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관장 김태근)은 허균이 1615∼16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쓴 기행시집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을 찾아내 ‘한국고전국역번역총서’ 1권으로 2005.12.31 번역 출간했다.
허균의 저술은 1618년 그가 역모죄로 처형된 탓에 망실되고 미처 간행되지 못해 초본 형태로 남았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부藁)’와 홍길동전만이 전해진다.
을병조천록은 제목만 전해져 왔는데 허균의 둘째 형인 하곡 허봉(荷谷 許g)의 저술인 ‘조천록’의 하권 속에 묻혀 있었다.
최강현(전 홍익대 교수) 한국기행문학연구소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천록을 검토하다가 이 책의 하권이 ‘조천록 하’로 적혀 있는 겉장과 달리, 첫 장 안쪽에 을병조천록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은 허균(許筠)이 동지 겸 진주사행(冬至兼陳奏使行)의 부사(副使)로서 광해군 7년(1615) 9월 6일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향했다가 이듬해 3월 1일에 의주로 귀환하여 3월 중 평양에 이르기까지 지은 382수의 시들을 모은 기행시집이다.
2004년에 최강현 교수가 『을병조천록』을 발굴하여 학계에 소개하고 2005년에 동서의 번역본을 출판한 이후로, 이를 주요한 자료로 사용하여 허균의 사상과 만년을 논한 논저가 속속 간행되었다. 기존의 번역은 오독이 많고, 그 번역에 근거한 논의도 자연히 억단(臆斷)으로 흐른 면이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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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을병조천록』국역본 발간 고전 국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문화관광부 국립중앙도서관(관장 김 태근)은 소장하고 있는 전적 문화재 국역 계획을 수립하고 그동안 서명만 알려졌던 허균(許筠)의『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을 발굴, 국역하였다.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은 이제까지 학계에 제목만 알려지고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로, 그동안 하곡(荷谷) 허봉(許篈)의 『조천록(朝天錄)』下冊으로만 알려 져 왔으나 2004년 국립중앙도서관이 발간한 해제집『선본해제』에서 처음 소개 되 었었다.
이 작품은 교산(蛟山) 허균(許筠)이 광해군 7~8년(1615~1616) 즉 을묘(乙卯) 병진 (丙辰) 2년에 걸친 사은사행(謝恩使行)의 부사(副使)로 당시 명나라의 수도였던 연경 곧 지금의 북경에 가서 머물다 오며 느낀 정서를 한시 228편 382수로 지은 기행시 집이다.
국역자인 기행한시 연구자 최강현(崔康賢) (한국기행문학연구소장, 전홍익대 교수) 교수는 ‘교산이 역신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이 되기 2년전에 지어진 이 작품이야 말 로 스스로가 유서처럼 남겨 놓은 진솔한 유언장’이라며 ‘교산의 인물연구에 고귀한 자료’라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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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치쪽으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허구의 이야기를 꾸며내며 망상하는 것에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하며 생전 문장, 시, 소설 등 문집으로 이름이 조선과 명나라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아버지 허엽, 이복 형 허성, 동복 형 허봉, 동복 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허씨 5문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자유분방하고, 사회비판적이고, 다양한 사상들을 믿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교류했으며, 조선에서 천지간의 한 괴물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 막후에서 종사하던 중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싫어하여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한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 암살 기도 때문에 당시 집권 세력 광해군과 북인에게 반역 혐의를 쓰게 되어 거열형을 당하고 역적이 되었다. 역적이 되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나고 조선시대 내내 "기피 대상"이 되었으나 1999년 4월 23일 허균이 양천 허씨에서 민간 차원에서 복권되었다.
허균을 연구한 대한민국 역사학자 이이화는 허균을 "인간을 사랑한 사람... 차별 없는 세상, 약자가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인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에서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천재 허균"이라고 평가하는 등 현대 들어서 한국에서 재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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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문인이다.
1569년(선조 2)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 10)에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문재에 뛰어났고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이달에게 배웠다. 명 사신 접대에 종사관으로 기용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명나라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에 가담하여 폐모론을 적극 주장했다. 유학 외에 불교와 도교 등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비판적 개혁사상가로서 여러 이론을 개진했고, 사회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 「한정록」 등의 작품을 남겼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엽(曄)이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봉(篈)과 난설헌(蘭雪軒)과 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선조 35)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이 해에 원접사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604년(선조 37)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허균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대북(大北)에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좌참찬이 됐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豪民論)」에 나타난 사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官論)」·「정론(政論)」·「병론(兵論)」·「유재론(遺才論)」 등에서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해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그러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평가허균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 사람됨에 대해서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자신이 편찬해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했다.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그가 25살 때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은 『성소부부고』에 함께 실려 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시를 보는 그의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허균의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가 전한다.이 밖에 『고시선(古詩選)』·『당시선(唐詩選)』·『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현재에 전하지 않는다.
저술했다는 기록만 있고 현재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한년참기(旱年讖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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