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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유명조선국에 대한 소고

by 연송 김환수 2018. 4. 5.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에 대한 소고(小考)

 

우리나라 전역에 존재하는 비석의 비문(碑文)에는 선대와 주인공의 행적(생애와 업적), 후손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인 경우에는 벼슬을 지낸 관직이 새겨져 있다.


금석문(金石文)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비문(碑文), 묘지(墓誌), 불상 명문, 종명(鐘銘), 도검명(刀劍銘), 목간(木簡), 토기 명문, 와전명(瓦塼銘), 등에 금문(金文)이나 비석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기타 금석문에는 서석(書石)처럼 암벽에 글자를 새기거나 성벽을 쌓은 성돌 등에 새긴 석각(石刻), 석탑의 탑신부에 각자(刻字)한 석탑기, 금속판이나 석판에 탑 조성에 관한 사항을 적어 탑 안에 넣은 탑지(塔誌), 각종 인장의 인문(印文), 동경(銅鏡)의 명문, 벼루 등 각종 용구에 적힌 묵서 혹은 각자명, 사리함, 청동합 등 각종 금속 제품에 새긴 금문, 낙랑 유물로서 문서 봉함(封緘)에 사용된 봉니(封泥)의 명문, 칠기의 묵서명 등이 있다.

 

비문(碑文)은 돌을 다듬어서 세운 비석에 새긴 문장으로, 기록된 정보량이 많고 남아 있는 숫자도 비교적 많아 금석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비석은 비(碑)와 갈(碣)로 나누기도 하는데, 비는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 다듬은 것으로 5품 이상 고위 관료만이 세울 수 있었다. 갈은 자연석의 한쪽 면만을 다듬어서 둥글게 만들었으며 6품 이하가 쓰는 비석이다.


비석의 인물이 신라 시대이면 직함의 서두에 '유당신라국(有唐新羅國)', 고려 시대이면 '유송고려국 (有宋高麗國)', '유원고려국(有元高麗國)' 조선시대 사람인 경우에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17세기 이후에는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표기는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의 신도비(神道碑)나 묘갈(墓碣)인 경우에 많은데, 이 '유당(有唐)', '유명(有明)' 등의 풀이(해석)에 여러 견해가 있다.


17세기 이후 조선시대에 제작된 묘비에는 당사자의 관직과 성명 앞에  ‘유명조선(有明朝鮮)’이란 말이 관용구처럼 따라붙어 있는데 대부분 유명조선으로 시작하고, 어떤 경우에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으로 새긴 경우도 있다.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광명(光明)한 조선’으로 풀이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명(明)나라와 관련지어 설명을 하고 있다.

 

“명나라에 있는 조선, 곧 명나라의 속국”으로 또는 “명나라가 있으므로 조선이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비석의 유명조선이 위와 같다면 명나라와의 관련설로 이해할 수 있고,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약소국의 비애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공을 바치는 약소국이었다고 해도, 명나라에서 죽은사람의 비석에까지 국호를 밝히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명나라는 1644년에 멸망했고 17세기 중반에는 사라진 나라인데 그 이후에도 계속 유명조선을 사용 하였다.


조선 전기에 유명조선국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유명조선 즉 조선이 명의 속국이라고 밝힌 이유는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1637년의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게 굴욕적인 패전을 당했고, 조선의 인조 임금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전에 나가 이마에 피가 흐를 때까지 땅에 조아리는 개국 이래 최악의 수치를 당해야 했다. 


패전으로 청의 신하국이 되었지만 조선의 유학자들로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는 오랑캐 나라 청의 신하가 아니라 명의 신하다." 라는 자존심의 표현으로 비석 앞에 유명(有明)을 붙였다는 설이 설득력을 갖게 한다.

 

또다른 견해는 유명(有明)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 한다.

“오랑캐(淸)가 중국 천하를 차지한 후 중국의 문명은 명나라를 이어 받은 조선으로 옮겨 왔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반청 사상을 숭명사상(崇明思想)으로 발산하였으며, 그런 그들로서는 부모의 나라(명-明)를 저버리고 야만적인 오랑캐(청-淸)를 섬긴다는 것은 패륜(悖倫)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유명조선을 '명나라에 속한 조선국'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명나라의 조선국'이라고도 한다. 또 혹자는 '명나라 시대의 조선국'이라고도 하는데, 과연 어떤 해석이 적절한 것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자 '유(有)' 자(字)의 뜻에 착안하여 '명나라의 속국(屬國)인 조선'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명나라에 있는 조선국'이라는 해석으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국사편찬위(國史編纂委)의 문답 게시판 답변은 '유(有)는 위대하다, 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대명(大明)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명나라를 높이고자 한 표현이지, 조선이 명의 속국임을 부각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전문 서적이나 고문헌 국역본에서는 그와 같은 식으로 '유명(有明)'이나 '유당(有唐)'을 한글로 풀어서 쓴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렇게 풀이할 필요성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그런 식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때문인지 궁금하다.


유당신라국(有唐新羅國), 유송고려국(有宋高麗國), 유원고려국(有元高麗國),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새겨져 있는 비석의 비문 사례를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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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 통일신라 893년(진성여왕7년) / 1714년(숙종 40년) 중건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


실상사수철화상탑비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의 실상사에 있다. 탑비의 전체높이는 2.9m이고, 비신의 높이 1.67m, 너비 1.12m이다. 보물 34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신라 말기에 세운 탑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 1714년(숙종 40)에 탁본을 가지고 다시 새긴 것만 남아 있다. 비문의 주인공 수철화상은 실상사의 제2조로 알려졌다. 그는 815년(헌덕왕 7)에 태어나 829년에 출가하였고, 836년(희강왕 1)에 실상사(實相寺)의 승려 홍척(洪陟)에게서 수학하였다. 경주의 팔각당에서 교종과 선종의 차이점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893년(진성여왕 7)에 입적하였다. 아마도 탑비는 그 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楞伽寶月塔記」

有唐新羅國良州深源寺故國師秀澈和尙楞伽寶月靈塔碑銘幷序」

    入朝奉賀▨駕遷幸東都使檢校右衛將軍司宮臺」

    ▨▨▨院使等朝請郞▨▨▨▨同正員▨」

    門下弟子比丘飮光」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양주(良州) 심원사(深源寺)의 고(故) 국사(國師) 수철화상(秀澈和尙)의 능가보월령탑(楞伽寶月靈塔) 비명(碑銘)과 서(序)

 

당(唐)에 입조(入朝)하여 봉하(奉賀)하고 왕을 따라 동도(東都)에 갔던 검교우위장군(檢校右衛將軍)이며 사궁대(司宮臺)의……인 <신(臣) ……가 지음>

……원사(院使)이며 조청랑(朝請郞)……인 동정원(同正員) <신(臣)……가 씀>

문하 제자인 비구 음광(飮光)<이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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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비(崇福寺碑)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숭복사비는 896년(진성여왕 10)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이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숭복사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황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다.


판독문

有唐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銘并序

臣聞王者之基祖德而峻孫謀也政以仁爲本禮以孝爲先仁以推濟衆之誠孝以擧尊親之典莫不體無偏於夏範遵不匱於周詩聿修芟秕稗之譏克祀潔蘋蘩之薦俾慧渥均濡於庶彙德馨高達於穹旻然勞心而扇暍泣辜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竭力而配天享帝豈若奉尊靈於常樂---- 이후 생략

해석문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초월산(初月山) 대숭복사(大崇福寺)의 비명(碑銘) 및 서(序)

신이 듣건대 “왕자가 조종(祖宗)의 덕을 기본으로 하여 후손을 위한 계책을 준엄히 할 때, 정치는 인(仁)으로써 근본을 삼고 예교(禮敎)는 효(孝)로써 으뜸을 삼는다” 하오니, 인으로써 대중을 구제하려는 정성을 드러내고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모범을 드높여 홍범(洪範)에서 ‘치우침이 없는 것’을 본받지 않음이 없고 시경(詩經)에서 ‘효자가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따르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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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비(玄化寺碑) 고려 1021년(현종12년)

 

유송고려국 (有宋高麗國)


현화사비(玄化寺碑)


현종(顯宗)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현화사(玄化寺)의 개창을 기념하여 지은 비문. 현종의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인데 경종(景宗)의 왕비로서 경종의 사후 궁궐밖에 나와 있던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안종은 사주(泗州,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에 걸려 죽었고 헌정왕후 역시 병으로 일찍 죽었다. 이와 같이 부모를 불행하게 잃은 현종은 후일 왕위에 오른 후 부모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들을 취하였고, 부모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현화사를 창건하였다.


이 비는 현화사 창건 직후인 1021년(현종 12)에 세운 것으로 중국으로부터 귀화해 온 문인 주저(周佇)가 짓고, 채충순(蔡忠順)이 글씨를 썼다. 현종의 부모의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와 현화사 개창의 구체적 내용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안종의 유배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적지 않고 거란의 침입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뒷면의 음기는 1022년(현종 13)에 채충순(蔡忠順 : ? ~1036)이 지은 것으로서 현화사 창건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신이한 일들과 현화사 창건 이후 여러 신하들이 국왕의 명으로 사찰의 건물과 국왕의 부모들을 위하여 지은 글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비는 현재 황해북도 개성시 월고리의 현화사 터에 남아 있으며,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판독문

靈鷲山大慈恩玄化寺之碑銘(御書篆額)[題額]」

有宋高麗國靈鷲山新創大慈恩玄化寺碑銘幷序」

       崇文輔德功臣翰林學士承 旨金紫興祿大夫左散騎常侍知制誥

       修史館事上柱國汝南縣開國子食邑五百戶臣周佇奉 宣撰」

       推忠盡節衛社功臣興祿大夫兼吏部尙書叅知政事上柱國濟陽縣

       開國子食邑五百戶臣蔡忠順奉 宣書」

臣聞有天地已來爲君聖明者唯唐堯與舜以其堯至仁而理天下舜大孝而化域中故能炳煥古今光輝史籍其後或 中夏主洎諸侯王凡有位之君孰不思」---- 이후 생략

해석문

영취산대자은현화사지비명 <왕이 제액을 쓰다> [제액(題額)]

유송 고려국 영취산 신창대자은현화사비 병서 (송의 고려국 영취산에 대자은현화사를 새로 지은 것을 기념하는 비명과 서문)

숭문보덕공신 한림학사승지 금자흥록대부 좌산기상시 지제고 수사관사 상주국 여남현개국자 식읍오백호(崇文輔德功臣 翰林學士承旨 金紫興祿大夫 左散騎常侍 知制誥 修史館事 上柱國 汝南縣開國子 食邑五百戶)인 신(臣) 주저(周佇)가 왕명[宣]을 받들어 짓다.

추충진절위사공신 흥록대부 겸리부상서 참지정사 상주국 제양현개국자 식읍오백호(推忠盡節衛社功臣 興祿大夫 兼吏部尙書 參知政事 上柱國 濟陽縣開國子 食邑五百戶)인 신(臣) 채충순(蔡忠順)이 왕명[宣]을 받들어 쓰다.

신은 천지가 생겨난 이래 성명(聖明)하신 임금으로는 오직 요임금[唐堯]과 순임금[虞舜]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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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묘지명(李兆年墓誌銘)


유원고려국(有元高麗國)

묘지명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권7과 『동문선(東文選)』권124에 실려 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에 이제현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자는 원로(元老)이다. 경산부(京山府 : 경북 성주) 용산리(龍山里) 사람이다. 증조는 돈문(敦文), 조부는 득희(得禧), 아버지는 장경(長庚)으로 모두 경산부의 향리였다.

묘지명에 따르면 이조년은 충선왕·충숙왕·충혜왕 때 벼슬을 하였다.


판독문

有元高麗國誠勤翊賛勁節功臣重大匡星山君贈諡文烈公李公墓誌銘 (李齊賢) 

墓之有誌古也世代旣遠或有崩隳見其誌知其爲誰所固有不忍不掩焉者士君子葬其親所不可後者也星山君李公卒逾年余始爲之譔銘盖有由焉曹頔之變

해석문

유원고려국 성근익찬경절공신 중대광 성산군 증시문열공 이공묘지명(有元高麗國 誠勤翊贊勁節功臣 重大匡 星山君 贈諡文烈公 李公墓誌銘) 

무덤에 지석(誌石)이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세대가 멀어지면 혹 무덤이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지석을 보면 그것이 누구를 위하여 간직해 둔 것인 줄을 알게 되어, 진실로 차마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사군자(士君子)가 그 어버이를 장사할 적에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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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묘비(李迥墓碑)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

   이형묘비(李迥墓碑)


이 비는 1696년에 건립된 이형묘비(李迥墓碑)로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 따르면 이형(李迥)의 자는 여근(汝近)으로 세종대왕의 9대손으로 종친이다. 약관의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경성판관, 금산군수 등을 지냈으며,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이형의 관력과 가계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판독문

李迥墓碑

贈大司憲李公墓碑銘(篆題)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司……成均館事行通訓大夫……

▨▨大匡輔國崇祿大夫……中樞府事兼領……宋時烈 撰

孫…… 謹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金壽▨ 篆

해석문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사(~ 마멸 ~) 성균관사행통훈대부(~ 마멸 ~)

▨▨대광보국숭록대부 (~ 마멸 ~)중추부사 겸영(~마멸~) 송시열 찬(~ 마멸 ~) 근서

대공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연경연홍문관(~마멸~) 김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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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신도비(趙光祖神道碑)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

    

 조광조신도비(趙光祖神道碑)

 

조광조(1482∼1519년)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이다.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황(李滉)과 함께 동방4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9년(중종 14년) 정국공신(靖國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하게 청하다가 훈구파인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비문의 찬자인 노수신(盧守愼)은 선조 때의 명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호는 소재(蘇齋)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퇴계(退溪) 이황과 토론하였다. 양명학을 공부하여 주자학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휴정대사(休靜大師)와도 친교가 있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有明朝鮮國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兼同知經筵成均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文正公 靜庵趙先生神道碑命 幷序)

노수신(盧守慎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동지경연성균관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문정공 정암조선생신도비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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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군 김정경 신도비 (蓮城君 金定卿 神道碑)


유명조선 (有明朝鮮)

연성군 김정경 신도비



김정경신도비


有明朝鮮佐命功臣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神道碑銘

推忠奮義翊戴同德佐命功臣崇政大夫行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

神道碑銘并序

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 經筵日講官 申錫愚 撰

綏祿大夫永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洪顯周 書并篆」----- 이후 생략

 

유명조선 좌명공신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

추충분의 익대동덕 좌명공신 숭정대부 행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병서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신석우가 글을 짓고,

수록대부 영명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홍현주가 글씨와 함께 전액을 쓰다. ----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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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有明)의 '유(有)'가 발어사(發語辭)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 자는 명사 앞에 붙는 접두사의 하나로, 옛날에는 여러 단어에 사용되었으나 점차 유주(有周), 유당(有唐), 유송(有宋), 유명(有明)과 같이 국명(國名) 앞에만 붙는 발어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발어사는 문장을 시작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조사의 하나로, 아무런 뜻이 없다.

 

그냥 '명조선국(明朝鮮國)'이라고 하면 '밝게 빛나는 조선국'인지 '명나라 조선국'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명(明)'이 '명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유명(有明)'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바로 앞 문단에서 언급된 것처럼, 유당(有唐), 유명(有明) 등은 국명을 나타내는 일상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특별히 명나라를 높이거나 조선을 폄훼한 표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명(有明)'은 그냥 '명나라'로 풀이하는 것이 타당하고, '유명조선국'은 '명나라 시대의 조선국(明代朝鮮國)' 정도로 풀이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굳이 '명나라에 속한'이나 '명나라에 있는' 등과 같이 적극적으로 사대주의적 의미를 내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조선국(朝鮮國)' 또는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썼으면 되었을 것을 하필 '유명조선국'으로 하였으니, 이것 또한 사대주의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기는 하다.


황명조선국(皇明朝鮮國),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 등의 표현이 금석문(金石文)에 종종 보이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 유명조선국이라고 적었고, 보편화 되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儒學)의 논리에 따르면 천하(天下)에 황제국(皇帝國)은 단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후국(諸侯國)이다. 따라서 신라나 조선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 않는 이상, 당시에 국명과 직함을 자세히 기술함에 있어서 황제국의 국명을 제후국 앞에 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가 최선(最善)의 정치 체제이고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적어도 동양의 군주제 질서 아래에 성리학(性理學)이 통치 이념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 '유청조선국(有淸朝鮮國)'이라고 하지 않고 '유명(有明)'을 계속 썼던 것은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숭명의리(崇明義理)에 입각한 것이든,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발로이든,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유명조선국'으로 표기한 것을 두고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여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명승지나, 전적지에 가보면, 신도비명이 눈에 쉽게 보이는데 맨 첫줄에 '有明朝鮮國'부터 보인다. 이 해석을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이라고 하는데 다시한번 접근해 본다.

 

'有明'이 명나라 이름인가? 이 낱말에서 '나라 國'자는 없는데 '有明朝鮮國'을 설명하기 전에 비슷한 다른 글자인 '有明贈諡 (유명증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증시는 죽은 뒤에 내린 시호로 내려주는 사람이 임금이나, 황제인데 그러면 '有明'은 무엇인가?

 

이것은 『효종실록』 권4 효종 1년(1650 順治 7) 5월 3일(을묘). 에 나오는 글인데, '모모 조정[某朝]'이다. 중앙조정의 이름을 써 넣는다는 말이다. 

이 '有明'이 나라가 아니고 중앙조정의 명칭이라면, 신하가 죽어서 시호를 내리는 사람은 황제인 것이다.

 

묘지석에도, 제사지내는 신주에도 지방을 쓸 때에도 쓰는 말은 원칙이 '有明朝鮮國'이 아니라 '有明贈諡'이다.

    

조선왕조 때 국왕이 승하하면 그 신위(神位)를 종묘(宗廟)에 모시는데, 위판(位版)에 명나라에서 준 시호(諡號)를 적을 때 그 시호 앞에 '유명증시(有明贈諡)'라는 글자를 썼다. '유명조선국'을 '명나라에 있는'으로 풀이한다면 '유명증시'를 풀이할 길이 없다. '유명증시'의 뜻이 '명나라가 준 시호'이니, '유명(有明)'을 역시 '명나라'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겠다. 


조선 태조 건원릉(健元陵)의 묘비명은 유명시강헌조선국태조(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이다.

  유명시(有明諡) = 유명증시(有明贈諡)

태조건원릉신도비(太祖建元陵神道碑)


판독문

楊州 朝鮮太祖健元陵神道碑

太祖健元陵碑(題額)

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健元陵神道碑銘 幷序

      推忠翊戴佐命功臣崇政大夫吉昌君集賢殿大提學兼判內贍寺事知經筵春秋館事世子

      貳師臣權近奉 敎撰

      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

      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昌寧府院君臣成石璘奉 敎書

      資憲大夫知議政府事集賢殿提學知經筵春秋館事臣鄭矩奉 敎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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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 (篆題)

 

유명 시호 강헌 조선국 태조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건원릉 신도비명(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健元陵神道碑銘) 아울러 서문도 있음(幷序)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길창군 집현전대제학 겸 판내섬사사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推忠翊戴佐命功臣崇政大夫吉昌君集賢殿大提學兼判內贍寺事知經筵春秋館事世子貳師) 신(臣) 권근(權近)이 왕명을 받들어 찬하다.

수충동덕익대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수문전 대제학 영경연사 감춘추관사(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修文殿大提學領經筵事監春秋館事) 세자부 창녕부원군(世子傅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이 교서(敎書)를 받들다.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집현전제학 지경연춘추관사(資憲大夫知議政府事集賢殿提學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정구(鄭矩)가 교서를 받들어 전(篆)을 쓰다. ------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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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성주사 낭혜화상 탑비’. 최치원은 이 글에서 ‘신라가 당나라 덕분에 미개한 나라에서 문명국이 됐다’는 식으로 적었다. 최치원에게서도 보이듯, 중국 사대는 안타깝지만 한국사를 관통한다.


박물관 등에 있는 옛 비문을 유심히 보면 첫 문장이 ‘유당 신라국’(有唐 新羅國), ‘대송 고려국’(大宋 高麗國), ‘대원 고려국’(大元 高麗國), ‘유명 조선국’(有明 朝鮮國)으로 시작되는 예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번역문을 보면 하나같이 ‘유당 신라국’ ‘대송 고려국’ 식으로 발음만을 적었다.


모든 단어에는 뜻이 있는 법이다. 왜 이 단어들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문맥을 전체적으로 보면 ‘당나라(혹은 송나라나 원나라, 명나라)의 영향 아래 있는’ 혹은 ‘당나라의 번국(신하의 나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한국 최고의 고고학적 발굴로 평가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석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무령왕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고 소개했다.


백제왕 앞에 ‘영동대장군’이라는 칭호가 붙은 이유는 무령왕이 중국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이 관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 백제 조정은 백제왕이라는 칭호보다 중국 대륙의 ‘반쪽짜리 왕조’로부터 받은 직함을 ‘자랑스레’ 앞에 적어놓았다.


무령왕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다른 왕들도 중국 왕조에 글을 보낼 때는 예외 없이 자신을 ‘신하’라고 밝혔다.


‘백제왕’이라는 칭호 앞에 중국의 반쪽짜리 남조 양나라 왕조에서 보낸 관작을 ‘자랑스레’ 먼저 적은 무령왕릉 묘지석. 지금 생각하면 수치스러울 수도 있지만 당시의 현실이었다.

 

물론 이를 놓고 중국 역사학계처럼 ‘한반도 국가는 대대로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식은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유명’ 등을 발음으로만 번역하거나, 한반도의 왕들이 중국 왕조에 자신을 신하라고 불렀음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유명조선이란 해석을 다양하게 해볼 수는 있겠지만, 최종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다만,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수 없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상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에 대한 소고(小考)를 마칩니다.

참고로 소고(小考)란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아니하고 단편적인 고찰을 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낮추는 말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