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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금관을 기생 머리에 씌우다니 - 서봉총의 주인은

by 연송 김환수 2018. 12. 6.

서봉총 출토 금관을 평양기생 차릉파 머리에 씌우다니

 

서봉총(瑞鳳塚)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고이즈미(小泉顯夫) 등이 발굴하였다.

 

고분 발굴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참가한 것을 기념하여,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의 ‘서(瑞)’ 자와 출토 금관의 봉황(鳳凰)장식에서 ‘봉(鳳)’ 자를 따서 고분의 이름을 서봉총(瑞鳳塚)이라 하였다.

 

지금부터는 서봉총 금관에 얽힌 이야기와 서봉총의 주인에 대해서 언급해 보기로 한다.  

 

 

서봉총(瑞鳳塚) 금(金冠)

 

 

 

 

 

 

 

 

 

 

서봉총(瑞鳳塚)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금관, 금제과대와 요패가 출토된 대형분으로 마립간시기 신라의 왕·왕비릉 급에 해당하는데, 황남대총 북분과 함께 당시 여성도 금관을 착용하였음을 알려준다.

 

서봉총(瑞鳳塚) 금관(金冠)은 봉황 장식이 붙어 있어 다른 신라 금관과 명확하게 구별되는데 봉황은 고대에도 최고 권력자를 상징했다.

 

 

금관은 5개의 세움 장식과 봉황 장식을 고정한 2매의 긴 금판 양쪽 끝을 관테에 고정했으머, 관테에도 6개의 곱은옥을 장식했는데 1926년 발굴 사진과 1934년 촬영 사진에서 확인됐다.

 

서봉총 금관은 교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사한 결과 현재의 금관은 1926년 출토 당시의 모습과 다른 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서봉총의 금관과 금관테에서 떨어진 곱은옥들은 1939년 서로 다른 번호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등록이 됐고 국립중앙박물관은 곱은옥이 관테에서 떨어진 것이 1934년과 1939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훼손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 시기에 금관과 관련된 일본 고이즈미의 만행이 있었다.

고이즈미가 평양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935년 서봉총 금관을 평양 기생의 머리에 씌우고 찍은 사진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다.

 

19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서울에 보관중인 서봉총 출토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를 대여받아 특별 전시를 열었다.

이 때 평양박물관장으로 있던 일본인 고고학자 고이즈미(小泉顯夫)는 서봉총 금관을 발굴해낸 장본인으로 문제의 사건은 전시회가 끝나고 유물들이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일어났는데, 평양 기생(妓生) 차릉파(車綾波)에게 금관 등의 발굴된 장신구를 착용케 한 것이다.

 

사건은 당시 일반에게는 알려지지 않아 무사히 지나갔으나, 이듬해인 1936년 6월 금관을 쓴 문제의 기생 사진이 시중에 나돌면서 문제가 되었다.

 

1936년 6월 부산일보의 평양 주재 기자는 이 사건을 송고하였는데 1936년 6월 29일자 부산일보는 금관 등을 착용한 기생의 사진과 함께 3단 기사로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금관의 파문. 박물관의 실태, 국보를 기생의 완롱물(玩弄物)로. 평양에서 문제화 라는 타이틀로 신라의 금관을 쓴 평양의 명기 차릉파(車綾波)의 사진이 시중에 산견(散見)....... 평양부립박물관에서 촬영한 것으로 박물관 당국이 국보인 서봉총 금관을 기생에게 씌워 사진 촬영을 한 일이 점차 파문을 크게 일으키고 있다.......라는 비난 기사를 싣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평양박물관이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 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는데 전시회가 끝나고 뒤풀이 연회에서 발생했다.

 

평양 기생들이 총출동하여 술판이 한창 벌어질 무렵에 사고가 터졌는데 취흥을 돋우기 위하여 서봉총 금관을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씌우고 이 것도 모자라 금제 허리띠·귀걸이 등의 장신구까지 패용케 하였다.

 

신라 경순왕(56대)이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것이 935년이고, 평양기생 차릉파가 금관을 쓴 것이 1935년이니까 1000년만에 신라 제57대 왕후로 등극한 사건인데 그렇다면 신라 57대 왕은 차릉파의 기둥서방이 되는데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 사건은 이듬해인 1936년 6월 뒤늦게 폭로되고 차릉파는 기생 재벌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유명세를 타게된다.

 

고이즈미 관장은 신문보도 후 총독부로부터 견책을 받고 시말서까지 썼다고 하지만, 평양박물관직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1945년 5월에는 국립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전시된 서봉총 금관을 훔쳐 사라졌지만, 다행히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서봉총 출토유물을 살펴보면, 나무널 안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었던 금관과 관수식(冠垂飾), 금제 태환식(太環式) 귀걸이, 마노 대롱옥·수정 다면옥·각종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은·유리구슬을 꿰고 끝에 비취곡옥을 단 가슴장식, 금제과대(金製銙帶)와 요패(腰佩), 금·은 팔찌와 유리팔찌, 금반지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금제 태환식 귀걸이는 이외에도 금관의 동쪽과 과대 아래에서도 요패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나무널 안에서는 이와 같은 장신구 외에는 소형의 금동장 도자가 1점 출토되었을 뿐이며, 대형요패가 피장자의 오른쪽 허리 아래에 착장되어 있었다.

 

이는 관수식과 귀걸이가 태환식인 점과 함께 여자 무덤이 확실한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과 같은 특징이어서 서봉총의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말해준다.

 

부장품들 가운데 은제대합(銀製大盒)에서는 뒤에 뚜껑 안쪽 면과 그릇 바닥에서 바늘 같은 것으로 새긴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연수원년(延壽元年)’, ‘태왕(太王)’, ‘신묘(辛卯)’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은합은 무덤의 조성연대와 주인공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에 대왕(大王)이 이 은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연수’라는 점, 또한 고구려왕을 지칭한 ‘태왕’이라는 글자가 나온 점, 또한 신묘년이라는 간지….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은합의 제작연대는 연수원년이자 신묘년인 451년이다.

 

신묘년은 60년 주기로 서기 391년, 451년, 511년인데 은합의 제작은 451년설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은제대합의 제작연대 451년을 기준으로 19대 눌지왕(?~458, 재위 417~458) 또는 제20대 자비왕(?~479, 재위 458~479)의 왕비릉으로 추정을 하든지, 후대 인물로 보려면 은제대합의 신묘년을 511년으로 보거나, 아니면 451년에 제작된 은제대합을 상당기간 보존(60년이상) 또는 사용했던 은제대합을 서봉총에 부장품으로 묻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후대 인물로 추정을 한다면, 소지왕(재위 479~500)후비였다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 514) 시대를 거쳐, 지증왕의 아들인 법흥왕(생몰487~540년, 재위 514~540년 음력 7) 후궁을 지내며 3대에 걸쳐 영화를 누린 벽화부인을 서봉총 금관에 장식된 봉황 3마리와 연결시켜 본다면 벽화부인이 능의 주인공으로 가장 유력하지 않겠는가? 

 

 

 

금관 봉황(鳳凰)장식 

  

 

찬란한 빛을 발한 서봉총 북분의 금관 주인공은 소지왕(재위479~500)의 왕비(정비)인 선혜부인(善兮夫人)일 가능성을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지만, 후비인 벽화부인 능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선혜왕비는 딸을 둘 낳았는데, 첫째는 법흥왕의 왕비가 되는 보도이고, 둘째는 오도이다.

보도는 소지왕의 딸이 맞지만, 오도는 묘심이란 중과 간통하여 낳은 딸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선혜부인은 묘심과의 간통사건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상식선에서 소지왕이 뭐가 이쁘다고 금관을 비롯한 금은보화로 부장한 커다란 능을 만들어 주었겠는가?  당시 왕비 집안이 명문가로 건재하고는 있었지만, 왕의 입장과 왕비집안의 입장을 반영하여 민초들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의 한단계 낮은 무덤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선혜왕비가 후대에 왕이 될 아들을 생산한 것도 아니고, 중과 간통한 사건으로 소지왕이 왕비인 선혜부인을 처형하는 마당에 무슨 큰 무덤을 조성하고 금관을 비롯한 금제과대(金製銙帶), 요패(腰佩), 금·은 팔찌와 유리팔찌, 금반지 등의 각종 장신구를 넣어 부장했다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라시대가 모계사회라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소지왕의 후비인 벽화부인이 소지왕 사후에 지증왕의 아들인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고 법흥왕과의 사이에서 삼엽공주를 낳았고, 법흥왕의 총애를 받은 비량과 혼인 전에 구리지 를 낳았고, 구리지의 아들이 화랑 풍월주 사다함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벽화부인 이 더 유력하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소지왕이 죽자, 벽화는 소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제22대 지증왕의 태자인 원종(제23대 법흥왕)을 섬겼다. 벽화는 처음에 소지왕의 후비가 되었다가, 다시 조카뻘인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비량의 부인이 된다.

그녀는 비량에게 시집가기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구리지이고 급찬(級飡)을 지낸 구리지의 아들이 화랑의 제5대 풍월주 사다함이라고 한다.

 

 

 

 

 

 

 *** 참고로 아래 도표안에 신라왕조실록 제21대 소지왕과 선혜부인, 벽화부인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보시면 일부 이해가 될 듯 ㅠ ㅠ  

 

서봉총 고분은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아 당시 신라의 왕비나 또는 왕비에 버금가는 공주 등 최고 지배층의 여성묘로 추정될 뿐이다.

 

두개의 고분이 잇닿아 있는 서봉총은 북분의 크기가 남분보다 두배 가까이 큰 것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북분의 형태가 원형이 아닌 동서 방향의 타원형이며, 축의 길이는 42.2∼46.7m로 확인됐으며 남쪽 고분(남분)의 장축 길이인 25m보다 두배 가까이 큰 규모다.

 

이처럼 많은 사연을 간직한 서봉총 금관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는데 무덤의 규모와 함께 출토된 유물의 종류로 보아 왕비나 공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서봉총은 북분과 남분이 있는데 봉분의 크기가 무덤 주인의 신분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서봉총의 북분보다 크기가 작은 남분에는 신분이 낮거나, 어린아이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서봉총의 북분이 소지왕의 후비인 벽화부인의 능이라고 가정을 한하면 남분은 내물왕의 5대손이 되는 비량(比梁)일 것이고 아니면 벽화부인 모자(母子) 또는 모녀(母女)의 무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 내물왕 - 눌지왕(미해공) - 황아(산황) - 덕지(비태) - 미고(비지) - 비량(比梁) - 구리지 - 사다함


 

 

신라왕조실록 제21대 소지왕과 선혜부인, 벽화부인

 

소지왕(재위479~500)의 부인은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 두 사람인데, 이 두 사람 모두 특이한 기록을 지니고 있다.

 

선혜부인은 생몰년은 미상이며, 이벌찬 내숙의 딸로 알려져 있다. 언제 소지왕의 부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왕실의 관례로 보아 소지왕이 태자로 있을 때 시집온 것으로 보인다.

 

선혜는 딸을 둘 낳았는데, 첫째는 법흥왕의 왕비가 되는 보도이고, 둘째는 오도입니다.

보도는 선혜와 소지왕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오도는 선혜가 소지왕 몰래 묘심이라는 인물과 사통(私通)하여 낳은 딸이다. 오도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고 화랑세기에서 전하고 있다.

 

선혜부인이 묘심과 간통한 사건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21대 비처왕(소지왕) 즉위 10년 무진(488년)에 왕이 천전으로 거동 하였더니, 이때에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소서.” 하였다. 왕이 말 탄 군사를 시켜 그 뒤를 밟게 하였다.

 

말 탄 군사는 남쪽 피촌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 버렸다. 따르던 군사가 길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 웬 늙은 노인이 못 한가운데서 나와 편지를 주었다.

편지 겉봉에는 “떼어 보면 둘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쓰여 있었다. 심부름 갔던 자가 돌아와 편지를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편지를 떼어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편지를 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고 하였다.

 

그러자 점치는 관리가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임금님이외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이 옳다싶어 편지를 떼어 보니, 그 속에 ‘거문고집을 활로 쏘라’ 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왕이 대궐로 돌아가 거문고집을 쏘고 보니, 그 속에서는 내궁에 머물며 불공을 드리는 중과 궁주가 몰래 간통을 하고 있었다. 왕은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소지왕에겐 부인이 하나뿐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궁주는 바로 왕비 선혜부인으로 그녀와 간통했던 중은 묘심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이들 두 사람의 간통 장면을 목격한 소지왕이 둘을 모두 처형했다고 되어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선혜부인이 묘심과 사통하여 오도라는 딸을 낳았다고 했으니, 선혜부인의 불륜행각이 발각되지 않고 지속되다가 간통 목격이후에 오도가 묘심의 딸로 확인된 듯하다.

 

신라 왕실에서는 왕비가 사통했다고 해서 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적으로 매우 자유분방했던 신라 왕실에서는 왕비가 사통하여 아이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대개 왕비들이 왕의 사촌 또는 이복동생이나 조카였기 때문에 부부이기 이전에 철저하게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따라서 이들의 결혼은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기에, 왕비들이 좋아하는 남자를 발견하여 사통을 일삼은 것은 바로 이런 독특한 결혼 풍습의 한 뒷면이었던 것이다.

 

왕비가 사통하여 얻은 아이라고 하더라도, 대개 그 아이는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또한 당시 풍습이었다.

 

선혜와 묘심이 사통하여 낳은 오도 역시 후에 화랑의 시조가 되는 위화랑과 사통하여 딸을 낳는데, 그 딸이 법흥왕의 애첩 옥진궁주이다. 옥진은 원래 영실이라는 인물에게 시집갔으나, 법흥왕이 그녀를 총애하여 애첩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녀와 법흥왕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비대(比臺)인데, 후일 이 비대의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신라 왕실은 큰 논란을 벌이게 되는데 이처럼 신라 사회의 남녀관계는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자유분방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화랑의 우두머리 제9대 풍월주 비보랑(秘宝郞)은 비대(比臺) 전군(殿君)의 아들이다. 비대공은 법흥왕(法興王, 514~539)의 서자(庶子)였는데, 어머니는 궁주였던 옥진(玉珍)이다.

 

소지왕(재위479~500) 재위 500년 3월에는 왜군이 장봉진(경북 포항 근처)을 공략하여 점령해버리는 등 그야말로 남북으로 적군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형국이었다. 이처럼 외침에 시달리고 있는 판에 설상가상으로 그해 4월에는 폭풍이 밀려와 몇백 년 된 큰 나무들이 뽑혀 나가고, 농토를 초토화시키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민심이 흉흉해 지다보니 또다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군왕을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고, 이에 반란세력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쯤 되자 소지왕도 무력감을 드러내고 국사를 포기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무렵, 소지왕은 벽화라는 한 젊은 여인에게 푹 빠져 있었는데, 그는 정사는 제쳐두고 걸핏하면 그녀의 집으로 행차하곤 했습니다.

 

벽화는 영주의 옛 이름인 날이군의 통치자였던 파로의 딸이었습니다. 당시 소지왕은 예순이 훨씬 넘어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고 벽화는 열여섯 살 난 낭자였는데, 소지왕이 기어코 그녀를 임신시키자, 사람들은 그 일을 두고 말이 많았습니다. 결국 소지왕은 그녀를 입궁시켜 후궁으로 삼았지만, 그는 벽화를 들어 앉힌 지 불과 두 달 만인 500년 11월에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소지왕도 전 왕과 마찬가지로 마립간을 칭호로 사용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소지왕의 부인은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 두 명입니다. 선혜부인은 후에 제23대 법흥왕의 왕비가 되는 보도부인을 낳았으며, 벽화부인은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하지만 벽화부인이 낳은 아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를 않아,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소지 마립간과 처녀 벽화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적어보면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조(서기 500년)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해 9월 소지 마립간은 날이군(지금의 영주시)에 행차했는데 날이군의 세력가인 파로라는 사람이 소지 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한 것을 알고 딸 벽화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들것에다 태우고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를 덮어 씌워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줄 알고 열어보니 어린 여자가 있어 괴이하게 여기면서 물리치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지간히 미인이었는지 왕은 궁궐에 돌아와서도 벽화를 잊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고 벽화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자 그리움을 못 이겨 수행원 몇 사람만을 데리고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 몇 차례에 걸쳐 벽화를 만나러 갔다.

 

그렇게 밀회를 즐기던 어느 날 고타군(지금의 안동)을 지날 즈음 해가 기울어 어느 할머니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문득 백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져서 할머니에게 나라 사람들이 왕을 어떤 임금으로 생각하는지를 묻자 할머니는 "모든 백성이 성군이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왕이 날이의 여자에 반해 백성의 옷차림을 한 채 온다"며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붙잡히는 법"이라고 충고하였다.

 

왕은 할머니의 솔직한 말에 부끄럽게 여겼으나 벽화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벽화를 경주 왕궁으로 불러들여 아들 하나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조를 보면 벽화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곧바로 이 해 11월에 소지 마립간이 죽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9월에 만났는데 11월에 죽었다면 소지 마립간은 벽화와의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게 된다. 사실 소지 마립간이 이 때 나이가 많았다. 소지 마립간의 생년을 알 수 없지만 후임자인 지증왕이 고령으로 즉위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소지의 나이도 고령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때문에 벽화와 만난지 얼마 못 가서 죽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음모가 있지 않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삼국사기 같은 편년체 사서에서 어떤 사건의 정확한 연대를 모를 경우 그 왕 재위기의 마지막 해에 기사를 수록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에 벽화와의 이야기가 소지 마립간조 마지막 해에 수록된 것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화랑세기에는 소지왕 사후에 벽화부인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하고 있다.

 

소지왕이 죽자, 벽화는 소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제22대 지증왕(智證王, 437~ 514, 재위: 500~ 514)의 태자인 원종(제23대 법흥왕 재위514~ 540년 음력 7)을 섬겼습니다. 지증왕은 소지왕의 6촌 동생이므로 원종에게는 큰아버지뻘이 됩니다. 말하자면 원종은 손위 큰 숙모인 여자와 관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의 풍습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 태자 원종에겐 태자비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소지왕의 딸 보도부인입니다. 그런데 원종은 보도부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원종이 좋아하는 여자는 보도의 동생 오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도는 벽화의 남동생인 위화랑을 좋아하여 서로 사통하고 있었던 사이였습니다. 삼각, 사각관계도 아니고 관계가 너무 복잡하여 설명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아무튼 법흥왕이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오도를 아시공에게 주어 버렸다.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벽화 또한 법흥왕 외에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법흥왕이 총애하던 인물 중에 비량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벽화를 좋아했던 것이다. 벽화 또한 그를 몹시 좋아하여 그들은 늘 뒷간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비량은 벽화를 너무 사랑하여 궁궐에 오기만 하면 늘 벽화부인의 뒷간으로 가서 그녀와 정사를 나누곤 했는데, 법흥왕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비량을 너무 아낀 까닭에 벽화를 비량에게 내주어 시집가도록 한다.

결국, 벽화는 처음에 소지왕의 후비가 되었다가, 다시 조카뻘인 법흥왕(생몰487~540년 음력 7) 재위 (514~540년 음력 7) 의 후궁이 되어 법흥왕과의 사이에 삼엽공주를 낳았고, 이후 비량의 부인이 된 것이다.

그녀는 비량(比梁)에게 시집가기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구리지입니다. 구리지(仇梨知)의 아들은 화랑의 우두머리 제5대 풍월주 사다함(斯多含)이다.

 

 

신라 왕실의 여인들은 이처럼 여러 남자를 거치며 결혼 생활을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신라 사회에선 여자가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신라 사회에서 모계를 중시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지왕의 후임자인 지증왕(智證王)은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제19대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의 딸인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이다. 지증왕(智證王)이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 479~500)의 6촌 동생(再從弟)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의 아버지인 습보갈문왕은 눌지마립간의 동생 가운데 누군가의 아들이 된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지증왕의 아버지가 눌지마립간의 동생인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이며, 어머니는 눌지마립간의 딸인 오생부인(烏生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는 이찬(伊湌) 등흔(登欣)의 딸인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영제부인(迎帝夫人)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500년(소지 22) 소지마립간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64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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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斯多含, 547~563)의 가계는 신라의 진골(眞骨) 가문으로, 내물 마립간의 7대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급찬(級飡) 벼슬을 지내던 구리지(仇梨知)였으며 할아버지는 비량(比梁)으로 성은 김()씨였다.

 

구리지는 사다함의 아버지로 급찬(級飡)의 직위에 있었다는 것 외에 다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구리지는 비량공(比梁公)과 벽화부인이 사통하여 낳은 자식으로, 사통한 장소가 궁궐의 화장실이었기 때문에 구리지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궁중에서 자란 구리지는 금진낭주와 사통하여 토함(免含), 사다함, 새달을 낳았다. 설성(薛成)은 구리지의 용양신(龍陽臣)이라고 한다.

 

위서 논란이 있는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국선이었으며, 5대 풍월주였다고 한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비량공과 벽화후(소지 마립간의 후비이자 법흥왕의 후비인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누나) 사이의 아들인 구리지의 아들이다.

사다함의 어머니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자 4세 풍월주 이화랑의 남매인 금진. 형제로 친형 토함(4세 풍월주 이화랑의 부제)과 아버지가 다른 동생 설원이 있다.

 

신라 진흥왕 때의 화랑으로 무척 유명하여 관창이나 반굴 등과 함께 화랑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그 행적이 실려 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나 뛰어난 실력으로 대가야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사로잡은 대가야 백성 300명을 모두 자유롭게 풀어준 대인배적인 일화를 남겼다. 또한 친구인 무관랑이 세상을 떠나자 이를 슬퍼하다가 곧 따라 세상을 떠난 일화로도 유명하다.

 

사다함은 근본이 좋은 귀족 가문의 자제로 그 풍모가 깨끗하고 외모가 준수해서 그 지기(志氣)가 드높았다 전해진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다함을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니 사다함은 청을 이기지 못해 화랑이 되었는데 그 인기가 엄청나서 그를 따르는 낭도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비량(比梁), 구리지(仇梨知), 사다함(斯多含)의 가계도

 

사다함(斯多含, 547~563)은 진골(眞骨) 가문으로, 내물왕(마립간) 7대손이다

내물왕 - 눌지왕(미해공) - 황아(산황) - 덕지(비태) - 미고(비지) - 비량 - 구리지 - 사다함

*** 산황의 아버지(친부)는 미해공이다.

 

 

* 덕지(德智) : 관등은 급찬(級飡). 벌지伐智, 관등 아찬)와 함께 신라 자비 마립간 시대 신라의 양대 장군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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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의 뒤를 이어 제23대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가 되는 삼맥종이 왕위에 올라 제24대 진흥왕이 되었다.

 

법흥왕은 지증왕과 연제부인의 아들로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그녀가 소지 마립간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정사에선 아버지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 딸로 지소부인을 뒀는데, 지소부인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과 결혼해 아들로 삼맥종(진흥왕)과 숙흘종을 뒀다.

 

화랑세기, 金大問, 9세 비보랑, p.110

 

9세 풍월주 비보랑(秘宝郞)은 비대(比臺) 전군(殿君)의 아들이었다. 비대공은 법흥왕(法興王, 514~539)의 서자(庶子)였는데, 어머니는 궁주였던 옥진(玉珍)이었다. 옥진은 지증왕(智證王)대 법흥왕이 태자의 신분이었을 때 총애하였던 오도(吾道)가 위화랑(魏花郞)과 사통하여 낳은 딸이었는데, 모습이 아름다워 법흥왕이 매우 총애하였다.

 

옥진이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을 때 법흥왕은 친히 길례(吉禮)를 행하였다고 한다. 옥진은 입궁하여 궁주(宮主)의 지위를 얻고 법흥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비대(比臺)공을 낳았다. 비대공은 법흥왕의 아들로 전군(殿君)의 지위를 얻었다. 당시 법흥왕의 정비는 보도(保道)부인이었는데 옥진이 비대 전군을 낳자, 법흥왕은 정비 보도에게 비구니가 되라는 명을 내렸다.

 

법흥왕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적통의 아들이 없었다. 때문에 법흥왕의 아우 입종(立宗)과 법흥왕의 딸 지소(只召)부인에게서 태어난 진흥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런데 법흥왕은 생전에 옥진(玉珍)궁주에게서 본 아들 비대(比臺)전군이 있었다. 법흥왕은 자신의 아들 비대공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고 싶어서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 왕실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법흥왕의 아우였던 입종(立宗)의 부인으로 진흥왕(眞興王)을 낳은 지소(只召)부인을 지지하는 쪽과, 법흥왕의 아들 비대전군과 옥진궁주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때 옥진의 아버지 위화랑(魏花郞)은 법흥왕의 신하였는데, 비대전군이 태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의 딸 옥진이 입궁하기 전에 한때 영실(英失)을 지아비로 삼아 혼인하였던 적도 있었으며, 골품(骨品)이 천한 것을 들었다. 위화랑은 옥진이 골품이 없다(無骨品)”고 표현하였다.

 

옥진은 대원신통(大元神統)의 혈통을 가지고 왕의 빈첩은 될 수 있었지만, 성골(聖骨)이라는 신분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골이 아니었던 옥진이 낳은 비대전군은 법흥왕 당시의 왕위계승 원리에 맞지 않아서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할 수가 없었다.

 

 

 

대원신통(大元神統)

 

대원신통(大元神統, 神通)은 왕과 그 일족의 부인을 공급하는 계통인 인통(姻統)이 아니라, 대원부인(大元夫人) 보미(寶美)로부터 시작된 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로부터 이어지는 후손들을 말하는 황가(皇家)를 말하는 것이다.

 

법흥왕과 가장 가까웠던 여자는 옥진궁주로 왕의 총애를 받았던 여자들은 월성(月城) 안에서 살았는데 월성에서는 성골만 살게 되어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은 여자들은 월성의 독립된 집에서 살았는데 이름을 따라 옥진궁, 미실궁이라 불렀다.

 

신라에는 왕비를 배출하는 진골정통이 있고 대원신통이 있다. 진골정통은 옥모를 시조로 하는 인맥으로 미추이사금(13대 왕으로 김씨 최초의 왕)이 “옥모의 인통으로 왕후를 삼으라”고 말 한데서 비롯되었다.

 

대원신통이란 보미라는 여자를 시조로 하는데 자세한 계통이 이어지는 진골정통과 달리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대원신통이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를 겸했다는 학설도 있다. 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은 모계로 이어지는 모계사회 전통을 유지했다. 아들이 태어나면 당대에 한해 모계전통을 이어받았다.

 

보미궁주(宝美宮主) :『대원부인(大元夫人) 보미(宝美)가 훙(薨)하니 수(壽) 82세였다. 미해왕릉(美海王陵)에 장사하였다. 보미(宝美)는 다파나왕(多婆那王)의 딸이다. 미해왕(美海王)을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노왕(老王)에게 총애를 얻고 자녀 12인을 낳았다. 뒤이어 연제(蓮帝)와 해량(海粱)이 총애를 얻은 이래로는 그 형제들이 날로 더욱 귀해지고 현달하므로 세상에서 대원족(大元族)이라 하였다.

노왕(老王:눌지왕) (재위) 초(初)에 상로(上老)인 국기(國奇)가 일찍이 왕(王)에게 말하기를 “왕기(王氣)가 해도(海島)중에 있으니 백년이 안가 뼈를 도울(援骨) 조짐이 있습니다.”라고 했으니 그 말이 징험(驗)한 것이로다.<炤知明王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화랑세기」에서만 언급되는 신라의 신분제도로 신라의 왕위계승이나 가계계승이부계의 혈족원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귀족들의 정치적 사회적 신분이라 할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모계로 계승됐다.

당시 남자들은 모계에 의하여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정해지고 1대에 한해 그 계통을 이었다. 따라서 남자들은 부자간에 계통이 다를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서현은 그의 어머니가 대원신통이었기에 그 계통을 이었지만 그의 아들인 김유신은 서현의 부인이자 어머니인 만명부인이 진골정통이었기에 진골정통이 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김춘추도 마찬가지였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같은 진골정통이었기에 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 귀족사회의 양대 파벌인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권력의 정점인 왕과 왕비의 옹립을 놓고 암투를 벌였다. 588년 풍월주가 되었던 하종대에 진골정통은 지소를, 대원신통은 사도를 정점으로 한다고 기록돼 있다.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알력을 벌였으며 이들이 당대 양 계통의 중심 인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동륜태자가 죽자 그 동생인 금륜을 진지왕으로 왕좌에 앉혔으나 너무 색을 밝히는 등 방탕생활을 하자 폐위시켜버린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왕위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26세 진공조에 27세 풍월주가 되는 흠돌이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명황후에게 『자의(慈儀·뒤에 문무왕비가 됨)가 후일 왕비가 돼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가므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처럼 「화랑세기」에는 모든 권력이 모계, 즉 여성에게서 나옴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는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을 일종의 정치적 파벌 개념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의 귀족사회를 신분적 격차의 개념으로 이른바 「성골」「진골」로 나눈 기존의 사서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역사학자들도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시기인 540∼681년에 여왕벌처럼 군림한 여성들의 파워의 각축장이었던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 대해 일치된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최광식(고려대 한국사학과)교수는 진골(眞骨)을 진골왕통으로, 성골(聖骨)을 대원신통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재호(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씨는 진골정통은 적자녀이고 대원신통은 서자녀이며 왕의 자녀도 왕비가 대원신통이면 그 적자는 부계를 따라 진골정통이 되고 적녀는 모계를 따라 대원신통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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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금관 기생 차릉파는 실제 어떤 사람이었을까.

 

‘차릉파’는 원래 평양의 기성권번(箕城券番) 소속 기생이었다. ‘권번’은 일제 때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뜻한다. 

 

1936년 7월19일 조선중앙일보는 “금관기생이 가짜승려에게 속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광법사의 중(승려)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돈을 뜯어갔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자칭 광법사 중이 기생의 금전을 사취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제재한다. 그러면서 ‘모 사건으로 한때 세간의 화제에 올랏든 평양기생 차능파의 수난이야기’를 부제로 단다.

 

“광법사의 중 김대술이 차군(차릉파)의 집에 찾아와~ 광법사 수축에 총독부에서 3천원의 보조비가 잇어 이를 수축하는 동시에 ‘백일제’를 행할 것인바 ‘등’을 만들어 걸게하면 행운이 조타하야 등값으로 1원을 얻어갔다.

다시 광법사의 이복경이라는 자가 나타나 감언이설로 5원을 얻어갔는 바 그 뒤 3번째로 금품을 요구하는 동시에 거절하는 때는 집안이 금년 내에 망해버린다고 위협을 가해~ 공포를 견디지 못하여 신고한 것이라고 하며~.”

 

예나 지금이나 복권당첨이 되거나 유명세를 타게 되면 빌붙으려는 온갖 사기꾼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금관’ 사건 이후 일약 유명세를 탄 차릉파의 집으로 가짜 승려들이 몰려들어 공포심을 견디지 못한 차릉파가 평양경찰서를 찾아 신고한 것이다.

 

1940년 8월에 나온 ‘모던 일본’ 조선판에 차릉파라는 이름이 나온다. 즉 잡지는 경성기생의 자산순위를 발표했는데, 종로권번의 ‘차릉파’가 공동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1위는 조선권번 김월색(金月色·총자산 25만엔)이었으며 한성권번 강산월(康山月)과 종로권번 차릉파(車綾波)가 나란히 18만엔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 뒤 순위는 8만엔 전후의 자산을 모은 기생들이 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생집을 10년 운영한다 해도 고작 평균 3만~4만엔을 모았을 뿐이었다. 이 차릉파가 평양에서 활약한 차릉파가 맞다면? 서울로 진출한 차릉파는 평양에서 얻은 ‘금관기생’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기생재벌’의 반열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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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금관이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억지 복원된 채 80년동안 전시된 내용에 대한 언론사 보도 내용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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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일제때 신라 금관 훼손 드러나 

 

 

http://news.donga.com/3/all/20150206/69506716/1

김상운 기자입력 2015-02-06 03:00 수정 2015-02-06 11:48   동아일보

 

중앙박물관, 발굴때 사진 비교 결과… 금띠 위치 바뀌고 옥장식 4개 사라져

 

 

1926년 발굴 직후엔 멀쩡했는데… 발굴 직후인 1926년 촬영한 서봉총 금관(오른쪽 위)은 양대가 금못으로 테두리에 고정돼 있다. 테두리 중앙에 달려 있는 곡옥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돼 현재 금관(아래)의 양대는 금못이 아닌 금사로 테두리에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양대가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맞가지 세움 장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테두리에 달려 있던 곡옥도 사라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라 왕릉인 ‘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금관이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된 사실이 드러났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신라 금관이 훼손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처음이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가 파헤친 신라 왕릉의 재발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1926년 경북 경주시에서 발견된 서봉총은 조선총독부의 초청으로 발굴 현장을 찾은 스웨덴 황태자가 봉황이 달린 금관 발굴 작업에 참여해 스웨덴을 뜻하는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명명됐다. 서봉총 금관(보물 제339호)은 ‘양대(梁帶·머리에 쓸 수 있도록 테두리 안쪽에 십자로 붙여 놓은 금띠)’와 봉황 장식을 모두 갖춘 유일한 신라 금관이라는 점에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강점기 자료 조사 사업으로 최근 발간한 ‘경주 서봉총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서봉총 금관의 양대가 테두리(臺輪·대륜)에서 떨어져 나간 뒤 원래 위치가 아닌 엉뚱한 곳에 붙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금관 테두리에 달려 있던 곡옥(曲玉) 6개 중 4개가 떨어져 나간 것도 조사됐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사진과 금관의 부위별 실측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 “1935년 일본인이 금관 외부반출… 평양 기생 씌워주다 망가뜨린듯” ▼

 

 

고이즈미 아키오 평양박물관장이 서봉총 금관을 기생에게 씌우고 찍은 사진을 보도한 1936년 6월 29일자 부산일보 기사. 1926년 발굴 직후 촬영한 금관(오른쪽 위 작은 사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 발굴 직후인 1926년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1934년에 각각 촬영한 유리 건판 사진을 살펴보면 금관 한가운데 있는 ‘맞가지 세움 장식(出자 형태로 생긴 금장식) 왼쪽 아래에 ‘금못’으로 양대를 고정한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또 테두리의 곡옥은 6개가 온전하게 달려있었다.

 

그러나 현재 곡옥은 2개만 남아 있고, 곡옥이 있던 자리에는 금못이 아닌 ‘금사(金絲·금실)’로 양대가 연결돼 있다. 곡옥이 떨어져 나간 구멍에 양대를 연결해 놓은 것이다.

 

중앙박물관은 보고서에서 “총독부 박물관이 서봉총 유물을 정식으로 등록한 1939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금관에서 떨어진 곡옥들이 별도 유물 목록에 기재돼 있다”며 “양대를 원래와 다른 위치에 고정하고 곡옥이 대륜에서 떨어진 시점은 1934년과 1939년 사이”라고 결론 내렸다.

 

양대의 훼손으로 현재의 금관을 머리에 쓰면 기형적인 모양이 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원래대로 양대를 복원하면 금관을 착용할 때 꼭대기에 있는 봉황 장식이 정확히 정수리 위에 놓인다. 박진일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당시 신라 금관 장인들이 정수리가 머리의 정중앙이 아닌 후위에 있다는 해부학 지식을 바탕으로 양대의 위치를 잡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신라인의 금속공예 작업이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누가, 어떻게 금관을 훼손했을까. 서봉총 금관은 1926년 출토된 뒤 경성(서울)의 총독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됐다가 9년이 지난 1935년 9월 평양박물관 특별전에 대여 형태로 딱 한 번 반출된 적이 있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으로 서봉총 발굴을 주도했던 일본인 고고학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특별전 직후 기생에게 서봉총 금관을 씌우고 사진을 찍어 논란이 됐다. 전무후무한 문화재 유린은 9개월 뒤 부산일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동아일보도 비슷한 시기 ‘평양기생 차릉파의 수난 이야기’라는 부제로 이 사건을 다뤘다.

 

고이즈미가 금관의 양대와 곡옥을 망가뜨렸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평양 사건의 시기는 박물관 조사팀이 추정한 금관 훼손 시기(1934∼1939년)에 포함된다. 또 유물이 손상되기 쉬운 외부 반출이 평양 특별전 외엔 없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누군가 억지로 금관을 쓰다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며 “훼손 시점은 정황상 고이즈미가 주최한 평양 특별전 때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중앙박물관은 문화재위원회 승인을 거쳐 서봉총 금관의 원형 복원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 올 4월 서봉총 유물 전시회를 열면서 훼손 전후의 금관 사진을 나란히 게시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서봉총의 주인이 여자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사진 자료도 함께 발견됐다. 1926년 서봉총 발굴 직후 유물 배치도를 촬영한 유리 건판을 찾아낸 것이다. 지금까지는 발굴 당시 일본 학자들이 유물 배치도를 그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유물 배치도에 따르면 서봉총의 피장자는 여성의 상징인 태환이식(太環耳飾·금귀고리)을 달고 있다. 남성의 경우엔 대도(大刀)를 차고 있다. 박진일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정황만으로 여성일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이번에 확실한 증거가 나온 셈”이라며 “고이즈미가 서봉총 조사 자료를 가지고 평양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사실을 미뤄 볼 때 유물 배치도 원본은 현재 평양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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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평양기생 차릉파 신라 57대왕으로 등극하다 2012.02.15

 

http://leekihwan.khan.kr/entry/%ED%8F%89%EC%96%91%EA%B8%B0%EC%83%9D-%EC%B0%A8%EB%A6%89%ED%8C%8C-%EC%8B%A0%EB%9D%BC57%EB%8C%80%EC%99%95%EC%9C%BC%EB%A1%9C-%EB%93%B1%EA%B7%B9%ED%95%98%EB%8B%A4

 

 

  16번째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는 <기생의 머리 위에 씌운 신라금관> 편입니다. 일제시대 때 일어난 황당한 사건입니다. 이 금관이 바로 서봉총 금관이었습니다. 서봉총 금관은 사연 많은 금관입니다. 스웨덴의 구스트파 아돌프 황태자가 직접 발굴한 금관이지요. 과연 서봉총 금관에 무슨 일들이 생겻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가 소개합니다. 

 

‘금관의 파문(波紋),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물(玩弄物)로.’
1936년 6월29일 부산일보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소식을 평양발로 타전했다. 기막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때는 바야흐로 기사가 나간지 약 9개월 전인 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제1회 고적애호일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특별전에는 경성박물관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들을 전시했다.

 

 

 평양기생 차릉파가 특별전 폐막기념 축하연회에서 서봉총 금관을 비롯, 신라 장신구를 쓴채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건은 9개월 만에 들통나 언론에 보도됐다. 1936년 6월29일 부산일보 기사

 

■기생의 머리에 신라금관을…
 금관은 물론 금제귀고리와 허리띠, 목걸이가 총출동했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다.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경주 발굴에 관여했던 고고학자였다. 그랬기에 웬만해서는 공개될 수 없는 금관을 평양까지 대여할 수 있었다. 국보급 유물이었으므로 전시는 삼엄한 경계 속에 이뤄졌다. 평양의 내로라하는 유지들은 물론 시내 각급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찬란한 신라의 금관을 친견했다.  
 그런데 사건은 전시회를 끝내고 예정된 유물반환일을 하루 앞둔 9월10일 터졌다. 이날 박물관은 성공적인 전시회를 자축한다는 명목으로 축하연회를 열었다. 평양에서 힘깨나 쓴다는 각급 기관장들이 다 모였다. 평양에서도 유명한 기생들도 총출동했다. 기생들과의 술자리가 질펀해지고 취흥(醉興)이 도도(滔滔)해졌다. 술기운에 이성을 잃어갔다. 그때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탈행위가 벌어졌다.
 그만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금관을 씌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금제 허리띠와 금귀고리, 금목걸이까지 차릉파의 몸에 휘감았다. 그러면서 금관을 쓴 차릉파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기생 차릉파, 신라 57대왕으로 등극?
 신라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것이 935년이니까…. 그리고 평양기생 차릉파가 금관을 쓴 것이 1935년이니까…. 꼭 1000년만에? 신라는 꼭 1000년만에 ‘제57대 여왕 차릉파’를 내세워 부활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활한 신라의 여왕은 평양 출신 기생이었던 것이다.
 그날 참석자들은 술이 깨자 입단속을 하면서 천인공노할 이 사건을 덮으려 했을 것이다. 아마도 술이 ‘웬수’라고 하면서…. 하지만 진실을 가릴 수는 없는 법. 금관을 쓴 차릉파의 사진이 평양시내에서 나돌기 시작했다. 참새들의 입방아가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언론이 9개월 만에 폭로하고 말았다. 요즘 같으면 SNS를 통해 연회장 장면이 생중계됐을 터인데…. 식민지 백성들의 공분(公憤)을 샀다. 연회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니까….
 그들이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마음껏 농락했다는 것 때문에, 또 ‘신라여왕’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은 소설가 이효석의 일본어 작품 ‘은은한 빛(ほのかな ひかり)”의 소재가 됐다.

 

서봉총 발굴전 모습. 옆에 시천교 교당이 보인다. 표주박형태의 고분이었다.

 

■이효석 작품에 등장한 ‘금관사건’
 이 작품은 1940년 4월 일본잡지 <문예(文藝)>가 마련한 ‘조선문학특집’의 일환으로 실렸다. 작품은 조선인 골동품상인 ‘욱’이 평양박물관장인 ‘호리(堀)’의 회유를 뿌리치고 고구려 도검(刀劍)을 지키는 과정을 담고 있다. 평양의 유명한 기생인 남월매도 등장한다. 호리 관장은 바로 ‘고이즈미’ 관장을, 남월매는 ‘차릉파’를 지칭한다.
 이효석의 소설 ‘은은한 빛’을 보자.
“남월매가 호리 관장과 가까이 하는 한편 욱과도 기묘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수년 전의 왕관사건 이래의 일이었다. ~그 당시는 전선적(全鮮的)인 화제를 던진 것으로, 주인공인 월매도 덕분에 기계(妓界)에서 한때 날린 것이었다. ~당대의 지사가 취흥에 맡겨 박물관에 비장된 신라조의 왕관을 유두분면(油頭粉面·화장)의 월매에게 씌우선 이를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것인데 그 일의 길잡이를 선 것이 호리 관장이었다.~”
   비록 소설로 재표현된 것이므로 과장되고 재포장 됐을 수 있다. 하지만 ‘금관사건’이 얼마나 전 조선적인 화제를 뿌렸는 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이 하룻밤의 은밀한 놀음이 한번 항간에 드러나게 되자 시시비비의 소리가 물끓듯 하여 국보의 존엄을 모독한 지사의 경거에 대한 비난의 소리는 높아 신문기자와 변호사들로 구성된 일단은~궐기하였다. 월매네 집에 숨어들어가 문제의 사진을 훔쳐내어 사회면에 폭로하고 시민의 여론에 호소하여~ 지사는 부득이 실각했고 호리 관장은 간신히 유임만은 허락되었다.”(‘은은한 빛’)
 실제의 ‘금관사건’도 이 소설에서 쓴 것처럼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다. 국보를 ‘기생의 악세사리’로 전락시켰으니 말이다. 실제의 고이즈미 관장은 신문보도 후 총독부로부터 견책을 받고 시말서까지 썼다고 한다. 하지만 평양박물관직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봉총 금관. 소지왕의 부인인 선혜부인의 것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금관기생, 전국구 스타가 되다.  
 그렇다면 문제의 차릉파는 실제 어떤 사람이었을까. 소설 ‘은은한 빛’에는 남월매, 즉 실제의 차릉파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호리 관장이 남월매를 두고 하는 말이다. 
 “딴 건 고사하고 노랫가락만 하더라두 시체 기생들은 유행가가 고작이지. 옛노래는 하나두 모른단 말이야.~ 
예전 기생은 노랫가락을 잘할 뿐만 아니라, 무고(舞鼓)에 통한데다가 서화(書畵)를 잘했구, 시를 읊는가 하면 사서(四書)를 죽 죽 내리 읽었거든. 지금의 기생은 쇠통 무재주란 말야. 어때 월매, 자네 같은 사람은 참 신통하단 말야. 역시 ‘왕관기생’은 다르지. 오늘밤은 옛것을 한 곡 불러달라구.~”
 소설속 남월매처럼 차릉파도 평양에서는 손꼽는 기생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금관을 쓴’ 이력 때문에 일약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금관’ 사건이 벌어진 뒤 20여 일이 지난 1936년 7월19일의 일이다.
 이 날짜 <조선중앙일보>는 “‘금관기생’이 가짜승려에게 속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광법사의 중(승려)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돈을 뜯어갔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자칭 광법사 중이 기생의 금전을 사취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제재한다. 그러면서 ‘모 사건으로 한때 세간의 화제에 올랏든 평양기생 차능파의 수난이야기’를 부제로 단다.
 “광법사의 중 김대술이 차군(차릉파)의 집에 찾아와~ 광법사 수축에 총독부에서 3천원의 보조비가 잇어 이를 수축하는 동시에 ‘백일제’를 행할 것인바 ‘등’을 만들어 걸게하면 행운이 조타하야 등값으로 1월을 얻어갔다. 다시 광법사의 이복경이라는 자가 나타나 감언이설로 5원을 얻어갓는바 그 뒤 3번째로 금품을 요구하는 동시에 거절하는 때는 집안이 금년 내에 망해버린다고 위협을 가해~공포를 견디지 못하여 신고한 것이라고 하며~”
 예나 지금이나 복권당첨이 되거나 유명세를 타게 되면 빌붙으려는 온갖 사기꾼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금관’ 사건 이후 일약 유명세를 탄 차릉파의 집으로 가짜 승려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래서 공포심을 견디지 못한 차릉파가 평양경찰서를 찾아 신고한 것이다.

 

■‘기생재벌’에 오른 금관기생
‘차릉파’는 원래 평양의 기성권번(箕城券番) 소속 기생이었다. ‘권번’은 일제 때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뜻한다. 당시 경성에는 한성권번(漢城券番)·대동권번(大東券番)·한남권번(漢南券番)·조선권번(朝鮮券番)이 있었다. 평양에는 기성권번 등이 있었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했다.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기도 했다. 또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런데 1940년 8월에 나온 ‘모던 일본’ 조선판에 차릉파라는 이름이 나온다. 즉 잡지는 경성기생의 자산순위를 발표했는데, 종로권번의 ‘차릉파’가 공동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1위는 조선권번 김월색(金月色·총자산 25만엔)이었으며 한성권번 강산월(康山月)과 종로권번 차릉파(車綾波)가 나란히 18만엔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 뒤 순위는 8만엔 전후의 자산을 모은 기생들이 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생집을 10년 운영한다 해도 고작 평균 3~4만엔을 모았을 뿐이었다. 이 차릉파가 평양에서 활약한 차릉파가 맞다면? 서울로 진출한 차릉파는 평양에서 얻은 ‘금관기생’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기생재벌’의 반열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구스트프 아돌프 스웨덴 황태자 부부가 발굴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일제가 마련한 외교적인 발굴이벤트였다.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당시 구설에 오른 ‘서봉총’은 발굴 당시부터 많은 에피소드를 뿌린 신라고분이었다. 표주박처럼 쌍무덤이었다.
우선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에 이어 세번째로 금관이 발굴된 곳이기도 했다. 서봉총은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직접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연인즉은 이렇다. 1926년 5월 대구~경주~울산을 경유,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예정이었다.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했다. 총독부는 바로 이 고추밭의 흙을 파내 기관차 차고를 짓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한데 공사 도중에 신라고분이 발견됐다. 그러자 총독부 촉탁으로 근무 중이던 문제의 고이즈미 아키오가 현지로 급파됐다. 
 발굴이 막바지로 흐르던 10월, 마침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 부부가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다. 황태자 부인인 루이즈의 우울증 치료를 위한 세계일주 여행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고도 나라의 사찰과 쇼소인(正倉院)을 관람한 뒤 조선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갖고 있었다. 그 순간 일본조정이 묘안을 짜낸다. 황태자가 북유럽과 그리스·로마 고분을 발굴했던 경력에 착안한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고고학자 하마다 게이사쿠(濱田耕作)가 황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마침 조선반도의 경주라는 곳에서 한창 발굴중인데 한번 가보심이? 황금보관이 절반쯤 출토되어 전하의 내방을 기다리고 있다 하옵니다.”
 “그렇습니까. 얼마나 엄청난 행운인가요. 당연히 가봐야죠.”
 44살의 황태자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면서 한마디 농을 던졌다.
 “그 금관, 혹시 박물관에서 일부러 묻어놓은 것은 아니죠?”
 하마다가 받아쳤다.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고고학자이신 전하가 확인하고 감정해주시죠.”
 당시 발굴자인 고이즈미는 황태자가 발굴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도록 묘안을 짜냈다. 즉 출토유물을 수습하지 않고 출토현상을 그대로 두어 황태자가 마지막 발굴의 방점을 찍도록 한 것이다. 한마디로 밥상을 차려준 것이다. 다음은 고이즈미의 회고.

 

 

 

유물을 발굴중인 구스타프 황태자. 옆에 있던 이가 발굴책임자인 고이즈미 아키오이다.

 

■“마-베라스, 감탄사 연발한 황태자”
 10월10일 10시, 경주 현장에 도착한 황태자는 능수능란한 자세로 발굴현장에 뛰어들었다.
 고이즈미가 현장을 싼 흰 천을 걷어냈다. 관 안에 흩어져있던 금관과 금장신구, 각종 구슬류가 햇빛의 직사광선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탄성이 터졌다. 황태자 부처는 한쪽 무릎을 꿇고 피장자의 혼령에게 정중한 서양풍의 경의를 표했다.
 “전하, 이 요패(腰牌)만큼은 전하께서 발굴하시도록 남겨놓았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고이즈미의 말이 떨어지자 고고학자의 끼가 발동한 황태자는 즉시 상의를 벗고 발굴에 나섰다. 고고학자다운 신중한 발굴은 1시간이나 걸렸다.
 “마-베라스!!(와! 경이롭다!!)”
 금제곡옥이 달린 요패가 모습을 드러내자 황태자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황태자는 완전한 고고학자의 모습으로 발굴단과 한 몸이 되어 발굴작업에 몰입했다. 황태자를 자지러지게 만든 발굴단의 말한마디가 이어졌다.
 “전하, 전하께서 이 금관을 수습해주시옵소서.”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금관을 들어올린 뒤 나무상자에 넣었다. 1500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신라금관은 이렇게 북유럽의 프린스의 손에 의해 부활한 것이다.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아 반짝거리는 황금관

 

■사이토 총독, 스웨덴 황태자에게 신라금귀고리 선물하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당시 사이토 조선총독이 11일 열린 만찬에서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에게 고려청자와 신라 금귀고리 한쌍을 선물했다. 최근 스웨덴 스톡홀롬의 셰프스홀맨 섬의 동아시아박물관에서 상설한국실이 생겼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개관식에 금귀고리 한쌍이 선보였다고 한다. 필시 사이토 총독이 선물로 준 금귀고리일 것이다. 남의 나라 국보급 유물을 선뜻 내주다니…. 이것 또한 약탈문화재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이때 발굴된 금관은 이전의 금관·금령총 발굴 금관과는 사뭇 달랐다.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끝에 세마리의 새 장식이 보였다. 발굴단은 이를 봉황이라 여겼다. 또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점도 특이했다. 따라서 이 고분의 명칭은 스웨덴의 한문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을 따서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과 깊은 인연을 쌓은 구스타프 황태자는 1950년 구스타프 6세로 황제에 오른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한국전쟁 당시 파견된 스웨덴 의료진에게 “경주를 반드시 방문하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소지왕비, 선혜부인의 무덤?
 한편 서봉총 고분에서는 금관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연수원년(延壽元年)’, ‘태왕(太王)’, ‘신묘(辛卯)’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은합은 무덤의 조성연대와 주인공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연수’라는 점, 또한 고구려왕을 지칭한 ‘태왕’이라는 글자가 나온 점, 또한 신묘년이라는 간지….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은합의 제작연대는 연수원년이자 신묘년인 451년일 수밖에 없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서봉총의 주인공이 5세기말이나 6세기초에 살았던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왜 여성이냐? 이한상 대전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서봉총에서는 남성의 고분에서 흔히 보이는 대도(大刀·칼)와 관모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귀고리와 허리띠 장식 등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가 다수 나왔습니다. 의류 등 섬유제품도 많았고…. 여성의 무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서봉총 은합에 기록된 명문. '연수원년', '태왕', '신묘' 등의 명문이 보인다.

 

학자들은 이 여성의 신분을 신라왕(마립간)의 배우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금관은 신라국왕과 그 배우자 혹은 후계자의 무덤에서만 보인다는 것. 특히 서봉총의 동쪽에 인접한 금관총의 주인공과 상관관계를 주목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금관총은 신라국왕, 서봉총은 왕의 부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499년에 서거한 소지왕(마립간)의 부인인 선혜(善兮)부인이 주목된다. 선혜부인은 내숙(乃宿) 이벌찬(伊伐飡)의 딸이다. 신라 17관등 중의 제1등인 최고위직이다.
 그러고 보면 1500년 후 금관을 쓴 이도 비록 기생신분이지만 여성이 아니었던가. 기구한 인연이다. 물론 서봉총의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지는 모른다. 다만 무덤의 내력으로 보아 주인공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삶을 살아간 여인이 아니었을까. 또 하나, ‘금관사건’의 주범인 고이즈미는 시말서만 쓰고 견책을 받는데 그쳤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여전히 경주발굴을 주도했던 저명한 고고학자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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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이 쓴 신라금관 억지복원된 채 80년 전시된 까닭은?

 

등록 : 2015-02-05 22:24 수정 :2015-02-06 09:16 한겨레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77165.html#csidx19421e02a67d4a297532542beb16cd4

 

 

현 서봉총 신라 금관

 

신라 금관의 대표적 걸작들 가운데 하나인 경주 서봉총 출토 금관이 26년 출토 당시 모습과 다르게 잘못 수리된 사실이 확인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훗날 구스타프 6세)가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 경주 노서동의 신라고분 서봉총의 조사보고서( <경주 서봉총Ⅰ(유물편)>)를 88년만에 발간했다.

 

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사업의 열세번째 성과물로 나온 이 보고서에서 박물관 쪽은 현재까지 전시되어온 금관이 발굴 당시 원형을 잃고 잘못 복원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혀 눈길을 끌고있다.

 

 

 

  

현 서봉총 신라 금관

 

서봉총 출토유물 중 가장 유명한 금관은 가운데에 세 마리 봉황 장식이 붙어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다른 신라 금관과 확연히 구별된다. 박물관쪽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금관을 정밀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봉황 장식에 얽힌 중요한 형태상의 오류를 발견했다고 보고서에 언급하고 있다.

 

발굴 뒤 조선총독부가 출토금관을 복원 조립하는 과정에서 금관 본체의 대륜(금관에서 머리가 닿는 아래 둥근 테두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달려있던 곡옥 장식 4개를 떼내고 이 장식을 고정했던 이음구멍에다 금관 봉황장식을 받치는 십자형 금판을 잇는 금실을 무리하게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설명이 복잡한 것 같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간단명료한 오류다.

 

봉황 장식이 위에 달린 십자형 금판은 원래 박았던 대륜의 금속못 자리 대신 그 옆 곡옥자리의 구멍에 금실 등으로 무리하게 고정돼 전체 모양이 틀어지고 원래 원형과 상당히 달라지게 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금관 정면 오른쪽 부분에 붙은 십자형 금판의 한갈래는 안쪽에 붙은 다른 세갈래와 달리 바깥쪽에 금실로 이어붙여 한눈에 봐도 어색한 느낌이다.

 

박진일 학예연구사는 “발굴 뒤 보관하는 과정에서 어떤 연유인지 금관 일부가 훼손되는 곡절이 있었고, 그 뒤 조립 수리하는 과정에서 이런 왜곡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일제강점기 잘못된 수리 이후 80년 넘도록 교정이 진행되지 않아 현재 모양이 원형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조속히 재복원 작업에 착수해야할 것이라고 박물관 쪽은 조언했다.

 

 

    

대륜고정부

 

노서리 129호분이라고도 불리는 경주 서봉총은 현재 경주 대릉원 옆에 터만 남아있는데, 발굴과 보관에 얽힌 흥미로운 후일담들이 많다. 조사는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연구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순수 학술조사는 아니었다.

 

원래 경동 철도노선(오늘날 동해남부선)의 경주역사를 짓기위해 필요한 토사를 확보하려고 땅을 파다가 발견된 유적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조사 현장에는 일본과 조선을 방문중이던 구스타프 황태자가 참여해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다. 고고학에 관심 많은 황태자가 조선을 들러 여행하다 경주 지하에서 대단한 고대유물들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참여를 간청해 황태자의 발굴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구스타프 황태자가 유물들 뒤엉킨 발굴현장 한 가운데에서 금관 등 금제유물을 살펴보고 직접 발굴작업을 벌이는 장면들을 찍은 여러장의 사진들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1935년 촬영 평양기생 차릉파

 

의문이 하나 남는다. 발굴 뒤 금관의 왜곡된 조립 복원을 촉발시킨 파손 사건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단서들이 있다. 1926년 출토당시 금관 사진과 1934년 총독부가 찍은 금관사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적한 봉황장식 금판의 무리한 조립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서봉총 금관은 1939년 조선총독부박물관 본관품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미 금관 대륜의 곡옥 4개가 금관 본체와 떨어진 채 별도 등록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금관은 1934년과 39년 사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 일부 장식이 떨어져나가는 등의 파손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추정에 부합하는 유명한 사건이 하나 전해진다.

 

26년 발굴을 총괄한 조선총독부 연구원 고이즈미 아키오는 1934년 평양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다. 그 이듬해인 1935년 서봉총 금관을 평양에 가져가 평양 기생 차릉파의 머리에 씌우고 기념사진을 찍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의 파렴치한 행위는 곧 들통나 다음해 1936년 <부산일보> 등에서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되면서 세간의 지탄을 받았다. 고이즈미가 당시 별다른 보호조치 없이 금관을 막무가내로 가져가 평양 기생의 머리에 씌운 정황이 당시 신문기사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문제가 된 금관의 파손은 이때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진일 학예사는 “다른 파손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배제 못하지만, 곡옥이 떨어지고 봉황 장식판이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파손 상황은 고이즈미가 평양 기생에 금관을 씌운 사건 말고는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다.

  

 

 

보고서 표지

 

고이즈미는 서봉총의 유구와 유물에 대한 발굴보고서 간행을 계속 미루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끝내 조사를 갈무리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돌아가버린다. 이후 서봉총 유물들은 보고서 없이 금관과 일부 금속공예품 정도만 대중에 알려진 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관돼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들이 출토 유물과 유리 건판 사진 등을 중심으로 발굴 88년만에 유물편 보고서 작업을 마무리한 것은 일제강점기 고이즈미의 책임 방기에 대한 학문적 징벌이기도 한 셈이다.

 

이번 보고서에는 금관을 비롯한 573건 유물의 도면과 사진이 처음 집대성돼 실렸다. 금관을 비롯한 금제품을 상세히 조사해 정리했고, 모든 금제품은 순도 분석을 벌여 그 결과를 부록에 담고있다. 박물관은 보고서 간행을 기념해 ‘다시 보는 신라 고분, 서봉총’ 테마전을 4~6월 열 예정이다. 내후년 이후 계획중인 서봉총 재발굴 조사를 마치는대로 유구편 보고서도 펴낼 계획이라고 한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서봉총 유물배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