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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의 주인은 누구인가 ?

by 연송 김환수 2018. 11. 10.

황남대총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

 

황남대총은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에 위치한 대형무덤이다. 크고 아름다운 대릉원 내 고분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참고로 무덤 높이가 가장 높은 무덤은 노동동에 있는 봉황대다. 황남대총은 금관이 출토되어 천마총과 마찬가지로 신라고분들 중 인지도가 높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 두 무덤을 연결한 쌍릉인데 피장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고, 학계 통설로는 5세기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3분중에 한분의 쌍릉(부부릉) 정도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최근에는 쌍릉(부부릉)이 아닌 선후대 눌지왕과 자비왕의 무덤이라고 이주헌 전주박물관 학예실장은 주장했다. 먼저 들어선 남분은 자비마립간이 쌓은 부왕 눌지마립간의 것이 되며 북분은 소지마립간이 쌓은 자비마립간의 능이 된다.

 

1975년 발굴로 모습을 드러낸 지 43년이 지났지만, 5세기 전후에 축조되고, 부부묘이며, 남분(南墳)이 남성의 무덤이고, 부인(夫人)이라 쓰여진 은제허리띠가 출토된 북분(北墳)은 여성의 묘이며, 남분이 북분보다 시대가 앞선다는 점 정도만 확인된 상태다.


1973년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고 은제 허리띠도 발굴되었는데, 여기에 부인대(夫人帶)라고 쓰여 있는명문이 있어 큰 파장이 있었다.


마립간 부인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분에선 화려한 금관이 출토되어 국보 191, 금제허리띠는 국보 192호로 지정됐다.

황남대총 남분의 마립간은 순금관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금동관을 쓴 채로 묻혔다.

남분에서 나온 금동관은 부식이 되어 복원을 하였지만, 문화재 지정은 되지 못했고, 남분에서 나온 금제허리띠는 보물 629호로 지정이 됐다.

마립간의 무덤인 남분에서 새날개 모양의 관꾸미기 등 남자의 지위를 나타내는 다수의 순금 장신구가 나왔다. 이를 보면 금관이 반드시 신분의 차이를 나타낸 것은 아닌 듯하다.

 

남분 금동관의 디자인은 전형적인 신라 나뭇가지 모양의 금관이 완성되기 직전의 모습이며, 북분은 나뭇가지 모양이 표준 형식으로 완성된 첫 금관으로 평가를 받는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 금허리띠


금관이 나왔으므로 피장자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부인대라고 쓰인 명문이 나왔으니 여자일 것이고 남분에선 그보다 한 등급 낮은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황남대총 발굴 모습 (1973년 7월 - 1975년 10월)


1975년에 발굴한 남분에서 피장자의 유해 일부가 나와 검사하니 60대 남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이유로 피장자가 누구인지 미궁에 빠졌다.


주인공을 추적할 수 있는 사람 뼈 20여편과 이빨 28개가 수습됐다. 분석결과 출토된 이빨 가운데 15세 전후의 여성 이빨 16개와 아울러 150미만의 키를 가진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었고, 60세 전후의 남성 머리뼈와 이빨 12개가 관 안에서 수습되었는데 여성은 순장(殉葬)의 흔적이었다.

 

발굴단은 당시 60대 남자·15세가량의 소녀 유골을 발굴이 끝나자마자 봉안함에 넣어 다시 무덤속에 파묻고 말았다. 정중한 봉안식과 함께. 당시는 인골을 고고학적 유물로 주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골을 함부로 한다는 경주 김씨 문중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1975년에 남분을 발굴하였을 때에는 특히나 더욱 금관의 유무에 학자들이나 언론들도 주목하였다. 쌍릉이므로 여성이 묻힌 북분에서 금관이 나왔다면 남자가 묻혔을 남분에서도 반드시 금관이 나오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남분에서는 은제 무구와 (금관보다 격이 낮은) 금동관이 나왔을 뿐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다.


실성 마립간은 쿠데타에 의해 정권과 목숨을 잃었는데 옛날 자신을 고구려 볼모로 보냈던 내물 마립간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 군사를 시켜 내물의 장남 눌지를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역습을 펼쳤고 실성 마립간은 결국 살해당했다.

 

실성왕의 무덤은 기록이 없어 왕릉이 전해지지 않지만, 그를 죽인 신라 19대 왕 눌지 마립간은 실성 마립간의 사위이기도 해 최소한 왕의 예를 다해 무덤을 지어줬을 것으로 보인다.


눌지 마립간은 아들(장자)에게 왕위가 이어지도록 제도를 다져 놓았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결정적 증거가 없어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자기들의 과거사에 유리하게 맞추려고 가장 후대의 눌지가 황남대총의 주인공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탄소연대측정을 통해 유물의 연대를 측정해봤지만 오차 범위가 60~70년에 걸쳐 있어 누구의 것이라 단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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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선 서울시립박물관장(고고학)은  저서 ‘고신라왕릉연구’에서 황남대총은 내물왕 부부의 무덤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이관장은 4∼6세기 고분과 유물 비교 등을 통해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극초에 조성된 왕릉이라고 보았다. 이 무렵 사망한 왕은 내물왕(402년 사망)이기에 남분은 내물왕릉이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이럴 경우, 북분은 당연히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부인의 묘가 된다. 남분은 내물왕이 죽자 402년경 보반부인 주도로 만들었고 북분은 보반부인이 죽고 나서 아들 눌지왕이 즉위하던 417년경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왕비릉인 북분에서 금관이 나오고 왕릉인 남분에선 그보다 떨어지는 금동관이 나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관장은 내물왕이 미추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 가문이 보반부인에 비해 서열이나 세력에서 떨어지므로 왕비의 무덤에만 금관을 묻을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같은 추론은 황남대총 주인공을 가리는 논란의 시작일 뿐이다.

 

내물왕릉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데다, 내물왕이 사위로 왕에 올랐다해도 왕의 무덤이 왕비의 무덤보다 격이 낮을 수 있는지에 관한 정교한 해명이 필요하다.

 

최병현 숭실대교수(고고학)는 “고고학적인 해석틀 자체도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왕릉급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특정 왕릉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황남대총은 한국 고고학사에 있어 최대 미스터리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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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전주박물관 학예실장 학회지서 파격 주장 펼쳐

 

한반도에서 가장 큰 옛 무덤인 경주 황남대총이 신라 왕과 왕비가 묻힌 무덤이 아니라 선후대왕이 나란히 묻혀 권력을 과시한 대형 기념물이란 주장이 나왔다.

 

고고학자인 이주헌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반연간 학술지 <신라문화> 45호에 최근 발표한 ‘경주 황남대총 북분 주인공 성격 제고’란 논문에서 부부의 무덤이란 기존 학계의 통설을 통째로 뒤엎었다.

 

남분과 북분이 표주박모양으로 붙은 이 거대한 쌍동이 무덤(쌍분)을 왕과 왕비 무덤으로 볼만한 논리적 근거가 없으며, 5세기 눌지·자비·소지 마립간(왕의 당시 호칭)으로 왕통이 세습된 것을 과시하는 선후대 왕들의 기념비적 무덤이라는 분석을 내놓은 것이다.

 

‘북분은 왕비의 것’ 뒷받침 했던

은제 허리띠 ‘부인대’라는 명문

의식용도로 넣은 부장품 주장

귀고리도 실제 착장 흔적 없어

 

쌍둥이 무덤형식 과시용 추정

남분은 부왕 눌지마립간

북분은 아들 자비마립간 주장

 

이씨 주장의 뼈대는 학계에서 그간 북분이 여성 것이라고 본 근거들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북분에서 나온 ‘부인대(夫人帶)’ 라는 은제 허리띠 끝의 꾸미개 명문과 태환이식이란 굵은 귀고리 출토품이다. 또, 남성지배자 무덤에 흔히 나오는 대도(큰칼)가 안 나오고 실을 감는 데 썼던 가락바퀴(방추차)가 나왔다는 점도 여성의 무덤으로 봤던 근거다. 금관과 큰 칼이 나와 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남분에는 이 유물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부인대’ 명문 자체가 주문자의 성별을 구분하려 새긴 것이므로 북분은 왕비 또는 왕족 부인 것이란 견해가 통설이었다.


그러나 이 실장은 1985, 1994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나온 남분, 북분 발굴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부인대’ 명문 띠꾸미개는 묻힌 이가 몸에 착용하지 않고 관의 외부 또는 부장품 수장부에 의식용도로 넣은 부장품으로 추정되므로 성별을 가리는 결정적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묻힌 이 머리쪽의 부장품 수장부에서 6점의 둥근고리칼(환두대도)가 발견됐기 때문에 큰칼이 없다는 것도 잣대로 삼기는 어렵다고 했다.


남성지배자의 무덤인 경산 임당동 고분처럼 칼을 주검 머리맡에 둔 다른 사례들이 보고된 것도 이를 반증한다고 한다. 태환이식 출토품도 실제 무덤주인이 착장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 순장된 다른 여성이 쓰거나 의식용 제구일 것이라는 추정이다. 가락바퀴의 경우 고대 일본과 국내 다른 고분의 발굴성과를 비교해보면, 실제 실 뽑는 도구 기능보다 매장의례 기물로 쓰이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도 이씨는 논거로 제시했다. 출토 인골에 대한 체질인류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지 않고, 착장유물의 존재유무를 근거로 판별하는 연구법은 더 이상 합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게 논문의 결론이다.


이 실장은 더 나아가 표주박 모양을 한 황남대총의 쌍둥이 무덤 형식이 내물마립간(재위 356~402)의 아들로, 석탈해 왕가 계열인 실성마립간(재위 402~417)을 죽이고 정권을 빼앗은 눌지마립간(재위 417~458)의 적통을 후대왕들이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념물 성격이란 주장도 폈다. 5세기 초부터 80여년간 눌지에 이어 자비마립간(재위458~479), 소지마립간(재위 479~500)의 김씨 왕계 세습체제가 확립되면서 계보관계를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능이 연속되는 표주박형 무덤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먼저 들어선 남분은 자비마립간이 쌓은 부왕 눌지마립간의 것이 되며 북분은 소지마립간이 쌓은 자비마립간의 능이 된다.


이에 대해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등 학계 중진들은 신라의 대형 표형분에 대한 기존 연구의 맥락을 무시하고, 세부 유물의 연대도 곡해했다며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다. 수십년간 여러 설들이 엇갈려온 황남대총 주인공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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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우월한 통치자가 나타나고 고대국가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는 4세기 중반 마립간(麻立干)의 등장부터입니다. 마립간시기의 물적 증거는 신라의 고유한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로 짠 덧널을 돌무지로 감싸고 그 주위로 흙을 높이 쌓아 올린 무덤입니다. 땅 위로 드러난 거대한 봉토를 지닌 이 무덤에는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는 관념에 따라 많은 부장품이 넣어졌습니다. 주로 마립간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그 끝은 6세기 중반의 신라 중고기(中古期)까지 이어집니다. 신라의 금관은 마립간시기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고 변화하였습니다.

 

    

사진. 황남대총 전경(경주시내 대릉원 일대)

 

황남대총 전경(경주시내 대릉원 일대)

 

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재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습니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에 속하며, 귀금속 장신구와 희귀한 수입품 그리고 엄청난 양의 철제품과 질그릇이 부장된 점에서 학자들은 이 무덤을 왕릉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왕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1976년에 문화재위원회는 이 무덤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란 뜻으로 ‘황남대총’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을 잇댄 쌍무덤입니다. 먼저 만든 남쪽 무덤[南墳]은 왕의 능이었고, 북쪽 무덤[北墳]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중에 잇댄 왕비의 능이었음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남쪽과 북쪽의 무덤 모두는 돌무지덧널무덤이란 점에서 같으나, 내부구조에서 남쪽 무덤은 시신을 모신 주곽(主槨)과 더불어 부장품을 가득 채운 부곽(副槨)을 따로 둔 점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북쪽이 왕비의 능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 ‘夫人帶’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인데, 이 ‘부인’이란 표현이 당시에 왕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夫人帶’는 왕비의 허리띠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 북분에 안장된 왕비는 금관과 금으로 꾸민 허리띠 이외에도 금팔찌, 금반지, 금목걸이, 가슴꾸미개 등으로 치장하였습니다. 비록 비단옷과 장신구에 덧댄 직물이 거의 모두 썩어 없어졌으나, 남아있는 귀한 장신구는 생전에 누렸던 가장 화려한 복장을 입혀 장례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진. 왕비의 금관

 

왕비의 금관.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높이 27.3 cm, 국보 191호

 

왕비의 금관은 신라에서 유행한 나뭇가지모양 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개의 맞가지[對生枝]와 두 개의 엇가지[互生枝]로 조합된 세움장식[立飾]은 좁고 긴 머리띠에 높이 솟아오르도록 부착되었습니다.


맞가지는 정면과 좌우 측면에 세웠고, 엇가지는 뒤쪽으로 비스듬하도록 후면의 좌우측에 붙였습니다. 표면에는 무늬를 새기고 곱은옥과 달개를 촘촘히 매달아 한층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비취라고도 부르는 경옥으로 만든 곱은옥과 금판을 둥글게 오린 달개는 하나하나씩 금실로 매달았습니다.


머리띠 아래에는 굵은 고리에 사슬로 달개를 엮은 금제 드리개를 좌우에 세 개씩 늘어뜨렸습니다. 머리띠는 유기질로 된 끈으로 양끝을 묶었던 듯합니다. 굵은 고리의 금제 드리개는 착용한 사람이 여성이었을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대체로 남성의 귀걸이와 드리개는 가는 고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금관에서 맞가지와 엇가지가 조합된 최초의 것입니다.

 

황남대총에서 가장 의아한 수수께끼는 왕과 왕비가 지녔던 관(冠)을 둘러싼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생각과 전혀 다르게, 왕은 금동관을 지녔고 왕비는 금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구리판에 도금을 한 금동관과 순수한 금관은 재질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비록 왕의 관은 유일하게 곱은옥을 단 금동관임에도 불구하고, 재질이 금동인 점에서 금관에 비해 결코 우월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의 금동관은 세움장식이 세 개의 맞가지 뿐입니다. 이러한 왕과 왕비의 관은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관’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관’은 세움 장식의 모양에 따라 변화를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머리띠에 세 개의 맞가지만을 세웠습니다. 맞가지의 모양은 자연스런 나뭇가지처럼 가지가 밖으로 벌어진 것에서 점차 직각으로 꺾이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자연의 나무를 형상화한 듯하며, 초기 형태이므로 ‘시원형식(始原型式)’으로 분류하는데, 경주 교동에서 발견된 금관이 대표적입니다. 이 형식의 마지막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왕이 착용한 금동관입니다. 세움 장식은 맞가지 뿐이지만, 그 형태가 직각에 가깝게 꺾여 있어 뒤이은 형식과도 이어집니다.


‘나뭇가지모양 관’의 전형은 세 개의 맞가지에 더해 두 개의 엇가지를 조합한 것인데, 가장 다듬어진 형태이므로 ‘표준형식(標準型式)’으로 분류합니다. 새로 조합된 엇가지는 사슴뿔을 본떴다고도 합니다. 엇가지는 뒤늦게 더해졌으므로 이를 굳이 사슴뿔을 형상화했다고 볼 여지가 적습니다. 다만 상징 측면에서 나무와 사슴뿔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라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 단계 이후의 맞가지는 한결같이 모두 직각으로 꺾인 형태입니다.


표준형식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에서 처음으로 완성되며, 금관총(金冠塚) 및 서봉총(瑞鳳塚)의 금관과 더불어 표준형식이 성립하는 단계에 속합니다. 표준형식 성립단계의 금관은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점이 특징입니다. 이후에 만들어진 천마총(天馬塚) 및 금령총(金鈴塚)의 금관은 표준형식 발전단계에 속하며, 맞가지의 마디가 4단인 특징을 지닙니다.


즉 ‘나뭇가지모양 관’의 표준형식은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것에서 4단인 것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으로 점점 빽빽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인 ‘퇴화형식(退化型式)’은 추측하건데 더 이상 금관이 만들어지지 않는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관에 내포된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단계이므로 필요 이상으로 꾸밈이 많아지거나 오히려 급격하게 간단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퇴화형식에서도 가장 마지막은 구리판을 적당히 잘라 만든 동관(銅冠)입니다. 동관의 착용자는 함께 부장된 방울 등으로 볼 때 이전 단계의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무당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상은 ‘나뭇가지모양 관’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왕과 왕족은 기록에 따르면 한때 제사장이었으며, 마립간시기(麻立干時期)까지 꾸준히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였습니다.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모양 관’은 신성한 나무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는 통치자이자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는 신라의 마립간과 그 일족의 성격에 부합하는 도안이라고 해석됩니다. 마립간시기 직후인 중고기의 법흥왕(法興王)은 전통제의의 중심이었던 신궁(神宮)을 대신하여 불교를 공인하였고 더불어 국왕의 세속적 권위를 월등히 강화시켰습니다.


이로써 신라의 왕에게는 전통제의와 관련된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모양 관’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듯합니다. 다만 나뭇가지모양 관이 지니고 있던 제의적 상징은 그대로 민간에 전승되어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채 무당의 신물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 1 시원형식. 경주 교동출토 금관 2 표준형식. 경주 천마총 출토 금관 3 퇴화형식. 단양 하리 출토 동관

 

1 시원형식. 경주 교동출토 금관, 높이 12.8 cm

2 표준형식. 경주 천마총 출토 금관, 높이 32.5 cm, 국보 188호

3 퇴화형식. 단양 하리 출토 동관, 높이 26.9 cm호

 

금관과 함께 사용된 신라의 허리띠는 가죽 띠에 황금으로 만든 띠꾸미개[銙板]를 붙이고, 그 아래에 역시 황금으로 만든 여러 형상을 매단 띠드리개[腰佩]를 드리웠습니다.


금제 허리띠꾸미개는 금관과 더불어 왕족만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신구로 다루어졌습니다. 띠꾸미개는 네모꼴의 판에 하트 모양의 드림을 달았습니다. 네모꼴 속에는 용봉무늬 또는 세잎무늬를 넣었는데, 이 두 문양은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것이 모두 신라에 전해진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세잎무늬가 주류로 정착하여 변화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 곱은옥, 칼, 집게 등을 매달았습니다.

 

  

사진. 왕비의 허리띠

 

왕비의 허리띠. 경주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길이 120 cm, 국보 192호

 

그간 학계에서는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한 신라 능묘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난 신라가 독자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일학계에서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의 왕릉이라는 학설이 다수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내적 수준을 지나치게 낮추어보는 시각을 비판하고, 중국 동북지방의 4세기대 무덤과의 비교를 통해 황남대총의 부장품은 마립간시기 초기의 양상일 수 있다는 학설이 등장하였습니다.


이 학설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왕릉으로 보았습니다. 최근에는 고구려의 영향이 아직 상당히 남아 있으며 마립간시기 초기의 시원적 양상에서 벗어난 시기를 배경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는 학설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논점은 왕이 금동관을 지닌 점에서 눌지마립간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재위 402~417)의 왕릉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비인 북분의 주인공은 왕인 남분의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학설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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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남대총 은관

은관은 황남대총의 남쪽 무덤, 즉 왕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당시에 아무래도 금관보다는 은이나 금동으로 만든 관이 더 많았을 것이지만, 은관은 부식이 잘 되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얼마 되질 않습니다. 황남대총의 은관은 금제 관꾸미개, 은제 관모와 함께 부장품의 가장 위쪽에서 출토되었는데, 이처럼 완전한 은관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전체적인 모양은 관테의 가운데에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 모양의 큰 세움장식을 오려 장식한 다음, 좌우에 새날개 모양의 세움장식 1개씩을 은못으로 부착하였다. 이 새날개 모양의 세움장식에는 신라시대 관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바깥쪽으로 일정한 폭으로 오려낸 다음 하나하나 꼬아서 새털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관테와 세움장식에 작은 금동제 원형 장식을 여러 개 매달았고, 가장자리에는 한 줄로 뒷면으로부터 두드려낸 연속점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높이는 17.2, 머리띠 너비 3.2, 지름 16.6, 보물 제63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황남대총 남분의 금동 관모

 

 황남대총 남분의 금동 관모와 은제 관모


오른쪽 관모는 높이가 17.0입니다. 은제 관모는 1매의 은판을 고깔 모양으로 접어 만들었습니다. 아래쪽 테두리는 조금 둥글게 만들고 끝은 밖으로 한 겹 말아 붙여 처리하였습니다. 뒷면에는 완만한 다이아몬드 무늬를, 몸통에는 번개무늬를 두드려 새겼습니다.

 

그리고 모자의 앞쪽에는 금동의 투조판(透彫板)을 덧댄 오각형의 은판을 덧붙였습니다. 오각형 판에는 간략화된 용무늬 혹은 넝쿨무늬(唐草文)를 가득 표현하였습니다. 이 투조판의 바탕은 무늬가 없는 은판이어서 금동 투조문양 사이사이에 백색의 은판이 드러나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 같습니다.


 

황남대총 남분의 금제 관꾸미개

 

3매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 금판 좌우에 새날개 모양의 금판을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 금판이 돌출되어 있어 산()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랫부분은 차츰 좁아져서 V자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면에 작은 원형 장식을 달았으나, 가운데 금판 밑의 관에 꽂게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습니다. 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점을 찍어 처리하였습니다. 가운데 금판은 세로 중심선에서 안으로 약간 접은 상태여서, 밑의 뾰족한 부분은 무엇인가에 꽂았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평소에 썼던 관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높이는 45, 날개 끝 너비는 59, 보물 제6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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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품, 해외명품 치장으로 경쟁한 신라인들


신라 왕관(王冠)은 5~6세기 마립간 시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금관은 왕족 중에서 남녀 모두가 사용했던 반면 금동관은 왕족 중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과 왕비가 모두 착용한 바 있는 신라 금관은 신라 왕실과 귀금관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만 발견되는데 비해 금동관은 신라의 영향력이 미친 경상남도로부터 경기도 파주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금, 은, 동의 차이는 분명히 그 주인공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시대 순금제 관은 사회의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인 동시에 신라 금속공예의 최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본장에서 금관이라 통칭하는 것은 대륜식 입식관(일명 금관류)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며 소재는 금을 사용한 것을 지칭한다. 순금관이 발견된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천마총(天馬塚)은 모두 단분이다. 각각의 무덤의 주인공은 일단 신라의 왕일 것으로 생각된다.


금관에는 나무·나뭇잎·사슴뿔 장식·새·꽃과 풀 등이 장식되어 있다. 금관에서 나무는 생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성스러운 존재로 보호를 받는 신수(神樹)이다. 특히 수목형 입식[山자 겹칩식]과 양쪽의 사슴뿔장식[鹿角形立飾]은 시베리아의 샤만(Shaman)의 관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슴은 당시 가장 중요한 양식원으로 숭배의 대상이자 식량이었다.


여기에 금실로 곱은옥(曲玉)과 영락(瓔珞)을 달았는데, 곱은옥은 나무의 과실로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애초에는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겠으나 나중에는 장식적으로 발달하여 독특한 형태를 이룬 것으로 짐작된다.


곱은옥(曲玉)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뭇가지 모양의 금관에 열매 모양으로 달리기도 하고 귀고리·허리띠·목걸이에도 장식으로 달리기도 한다.


나뭇잎 모양은 원형과 끝이 뾰족한 심엽형(心葉形 : 하트형 잎모양)이 있다. 금관에만 달려있는 나뭇잎은 신라인이 숭배하던 백화나무의 잎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금관에 장식된 새는 높은 나무를 통하여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천계와 인간의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의 역할로 상징된다.

 

기본적인 구조는 대 모양(帶狀)의 얇은 황금 판을 새겨서 무늬를 나타낸 후, 그 위에 영락(瓔珞;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서 머리,목,가슴 따위에 두르는 장신구)이나 곡옥(曲玉;곱은 옥)을 단 것으로, 금빛의 반사가 무수한 명암(明暗)을 이루어 반사되는 빛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금관이 중앙 및 지방의 정치적 우두머리의 신분적 상징물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하지만 금관의 세부장식이 뜻하는 의미는 학자들마다 학설이 제 각각일 만큼 여전히 안개 속에 휩싸여 있다. 또한 금관이 실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장례용 부장품이라는 설도 강력하게 제기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근거는

첫째, 금 100여 돈 가량이 들어가는 금관의 전체 무게는 1kg 정도, 평상시 쓰고 다니기에는 버거운 무게다.


둘째, 천마총 금관을 재현해 보았더니 완성된 금관은 수많은 장식의 무게 때문에 흔들리고 불안정해서 테와 연결되는 부분이 몇 발짝만 움직여도 흔들려서 꺾일 것 같다고 한다.

발굴된 금관들은 얇은 금판에다 입식(솟은 장식)이 매우 높고 수백 개의 곡옥까지 달려있어 구조가 약하다.

그래서 평소 왕이나 왕족이 쓰던 것이 아니라 장례용품이 아닌가 추정된다는 것이 요지이다.

 

참고자료

유희경, 김문자, “한국복식문화사”, 교문사, 1998.

유희경, “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대출판부, 1975.

김문자, “한국복식문화의 원류”, 민족문화사, 1994.

김병모, “금관의 비밀”, 푸른 역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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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황금보검은 어떻게 이역만리 신라에까지 왔을까. 중국이나 고구려를 통한 수입이거나, 혹은 중앙 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소그드·박트리아·에프탈 상인들의 거래한 해외명품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신라의 어떤 계층이 이 해외 명품을 수입했을까.


신라의 황금보검

http://blog.daum.net/yescheers/8599002

  

앞서 밝혔지만 신라의 장례문화는 독특했다. 특히 4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가히 무덤경쟁이 벌어졌다.

 

왕과 왕족들은 자신의 배타적인 지위를 과시하려고 무덤을 대형화하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렀다. 현세의 삶이 내세까지 이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때문에 사후의 안식처인 무덤에 자신의 권세와 부를 그대로 옮기려고 했다.

생전에 모아둔 고급 사치품으로 무덤을 가득 채웠다. 그것도 모자라 온 몸을 황금으로 치장했다.

 

여기에 해외에서 사들인 온갖 명품들도 무덤을 꾸몄다. 앞서 밝혔듯이 대표적인 외래품은 계림로 황금보검을 비롯해 은제타출문 그릇과 식리총 출토 신발, 감옥 팔찌, 그리고 25점의 유리그릇 등이다. 유리그릇은 왕릉급 무덤인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등에서 출토됐다. 결국 해외 명품은 신라 고위층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이다.

경쟁적으로 명품을 사들였을 것이다. 그랬으니 도굴이 무서웠을 것이다. 나무곽을 만들어 시신을 안장하고 그 위에 엄청난 돌 무더기를 쌓았다.

    

황남대총 남분에 쌓은 돌의 경우 2.5t 트럭으로 758대분이었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물론 그 덕분에 1500년 후의 후손들은 그들이 남긴 찬란한 황금유산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지만….

 

그러나 황금보검은 발굴이 끝난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처럼 귀한 고고학 자료로 나와도 정확한 해석은커녕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기 일쑤다.

섣부른 발굴도 금물이고, 섣부른 해석이나 주장을 펼치는 것도 가소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