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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여사 터 부도, 강유후 공덕비 - 철마면 임기리

by 연송 김환수 2021. 4. 19.

선여사지 터에 있었던 부도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반출시도가 있었으나 주민들의 저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이며, 원형 기단부에는 복련이 여러 겹 복련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상부로 향할수록 둥글게 마감하였고,일석으로 조성된 연봉형 보주 아래는 1단 괴임을 두었다.

부도 주인공의 당호는 새기지 않아서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 수 없다.

 

선여사 터 부도 (船餘寺-浮屠) - 부산 기장군

 

- 분야 :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유물/유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 시대 : 조선/조선

- 출처 : 디지털부산문화대전-선여사 터 부도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의 선여사 터라 추정되는 곳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석종형 부도이다.

선여사 터 부도(船餘寺浮屠)는 양식상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것이지만, 건립 경위는 알 수 없다.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임기 3호교에 안치되어 있다.

 

선여사 터 부도는 조선 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부는 원형의 평면이며 여러 겹으로 된 복련(覆蓮)의 연꽃 문양을 양각하였다.

 

탑신의 형태는 아래쪽은 직선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둥글게 깎았으며 탑신 위에 1단의 받침을 놓고 그 위에 꽃잎을 다물고 있는 연꽃 봉오리를 표현하였다. 따라서 상륜부는 연봉(蓮峰)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탑의 높이는 2.4m이고 둘레는 2.9m인데, 높이에 비해 탑신의 지름이 작아서 다른 석종형 부도와 비교하면 날씬한 느낌이다.

 

선여사 터는 기장 지역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절에 딸린 전답이 300석을 넘었다고 전한다. 『기장현 읍지(機張郡邑誌)』에도 기장현의 사찰로서 제일 먼저 선여사를 적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선여사의 사역(寺域)이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선여사 터의 위치를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일대로 추정하였다.

 

그 이유는 비록 사역을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부산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지표상에서 확인되었으며, 1981년에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이곳에서 석탑의 상륜부 일부를 수습함으로써 이 일대를 선여사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부터 선여사를 찾기 시작하여 2004년 선여사로 추정되는 대규모 절터와 폐불들을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의 임기천 상류에서 발견하였다.

 

백운산(白雲山) 서쪽 산록의 해발 350~400m에 해당되는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선여사 터는 대략 4곳으로 분산되어 있고 산록의 구릉 사이에 건물 터가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지표상에서는 건물 터의 초석들과 경주 옥석으로 제작된 모양이 각각 다른 다수의 불상 조각, 각종 기와편, 귀얄문의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이 다량 확인되었으며, 특히 자연석으로 만든 대형 맷돌이 발견됨으로써 당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선여사 터 부도는 철마면의 선여사 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밀반출하려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지켜 내어 현재의 위치에 안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철마면사무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여사 터 부도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의 절터가 선여사 터였음을 알려 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어느 시점까지는 선여사가 존속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자료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기장군지』(기장군지편찬위원회, 2001)

『철마면지』(철마면지편찬위원회, 2007)

조원영, 「부산의 고미술: 불교 미술 자료를 중심으로」(『항도 부산』13,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6)

이봉기, 「기장군의 불교 폐사원지」(『기장 문화』6, 기장문화원, 2009)

 

선여사 터 부도 옆의 비석은 부도와 연관이 없는 강유후의 공덕비(만세불망비)이다.

강유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고, 청주목사, 전라도암행어사,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석탑사에 있는 "석탑부재"로 "선여사 터 폐탑"으로 추정되었으나, 현재는 철마면 임기천에서 선여사 터를 발견하여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산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일대를 선여사 터 폐탑으로 추정하였으나 2004년 이후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의 임기천 상류에서 선여사 터를 발견하였다. 

 

석탑의 상륜부는 네모난 형태의 앙화와 세 개의 보륜으로 구성되어 있고, 옥개석 부재는 6개가 남아 있으며, 기단석은 네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선여사(船餘寺)

 

1786년에 발간된 기장읍지에 “기장군에는 선여사(船餘寺), 안적사(安寂寺), 취정사(鷲井寺), 장안사(長安寺)가 있고, 선여사가 대표적인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폐사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선여사는 18세기 중엽의 해동 지도(海東地圖)에는 동래에서 울산으로 가는 대로(大路) 중간에서 동쪽으로 백운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선여사는 흰 구름 속에 배처럼 보인다고 하여 선여사(船如寺)라는 설과 임진왜란 때 선녀(仙女)라는 비구니의 법명을 따라 선여사라고 유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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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 강유후(姜裕後)361) 청덕선정만세불망비(淸德善政萬世不忘碑) / 공덕비()


行縣監姜公裕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행현감강공유후청덕선정만세불망비)

*** 만세불망(萬世不忘) : 영원히 은덕을 잊지 아니함.

*** 강유후 : 문관. 1652년(효종3)에 부임하여 1654년 이임됨.

 

行縣監姜公裕後淸德善政萬古不忘碑 (행현감강공유후청덕선정만고불망비) / 공덕비

 

참고로 이 비석은 갑오(1654년) 12월에 세우고 1881년(광서7년,신사년) 보수한 비석으로 선여사 부도와 연관성은 없다. 

 

강유후(1606~1666)의 현감 재위기간(1652년~1654년)이 끝나는 1654(갑오)년 12월에 세웠고, 이후 1881년(광서7년)보수하였다.

  

강유후(1606~1666)는 숙종 대에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이다

1654년(효종 4년) 임금에게 진소(陳疎)하여 기장을 현으로 복귀시켰으며, 기장읍 동부리 읍성 비림에도 선정비가 있다.

 

이 비는 철마면 임기리에서 송정리로 가는 도로 경계 옆 임기마을 입구에 있다.

석비로 비신과 이수가 있고, 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수 부분은 77×88×33cm, 비신은 104×51×20cm이고 글씨는 해서체이다.

현감 강유후는 “기장읍지” 읍선생안에 의하면 1652년(효종3년) 3월에 부임하여 1654년(효종5년) 임기만료 되었다.

 

공덕비 前面(전면)

行縣監姜公裕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행현감강공유후청덕선정만세불망비)

幸莅玆士 鑴石永壽 祛療此境 遺愛追詠(행리자사 휴석영수 거료차경 유애추영)

 

공덕비 背面(배면) / 후면

光緖七年 申巳 日 更繕 監 宋福奎 丁赫規?(광서7년(1881년) 신사(1881년) 7월 일 경선(보수하다)감 송복규 정혁규)

甲午 十二月 日 監 金百男 宋世祐 (갑오(1654년) 십이월 일 감 김백남 송세우)

 

광서(光緖) 연호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이다.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쓰였다.

비문에 따르면 기장현에 부임하여 병든 것을 없애어 그 공적이 쇠솥과 돌처럼 영구하게 하고, 백성을 사랑함을 추모하여 공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비문에서처럼 강유후는 전염병 방지등 현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이 공덕비는 갑오(1654년)에 김백남, 송세우가 감독하여 세웠고 고종18년(1881년) 7월에 송복규, 정혁규가 감독하여 보수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래 "기장군지 상하"에 실려 있는 비문 내용중 200년 뒤에 세웠다는 내용은 명백한 오류이다.

비문에 당시(1654년) 2명의 감독자 이름이 있고, 1881년에 보수 시에 2명이 감독하였다는 기록이 비석 배면(후면)에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냥 비석의 마모상태만 보아도 300년정도 지난 비석으로 보인다.

 

光緖七年 申巳 日 更繕 監 宋福奎 丁赫規?(광서7년 7월 일 경선(보수하다) 감 송복규 정혁규)

幸莅玆士 鑴石永壽 祛療此境 遺愛追詠(행리자사 휴석영수 거료차경 유애추영)

甲午 十二月 日 監 金百男 宋世祐 (갑오(1654년) 십이월 일 감 김백남 송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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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후(姜裕後)

1606(선조 39)∼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수(汝垂), 호는 옥계(玉溪). 강극성(姜克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종경(姜宗慶)이고, 아버지는 현령 강진명(姜晉imagefont)이며, 어머니는 안봉(安鳳)의 딸이다.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소속되었다. 그뒤 승정원주서·전적·병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기장현령(機張縣令)으로 외직에 나갔다.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1655년(효종 6)에 정언에 이르렀다. 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경기도사가 되었다가 청주목사로 전직되어, 포곡(逋穀) 2만섬을 서민의 책임이 아니라 하고서 부호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용단을 보여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1659년(효종 10) 지평을 거쳐 안후열(安後說)·김수흥(金壽興)·남구만(南九萬) 등과 함께 암행어사로 선발되어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그해 지평이 되었으나 패초(牌招: 승지가 왕명을 받아 왕의 명령서를 가지고 신하를 부름)에 나가지 않았다 하여 관직에서 내어 쫓기는 것을 요구하는 김익렴(金益廉)의 탄핵을 받았다.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은 현종에게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아뢰는 소를 올렸다. 1659년(현종 즉위년) 정주목사로 나가서 강계부사와 의주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정주목사 시절에는 부호들이 차지한 전답을 서민들에게 돌려주는 한편, 청나라 사신들의 무리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는 기개를 보였다.

 

강계부사가 되어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하여 당시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였던 인삼 채취를 허락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평안감사 민유중(閔維重)의 청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러한 청조(淸操)가 인정되어 숙종조의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강유후(姜裕後)의 묘(墓)는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옥계2리에 있다.

강유후(姜裕後, 1606 ~ 1666)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청주목사, 전라도암행어사,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묘의 높이는 1.5m, 둘레 14m이고 묘 앞에는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고 왼쪽에는 1986년 새로 세운 묘비가 있다.

묘비의 앞면에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은 비문이 있다.

상석은 높이 25cm, 너비 125cm, 두께 92cm이며 문인석(文人石)은 왼쪽, 오른쪽 모두 높이가 180cm이다.

옥계리 잣골 마을 도로변에 최근에 새로 건립한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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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 (현감 강공유후 청덕선정만세불망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조선 후기 기장 현감 강유후(姜?後)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강유후[1606~1666]는 지방관이나 중앙관으로 재직하면서 청렴하고 강직하여 숙종 대에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이다. 1652년(효종 3) 기장 현감으로 부임하여 1654년(효종 5)까지 재직하였는데, 1654년 무렵 선정을 베푼 공로를 기려 강유휴 청덕선정 만세불망비(姜?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강유휴 청덕선정만세불망비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85-7번지 기장읍성 동문 터 앞에 있다.

 

[형태]

이수(螭首)의 정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켜 머리를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양각하였고, 그 사이에 구름무늬를 얕게 음각하였다. 뒷면에는 아랫부분에만 구름무늬를 얕게 음각하였으며, 꼭대기는 보주형(寶珠形)을 하고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12㎝, 너비 62㎝, 두께 18.5㎝이다.

 

[금석문]

비 앞면에 ‘현감 강공유후 청덕선정만세불망비(縣監姜公?後淸德善政萬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대에 흩어져 있던 36기의 비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기장 공덕비군을 조성할 때, 강유후 청덕선정만세불망비도 함께 옮겨와 보호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강유후 청덕선정만세불망비는 기장 현감으로 재직한 역대 지방관이 기장현에서 펼친 행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비석이 잘 보관되어 조선 후기 지방관의 선정비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