, 2호 갱은 왼쪽에 있는 좌군이다.

 

그러면 중군은 어디에 있는가? 고고학 탐사에 의하면 원래 1호 갱 중부 북측과 2호 갱 서측 사이에 또 용 갱이 하나 있었다. 이 갱은 형상이 규격에 맞고 깊이도 다른 3개 용 갱과 같다. 다만 갱내에 토용․토마와 기타 유물이 없고 침적토에 의해 메워져 있어 사람들이 소흘히 여기고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이 빈 갱이 바로 건설을 계획하였던 중군이었는데 진나라 말기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진왕조가 신속히 붕괴됨에 따라 미처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견해다. 당시 진나라의 “병사 100 여만, 전차 1,000 여승, 전마 1만 여필에 달한다”는 3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생경하게 반영하였다.
현재 발굴된 진나라 병마용 갱은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이미 검, 창, 극, 긴 창, 쇠뇌, 수(殳), 화살촉, 금구(金鉤) 등 10여종의 병기가 출토되었고, 총 수량이 무려 3만여 점에 달한다.
청동거마(靑銅車馬)
진나라 병마용 갱이 발견된 후, 1978년 진시황릉 채색 동거마(銅車馬)의 출토는 진시황릉 고고학 사업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중대한 성과이다. 이 동거마는 모두 2대로 원래 진시황릉 서쪽 20Km 거리의 한 부장 갱에 매장되어 있었다.

 

출토시 이 2대의 동거마는 길이 약 7m, 넓이 약2.3m의 대형 나무관 속에 앞뒤로 서쪽을 향해 놓여 있었다. 동거마의 크기는 진짜 말과 수레의 1/2에 상당하다. 비록 부장물이기는 하지만 망령의 여행용 진상물로서 실용물은 아니다.

 

그러나 수레의 구조 및 메는 방법은 완전히 실물을 모방하여 진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므로 황실대가의 축소판이며 재현인 것이다.
진시황릉 동거마는 출토시의 전후 순으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1호 수레, 2호 수레로 불려지고 있다. 2대의 동거마는 모두 쌍륜 단채로 네 필의 구리말을 메웠지만 형상과 구조는 서로 다르다. 漢나라 채옹(蔡邕)의 ꡔ독단(獨斷)ꡕ에 의하면 이 두 동거마는 모두 제왕법가 중의 ‘오시부거(五時副車)’ 속하는 것으로, 즉 난가대오 중 제왕승여의 수행차량이다.

 

1호 수레(軺車)는 고거(高車) 또는 입거(立車)라고 하는데 당시 진시황 순행차대의 선도수레였다. 수레의 차체는 가로된 장방형으로 넓이 126Cm, 길이 70Cm이며 수레 위에는 122Cm의 원형 구리산이 세워져 있고 그 밑에는 장검을 찬 동제 어관용이 서있다.

 

수레 위에는 또 청동방패와 궁노(弓弩)․전통(箭筒)이 하나씩 놓여 있고 전통안에는 66개의 청동화살이 담겨져 있다. 4마리의 말 중 2마리는 참마, 2마리는 복마이고 동체는 흰 색을 칠하였고 키는 모두 90Cm, 길이는 약 110Cm이다. 머리에는 은재갈에 금은 장식끈이 드리워 있고 면부에는 금방울이 장식되어 있으며 목밑에는 장식용 술이 드리워져 있다.

 

두 참마의 목에는 금은고삐가 매어져 있는데 그 중 오른쪽 참마의 이마에는 이 수레가 황실전용임을 표시하는 깃발이 꽂혀 있다. 중간의 두 복마는 멍에를 쓰고 끌채를 메였다. 4마리의 말은 다 갈기를 자르고 꼬리를 묶어 놓았다. 머리를 쳐들고 우뚝 서서 기민하고 날랜 표정으로 멀리 앞을 내다보고 있는 품이 곧 네 굽을 안고 달려나가려는 듯 싶다.

 

2호 수레는 안거(安車), 속칭 온량거라고 한다. 동거마의 총기리이는 3.17m, 높이는 1.06m, 중량은 1,241Kg이다. 수레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고 평면은 ‘볼록’ 자형을 이루었다. 앞부분은 어관의 자리이고 뒷부분은 주인의 좌석이며 둘레에 간막이를 대고 앞에 횡목, 뒤에 문을 내었으며 좌우 양측과 앞에 창문을 각각 하나씩 내었다.

 

창문짝에는 투조한 작은 구멍들이 밀포되어 있어 햇빛을 가리우고 바람과 먼지를 막아주면서도 탑승자가 창문으로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했다. 창문의 구조는 홈을 판 미닫이로서 여닫기에 매우 편리하다.

 

수레 전체가 타원형의 뚜껑 밑에 놓여있는데 수레는 네모지고 뚜껑은 둥글어 이른바 “여(輿)는 땅과 같아 네모지고 뚜껑은 하늘과 같이 둥글다”고 한 사서의 기록과 상합되며 중국 고대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소박한 자연관을 구현했다.

 

수레 앞 부분의 구리 어관용은 몸에 단검을 차고 꿇어앉은 자세를 취하였는데 높이 51Cm로 몸에 긴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할관을 쓰고 정신을 가다듬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모양이 매우 생동적이고 정교하다.

 

고귀한 신분으로 하여 득의앙양해 하면서도 또 늘 황제를 수반함에 호랑이에 동행하는 듯한 공포심을 품게 되는 황실 고급 노복의 정신면모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진시황릉 동거마는 현재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동거마 중 차형이 제일 크고 장식이 가장 화려하고 모방이 매우 정교하고 또 완전하게 보전된 동거마이다. 그 구조의 복잡함과 기예의 정심함은 이왕에 출토된 그 어떤 구리기구도 비교할 바가 못된다.

 

실로 중국 ‘청동의 으뜸’으로 칭송됨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동거마의 발견은 고대 수레제조, 특히 천자의 여복제도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실물자료를 제공했다.

 

동거마를 통해 우리는 당시 진시황의 난가가 얼마나 화려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당년 한고조 유방은 황제로 되기 전에 진시황의 순행차대를 보고 부러운 나머지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러할 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시중에 유행하는 유머들

 


[아내를 오리에 비유하면] 
 

돈 버는 능력은 없지만 집에 틀어 앉아 살림은 잘하는 전업주부=집오리.

전문직에 종사하며 안정적 수입이 있는 아내=청둥오리.

부동산, 주식투자 등으로 큰 돈을 벌어오는 아내=황금 알을 낳는 오리.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다 쓰고도 모자라 돈 더 벌어오라고 호통만 치는 아내=탐관오리.

모든 재산을 사이비종교에 헌납한 아내=주께 가오리.

돈 많이 드는 병에 걸리고도 명까지 긴 아내=어찌 하오리.

돈 많이 벌어 놓고 일찍 죽은 아내=앗싸 가오리.


[4대 거짓말]
 
노처녀가 시집 안 간다.

노점상이 밑지고 판다.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

노태우는 보통사람이다.
 

[김정일이 서울에 못 오는 이유]
 
거리에는 총알택시가 너무 많다.

골목마다 대포집이 너무 많다.

간판에는 부대찌개가 너무 많다.

술집에서는 폭탄주가 너무 많다.

가정은 집집마다 핵가족이다.

[우기는 데는 못 배겨] 

갈매기살과 제비추리는 새의 살고기라고 우기는 놈.

탑골공원과 파고다 공원은 다르다고 우기는 놈.

LA와 나성은 다르다고 우기는 놈.

으악새를 새라고 우기는 놈.

구제역이 양재역 다음역이라고 우기는 놈.

노루에게도 쓸개가 있다고 우기는 놈.

쌍팔년도 얘기란 1988년도 얘기라고 우기는 놈.
 

 
 

 

[얄미운 여자]
 
10대에는~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예쁜 여자

  (공부 잘하는 여자는 대개 얼굴이 못 생겼다).

 
20대에는~ 쌍꺼풀 수술을 했는데 수술이 너무 잘 돼

원래 자기 것처럼 보이는 여자.

  (보통은 쌍꺼풀 수술을 한 표가 난다)
.

30대에는~ 학교 다닐 때는 공부도 못하고 아무 것

아니었는데

  결혼 한 번 잘하더니 외제차 타고 다니는 여자(잘

난 여자도 결혼생활이 행복하기 어렵다)
.

 
40대에는~ 자기는 골프치고 카바레 다니고 할 짓

다하는데
애들은 서울대에 꼬박꼬박 들어가 주는 여자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는 놀지도 못하고 애한

테만 매달려도
애를 서울대에는 커녕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

시키기도 어렵다
.).

 
50대에는~ 밥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 안찌는 여자
(보통은 조금만 먹어도 나이 들면 살이 찐다).

 
60대에는~ 남편이 돈만 많이 벌어 놓고 일찍 죽어준

여자
 
(보통은 남편이 돈도 못 벌고 죽지도 않는다).
 
70대에는~ 평생 오만가지 좋은 일은 다 즐기고 죽어

서 천당까지 가려고 성당에서 세례 받은 여자

  (평생을 어렵게 산 사람들이 죽어서라도 행복하게

지내려고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 .

   여자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면 남이 볼 때는

얄밉게 보인다
.

 

[여자의 상품가치] 

10대는 ~ 쌤플.

20대는 ~ 신상품.

30대는 ~ 명품.

40대는 ~ 정품.

50대는 ~ 쎄일품.

60대는 ~ 이월상품.

70대는 ~ 창고 대방출.

80대는 ~ 폐기처분(후일에 희귀품으로 진품명품으

로 될 수 있음).

 

 
[남자를 불에 비유하면]
 
10대 : 부싯돌(불꽃만 일어난다)
.
20대 : 성냥불(확 붙었다가 금세 꺼진다).


30대 : 장작불(강한 화력에다 새벽까지 활활 타오른다).


40대 : 연탄불(겉으로 보면 그저 그래도 은은한 화력을 자랑한다).

50대 : 화롯불(꺼졌나 하고 자세히 뒤져보면 아직 살아 있다).

60대 : 담뱃불(힘껏 빨아야 불이 붙는다).

70대 : 반딧불(불도 아닌 게 불인 척한다).

80대 : 도깨비불(불이라고 우기지만 본 놈이 없다).


[부부의 잠버릇 ]
 
20대 : 포개고 잔다.

30대 : 옆으로 누워 마주보고 껴안고 잔다.

40대 : 천장보고 나란히 누워 잔다.

50대 : 등 돌리고 잔다.

60대 : 각방에서 따로따로 잔다.

70대 : 어디에서 자는지도 모른다.


[부부생활의 상태]
 
10대 부부는 ~ 서로가 뭣 모르고 산다(환상 속에서 산다).

20대 부부는 ~ 서로가 신나게 산다(서로가 너무 좋아서).

30대 부부는 ~ 서로가 한 눈 팔며 산다(권태기라 고독을 씹으며 산다).

40대 부부는 ~ 서로가 마지못해 산다(헤어질 수 없어서 체념하고 산다).

50대 부부는 ~ 서로가 가엽어서 산다(흰머리 잔주름이 늘어나서).

60대 부부는 ~ 서로가 필요해서 산다(등 긁어 줄 사람이 없어서).

70대 부부는 ~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서로가 살아준 세월이 고마워서).


[평준화 시대] 

40대 : 지식의 평준화
(학벌이 높던 낮던, 많이 알던 모르던, 좋은 학교 나왔건 안 나왔건 상관없음).

50대 : 미모의 평준화(옛날에 예뻤던 안 예뻤던 별 차이 없음).

60대 : 성의 평준화(옛날에 정력이 셌던 안 셌던 차이 없음)
.
70대 : 재산의 평준화(재산이 많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리).

80대 : 생사의 평준화(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큰 의미 없음)
.

 

[아내가 두려울 때] 

20대는 ~ 외박하고 들어갔을 때.

30대는 ~ 카드 고지서 날아왔을 때.

40대는 ~ 아내의 샤워하는 소리가 들릴 때(고개 숙인 남자라).

50대는 ~ 아내의 곰국 끓이는 냄새가 날 때(곰국 먹는다고 달라지겠나).

60대는 ~ 해외여행을 가자고 할 때(떼어놓고 올까봐).

70대는 ~ 이사 간다고 할 때(가는 곳도 알려주지 않고 놔두고 갈까봐).

 
[인생에 3번]
 
남편은 부인에게 3번 미안해 한다.

 =아내가 분만실에서 혼자 힘들게 애 낳을 때.

  카드대금 청구서 날아올 때.

  부인이 비아그라 사올 때.

부인은 남편에게 3번 실망한다

 =운전하다 딴 여자한테 한 눈 팔 때.

  잠자리에서 등 돌리고 잘 때.

 

 

 

 

[ 정치인과 개의 공통점] 

가끔 주인도 몰라보고 짖거나 덤빌 때가 있다.

먹을 것을 주면 아무나 좋아한다.

무슨 말을 하든지 개소리다.

자기 밥그릇은 절대로 뺏기지 않는 습성이 있다.

매도 그 때 뿐 옛날 버릇 못 고친다.

족보가 있지만 믿을 수 없다.

미치면 약도 없다.
 

[여자와 책의 공통점] 

겉표지(얼굴)가 선택을 좌우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

한 것은 내용이다.

내용(?)이 별로인 것들의 대부분은 겉포장(화장)에

무진장 신경 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세월이 지나면 색(色)이 바랜다.

파는 것과 팔지 않는 것이 있다.

가끔 잠자기 전에 펼쳐(?) 본다.

자기 수준에 맞는 것이 좋다.

한번 빠지면 무아지경에 이른다.

남에게 빌려 주지 않는 것이 좋다.

 

[여자와 무의 공통점] 

겉만 봐선 잘 모른다.

바람이 들면 안 좋다.

물이 많고 싱싱해야 좋다.

공짜로 주면 더 좋다.

쭈글쭈글하면 안 좋다. 

 
 
[신혼부부와 초보 운전자의 공통점] 

보기만 하면 올라타려고 한다.

기술은 서툴어도 힘으로 밀어 붙인다.

남들이 그 시절이 좋은 때라고 말한다.


 


[남편이란 존재는 이래저래 애물 덩어리]

집에 두고오면.................근심 덩어리

같이 나오면....................짐 덩어리

혼자 내보내면.................걱정 덩어리

마주 앉아 있으면.............웬수 덩어리
 

[선생님 시리즈]

20대 선생님....................어려운 것만 가르친다

30대 선생님....................중요한 것만 가르친다

40대 선생님....................이론(원칙)만 가르친다

50대 선생님....................아는 것만 가르친다 


[잊었던 첫 사랑이 또 아픔을 주네]

잘 살면...........................배 아프고

못 살면..........................가슴 아프고

같이 살자고 하면.............머리 아프고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든 것] 

앙드레 김에게 ................검은 옷 입히기

중 머리에.......................꽃핀 꽂기

장가 간 아들...................내편 만들기

펀드에 맡긴 돈................원금 되찾기
  

 

[전두환식 영어]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한 미국대사와 만났다.

대통령이“오늘 만나서 대단히 반갑다”고 했고 이를 통역이

전하였다.

그러자 미국 대사는“미 투(Me too)”라고 했는데

대통령이 이를 듣고 있다가 투(two) 다음에는 쓰리(Three)니



나도 영어는 좀 안다는 식으로“미 쓰리(Me three)”라고 했다.

그 때 옆에 있던 이순자 여사가 “자기 나 불렀어?”
 

[애인 버전]

30대에 애인이 없으면 : 1급 장애자.

40대에 애인이 없으면 : 2급 장애자.

그런데 50대에 애인이 있으면 : 가문의 영광.

60대에 애인이 있으면 : 조상의 은덕.

70대에 애인이 있으면 : 신의 은총
.

일주일 내내 보고싶은 사람..

바로..

바로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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