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령(蟹踰嶺)과 신각(申恪)장군
신각(申恪) 장군은 임진왜란 최초로 육지에서 승전을 했으나, 억울하게 처형된 비운의 장군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강화도호부사(종3품), 상호군(정3품 당하관), 경상 좌도 수군 절도사(정3품 당상관), 영흥대도호부사(정3품), 경상도 방어사(종2품),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종2품), 팔도 부원수(종2품) 등을 지냈다.
신각장군은 적전도주자로 오해를 받아 비변사에 의해 참형(1592년 음력 5월 19일)에 처해졌다가, 사후 2년 뒤인 1594.12.21(음력) 상소가 올라와 억울함이 밝혀져 복권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신각은 부원수 자격으로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한강 방어 임무를 맡았으나 중과부적에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어 방어전은 사실상 불가능 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군을 물려서 재정비하려 했으나 도원수가 군을 물리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군이 와해되어 버렸다.
당시 한강 방어를 맡았던 도원수 김명원은 방어선이 무너지자 임진강으로 달아났으나 부원수 신각은 한강 사수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를 쫒지 않고 최대한 병력을 수습해 양주로 후퇴한 뒤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도 병마 절도사 이혼과 합류했다.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와 흩어진 병사를 모아 진을 치고 함경도 병사 이혼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일대인 해유령 근처에서 왜군 소부대를 기습하여, 왜병 70명을 참하여 임진왜란 중 조선군 최초의 승리 기록을 세운다.
규모가 작아 무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연일 패전만 이어지는 상황 중에 귀중한 승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해유령 전첩비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28-9
임진왜란 때 육지 싸움으로는 최초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전첩비이다.
싸우지도 않고 임진강으로 후퇴한 도원수 김명원은 패전 책임을 부원수에게 돌려 신각이 자기를 따르지 않았다고 왕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우의정 유홍이 신각을 주살할 것을 청하여 선전관을 보내 형을 집행하였다.
선전관이 떠난 뒤에 해유령 승전의 첩보가 도착해 왕은 사람을 보내 집행을 중지토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경솔히 인재를 처형하는 실수를 했다.
같이 싸웠던 이양원(李陽元)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유령 전투 직후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양원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수도의 수비를 맡았으나 한강 방어의 실패로 양주(楊州)로 철수, 분군(分軍)의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과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군사와 합세해 해유령(蟹踰嶺)에 주둔,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뒤 영의정 벼슬에 올랐다.
의주에 피난해 있던 선조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전한다. 어릴 적에 이중호(李仲虎)에게 수학하였고, 성품이 충후하고 박학했으며, 흑백의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고 시문에도 매우 능했다 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한강과 도성 방어선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임금이 측근 한응인을 파견하여 패전을 질책하자 다급해진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 실패의 원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으로 이탈한 부원수 신각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였고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홍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유령 전투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대탄(大灘)에서 물러나와 방어진을 치고 있던 신각은 억울한 참형(斬刑, 목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말았다.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이 출발한 그날 오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함께 획득한 왜적의 머리 70여 개가 도착하자 비로소 진상을 파악한 선조는 급히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다른 선전관이 당도하기 전 해유령 전승의 지휘관 신각은 이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였다. 1592년 음력 5월 19일 해유령의 승전고(勝戰鼓, 승리의 북소리)가 울린 지 불과 사흘 후의 일이다.
신각과 함께 싸운 함경병사 이혼은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하여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갔으나 국경인(鞠景仁) 등 반역자들에 의해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역도들의 손에 죽었고, 유도대장 이양원 역시 의주에 피란해 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니 이 또한 가슴 시리도록 참혹한 일이었다.
도원수 김명원은 몽진한 조정에 합류하였고, 명나라 원병을 지휘한 조승훈, 순찰사 이원익과 함께 평양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음력 11월 1일 이일을 순변사로 삼게 되었는데 김명원이 혼자 반대했다.
1593년 송응창,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나라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하고 이후 체직되어 도원수직을 권율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호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판서 재임 중이었던 음력 7월 14일,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책임을 지고 사간원에게 탄핵을 당했는데, 이때 실록을 보면 “김명원은 사람됨이 지나치게 순후하여 원수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 선조는 김명원이 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고생을 많이 했다며 탄핵을 기각했다.
1597년 요시라의 공작으로 파직된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자 정탁, 유성룡, 심희수, 노직 등과 함께 그를 위로하였다.
같은 해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이 당황하여 대답할 바를 모르는데 김명원과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왕이 이에 따랐다.
이후 병조판서, 유도대장을 겸했고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가 이듬해 음력 11월 1일 죽었다.
졸기에서는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부침이 심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풍도가 뛰어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가받았다. 정승에 오른 뒤에도 이룬 것은 없었으나 마음이 아름다워 남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 한다. 김명원은 성품이 선량하여 남과 잘 지냈고 풍의가 온아하여 그의 인품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각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파천 과정에서 온 혼란으로 김명원과 신각은 연락이 두절되어 김명원은 조정에 이양원을 따른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고 장계를 올린다. 비변사에선 신각을 군법으로 다스릴 것을 청했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처형하게 한다.
처형 당일 오후에 해유령 전투의 승전보가 올라오자 선조는 다시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된 뒤였다.
예상못한 대규모 침공으로 개전 이전 온건한 입장에 있는 신하들이 발언권을 잃고 전면 패주로 인해 일선 장수들에 대한 강경론이 제기된 시점인데 운 나쁘게 제대로 걸렸다.
당시 조정이 파악한 전세는 왜군을 막을 요충지들이 모조리 함락되었다는 사실과 싸우다 달아나는 장수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장수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적전 도주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러다보니 신각이 도주를 했다고 보고한 김명원을 크게 질타할 수는 없었다. 신각과 연락이 끊어진 상황에서 정황상 가장 합당한 사안으로 보고 했기 때문이다.
선조 역시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비변사에서도 참수를 주장하니 달아난 장수를 참하라 명한 것일 뿐이다.
왜 비변사에선 부원수란 고위직 급인 신각을 처형하라는 결정을 그렇게 쉽게 내리고, 반대한 신료가 아무도 없었을까?
당시 도망간 장수가 너무 많아서 다 죽일순 없지만 본보기를 보여 일벌백계할 필요는 있다는 여론이 조정 대신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각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우호적인 의견은 혼란한 상황에서 연락이 제대로 닿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주와 탄금대서 몇번이나 죽을 뻔 했고 모진 고생 끝에 평양에서 거지꼴로 합류했던 이일조차 장계는 꼬박꼬박 제대로 올렸다는 걸 감안하면 신각의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해유령 전투의 결과가 신각 처형 직전에 곧바로 조정에 알려졌고, 선조가 재빨리 처형 명령을 취소했음에도 늦은 것으로 봐선 전투 보고서인 첩서(捷書,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보고하는 글)를 신각이 조금만 더 일찍 올렸다면 신각은 사형을 면하고 최초 승전의 공을 크게 치하 받았을 것이다.
징비록에서는 그에게 90살 노모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더 안타깝게 여겼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선조 수정 실록도 '신각이 비록 무인(武人)이기는 하나 나라에 몸 바쳐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는데, 죄 없이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겼다.'라고 적었다.
그가 왜란 이전 조헌의 말을 듣고 황해도 일대의 방비를 어느 정도 해 놓은 덕택에 훗날 황해도 연안성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이정암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물리칠 수 있었다.
당초 조헌은 선조에게 왜침이 있을 것이니 왜놈 사신 목을 베고 수도를 공격하소서라고 했는데 그 후 돌아와서 권징과 신각에게 편지를 보내 왜침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권징은 무시하고 신각은 받아들였다. 이때 권징은 평안 감사 신각은 연안 부사였다. 사실 신각이 방비를 많이 했지만 이정암도 신각이 해놓은 방비에 더해서 준비를 해 놓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본디 유순한 성격으로 당시 도원수 김명원은 직책에 충실했을 뿐, 전시 행정가로서도 성실한 데다 유능했고 남을 모함하거나 해코지하는 일이 없었지만, 고의성은 없지만, 멀쩡한 장군을 죽게 만든 데 책임을 느꼈는지, 정유년에 선조가 작정하고 이순신을 쳐내려 했을 때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이순신의 구명과 재기용에 힘썼다고 한다.
신각 장군 사당 충현사(忠顯祠)와 해유령 전첩비
신각 장군 사당 충현사(忠顯祠)
해유령 전첩비 아래에 충현사에서 신각, 이양원, 이혼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제향을 올린다.
임진일록에 따르면 김명원은 최소한 1592년(임진년) 5월 12일까지는 신각의 소재지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김명원 입장에서 신각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한 기간은 13일에서 15일 상관에게 3일간 소재를 알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죽음(1592년 음력 5월 19일)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신각장군은 억울하게 비변사에 의해 참형에 처해졌는데 양주골에 들이닥친 선전관이 진영 본부에 군졸들을 도열시킨 뒤 군사를 풀어 신각을 묶어 꿇어 앉히고. 호통치듯 어지(御旨)를 읽어 내려갔다.
패주 장수 신각은 어명을 받들라
종2품 자헌대부 신각은 주장의 명을 거역하고 적전(敵前)에서 도주하였은즉 군졸의 사기를 지하로 떨어뜨리고, 신성한 국방의무를 저버렸으며, 지엄한 어명을 거역하였으므로 관작을 삭탈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는 동시에 참형에 처할 것을 명하노라!
추상같은 어명으로 되돌릴 수 없었지만, 모여 있던 중위장·부장들과 군졸들은 큰상을 받을줄 알고 모여 있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 한결 같이 외쳤다.
선전관 나리, 어찌 이럴 수 있사옵니까.
신각 장군은 난세에 불세출의 영웅이며, 그를 죽이면 세상의 막장에 온 것이니 그것은 진실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경도 남병사 이혼도 잘못 되었다고 외쳤다.
선전관은 언성을 높여 왕명을 거역할 텐가! 너희들 목도 온전하다는 것인가?
선전관, 우리 목이 두려울 것은 없다. 신각은 용감하게 싸우고, 적병 70급 베어 인마편으로 상감마마께 보냈다. 나라를 지킬 힘을 가지시라고 서둘러 보냈가. 저기에 있는 으깨진 적병의 모습을 보시오.
한강 전투에서 도원수는 먼저 퇴각하여 숨었으므로 행방을 모르고 있어 보고할 수 없었지만,
신각 부원수는 잔병을 수습해 함경도 남병사 군대를 규합해 해유령에서 적병을 맞아 무찔렀다.
하루만 기다리면 왜의 두상이 평양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명령을 따르는 충직한 선전관으로 너희가 나를 기망하고 사세를 뒤집으려고 하는데 나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적병 70급을 보냈다는데 그걸 누가 믿는단 말인가 왕실에서 믿지 못하는데 신하가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냐. 지체할 것 없다. 당장 목을 쳐라
왜의 두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 올라가고 있는 중이니 하루만 지체를 하시오
시끄럽다. 집행하라.
이날이 1592년 음력 5월 19일이다.
명령은 떨어졌다. 참수병은 죄인의 목을 치기 위해 차출된 선전관의 수행병으로 긴 칼을 휘두르더니 가차없이 신각의 목을 베었다.
신각의 장계와 칠십 급의 왜 병사의 효수를 실은 마차는 같은 날 오후에 평양에 당도했는데 수레에 쌓인 적병의 두상과 장계를 본 선조가 다급하게 명령했다.
빨리 가서 참수형을 멈추도록 하라
이번엔 다른 선전관이 양주골로 향해 달렸는데, 임진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불타고 없어, 시간이 지체되어 양주골에 도착하며 숨을 헉헉거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신각 장군의 참형을 멈춰라
하지만, 벌써 효수된 신각장군의 머리는 양주골 진영 마당 장대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군졸들이 각자 한마디씩 했다.
에라이 씨발놈들아 이것이 나라냐
개새끼들아, 인물은 내치고, 쓰레기들은 연명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겠냐
이런 새끼들 믿고 백성 노릇하기 참으로 더럽구마.
저기 있는 선전관 새끼부터 죽여버려야지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형을 집행한 선전관과 나중에 온 선전관이 쏜살같이 달아났고, 양주골의 병사들 대부분은 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양주골이 훗날 산적들 소굴이 된 것은 그런 까닭이 있었다.
조선 명종때 실제 인물로 알려진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골 백정인 임돌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놈'인데, 부모를 걱정시킨다고 '걱정'이라고 하던 것이 '꺽정'으로 되었다고 한다.
신각장군은 사후, 2년이 지난 뒤인 1594년 음력 12월 21일 상소가 올라와 신각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복권이 되었다.
해유령 전투를 통해서 임진왜란 때 조선의 첫 승리를 이끌어낸 신각장군인데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이유는 선정이 조정 신료들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각 장군의 경우 해유령 전투는 개전 이래 첫 승전보였지만, 그 뒤가 깔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원수였던 신각이 도원수 김명원의 휘하를 벗어나 독자작전을 해서 승리를 거뒀고, 신각이 전투 전에 조정으로 장계를 올리지 않았던 큰 실수가 있었다.
김명원은 신각이 다른 장수들처럼 도주했다고 생각했고, 조정에 그렇게 보고를 하였고 조정에서 도망하는 장수가 많다 보니 일벌백계 본보기 케이스에 걸려 들어 애석하게 된점도 있다.
결론은, 신각장군은 선무공신으로 책봉되기에는 전공이 너무 작았고, 지휘부와 장수의 의사소통 문제로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기에 조정 입장에서는 공신으로 올리기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각 장군에 대한 이후의 논공행상은 찾아 볼 수 없는데, 선조실록에 신각 장군과 관련한 생원(生員) 유숙(柳潚)의 상소가 다음과 같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卒)에 앞장서 일당백으로 곧장 적의 소굴을 짓밟아서 80명의 목을 베어 바쳤으나 주첩(奏捷)의 공은 받지 못하고 도리어 복검(伏劍)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모두 원통해 하기를 ‘군사 전체를 패몰시킨 경우도 은사(恩赦)를 입지 않은 자가 없는데, 신각 만은 무고하게 죽었다.’ 합니다. … 신은 전하께서는 이병의 공로를 살피고 신각의 공훈을 생각하여 승급시키고 포증하시며, 또 이광의 죄를 가하여 일국(一國)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삼군(三軍)의 의기를 고무시키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당시 신각 장군의 어머니도 살아계셨는데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신각의 처 정씨(鄭氏)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낸 뒤 자결했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정조 때 열녀문을 세워주고 원혼을 위로하였다. 연안의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해유령전첩지는 380여년이 지난 1977년 기념비가 세워졌고, 1991년에 충현사가 세워졌다. 매년 5월 19일 충현사에서 신각 장군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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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 전승 기종 사적비> 비문 전문
단군 성조(聖祖, 성스러운 시조)께서 거룩한 나라를 여신 후 누천년(累千年, 여러 천년)을 지나는 동안 아름다운 강토를 노리고 침범해 온 외적(外敵, 외국 침략군)의 무리가 그 얼마였던가? 그러나 선조들은 그때마다 조국 수호의 성업(聖業, 성스러운 일)에 기꺼이 한몸을 던져 결연히 이 땅을 지켜냈으니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지극한 평화와 눈부신 번영은 온전히 그 헌신의 아름다운 대가(代價)요 풍요로운 열매이리라.
우리 민족이 극복해낸 그 숱한 외침 중에서 왜란(倭亂, 임진왜란)처럼 참혹한 수난은 없었다. 왜적은 척박한 땅에 문명을 전해준 은혜를 외면한 채 단기 3925년(1592년) 4월 13일 침략의 칼끝을 이 땅에 들이밀었다.
이 땅과 백성이 처참히 유린되는 참혹한 병화(兵禍, 전쟁의 피해) 속에서 충의(忠義, 충성과 의리)의 의사(義士, 의로운 인물)들은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으로 사직과 국토를 온전히 보존하였으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은 곳곳에서 흉적을 몰아내고 이순신은 왜적의 함선들을 모조리 푸른 물결 아래 쓸어 넣었다.
자신이 죽을 자리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의연히 한몸을 바친 충신들의 빛나는 업적은 오늘도 해와 달처럼 휘황하거니와 이곳 양주 해유령에도 왜적과 싸워 승리를 거둔 충신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어 그 남긴 자취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더욱 역력히 우리의 가슴에 사무치니 후손된 누군들 이 자리에 서면 그 마음 숙연해지지 않으랴!
임진년 4월 14일 왜적이 날카롭고 서슬 푸른 기세로 들이닥쳐 부산 동래가 함락되고 이어 4월 28일 충주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국왕 선조(宣祖)는 4월 30일 정처 없는 피란길에 오르고 왜적의 잔인한 약탈과 살육의 소문에 상하 군민(軍民, 군인과 민간인) 모두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 채 극단의 공황 상태로 빠져들었다.
국왕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이양원에게는 유도대장이 되어 한성 한양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거침없이 밀려오는 수 만 명의 왜적에 비해 이에 맞설 우리의 병력은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5000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부원수 신각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진지를 벗어나자 전의를 잃은 도성 방위군은 왜적이 미처 한강에 당도하기도 전인 5월 2일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 방어선을 속수무책으로 포기한 부원수 신각은 임진강 방면으로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하는 중에 때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병사 이혼과 양주 장수원 등에서 전투를 치르며 북상해 온 인천부사 이시언의 병력을 합쳐 비로소 전투가 가능한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도성을 점령한 왜적은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먼저 선발대를 편성하여 양주로 보냈는데 이들은 양주 일대를 약탈하며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5일) 이곳 해유령에 도착하게 된다.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던 조선군은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개를 넘는 왜적을 급습하여 적병 70여 명을 한자리에서 몰살하였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의 거듭되던 패전을 비로소 극복하고 마침내 첫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왜적이 접근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우리도 왜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 뜻깊은 승전이 참으로 어이없는 참변(慘變, 비참한 사고)으로 이어졌으니 누군들 이 참혹한 사태를 짐작이나 하였으랴? 한강과 도성 방어선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국왕 선조가 측근 한응인을 파견하여 패전을 질책하자 다급해진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 실패의 원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으로 이탈한 부원수 신각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였고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홍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유령 전투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대탄(大灘)에서 물러나와 방어진을 치고 있던 신각은 억울한 참형(斬刑, 목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말았다.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이 출발한 그날 오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함께 획득한 왜적의 머리 70여 개가 도착하자 비로소 진상을 파악한 선조는 급히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선전관이 당도하기 전 해유령 전승의 지휘관 신각은 이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였다. 1592년 음력 5월 19일 해유령의 승전고(勝戰鼓, 승리의 북소리)가 울린 지 불과 사흘 후의 일이다.
신각 장군의 아내 또한 남편의 시신을 수습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집에는 신각이 노심초사 걱정하던 90 노모만이 세상에 홀로 남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신각은 강화와 경상도의 수사(水使, 수군 지역 대장)를 역임하였고, 일찍이 황해도 연안 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성내에 우물을 깊이 파고 각종 무기를 많이 비축하여 이로써 후일 이정암(李廷馣)이 연안에서 왜적 3000여 명을 도륙하는 토대를 미리 마련하기도 하였던 지혜로운 명장이었다.
신각과 함께 싸운 함경병사 이혼은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하여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갔으나 국경인(鞠景仁) 등 반역자들에 의해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역도들의 손에 죽었고, 유도대장 이양원 역시 의주에 피란해 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니 이 또한 가슴 시리도록 참혹한 일이었다.
피 흘린 충신들의 사적이 낱낱이 밝혀지매 여기 피 어린 해유령 언덕에 서기 1977년 유생(儒生,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김주현(金周鉉) 선생과 지역 유림 및 뜻있는 이들이 이를 기려 함께 탑과 비를 세우고 그 후 충현사(忠顯祠)를 지어 향화(香火, 제사의 향불)를 올렸다.
이를 더욱 선명히 하고자 해유령전승보국충신숭모사업회의 조태훈(趙泰勳) 회장을 비롯한 제현이 뜻을 모아 글을 다듬고 최형국(崔炯國) 박사의 감수를 받아 정성껏 사적비를 세우니 이로써 님들이 이루어 낸 눈부신 승리의 영광은 온누리에 뚜렷해지고 그 남긴 자취는 만대에 영원하리라.
후손들이 시절을 따라 고개 숙여 정성 어린 향(香)을 사르리니 충혼(忠魂, 충성스러운 영혼)들이시여, 평안히 쉬시며 부디 이 나라와 자손을 축복하시어 속히 통일의 대업(大業, 큰일)을 이루고 만방(萬邦, 세계)에 우뚝 솟아 번영하도록 도우소서.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12월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洪晸悳) 삼가 지음
한국서예박물관 관장 양택동(梁澤東) 삼가 씀
해유령전승보국충신숭모사업회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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