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알아보기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安堅)의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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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몽유도원도> 1447년, 비단에 담채, 38.7×106.5cm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의 전체 구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여러 문인의 친필 찬시 | 안견의 그림 | 안평대군의 발문과 표제 |
작가 : 안견(安堅)
종류 :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크기 : 38.7×106.5cm
제작년도 : 1447년(세종 29)
소장 :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본인 소장 몽유도원도 영인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안견이 1447년(세종 29)에 그린 산수화로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다. 크기는 세로 38.7㎝, 가로 106.5㎝이고,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447년 4월 20일 안견의 독실한 후원자였던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꿈 속에 도원(桃源)을 방문하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안평대군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안견이 이 걸작을 단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여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도잠(陶潛) : 도연명(陶淵明)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어부가 도화원에서 본 마을 사람들의 평안하고 순박한 생활정경을 서술하고 있다.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의 작품으로 동진 태원연간(376~395)에 무릉(지금의 후난 성 타오위안 현)에 살던 어느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대의 전란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때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노자의 소국과민 사상에 기초하여 고대의 자연주의적 유토피아를 묘사한 것으로, 당대 전기소설의 원조가 되었다. → 무릉도원.
도잠(陶潛)은 중국 동진(東晋)말기 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초기에 걸쳐 생존한 중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동진(東晉) 여강(廬江) 심양(潯陽) 사람. 자는 연명(淵明) 또는 원량(元亮)이고,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호했다. 일설에는 이름이 연명(淵明)이고, 자가 원량이라고도 한다. 도간(陶侃)의 증손이다. 고을의 좨주(祭酒, 동한 삼국시대 관직)가 되었지만 관리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직한 뒤 돌아왔다. 다시 생활을 위해 진군참군(鎭軍參軍)과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지냈다.
팽택현령(彭澤縣令) 때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일을 견뎌내지 못하면서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하다가 안제(安帝) 의희(義熙) 2년(406) 41살 때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팽택현령을 사임한 뒤 다시는 관계(官界)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쓴 글이 「귀거래사(歸去來辭)」다. 의희 말에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불렸지만 나가지 않았다. 스스로 증조가 진(晉)나라 때의 재보(宰輔)였으면서 후대에 몸을 굽힌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남조 송나라에 들어서자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지은 문장에는 모두 연월(年月)을 달았는데, 의희 이전에는 진나라 연호를 썼다가 남조 송나라 이후에는 갑자(甲子)만 달았다.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했고, 술을 좋아했으며, 시문을 잘 지었다. 시풍(詩風)은 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과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고,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사시(私諡)는 정절(靖節)이다. 저서에 『도연명집(陶淵明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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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두루마리 안쪽에는 첫머리에 〈夢遊桃園圖(몽유도원도)〉
라고 쓰여진 제첨(題簽:제목, 題號제호)이 붙어 있고,
그 다음에는 폭 25cm의 푸른색 비단 바탕에 여섯 행의 붉은 글씨가 쓰여 있다.
이 주서(朱書)는 안평대군이 1450년,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뒤에 쓴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 世間何處夢桃源 (세간하처몽도원)
은자(隱者)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 野服山冠尙宛然 (야복산관상완연)
그림 그려 보아 오니 참으로 좋을씨고 / 著畵看來定好事 (저화간래정호사)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 自多千載擬相傳 (자다천재의상전)
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 / 後三日正月夜 (후삼일정월야)
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 한마디 적어 맑은 정취를 기리노라 / 在致知亭因故有作淸之 (재치지정인고유작청지)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란 제첨(題簽·작품 제목)은 안평대군의 글씨가 아니라 작가 미상의 글씨라는 주장이 있고, 15세기 당시는 ‘몽도원도’로 불렸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왕희지와 조맹부의 서체를 기본으로 한 안평대군의 서체와 달리 당송의 금초서(今草書)를 배운 글씨라는 얘기다. 제첨 역시 '몽유도원도'가 아닌 '몽도원도'라고 해야 옳다는 견해도 그냥 넘겨버리기 아까운 논거를 갖고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글씨는 안평대군이 쓴 글이 아니고 후대의 글씨체로 3-4세대 이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고 그 왼쪽 초록 바탕에 금니로 쓰여진 폭 25cm의 푸른색 비단 바탕에 여섯 행의 붉은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 주서(朱書)는 안평대군이 1450년, 즉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뒤에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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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그림 자체는 높이 38.6 cm x 길이 106.2cm다.
발문(跋文)은 그림을 본 감상문인데 발문까지 붙인 두루마리는 두 권으로 각 1,120cm 와 857cm 이다.
합하면 1,977cm에서 그림 길이 106cm를 빼면 1,871cm이다. 발문만 60척(1,871cm)이다.
자 = 척(尺) 자는 손을 폈을 때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서 비롯된다. 자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온 상형문자(象形文字)이며, 처음에는 18c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차차 길어져 한(漢)나라 때는 23cm 정도, 당(唐)나라 때는 24.5cm 정도로 되었으며, 이보다 5cm 정도 긴 것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32.21cm를 1자로 했으나, 세종 12년의 개혁시에 31.22cm로 바꾸어 사용해 오다가 한말(1902년)에 일제의 곡척(曲尺)으로 바뀌면서 30.303 cm로 통용되었다. 1963년 계량법이 제정되어, 현재는 거래 ·증명 등의 계산단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자 = 1척 = 10치[寸] = 10/33m = 30.3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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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감상법>
몽유도원도는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다른 동양화와는 정반대입니다.
안견의 치밀한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그림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왼쪽부터 현실세계, 현실과 이상향의 경계, 이상향(도원)으로 나뉩니다.
동양화의 두루마리 그림의 경우 우측에서 좌측으로 전개되는 것이 통상적인 화법인데 동양적 이상향의 구현체였던 <몽유도원도>는 얘기의 전개가 좌측 하단부에서 시작한다.
우측 상단으로 보이지 않는 대각선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는 점이 주목되며 이는 다른 어떤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구성이다.
그림은 왼편으로부터 1)현실세계, 2)도원의 바깥쪽 입구, 3)도원의 안쪽 입구, 4)도원, 4개의 경군들로 짜여져 있다.
현실세계는 야트막한 야산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도원과 관계되는 3개의 경군은 환상적인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고원, 평원, 심원 등 3원법(三遠法)이 자연스럽게 갖추어져 있다. 현실세계와 환상세계를 구분하되 4개의 경군이 통일적인 균형을 이루어 진 점은 역시 대가의 명작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일본, 한국의 수많은 산수화 중에서도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최고의 걸작임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고 한다.
그림의 오른쪽 끝에 안견의 낙관이 보인다. 다른 동양화 낙관이 왼쪽 하단에 있는 점과는 대조가 된다.
夢遊桃源圖 그림제호와 이 그림을 그린 경위를 쓴 題記에서 안평대군의 글씨체 감상을 할 수 있으며 아울러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남긴 찬시(讚詩)들이 그 자체 만으로 대단한 작품이다.
안평대군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
이 그림을 안견이 그리게 된 연유는 이렇다.
세종 29년(1447) 음력 4월 21일. 화원으로서는 도화원에서 출세할 수 있는 최고직인 종6품의 별제(別提)와 선화(善畵)가 전부였던 시기에 예술을 사랑했던 세종의 총애로 정 4품인 체아직호군 이라는 파격적인 직책을 수여 받은 안견은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안평대군 댁에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안평대군 사저인 수성 궁으로 달려갔습니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은 시, 서, 화, 음악 등 다방면의 훌륭한 재능을 가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왕자가 여덟명 있었는데 그 중 문종, 세조, 안평대군은 글씨를 잘 썼고 그림과 음악은 영응대군과 안평대군이 뛰어났다고 하니 부왕의 풍부한 예술적 기질을 온전히 타고난 왕자는 바로 셋째 왕자 안평대군 이였습니다.
이름은 용(瑢)이고 자는 청지, 호를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이라 했습니다.
예술을 사랑한 안평대군은 호탕한 성격과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며 예술적 재능이 있는 사람을 몹시도 아꼈던 당대 최고의 문객이자 풍류남아였습니다.
안평대군과 마주앉은 안견은 안평대군에게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꿈이 어떤 꿈 이야기인지는 몽유도원도 바로 뒤로 이어지는 <몽유도원기>에 잘 나와 있는데
몽유도원기는 그림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므로 인용을 하겠습니다.
몽유도원기는 계유정난이후 안평의 글씨는 거의 다 불태워졌는데 살아 남은 몇 안되는 안평대군의 글씨이다.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잠이 깊이 들어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박팽년과 더불어 한곳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의 멧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성대며 어디로 갈 바를 몰랐었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 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 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틔어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 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토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여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박팽년한테 이르기를, “바위에다 가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 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항, 신 숙주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 …중략… 그리하여 가도 안견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 본다면 반듯이 무어라 할 말이 있으리라. 꿈꾼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비해당 매죽헌에서 쓴다”
안평의 꿈 이야기는 도 연명의「도화원기」와 아주 친연성이 있는데 제문에서의 몽유도원이 바로 도화원기에서 중국 진 나라의 학정을 피해 사람들이 신선처럼 살았다는 이상향, 귀거래사의 표상인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의미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은 천천히 자신의 꿈 이야기를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안견에게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견에게 그 꿈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였습니다.
꿈을 그림으로 그리다니. 그것도 자신의 꿈이 아닌 다른 사람의 꿈을 그림으로 그려야 하니 아마 안견은 다소 난감했었을 것이나 머리를 조아리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그 후 3일만에 그림을 가져다 받치니
꿈을 꾼 날짜가 4월 20일 이었으니 4월 23일 몽유도원도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소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3일만에 완성했다는 부분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파격적이 구도, 엄청난 정성을 드린 붓 놀림, 세부 부분의 높은 완성도와 전체와의 통일성 등
조선 최고의 산수화 대작이 3일만에 완성 되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송처관등 당대 최고의 문신 참여하여 23편의 자필 찬시가 들어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에는 안견의 그림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1450년(세종 32) 정월에 쓴 시 한 수를 비롯해 20여 명의 당대 문사(文士)들과 1명의 고승(高僧)이 쓴 제찬을 포함해서 모두 23편의 찬문(讚文)이 곁들여져 있다.
안평대군과 더불어 찬문을 남긴 인물은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연(河演), 송처관(宋處寬), 김담(金淡), 고득종(高得宗), 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 김종서(金宗瑞), 이적(李迹),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만우(卍雨), 최수(崔脩)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詩文)은 현재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누어져 표구되어 있다. 첫 번째 두루마리에 박연의 시문까지, 두 번째 두루마리에 김종서의 찬시부터 최수의 찬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순서는 일본에서 다시 표구할 때 변형된 결과로 여겨진다.
일본에 널리 알려진 신숙주의 찬문이 맨 앞에 배치된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래는 고득종의 찬문이 제일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시문은 각 인물의 친필로 쓴 것이어서 그 내용의 문학적 특징은 물론 서풍(書風)까지 파악할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즉 「몽유도원도」의 그림과 거기에 곁들여진 시와 글씨가 함께 어우러져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세종대 문화예술의 성과가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 그림은 회화 양식상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개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상적인 예와 달리 왼편 하단부로부터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왼편의 자연스러운 현실세계와 오른편에 배치된 환상적인 도원(桃園)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것도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현실세계는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이루어져 있고, 도원의 세계는 기이한 형태의 암산(巖山)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그 차이가 현저하다.
무엇보다 큰 특색은 전체 경관이 몇 개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경군(景群)들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즉 여러 개의 산 무더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전경(全景)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와 그 영향을 받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산수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 두드러진 시각의 차이가 엿보인다. 즉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른편 대부분의 도원은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俯瞰法)을 적용하여 표현되었다. 이처럼 부감법을 사용함으로써 안견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공간이 넓은 도원의 경치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산들은 왼편에서부터 오른편으로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띠고 있어서 서서히 웅장감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이 밖에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은 전혀 그려져 있지 않아 중국에서 그려진 도원도(桃園圖)와는 차이를 드러낸다.
이상의 여러 가지 양식적인 특색은 바로 안견이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고, 그러한 특징들이 후대의 한국 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또한 붓을 잇대어 쓴 필법(筆法), 조광효과(照光效果)를 살린 표현, 그 밖의 세부에서 안견이 토대로 삼았던 북송대(北宋代) 이래의 이곽파 화풍(李郭派畵風 : 중국 북송대 이성과 곽희가 이룩한 산수화 양식), 특히 곽희 화풍(郭熙畵風)의 영향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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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반정 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사라졌는데 두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가장 확실한 주장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이 한국에 침략해서 빼앗아 갔다는 추측이다.
약탈과정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임진왜란때 제4진으로 조선에 출병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경기도 고양현 소재 사찰 대자암(大慈庵)에 있던 이 그림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번째 설은 개화기 초에 몰락한 양반 집에서 어떤 그림하나가 나왔는데 그것을 안 팔려고 했지만 너무 가난하여 우리나라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골동품 가격으로 팔려고 했지만 팔리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일본의 어느 수집가에게 팔았고, 이것이 바로 일본에 소장중인'몽유도원도' 라는 것이다.
두 가지 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는 없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게 빼앗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6년 후인 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니 역사상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그전부터 세조(수양대군)는 안평대군을 경쟁자로 여겼고 (일정부분 사실일 것이다) 정난(靖難) 후 바로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
몽유도원도는 세조의 정적 안평대군이 애지중지하고, 절재 김종서, 사육신 등이 모두 발문을 붙였으니 당시 상황에서는 자랑할 만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를 말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현동자 안견(玄洞子 安堅)은 당대 제일의 화원(畵員)이었다.
예술에 조예가 있는 안평대군은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안견은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정세가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신분 낮은 화원(畵員)으로서 금지옥엽(金枝玉葉) 대군(大君)을 감히 먼저 멀리 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안견은 안평대군이 귀중히 여기는 중국산 벼루를 훔치고, 일부러 들킨다.
대군이 안견에게 화를 내자 이에 조용히 물러난다.
그 덕인지 세조의 정난(靖難) 후에도 안견은 무사할 수가 있었다.
<윤휴(1617-1680)의 백호전서 중 일부>
백호 윤휴는 17세기 초/중반, 계유정난으로부터 200년 뒤 사람이다.
그 동안 이야기는 윤색되었겠으나 안평대군과 친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몽유도원도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가 그 이후 일본에서 나타났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1893년 일본 큐슈에 살던 도진구징(島津久徵)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것은 확실하다.
소장자 시마즈 히사시루시(도진구징島津久徵)는 가고시마 영주이자 임진왜란 때 출정한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의 경제가 흔들리던 시점인 1928년경 지방 토호들과 무사계급의 귀족들이 1887년 도쿄에 설립했던 주고(十五 )은행이 도산 위기에 몰리자 주주였던 시마즈 시게마로 남작은 도산위기에서 재산을 현금화 하기 위해 몽유도원도를 후지타 데이조란 사람에게 3천엔(약 2천만원)에 담보로 넘긴다. 그래서 그 후 파산을 겪게 되면서 500여점의 골동품과 서화가 경매에 넘어갔지만 몽유도원도는 그 중에 없었다. 후지타에게서 이를 매입한 사람이 소노다 사이지 사장이었다.
그후 도쿄의 유명 골동품상 류센도에 매물로 나왔던 몽유도원도는 1947년 초대 국립박물관장 김재원박사가 일본에 갔을 때 구입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로는 너무 거액인 수천 달러를 홋가 하는 바람에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인 정객이 구입을 권유했지만 이때는 가격이 더 폭등해서 모 재벌을 시켜 구입하려 했는데도 그가 사지 않았다는 등 일화도 무성하다.
몽유도원도의 1949년 일본의 재일교포 미술상이 한국에 들어와 당시 종로의 집값과 맞먹는 60만원이라는 가격으로 새 주인을 물색했는데, 워낙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아무도 나서지 않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고 전하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때 우리 골동품을 일본으로 수없이 반출했던 장석구라는 골동품상이 300만원에 팔려고 했던 내용이 와전된 듯하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오가다가 덴리대가 최종 구입을 하였다.
당시 누군가가 300만원을 쾌척해 이 그림을 샀다면 몽유도원도의 운명이 달라졌을 겁니다.
민족의 명품인 몽유도원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 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까지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에 건너가 있던 것은 확실하다.
몽유도원도에 대한 첫번째 논문은 1929년 나이토 코난이란 사람이 발표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는 여러 차례 이 그림을 조선에 돌려달라고 했으나 소장자로부터 번번이 거절 당했다.
만약 이때 우리나라에 왔으면 해방 이후 적산 처리 문제와 맞물려 우리 것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데 생각할수록 안타까움만 남는 경우다.
몽유도원도는 1949년 잠깐 한국으로 왔었는데 일제 시대 골동상으로 유명했던 장석구라는 사람이 판로를 찾아 가지고 왔었다. 당시 장석구는 몽유도원도 가격으로 3백만원을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거금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살 의사를 가진 사람도 없어 몽유도원도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덴리대학 소장품이 된다.
지금 일본 덴리대(天理大)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는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인가?
몽유도원도 소장과 관련하여 가장 이른 기록은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3년 11월에 발부된 몽유도원도 監査證감사증에는 소장자가 島津久徵(시마즈 히사시루지)로 되어 있고 “미술상의 참고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함”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확인되지만 1893년 이전의 流跡유적에 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후 시마즈의 아들인 島津繁雄(시마즈 시게오)는 몽유도원도를 가고시마에 사는 藤田禎三(후지다 사츠미)에게 3천 엔에 맡겼고 후지다는 1920년대 후반 오사카에서 전화 소독기를 제조 판매하는 浪花商會(료카 쇼카이)의 園田才治(소노다 사이지) 사장에게 팔았다. 소노다는 이를 京都에 있는 학자들에게 두루 보였고 內藤湖南(나이토 코난)이라는 학자가 몽유도원도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썼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1933년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었고,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朝鮮古蹟圖譜조선고적도보>에도 수록되었다. 이때의 소장가는 소노다 사이지였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도 몽유도원도를 조선에 돌려줄 것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고 한다.
1939년 몽유도원도는 소노다의 아들인 園田淳(소노다 슌)을 소장자로 하여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패전 후 궁핍해진 소노다 쥰은 1947년에 東京의 용천당에 팔았다. 용천당에서 구입할 때 그림은 扁額편액으로 되어 있었고 詩文은 별도의 두루마리로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용천당에서 구입한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는 곧 原(하라)라는 이에 의해 현재 상태로 裝潢장황(表具는 일본식 한자어)되었는데 그림을 모른 이가 장황을 하다보니 그림이 그려진 3년 후에 쓴 安平大君의 詩가 맨 앞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하라는 그림을 上下 두 개의 두루마리로 장황하였다.
1947년경 국립박물관장을 하시던 金載元김재원 선생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美術史家미술사가인 熊谷宣夫(구마가이 노부오)라는 이가 몽유도원도를 구할 수 있다고 했으나 그 당시 수천 달러에 이르는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1950년 初 지금의 소장처인 天理大學으로 들어갔는데, 1995년 11월 <미술저널>에 몽유도원도에 대해 중언했던 申基漢신기한 선생에 따르면 그 이전 1949년(일설에는 6.25 피난 시절)에 우리 미술품을 수없이 해외로 빼돌려 치부했던 친일파 張錫九장석구라는 탐욕스러운 자가 몽유도원도를 들고 부산에 났다고 한다.
장석구는 탐욕스런 눈을 굴리면서 말했다. “내게 우리나라 보배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한국인에게 처분할 수 없겠소?” “얼마나 받으려고 하시오?” “3백 만원은 받아야지요.
그 당시 3백 만원이면 상당히 큰 돈이다. 신기한 선생은 살 만한 분들과 국립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살 것을 권유했으나 그런 巨金을 당장 낼 사람도 드물었고 별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컬렉터인 金杰김걸 씨도 독일 대사였던 헬츠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았고, 崔南善최남선, 李光洙이광수, 張澤相장택상 등 諸氏제씨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몽유도원도는 끝내 故國에서 主人을 만나지 못하고 현해탄을 건너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고 통분한 일이지만 모두가 민족의 수난기에 벌어진 일이고 아직 미술에 대한 관심이 없을 때의 일이니 누구를 탓하랴.(<누가 문화재를 벙어리 기생이라 했는가 pp.67~72. 고재희 지음. 다른세상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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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었다.
6.25 때인 1952년 박물관 학예관 최순우 씨는 어느 골동품 상으로부터 80만엔에 몽유도원도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바로 문교부장관 백낙준 박사 (전 연대총장)에게 전했으나, 전쟁 중인데 어떻게 하느냐 고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 뒤 최순우 씨는 몽유도원도 이야기만 나오면 애통해 했다고 한다.
골동품상이 전한 내용이 실제던, 사기(詐欺)던 간에, 최순우 씨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만은 사실일 것이다.
1952년 80만엔 이면 얼마 정도의 가치였을까? 당시 한국 전쟁중이라 인플레이션이 있었으니 현재 가치를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1931년에 우리돈 100억원 시세이니 1952년에는 2배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았을까?
1931년 봄,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은 몽유도원도를 3만원에 사라는 권유를 받는다.
몽유도원도가 일본의 국보가 된 것은 1938년이니, 1931년엔 돈 내면 살 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기와집이 천원이었다니, 3만원이면 30채 값, 요즘 아파트 시세를 생각하면 100억이 넘는 가치다.
그런데 간송 정도 되는 분도 그 때는 몽유도원도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모양이다. 조선고적도보에 몽유도원도가 소개된 것은 1934년이다.
어쨌던 위창 오세창 선생 등으로부터 설명 듣고 간송은 사기로 결심하는데 문제는 당시 25세였던 간송이 부친 상중(喪中)이었다.
아무리 3만석지기 거부(巨富)를 물려 받았다고 하더라도, 상중에 조상의 재산을 처분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에 간송은 중개인에게 3달만 있으면 탈상(脫喪)이니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런데 1931년 4월 12일 중개인은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낸다.
세로 글씨에 한자가 많이 섞여 읽기 곤란할 테니 다음과 같이 풀어 본다.
일본 원전재치(圓田才治)씨 출품(出品) 안견화(安堅畵) 몽유도원도는 참 위대(偉大)한 걸작(傑作)입니다. 본화(卷畵)가 폭 3척 여 세화로 서명 가도(可度-안견)의 인(印)이 분명하고…
(그 다음 발문이야기는 위에서 인용하였다.)
이것은 조선에 있어서 무이(無二)한 국보입니다.
금번 명화전의 최고 호평입니다.
일본 문부성에서 국보로 내정되고 가격은 3만원 가량이랍니다.
내 전재산을 경주하여서라도 이것을 내손에 넣었으면 하고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자신의 몽견도원을 안견에세 사생시킨 것이라는데 나는 이것을 수십 차나 보면서 선생 저 단종애사를 재찬하는 감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만은 내손에 아니라 조선사람들 손에 넣었으면 합니다.
자기는 돈이 없어 못 사지만 누구던 조선 사람이 샀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나, 결국 간송은 이 그림을 사지 못하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
몽유도원도는 1933년 일본의 중요 미술품, 1939년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고 1950년대 초 일본 천리(天理)대가 사들인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의 덴리대 박물관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놓여 있는 몽유도원도는 복사본이다. 극중 몽유도원도와 비슷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그려진 상상 속의 그림 벽안도는 밀거래 가격이 400억원까지 얘기됐는데, 몽유도원도를 값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국립중앙박물관, 고미술협회나 고화 감정 전문가들 등 각계의 얘기를 물어봤는데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국보급 유물의 값을 매긴다는 게 부담스러운 일인데다, 언젠가 일본으로부터 다시 들여올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경우 고가로 책정할수록 되레 좋을 게 없는 만큼 더욱 더 말을 아낄 수 밖에 없는 현실인 듯 합니다.
참고로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학예사는 외국 전시회를 위해 빌려준 국보급 유물들의 보험 가격을 알려줬다. 국보 182호인 금동여래입상은 15억원, 국보 87, 88호였던 금관과 허리띠는 각각 100억원과 50억원, 국보 106호 계유명아미타불입상은 30억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300억원으로 보험금을 산정했던 적이 있다. 실제 거래가 보다 보험가는 더 비싸게 책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유홍준 씨가 9월 30일 조선일보에 쓴 글 중 다음 내용이 있다.
덴리대 도서관은 1980년대에 이 '몽유도원도'의 정밀한 복제본을 만들었다.
……10년 전 필자는 국제교류재단의 위촉으로 해외문화재를 조사할 때 덴리대 도서관 수장고에서 '몽유도원도'의 진본과 복제본을 한자리에서 배관(拜觀)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서관장이 두 점을 동시에 펴놓고 보여주는데 어느 것이 진품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귀신 같은 복제술이었다.
다만 시축(詩軸)에서 신숙주(申叔舟)의 시 중 제8행에 '요지로 가는 길(路走瑤池)'이라는 글귀를 보니 원본은 종이를 덧붙이고 땜질한 자국이 남아 있으나 복제본은 땜질을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몽유도원도는 1996년 호암미술관이 주최한 “위대한 문화 유산을 찾아서 - 조선전기 국보전” 에 선보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탄성과 탄식을 동시에 자아냈다. 작품에는 탄성을, 일본 소유라는 데는 탄식을 쏟아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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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벼루 도난사건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안평대군은 정난(靖難) 후 바로 역적으로 죽었지만, 안견만이 살아남은 데는 특별한 사연이 전하는데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안평대군이 안견의 재주를 귀하게 여겨 꾀를 냈다는 설과, 안견이 스스로 살기위해 꾀를 내어 안평대군의 벼루를 훔쳐 그와 의절했음을 수양대군에게 알리고 스스로를 구명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안견이 무계정사에 기거할 때의 일화이다. 대군이 중국에서 선물로 받은 귀한 벼루를 밤에 몰래 안견의 소매춤에 감춘다. 이튿날 아침 대군은 벼루가 사라졌다 하며 야단법석을 떨고, 만일 훔쳐간 놈이 나오면 낙향시키기로 했다.
벼루는 어김없이 안견의 뜻과 관계없이 그의 소매춤에서 나오고, 안견은 충청도 서산 지곡(池谷)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러나, 훗날 안평대군과 그 주변 사람들의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서곡이 이어지자 안견은 뒤늦게 안평대군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눈물을 쏟는다는 것이 첫 번째 설이다.
벼루와 관련된 소설에 나오는 대목을 참고로 읽어 보자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사립 문 밖이 시끄러웠다. 안견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방문을 밀쳤다. 음력 사월 스무날의 아침 해는 벌써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 가난한 환쟁이 집의 사립문은 밀치기만 하면 열린다. 호군이라는 말단 무관직 벼슬이 무슨 양반이라고 한껏 목소리를 높여 문 앞에서 마당쇠를 부르는 시늉을 했다. 마당에 들어선 안평대군댁의 행랑아범은 방문을 열고 바라보고 있는 안견에게 한달음에 다가가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 호군 어른, 나으리께서 급히 들르라는 분부를 받잡고 왔습니다.”
“이른 아침에 어인 일로,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글쎄요. 쇤네는 모르는 일입니다.”
알아도 아는 체는 하지 않는 것이 신분이 높은 사람을 모시는 자들의 몸에 벤 처신이다. 안견은 뻔히 알면서도 무심코 물어보았다. 어린 세자가 왕위를 이은 탓인지 세상 돌아가는 일이 심상치 않다. 혹시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얼른 행장을 갖추었다.
안평은 울적할 때면 곧잘 안견을 불렀다.. 세상사를 모두 잊은 사람처럼 그림을 펴놓고 다른 세상을 유람하듯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안평이 주로 말을 하였고 안견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간혹 세상인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묻기는 해도 속깊은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흥취가 도도해지만 얼핏 속마음을 내비치기는 하지만 안견은 못 들은 척 한다. 신분이 다른 사람 사이에는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평은 기분이 언짢을 때는 사랑방을 밤낮으로 드나드는 사람을 제쳐두고 환쟁이인 안견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평대군은 어느 날 안견더러 형제처럼 지내자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림을 아는 자로는 사대부 식자들도 한동자를 따를 자가 없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안견은 그 말을 곧이 고대로 믿지 않았다.
행랑아범은 이날 따라 사랑채가 아닌 안평대군의 침전으로 안내하였다. 침전으로 부른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머뭇머뭇 하면서 방문을 열였다. 안평은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호군께 오셨는가?” 안견은 넙죽 큰 절을 올렸다. “어인 일로 아침 일찍 저를 부르셨습니까?” “별일이 아니네, 내가 자네에게 줄 선물이 있다네.” “선물이라니요?”
“그건 그렇고. 현동자를 오늘처럼 이른 아침에 불러서 내 꿈을 그려달라고 하였을 때도 사월이었지?”
벌써 6년 전 일이다. 꿈을 꾼 날은 사월 스무날 이었다. 이른 아침에 안견을 불렀다. 혼곤하게 잠이 들었는데 문득 꽃이 만발한 도원을 거니는 꿈을 꾸었다면서 그 정경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였다. 그날은 기분이 무척 고조되어 있었다. 안평은 깊숙한 산골에 숨어 있는 도원에서 박팽년, 최항, 신숙주와 같이 산책을 하였다. 안평은 집현전 학사인 그들을 끔직히 좋아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한담을 즐기면서 도원을 거닌 일이 얼마나 즐거운가, 라고 했다. ‘도원을 한 바퀴 산책하고 나니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리고 나 혼자만이 남아 있지 않은가? 거 참.’ 하였다. ‘즐거움이 더하여 몰아의 경지에 빠지시니 그들의 행방을 모르시는 거지요.’라고 대꾸 했던 일이 생각났다. 안견은 안평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에 사람은 그려넣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 하더라도 자칫 속된 인간의 허물이 도원의 맑음을 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림을 다시 보니 현동자는 내 심정을 어찌 그리 뒤집어 보듯이 꿰뜷고 있었는지. 인간이란 조석지변이라더니. 그래서 이 그림을 나는 보물로 여긴다네.”
안견은 늘 그래 왔듯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안평대군이 갑자기 몇 년 전에 그려드린 몽유도원도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안견은 속으로 짐작되는 바가 있긴 하였다. 안평이 아무리 형제처럼 지내자고 하였지만 인간사란 흐르는 물과 같다. 환쟁이 주제에 함부로 속마음을 말할 수는 없다.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월아가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반갑게 인사하였다.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월아는 안견을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가까이서 따랐다. 찻상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차를 따랐다.
“아침에 술상을 내 오랄 수는 없고. 차나 한 잔 하세.”
“그럼요. 아침에 술이라니요.”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현동자를 부른 것은 선물을 하나 줄까 해서 이네. 갑자기 불러서 놀라지나 않았는가? 월아야. 저기 있는 보자기를 갖고 오렴.”
월아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윗목에 있는 보자기를 갖고 왔다. 보자기를 끄르자 안평대군이 가장 아끼던 단계연과 용계묵이 나왔다. 뚜껑에 무뉘로 새겨져 있는 용은 마치 살아있듯이 꿈틀거렸다. 마음속으로 저런 벼루에 먹을 갈아서 그림을 그려보았으면 싶었지만 안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벼루를 선물로 주겠다니 마음 속에 들어와 보기라도 하였다 말인가? 안견은 황송하여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귀한 것을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내가 아끼는 것이네만 옳은 주인은 그림을 잘 그리는 자네일세. 이 벼루로 좋은 그림을 많이 그려보게나. 하하.”
안평대군은 이제야 크게 웃었다.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어두운 그림자가 안평의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눌려서 안견도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웃음소리가 호탕하여 안견도 한결 마음을 놓았다. 월아도 찻상을 들고 물러났다.
“나으리, 교리 어른께서 문안 여쭙니다.”
행랑아범은 문밖에서 승문원 교리 이현노가 찾아왔다고 고했다. 안평은 주변의 사람을 아침부터 부르지 않았다. 안견은 의아하였다. ‘그렇다면 나만 부른 것이 아니고 이교리도 불렀다 말인가?’ 안견은 이현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식년 문과에 급제한 사대부와 겨우 도화서 화원화가인 자기와는 신분이 하늘과 땅 사이이다. 안평을 가까이 모신 탓에 자주 마주하긴 하였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 만날 때마다 안견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비굴하리만치 자신을 낮추어 인사를 올렸다. 이현노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알은 체 하지 않기 일수였다.
“나으리, 저는 그만 일어서겠습니다.”
“그러게나”
안견은 안평이 내린 단계연을 주섬주섬 챙겨서 옆구리에 끼고 일어섰다. 이현노에게도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현노는 힐끗 거들떠보고는 답례도 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댓돌에 내려서서 신발을 신기가 무섭게 안평대군이 방문을 드르륵 열렸다.
“저놈을 붙잡아서 몸을 뒤져라.”
노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안견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축담 아래 마당으로 끌고 가서 꿇어 앉혔다. 영문을 몰라 하는 안견에게 와서 옆구리에 끼고 있던 보자기를 뺏어서 풀었다.
“대감 마님, 이 자가가 나으리의 벼루를 갖고 있습니다.” “고이연 놈이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내 벼루를 훔쳐.” 안평대군의 목소리가 추상같았다. “나으리, 나으리께서 ” “허어, 이놈 봐라.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입술을 달싹거리느냐.”
안견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안평대군의 목소리는 칼날같이 싸늘했다. 조금 전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예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주인이 얼마나 아끼는 물건인지를 잘 아는 노복들은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로 안견의 목덜미를 거칠게 눌렀다. 노복들은 천한 환쟁이에게 주인이 따스하게 대해주었던 일을 잘 알았다. 천한 것들은 은덕을 베풀어도 돌아서기를 밥 먹듯이 하는 배은망덕한 족속으로 믿는 눈치였다. 안평이 누구인가. 노복들은 이 나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권력의 실세가 아닌가. 감히 벼루를 훔칠 생각을 하다니. 숨통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는 글렀다고 생각하였다.
“이 놈을 당장 치도곤이를 하여 목숨을 끊어도 시원찮을 놈이지만 내가 수족처럼 여긴 인연이 있으니 목숨만은 살려주고, 곤장으로 다스려라. 앞으로 내 집 앞에는 얼씬거리지도 못 하게 하라.”
안평은 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무언가 변명을 하여야 할 텐데 숨이 막히도록 목줄기를 짓누르는 노복의 손길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도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가슴이 터질 듯하였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노복은 바쁘게 움직이며 형틀에 엎어 놓고 곤장을 쳤다. 행랑아범은 저 멀리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기만 했다. 곤장을 치는 일이 끝나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안견은 까무라쳐서 축 늘어져 있었다.
“호장 어른, 제가 부축해 드릴테니 집으로 돌아가셔서 조리를 하세요.”
누가 몸을 흔들어서 정신을 추수려보니 형틀에 늘어져 있는 자신의 옆에서 행랑아범이 허리를 구부리고 내려다보았다. 안견은 행랑아범의 부축을 받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행랑아범에게 엎히다시피 하여 대문 밖으로 나왔다.
“집까지 부축해 드릴까요?”
“괜찮네. 혼자 가겠네. 자네는 믿지. 나 정말 훔치지 않았어.”
행랑아범은 대꾸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였으나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대문 바깥까지 따라 나와 불안한 듯이 바라보면서 한 마디를 힘주어서 말했다.
“앞으로는 이 집 앞에서 얼씬거리지 말라고 대감께서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절대로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대감님께서 연을 끊으신 것입니다. 벼루와 묵은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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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찬양 7언장편시(夢遊桃源圖讚揚七言長篇時)
제주고씨 영곡공파 종문회 발행(1970년대) # 일본 덴리대도서관 소장 영인본
일본 덴리대도서관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 찬양 7언장편시"입니다.
이 시는 제주고씨 영곡공 고득종 선생이 조선시대에 지은 시이며
일본 덴리대도서관(天理大 圖書館)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시집입니다.
이 책은 제주고씨 영곡공파종문회가 1970년대 발행한 책분량 18쪽의 일부 영인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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