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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연지유압도(蓮池遊鴨圖) - 심사정, 김홍도

by 연송 김환수 2016. 11. 15.

심사정 선생이 그린 영모화(새와 동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 연지유압도(蓮池遊鴨圖)입니다.

 

   연지유압도(蓮池遊鴨圖) / 심사정 한국화

   견본담채 142.3 x 72.5 cm / 호암미술관 소장

 

이 그림에서 오리는 장원급제를 바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연지유압도(蓮池柳鴨圖)” 한자를 풀어보면 오리 ()” 를 나눠보면 ()”()”가 되는데 은 으뜸 곧 장원급제를 뜻하고 오리가 두 마리면 二甲으로서 곧 향시(鄕試)와 전시(殿試)에서 모두 장원급제하라는 뜻이 된다

 

연지(蓮池)는 연못으로 연밥을 뜻하는 연과(蓮顆)”는 잇달아 합격한다는 연과(連科)”와 발음이 같다.

 

작품의 메인을 차지하고 있는 연꽃의 뜻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연꽃은 수많은 한국화에서 진흙탕 속에서 고매하게 피어있는 꽃으로 선비의 절개와 결백함, 순수성을 상징하는 오브제이다.

*** 오브제(objet) : <미술>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작품에 쓴 일상생활 용품이나 자연물

그러면 이 그림에서 한자를 살펴보면 연꽃의 연()과 연속할 연()은 발음이 같은 점을 이용하여 두 과거 모두 연속하여 급제하란 뜻을 숨겨둔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청렴함과 결백한 지식인으로서 정치, 명예를 원하는 세속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기란 스스로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급제를 통해 정계로 진출하고 싶은 세속적 욕망을 담은 그림이 연지유압도(蓮池柳鴨圖) 이.

 

조선시대 동양화는 이런 동음이어의 기법을 많이 활용하여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성이 있는데, 연못에 오리가 두 마리면 연과이갑(連科二甲)" 곧 잇달아 두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라는 뜻으로 이 그림은 과거를 보는 선비에게 주어진 그림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화는 마치 중국이 뜻 글자를 쓰듯, 그림에 나타난 소재는 모두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특징은 서양화도 마찬가지이다.


 

심사정 (沈師正)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鄭敾)의 문하에서 그림을 공부하였고 뒤에 중국 남화(南畵)와 북화(北畵)를 자습, 새로운 화풍을 이루고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화훼(花卉초충(草蟲)을 비롯, 영모(翎毛)와 산수(山水)에도 뛰어났다.

 

출생-사망 : 1707 ~ 1769

본관 : 청송(靑松)

: 이숙

: 현재(玄齋)

활동분야 : 미술

 

주요작품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1707(숙종 33)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청송(靑松), 자 이숙(頤叔), 호 현재(玄齋)이다. 조선후기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과 더불어 3재로 일컬어진다. 심사정의 증조부 만사(晩沙) 심지원(沈之源)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명문 가문이었으나 심사정의 조부 심익창(沈益昌)이 과거 시험 부정사건으로 귀양을 갔으며, 이후 해배되어 돌아왔으나 연잉군(이후 영조)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대역죄인의 집안으로 전락하였다.


이런 집안의 내력 때문에 심사정의 일생은 불우하게 보냈으며 당대 최고의 화가였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1748(영조 24) 숙종의 어진 보수를 위해 어진모사(御眞模寫) 중수도감(重修都監)이 설치되면서 첫 관직인 감동관(監董官)에 임명되었으나 한달 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어려서는 정선의 문하에서 그림을 공부하였고 이후, 스스로 깨쳐 중국의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畫)를 완벽하게 토착화시켜 새로운 문인화풍을 확립하였다. 그림은 화훼(花卉), 초충(草蟲)을 비롯 영모(翎毛)와 산수에도 뛰어났다.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산수화 150 여점을 비롯 총 300 여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 작품에는 딱따구리(1763) ,촉잔도(蜀棧圖)(1768), 경구팔경도첩(京口八景圖帖)(1768),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1747)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1766), 와룡암소집도(臥龍菴小集圖)(1744), 연지쌍압도(蓮池雙鴨圖)(1760),황취박토도(荒鷲博兎圖)(1760), 노안도(蘆雁圖)(1763), 파초와 잠자리, 하마선인도(蝦蟆仙人圖), 선유도(船遊圖)(1764),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모란도(牧丹圖), 맹호도(猛虎圖), 산시청람도(山市晴嵐圖), 화수초충도(花樹草蟲圖), 추포도(秋圃圖), 운룡도(雲龍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등이 있다.

 

 

금실 좋은 오리가 장원급제 도와 준다.


오리는 선비화가나 화원 화가들이 그린 감상용 그림 외에도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오리는 암컷과 수컷의 사이가 좋아 부부간의 금실을 기원하는 그림을 선물하려고 할 때 언제나 그림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다.

 

오리가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의 장대 끝에 모셔지게 된 것은 물을 부를 수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오리는 복을 불러오는 상서로운 길조(吉鳥).

 

하지만,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새라서 그다지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오리는 부부 금실과 물이 필요한 곳에서만 불러 주는 새는 아니고,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매력적인 새다. 오리 압()자를 파자(破字)하면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등 혹은 A학점을 의미한다. 그러니 과거에 장원급제하는 새를 상징한다. 오리가 두 마리 있으면 이갑(二甲), 즉 향시(鄕試)와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함을 의미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 방에 오리 그림이 여러 점 붙어있다 한들 전혀 뜬금없는 짓이 아니다. 합격에 대한 강렬한 소원을 드러낸 것이다.


연꽃에 오리 두 마리가 그려지는 그림은 연꽃의 연밥을 뜻하는 연과(蓮顆)는 잇달아 합격함을 의미하는 연과(連科)와 발음이 같으므로 연꽃에 오리 두 마리를 합하면 연과이갑(連科二甲)’, 즉 연속해서 두 군데 시험에 장원을 하라는 뜻이 된다.

 

과거시험에서 장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벼슬하고자 하는 바람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이런 식의 그림이 무수히 많이 그려졌을까 하는 측은한 생각도 있다.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수험생 부모가 학교 대문에 엿을 붙이고 빌고 있는 모습도 근원을 추적하다 보면 이런 오랜 역사와 전통의 맥락 속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와 심사정이 그린 연지유압(蓮池遊鴨)그림은 전형적인 선비의 출세그림이다.

김홍도의 그림의 크기는 책 크기 정도의 작은 그림으로 선비들이 책 속에 숨겨두고 몰래 보면서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심사정의 그림은 제법 큰 그림으로 고급스런 비단에 담채방식으로 색을 칠했는데 족자로 만들어 선비의 사랑방에 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그림을 해석하려면 한자를 알아야 하는데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그림의 내용을 해석할 수 없고 단순히 연꽃과 오리를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여길 뿐이다.


오리를 한자로 쓰면 압()이 되고, ()이란 한자는 갑()과 조()의 결합이다.

()은 으뜸이란 뜻으로 장원급제를 뜻하고, 두 마리의 오리는 이갑(二甲), 즉 향시(鄕試)와 전시(殿試)에서 모두 장원급제를 하라는 의미이다.

또한 못에 핀 연꽃에는 당연히 연과(蓮果)가 있는데 연과는 연과(連科)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연달아 과거시험에 합격하다.’는 뜻을 숨기고 있다.

 

선비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차마 이런 그림을 직접 구입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과거시험을 앞둔 선비의 아버지나 친척들이 구입해 선물했을 것이다.

 

연꽃과 학을 그린 그림, 소나무, , 학을 함께 그린 송학도(松鶴圖), 연꽃과 게를 그린 그림, 여러 마리의 사슴을 그린 백록도(白鹿圖), 쏘가리를 그린 그림, 잉어그림, 닭과 맨드라미를 그린 그림 따위는 모두 출세그림에 속한다.

 

출세의 목적은 학문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정치에 있으며, 정치의 목적은 태평성대이고 그 혜택은 모두 백성에게 돌아갔다.

출세를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는 선비는 비난을 받았고 관직에서 박탈되고 사회적 생명이 끊어졌다.

 

선비는 염치(廉恥)가 있는 사람이다.

염치는 청렴하고 청빈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부끄러우면 체면(體面)이 서질 않고 체면이 서지 않으면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렵다.

정치를 위해 출세하는 것이 선비의 당연한 일임에도 재물과 권력을 경계하고 부끄러워했다.


출세그림은 선비의 유유자적, 욕심 없는 마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내면에 출세의 욕망을 숨겨둔 염치가 있는 선비의 그림이다.


 

  연지유압도 / 김홍도 (金弘道) / 출생 : 1745미상(1806?)

  기법 : 견본담채(비단에 옅게 채색) / 크기23.8 x 16 cm

  소장기관 : 간송미술관

 

 

김홍도 (金弘道)

 

조선시대의 화가. .정조의 문예부흥기부터 순조 연간 초기에 활동했다.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지도를 받아 그림을 그렸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어 정조의 신임 속에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풍속 등 모든 장르에 능하였지만,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출생-사망 : 1745 ~ 1806?

본관 : 김해(金海)

: 사능(士能)

: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옹(輒醉翁)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회화

출생지 : 미확인

 

주요작품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 행려풍속도(1778),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송월도(1779), 단원도(1784), 금강사군첩(1788),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청앵도(18세기 후반), 추성부도(1805)

 

김홍도(金弘道)1745(영조 21)에 태어났다. 출신 가문은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되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나이 7, 8세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姜世晃)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어린 시절을 안산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강세황은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직장의 상하 관계로,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 강세황이 세상을 떠나는 1791, 김홍도의 나이 47세까지 이어졌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773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에서 근무했다. 1781(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平)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에 대한 포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을 제수 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다. 이는 그가 이유방의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맑으며 그림이 기묘하고 아취가 있는 것을 사모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에 의하면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강세황 역시 단원기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김홍도는 회화에서뿐 아니라 거문고, 당비파, 생황, 퉁소 등을 연주하는 음악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일찍부터 평판이 높았던 서예가이고, 빼어난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에 고졸한 아취가 흐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멋과 문기(文氣)가 번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홍도는 179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또 한 번 참여하게 되었고, 그해 12월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발령받았다. 이는 중인 신분으로 그가 오를 수 있는 종6품에 해당하는 최고 직책이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충청위유사 홍대협(洪大協)이 조정에 올린 보고가 발단이 되어 만 3년 만에 연풍현감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1795년 서울로 돌아온 김홍도는 그림에 전념했다. 그의 나이 51세로 원숙기에 접어든 그는 이때부터 단원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이고, 을묘년화첩병진년화첩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온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명작이다. 김홍도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 대신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김홍도는 만년에 이르러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배인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는데, 화원이었던 그가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서민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도석신앙과 관계가 깊다. 굵고 힘차면서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선이 특징인 그의 도석인물들은 후기에 오면서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 분방한 필치를 띄게 되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났지만 특히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후기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여 길쌈, 타작, 대장간, 고기잡이 등 그들이 생업을 꾸려가는 모습과 씨름, 무동, 윷놀이 같은 놀이를 즐기는 모습, 빨래터와 우물가, 점심 등 서민의 삶과 정서에 밀착된 일상의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의 풍속화에는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예리한 관찰,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으며, 활달하고 건강한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묻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둥글넓적한 우리 서민의 얼굴이 한국적인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한다.

 

김홍도는 왕의 어진에서 촌부의 얼굴까지, 궁중의 권위가 담긴 기록화에서 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속화까지 신분과 장르를 아우르며 그림을 그렸다.


화가 신분으로 종6품에까지 오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았고, 비록 말년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 생을 마감했으나 일생동안 시를 읊고 고졸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 위대한 화인이었다.


김홍도의 작품은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고찰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이인문(李寅文),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유운홍(劉運弘),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작품에는 자화상(18세기 중반),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 행려풍속도(1778),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송월도(1779), 꽃과 나비(1782), 단원도(1784), 사녀도(1784), 금강사군첩(1788), 연꽃과 게(1789),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청앵도(18세기 후반), 염불서승도(1804), 추성부도(18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