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영월군의 흥녕선원지 건물터에서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출토됐다.
(높이 15cm.. 7∼8세기 양식 추정)
영월 흥녕선원지(興寧禪院址)에서 금동반가사유상 출토
- 국내 최초로 발굴조사 중 출토 / 유일하게 출처가 분명한 금동반가사유상 -
2017년 11월 8일부터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강원도 영월에 있는 흥녕선원지(강원도기념물 제6호)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중에 금동반가사유상이 출토된 것은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출처가 분명한 금동반가사유상으로도 유일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 발굴현장 :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리 386번지 일원
영월군과 강원문화재연구소는 발굴조사 중인 영월의 흥녕선원지 절터(강원도 기념물 제6호)에서 지난달 말 높이 15cm, 폭 5cm 크기의 금동반가사유상을 발견했다고 2018.4.3일 밝혔다.
흥녕선원지 발굴조사는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이 발굴 허가하고 강원도(도지사 최문순)의 사업비를 지원 받아 영월군(군수 박선규)과 (재)강원문화재연구소(소장 오제환)가 진행하는 조사인데, 이미 2002년부터 2004년까지 2차례 시행한 시굴조사를 통해 건물지, 석축, 보도시설 등 다양한 유구와 유물을 확인한 바 있다.
이번에 출토된 흥녕선원지의 금동반가사유상은 높이 약 15㎝, 폭 약 5㎝이며, 조사지역 내 건물지에서 나왔다. 전체적인 유물 상태는 좋은 편이며 일반적인 반가부좌 형태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걸치고 오른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팔로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원형에 가까우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상의는 걸치지 않은 모습이고 머리에는 삼면이 돌출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다.
* 반가부좌(半跏趺坐): 부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흥녕선원(興寧禪院)은 선종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자산문파의 본거지로, 통일 신라 시대의 승려인 징효대사(826~900)에 의하여 크게 번창한 사찰이다. 징효대사 탑비(보물 제612호)와 부도(浮屠,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 등은 현재 법흥사 경내에 남아있다.
* 구산선문(九山禪門): 선종이 중국(당)으로부터 유입된 후 신라 말~고려 초에 형성된 아홉 갈래의 승려 집단
* 사자산파(獅子山派): 850년 쌍봉 도윤(雙峰 道允) 국사가 개산한 사자산문(獅子山門)
금동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유물의 주조기법과 도금방법 등에 대한 보다 정밀한 분석이 있을 예정이다.
강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의 출처가 분명한 첫 사례”라며 “양식으로 볼 때 7∼8세기 유물로 보이지만, 출토된 건물지가 9∼10세기 유적이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은 삼면이 돌출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고,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상의는 걸치지 않았다.
삼국시대 불상 중 걸작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1920년대 경북 경주에서 발견됐다고 알려졌지만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고,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도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다.
반가사유상의 정식 명칭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으로 반가부좌 자세를 한 미륵보살에다가 구리에 금을 입혀 표현한 불상이다.
따라서, 금동으로 만든 것은 금동반가사유상, 일반적으로 통칭하여 반가사유상이라 부른다.
기본적으로는 반가부좌를 틀고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 미륵보살을 표현한 모든 형태의 불교공예품을 가리키는 유물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국보 78,83,118호, 보물 331,643호 등 여러 점이 있다.
반가사유상이란 반가부좌의 준말인 ‘반가’와 생각하는 불상이라는 뜻의 ‘사유상’을 합친 말이다. 실제로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얹은 반가부좌 자세로 오른손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미륵보살이란 먼 미래에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악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미래의 부처를 뜻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38구이며, 이중 금동으로 만든 것은 24구이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은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리움미술관), 보물 제331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64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호암미술관) 등이다. 국보가 3구, 보물이 2구인 셈이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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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녕선원지 (興寧禪院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
강원도 기념물 제6호.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자산파(獅子山派)의 본거지이다. 사자산파의 개산조(開山祖)는 철감선사(澈鑑禪師)도윤(道允)이라 말하고 있지만, 실제 사자산문을 개창한 이는 징효대사(澄曉大師)절중(折中, 826∼900)이다.
징효대사는 882년(헌강왕 8)에 이 절에 와서 891년의 병화(兵火)를 피해 떠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당시 헌강왕은 대사를 서울로 모시기 위하여 친서를 보냈고,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나라에서 돌보도록 하였다.
이후 천년 가까이 흥녕사는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다가, 1902년에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감몽(感夢)을 받아 중건하여 절이름을 법흥사(法興寺)로 고쳤다. 1912년에 화재를 만나 1930년에 중건하였으나, 이듬해의 산사태로 절터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1933년에 이곳에서 1㎞ 정도 산쪽으로 올라와 다시 절을 지었으니 곧 지금의 법흥사다.
흥녕선원지는 법흥사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밭 앞쪽에 위치한다. 절터는 남향으로서 서쪽으로 계곡이 흐르고, 동쪽은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넓은 지대이다. 현재 종형(鐘形) 부도 하나와 사리탑의 대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나란히 놓여 있고, 주위에는 깨지거나 완형인 주춧돌들이 10여 개 묻혀 있다.
아울러 기와·토기·자기 조각들이 널려 있는데 약 1만평 규모로서 단국대학교에서 발굴한 바 있고,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 초석은 60㎝×75㎝ 크기에, 높이 40㎝이다.
선원지 앞길 옆 개울에는 거북모양 비석받침이 있는데 거북등에는 장육각형(長六角形)의 귀갑문(龜甲文)이 세 줄로 돋을새김되어 있고, 가운데에 넓게 판 비좌(碑座)가 있다. 거북의 앞면은 마모가 심하고, 머리도 떨어져나간 상태이다.
법흥사 주변에는 징효대사탑비(澄曉大師塔碑, 보물 제612호) 및 그 부도(강원도유형문화재 제72호)가 있고, 법흥사 뒤 산쪽으로는 방형연화대석(方形蓮花臺石)·석종형부도·석실(石室)·석관(石棺)·사리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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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寧越興寧寺址澄曉大師塔碑]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흥녕사지에 있는 고려 초기의 탑비.
보물 제612호. 비신 높이 2.77m, 너비 1.14m. 944년(혜종 1)에 건립된 이 비의 형식은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螭首)로 덮은, 신라·고려의 전형적인 석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비신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완전한 형태로 남아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자경은 2.5㎝로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내용을 최윤(崔潤)이 쓰고 전액도 하였으며, 각자는 최환규(崔奐規)가 맡았다.
통일신라의 국사인 징효(澄曉)의 휘는 절중(折中)이고 휴암(鵂嵓,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람이다. 자와 속성은 비문의 마멸로 알 수 없다. 이밖에도 비문에는 징효의 가계, 826년(흥덕왕 1)에 진전법사(珍傳法師)를 사사하고 19세에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아 탁월한 총명으로 수행하고 교화한 것, 75세 때인 901년(효공왕 5)에 입좌하여 입멸하였음을 기록하였다. 또 효공왕이 징효대사와 보인(寶印)이라는 탑명을 증시(贈諡)한 것 등을 적고, 말미에 대사의 공덕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효공대왕은 일찍부터 스님의 빛나는 도풍(道風)을 앙모하여 항상 불교를 존숭한 까닭에 시호를 징효대사(澄曉大師)라 하고, 탑명을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 비는 통일신라의 징효대사를 기리는 탑비이지만 국가가 바뀌는 어지러움 때문에 이미 지었던 것을 나중에 새겨서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글씨는 통일신라와 고려 초에 유행한 초당의 필법으로 구양순풍(歐陽詢風)으로 볼 수 있다.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판독문
有唐新羅國師子山▨▨▨▨▨敎諡澄曉大師寶印之塔碑銘幷序」
朝請大夫守執事侍郎賜紫金魚袋臣崔彥撝奉 敎撰」
崔潤奉 敎書兼篆」
原夫眞宗寂寂强▨立敎之門▨▨▨▨▨▨傳心之旨其要也玄機玄境其宗也佛語佛心名言不見其始終視聽莫知其規矩爰有乘時大士出世神人不假言津獨逝而直歸性海寧遵意路孤征而深入禪」
山必有穿鑿異端信其邪見▨▨▨▨▨▨▨心猿每閙於毒林待以良緣知之善誘引斯迷者吾得之」
大師焉 大師諱折中字▨▨俗姓▨▨▨▨鵂嵩人也其先因宦牟城遂爲郡族父曰先幢藝高弓馬名振華夷孝慈載於史官功業藏於王府作郡城龜鏡爲閭里棟梁母白氏假寐之時夢一天」
女謂之曰阿要必生智子因以寳▨▨▨▨▨娠 大師焉以寶曆二年四月七日 誕生生有曹姿不曾兒年七歲覩禪侶之乞食者因慕出家遂辭二親於是孤逝至五冠山寺謁珍傳法師爰於摩頂之時」
便契息心之旨仍居慈室落釆▨▨▨▨謂▨後代之染道人於是復現者衆口喃喃且與救蟻沙彌不可同年而語哉年十有五直詣浮石因聽雜華尋方廣之眞詮究十玄之妙義義學沙門始聞其語方認其」
心猶如孔詣膺門竟作忘年之友▨▨▨▨守爲幷日之交至十九於白城郡長谷寺受具足戒 大師上壇之日忽看紫氣直起壇中此寺有老僧謂衆曰此沙彌不是凡人非一朝一夕之故仍觀此驗合得」
戒珠必是後代之誘引迷途先標▨端也選思前夢宛若合符於是精護浮囊遠尋絶境企聞楓岳長潭寺有道允和尙久遊華夏纔返故鄕特詣禪扉敬投五體和尙曰靈山別後記得幾生邂逅相逢來何暮矣」
大師旣蒙入室深感慈風適我願▨因玆師事焉 和尙曩於中國先謁南泉以此南泉承嗣於江西江西繼明於南岳南岳卽曹溪之冡子也其高峻可知矣所以 大師從此服膺不離左右得嗣東山之法」
何▨震旦之遊其後徑詣道譚禪▨▨ 慈忍禪師纔見摳衣便如舊識謂曰相逢之晚引於領多時 大師便指眼前水瓶曰瓶非瓶時如何荅曰汝名什摩 大師荅曰折中 禪師云非折中之時阿誰」
荅曰非折中之時無人如此問 禪師云名下無虛士折中不奈何閱人知幾个如汝者無多所以十六年久住禪院深探理窟遂踐忘言之境終歸得意之塲可謂靑出於藍而藍無靑絳生於荳而茜無絳者」
也所以不出戶而知天下者於大師見之矣入海探珠登山釆玉亦何常師之有於是乎生者焉以後杖錫荷瓶巡叅知識中和二年前國統大法師威公聞大師之萍跡無處安之便戚於懷如呑棘刺」
怱▨究谷山寺秦請住持雖然▨▨丹誠蹔因駐足所恨近於京輦不愜雅懷爰有師子山釋雲大禪師竊承 大師德冠華夷居無處所尋遣神足實表丹情云老僧所住之居非宜小器 大師駐此合盖」
相▨不是吾師何人得住乞▨廻盖來止松門 大師莫逆遠誠仍依來意便携禪衆往以居之此寺也萬壑屛開千巖壁立誠海東之佳境亦天下之福田也 大師戾止之辰遠方來者朝三暮四雨」
驟風馳桃李無言稻麻成列此時」
獻康大王遽飛鳳筆徵赴龍庭仍以師子山興寧禪院隷于中使省屬之方忻國步中興忽歎 宮車晏駕 定康太王欽崇禪敎不下前朝屢遣王人遠伸鑚仰此際運當喪亂時屬艱」
難▨祚之危危如累卵處處而煙塵欻起妖氣而恐及蓮扉大順二年師避地於尙州之南暫栖鳥嶺當此之時本山果遭兵火盡爇寶坊 大師預卜吉凶以免俱焚之難眞聖大王御」
宇之二年也特遣溟州僧三釋浦道東宮內養安處玄等遠降 綸言遙祈 法力仍以陰竹縣元香寺永屬禪那別觀此日也方離北地漸次南行路出公州經過城下長史金公休與郡吏宋嵒等遠至」
慈▨迎入郡城兼以揀其▨▨名居請爲安下 大師謂長史曰貧道老之將至擬往雙峯叅親率同學之徒面禮先師之塔以此南去不可踟躕遂以使領衆行行直入進禮郡界忽被賊徒截道禪衆迷途忽」
然煙霧沉沉湏臾斗暗賊▨忽聞空裏有若甲馬之聲莫不驚惶逡巡潰散大師與衆免其劫奪之灾此則觀音勢慈擁護之力也所恨擧邦草寇無處不之此際星夜倍程達于武府於是旡戎敬仰一群顯蘇」
大王聞 大師遊歷南方護持四境郡兇稽手大憝歸心則知 大師永福國家兼爲北壍特寄無量靈神二寺請以住之當州群吏金思尹等欻聞禪旨深沐法恩請住芬嶺郡之桐林永屬禪居以爲終焉」
之所惠遠居廬阜之日晋▨尊▨僧稠在龍山之時齊文鄭重而又許詢之師於支遁朱序之託彼道安無之尙也可謂爲世津梁作時藥石君臣倚賴士庶歸依者也無何大師謂衆曰此地必是灾害所生」
寇戎相煞不如早爲之所難至無計可爲也忽指路於北山尋乘桴於四海此時欻遭風浪難整舟 大師問海師云晝夜六時征行千里此中何處爭認前程海師荅曰暗算前途必應西國也大師作」
偈云先想遊秦落拓時老▨還作學生兒追思昔日求西笑更感臨時恨太遲恍忽之間沉吟之際其於耿戒夢見海神謂曰 大師不要入唐何妨歸本努力努力莫以傷心忽然仍遇便風東征半日得達唐」
城郡之西界得抵平津以此▨往守珍權謀止泊遂至銀江禪院稍愜禪襟因過旬時暫停杖屨 大王尋遣斧壤縣副守張連說專賷茗香遠奉銀山云常欽王佐之才冀表國師之禮 大師以煙塵」
所逼世道交危拒其薛簡之邀辭以周豐之懇謂曰世皆濁矣時久昏焉爝火不能除大夜之昏阿膠不能止黄河之濁每看惡路實猒生途至于乾寧七年三月九日詰旦忽告門人曰三界皆空萬緣俱寂吾將」
逝矣汝等勉旃守護禪門無隳宗旨以報吾恩也言訖坐滅報年七十五積夏五十六于時天色蒼茫日光慘澹人間失眼世路傷情况復門下弟子倶叨心喪共悲面訣效天竺拘尸之法茶毘於石室之西拾得」
舎利一千粒其夜當縣制置使金堅奐云於石壇之上紫氣侵天天衆飛來拾其舎利以去待其去赴院中備說殊祥聞於僧衆衆乃驚愕往於雙林果然拾得百餘粒天人恭敬緇素悲哀▨▨▨矣▨▨▨此江」
岸▨▨縣邑所恨遠於山舎逼以海濡唯以僧託城邊譬如鷰栖幕上所以潛賷舎利得到桐林以天祐三年高起石墳安其金骨 大師精靈岳降惠悟天資領禪▨之宗登無生之▨到處而但問禪▨所居」
而▨▨眞乘則是來者雲▨納之似海誨之不倦其在玆乎所謂爲世現生隨方敷化不常厥所其利博哉遂使弘敝禪關闡揚大敎掃魔軍於末代扶王道於三朝收風竅肅然之威每▨竟樹賢雨露生成之德」
常灌情由至於指示玄譚敷陳厚旨或簸在學徒之口或懸於僧史之言者也傳法弟子如宗弘可神靖智空等一千來人倶慮石城共憂陵谷抗表而趍於闕下陳 而情竪豐碑」
孝恭大王夙仰華風常欽▨理贈諡曰澄曉大師塔名寳印之塔仍命翰林學士前守禮部侍郎朴仁範撰碑文也其仁範纔惟奉命且未修文因臥漳濱忽夢莊壑▨▨是門人所恐芳塵稍歇貞石無刋勤露▨」
誠▨陳行狀誠乃雲▨▨▨鶴唳聞 天今上神噐傳華寳圖受命繼其先志將示後來俾令下臣式揚高烈仁渷才非吐鳳學媿亡羊桂科雖坊於▨心虀臼但憂於傷手所冀强搖柔翰▨▨國」
主之 恩湏拱▨▨以慰▨人之志重宣前義乃作銘云大覺大乘兮開▨道 能仁秘旨兮引玄津 推僞悟眞兮時▨恩 即凡成聖兮世詵詵 龞山孕秀兮生奇骨 鶴樹銜凄兮葬報身」
方知高跡兮雖▨▨ 忽覩盛名兮亦日新 欽化飾終兮有五▨ 繼明靈跡兮是千人 月吊茅堂兮長閇日 霜霑奈菀兮永辭春」
▨▨長老 雲超長老 ▨時主人和尙夐栖老乂洪長老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十五日文己成而以 國家多事時隔二紀忽遇四郡烟消一邦塵息天福七年歲在甲辰六月十七日立 崔奐規刻字」
(陰記)
謹錄賢哲僧俗弟子尊位排在於後」
能善寺主 乘全寺主 聦月寺主 崔虛大德」
弘㑣大德 契貞大統 慶甫大統 性言大德」
王堯君」
王昭君」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淸端▨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權▨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相 金奐阿飡 金休長史 鎰休郎」
▨順元甫 希悅助 兢悅助 式榮韓飡」
寬質韓飡」
兢鎰海飡 賢逢元甫 官憲元甫」
廉相海飡 允逢元甫 憲邕元尹 師尹一哲飡」
侃榮阿飡 章劍史上 弼邢大監 姚謙郎」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與一正朝 乎直阿干(溟州)」
尅奇(溟州) 金芮卿(溟州) 連世大監(溟州)」
王侃(原州) 德榮沙干(竹州) 弟宗沙干(竹州)」
宋嵒史上(公州) 平直村主(提州) 貴平一吉干(提州)」
堅必村主(冷州) 堅奐沙干(新知縣) 越志山人(新知縣)」
哀信沙干(又谷郡) 能愛沙干(又谷郡) 世達村主(奈生郡)」
式元大監(冷水縣) 明奐村主(洒淵縣) 康宣助(別斤縣)」
金立房所郎 吉舎村主丹越駬 崔山㭆听」
當時三綱典名位列」
院主希朗長老」
典座昕曉上座」
史道澄禪師」
直歲朗然禪師」
▨檢校維那良善長老老」
堂維那契融上座」
持客契廉禪師」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해석문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사자산(師子山) 흥▨▨▨(興▨▨▨) 교시(敎諡) 징효대사(澄曉大師) 보인지탑비명(寶印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조청대부(朝請大夫)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최언휘(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은 교지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살펴 보건대 진종(眞宗)은 본시 적적하건만 억지로 교(敎)의 문을 설립하였고, (결락) 전심(傳心)의 취지를 제창하였으니, 그 추요는 현기(玄機)라야 알 수 있는 현경(玄境)인 것이며, 그 종지(宗旨)는 불어(佛語)와 불심(佛心)이므로 이름과 말로써 그 시종(始終)을 엿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것으로도 규구(規矩)를 알 수 없다. 여기에 때를 타고 원력(願力)으로 출세한 신인(神人)이 있으니, 그는 언진(言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홀로 걸어가 바로 성해(性海)로 돌아갔으니 어찌 의로(意路)를 따라 외로이 선산(禪山)에 들어갔다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반드시 이단(異端)을 천착하고 그 사견(邪見)을 믿어서 (결락) 마음이 마치 원숭이처럼 날뛰어 항상 삼독의 숲을 요란하게 하다가 홀연히 좋은 인연을 만나 선유(善誘)임을 알았다. 이와 같이 미혹한 중생(衆生)을 인도하는 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그가 곧 징효대사(澄曉大師)이시다.
대사의 휘(諱)는 절중(折中)이요, 자(字)는 (결락) 속성은 (결락) 휴암(鵂嵒) 사람이다. 그의 선조가 모성(牟城)에서 벼슬살이하다가 드디어 군족(郡族)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동(先憧)이니, 기예는 궁술과 기마에 뛰어났으며 명성은 화이(華夷)에 떨쳤다. 효자(孝慈)는 사관(史官)에 실렸고, 공적은 왕부(王府)에 간직되어 군성(郡城)의 귀감이며 여리(閭里)의 동량이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로 비몽사몽 중에 한 천녀(天女)가 나타나 이르되 “아미(阿㜷)께서는 반드시 지혜 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 하면서 아름다운 보배 구슬을 전해 받고는 대사(大師)를 임신하였다. 그 후 보력(寶曆) 2년 4월 7일에 탄생하니, 날 때부터 성스러운 자태를 지녔고, 일찍부터 아이들과 같이 장난하지 아니하였다. 일곱 살 때 걸식(乞食)하는 스님을 보고 흠모하여 출가(出家)할 것을 결심한 다음, 드디어 양친(兩親)을 하직하였다. 외롭게 오관선사(五冠山寺)에 가서 진전법사(珍傳法師)를 배알하니 법사가 이마를 만져 주는 순간 문득 식심(息心)의 뜻에 계합하여 곧 자실(慈室)에 있게 되었다. 머리를 깎고 (결락) 위(謂) (결락) 모두들 말하기를 “후대(後代)의 칠도인(漆道人)이 여기에 다시 나타났다”면서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구의사미(救蟻沙彌)와 더불어 어찌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열다섯 살 때에 곧바로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잡화경(雜華經)을 배워 방광(方廣)의 진전(眞銓)을 찾았으며, 십현(十玄)의 묘의를 연구하였다. 의학(義學)하는 사문들이 비로소 그 말을 듣고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마치 공융(孔融)이 응문(膺門)에 나아가서 마침내 망년(忘年)의 벗을 삼은 것과 같았으며, (결락) 수(守)하여 병일(幷日)의 교우(交友)가 되었다. 열아홉 살 때 백성군(白城郡)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고자 하였을 때, 대사(大師)가 계(戒)를 받으려고 계단에서 수계의식을 행하려 상단(上壇)하는 날, 갑자기 자색 기운이 단중(壇中)에서 솟아올랐다. 이를 본 어떤 노(老)스님이 대중들에게 말하되, “이 사미(沙彌)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닦은 공이 아니니, 이러한 증험을 보인 것은 마땅히 이미 계주(戒珠)를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반드시 후대(後代)의 미혹한 중생을 제도할 큰 재목(材木)이므로 수계하기 전 먼저 이러한 상서를 나타낸 것이다”라 하였다. 돌이켜 태몽(胎夢)을 생각하니 참으로 합부(合符)하였다.
이로부터 정미롭게 부낭(浮囊)을 보호하며 멀리 절경(絶境)을 찾아다니다가 풍악산 장담사(長潭寺)에서 도윤화상이 오랫동안 중국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선비(禪扉)로 찾아가서 오체투지하고 예배를 드렸다. 화상이 이르되 “영산에서 서로 이별한 후 몇 생(生)이나 되었는가. 우연히 서로 만남이 어찌 이다지도 늦었는가”하였다. 대사는 이미 입실을 허락받았고 스님의 자풍(慈風)에 깊은 감명을 느꼈으므로, 나의 원에 적합하다면서 화상(和尙)을 사사하였다. 화상은 지난 날 중국(中國)에 가서 먼저 남전화상(南泉和尙)을 친견하고 법을 이어 받았으니, 남전(南泉)은 강서도일(江西道一)을 계승하였고, 강서(江西)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을 승사하였으므로 남악(南岳)은 곧 조계혜능(曹溪慧能)의 몽자(冡子)이니, 그 고매(高邁)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사(大師)는 도윤을 모시면서 좌우(左右)를 떠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의 법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 때 “내 어찌 진단(震旦)에 유학하는 것을 늦추리요”하고는 그 후 곧바로 도담(道譚)선사에게 나아가 (결락) 자인(慈忍)선사를 함께 친견하고 예배를 드리니, 처음 뵙는 것 같지 않고 구면과 같음을 느꼈다. 도담선사가 말하되 “늦어서야 상봉(相逢)하였으니 그동안 얼마나 되었는가”하거늘, 이에 대사(大師)가 앞에 놓여 있는 물병을 가리키며 “병이 곧 병이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 대사(大師)가 또 답하되 “절중(折中)입니다”하였다. 선사(禪師)가 이르되 “절중(折中)이 아닐 때에는 누구인가” 대답하되 “절중(折中)이 아닌 때는 이와 같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이름 밑에 허사(虛事)가 없으니, 이제 절중(折中)은 어찌할 수 없구나! 내가 많은 사람을 상대하였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하였다. 그러므로 16년 동안 선방에서 진리를 깊이 탐구하여 드디어 망언(亡言)의 경지를 밟았으며, 마침내 득의(得意)의 마당으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빛을 꼭두서니에서 뽑아냈지만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집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天下)를 두루 아는 자를 대사(大師)에게서 볼 수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서 구슬을 찾고, 산에 올라가 옥(玉)을 캐는데 있어 어찌 정(定)해 놓은 스승이 있으리요. 이에 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행장을 짊어지고 행각하면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중화(中和) 2년에 전 국통인 대법사(大法師) 국공(威公)이 대사(大師)가 주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마치 가시가 목에 걸린 것과 같았다. 생각 끝에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곡산사(谷山寺)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으니, 애써 주선해준 단성(丹誠)에 못 이겨 잠깐 주석하였지만 경연(京輦)과 가까운 것이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다. 이때 사자산(師子山)에 석운대선사(釋雲大禪師)가 있었는데, 징효대사(澄曉大師)의 덕은 화이(華夷)를 덮었는데도 정해진 거처(居處)가 없음을 알고 신족(神足)을 보내어 간절한 성의를 표하여 말하되, “노승(老僧)이 있는 이 곳은 작은 그릇이 있을 곳이 아니니, 대사(大師)가 여기에 주석한다면 가장 적합할 듯합니다. 만약 스님이 아니면 누가 이 도량(道場)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속히 왕림(枉臨)하여 송문(松門)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청을 받은 대사(大師)는 그 성의를 거역할 수 없어 곧 선중(禪衆)을 데리고 그 곳에 주석하였다. 이 절의 경치는 천봉만학이 마치 병풍처럼 열려 있고, 층암 절벽의 절경이어서 참으로 해동(海東)의 가경(佳境)이며, 또한 천하(天下)의 복전(福田)이라 할 수 있었다. 대사(大師)가 여기에서 려지(戾止)함으로부터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아침에는 셋, 저녁에는 넷으로 끊임없이 모여들어, 마치 비처럼 모이고 바람과 같이 달려와서 도리무언(桃李無言)이나 하자성혜(下自成蹊)하여 도마(稻麻)와 같이 열을 이루었다.
이 때 헌강대왕이 봉필(鳳筆)을 보내 궁궐로 초빙하고는 사자산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대사(大師)를 그 곳에 있게 하고는 나라의 중흥(中興)을 기꺼워하였으나, 갑자기 헌강대왕이 승하하여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즉위하여 선교를 존숭함이 전조(前朝)보다 못하지 아니하였다. 왕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멀리서 찬양하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뜻 밖에 정강왕(定康王)도 즉위 2년 만에 승하하여 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고, 국조(國祚)는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연진(煙塵)이 일고, 갑자기 요기(妖氣)가 가득하여 산중 연비(蓮扉)에까지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웠다. 대순(大順) 2년에 상주의 남쪽으로 피난 가서 잠시 조령(鳥嶺)에서 서지(栖遲)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본산(本山)인 사자산이 병화(兵火)를 만나 보방(寶坊)이 모두 소실되었으니, 대사(大師)는 혜안으로 미리 길흉(吉凶)을 점쳐 건물과 함께 타 죽을 액난을 면하였다. 진성대왕이 어우(御宇)한지 2년 만에 특별히 명주의 삼석(三釋)과 포도(浦道) 두 스님과 동궁내양(東宮內養) 안처현(安處玄) 등을 보내어 륜언(綸言)을 전달하여 국태민안을 위해 법력(法力)을 빌고 나아가 음죽현(陰竹縣)의 원향사(元香寺)를 선나별관(禪那別觀)으로 영속시켰다. 이 날 대사(大師)는 북지(北地)를 떠나 점차 남행(南行)하다가 공주(公州)를 향해 지하(城下)를 지나가는데, 장사(長史)인 김공휴(金公休)가 군리(郡吏)인 송암(宋嵒) 등과 함께 멀리서 듣고 자(慈) (결락) 에 이르러 군성(郡城)으로 영입하고 겸하여 간기(揀其) (결락) 명거(名居). 스님을 그 곳에 초빙하여 계시게 하였다. 대사(大師)가 장사(長史)에게 이르되 “빈도(貧道)는 늙어 죽음이 임박하였으므로 쌍봉사에 가서 동학(同學)들을 만나보고 선사(先師)의 탑에 참배하려 하니 만류하지 말아 달라”하시고, 드디어 몇 사람의 대중을 거느리고 떠나 진례군계(進禮郡界)에 들어서자마자 적도(賊徒)들이 길을 차단함을 당하여 대중들이 길을 잃게 되었다. 이 때 홀연히 운무가 몰려와 어두워지며 캄캄해지더니 공중(空中)에서 병마(兵馬)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도적의 우두머리 등 모두가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뒤로 물러서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대사(大師)와 대중은 겁탈의 재앙을 면하였으니, 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자비로 가호해 주신 덕택이라 하겠다. 한탄스러운 바는 전국 방방곡곡에 초적(草賊)이 출몰하여 조용한 곳이 없었다. 이러한 위험한 때에 밤을 새워가며 길을 재촉하여 무부(武府)에 도달하였으니, 융적(戎賊)들도 공경히 받들었고, 일군(一郡)은 조용하며 편안하게 되었다.
대왕께서 대사가 남방(南方)으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경(西境)을 보호하였으며 군흉(群凶)들이 예배하고 대대(大憝)가 귀의하였다. 임금은 대사가 길이 국가를 복되게 하며 겸하여 북당(北堂)을 위해서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인 두 절을 헌납하여 주석(住錫)하도록 하였다. 당주(當州)의 군사(郡吏) 김사윤(金思尹) 등이 찾아와서 선지(禪旨)를 듣고 법문(法門)에 깊이 감명을 받아 분령(芬嶺)에 계시도록 청하고, 군(郡)의 동림(桐林)을 선거(禪居)에 길이 예속시켜 열반(涅槃)할 종신처로 삼게 하였다. 혜원법사가 려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진(晋)나라 안제(安帝)가 숭앙하고, 승조(僧稠)가 효룡산(孝龍山)에 있을 때에 제(齊)나라 문선제(文宣帝)가 귀의하였으며, 허순(許詢)이 지둔(支遁)을 스승으로 모셨고, 주서(朱序)가 도안(道安)대사를 존숭한 것 등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진량(津梁)이 되며, 시대의 약석(藥石)이라고 할 만하였다. 군신이 의뢰하며 사서(士庶)들이 귀의하였다. 어느 날 대사가 대중에게 말씀하되 “이곳은 반드시 재해(災害)가 일어나 구융(寇戎)들이 서로 죽이는 일이 있을 터이니, 미리 대처하여 재난이 다가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하고 홀연히 북산을 향해 떠났다. 서해(西海)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였다. 대사(大師)가 해사(海師)에게 “주야 육시(六時)로 천리(千里)쯤 온 듯하니 여기가 어디며, 어디를 향해 가느냐”고 물었다. 해사(海師)가 대답하되 “전도(前途)를 암산하니 아마 서국(西國)일 듯하다”고 하였다. 해사의 말을 들은 대사(大師)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전에 진(秦)으로 유학하려던 것을 생각하니
노승(老僧)이 이제야 유학승이 되었구나.
옛날 유학하려던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니
때가 너무 늦은 것을 다시 느끼네!
황홀하고 침음(沉吟)하면서 근심에 잠겼다. 그날 밤 꿈에 해신(海神)이 나타나 이르되 “대사(大師)께서는 입당구법(入唐求法)을 포기하고 본사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니, 부지런히 정진하고 상심(傷心)하지 말라”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순풍을 만나 동쪽으로 반일(半日) 쯤 가다가당성군(唐城郡)의 서계(西界)인 평진(平津)에 도달하였다. 곧바로 수진(守珍)으로 가서 권모씨(權某氏)의 집에서 며칠을 묵은 다음 드디어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니, 매우 훌륭한 도량이었다. 그 곳에서 십여 일 동안 임시로 주석하고 있었다.
대왕(大王)이 황양현(荒壤縣) 부수(副守)인 장연설(張連說) 편으로 명다(茗茶)와 명향(名香)을 담은 양함(琅函)을 보내면서 “항상 스님을 왕좌(王佐)의 재목(材木)으로 흠모하였으므로, 이제 국사(國師)의 예를 표한다”고 전하였다. 대사(大師)는 연진(煙塵)의 핍박으로 세상이 혼란하다 하여 설린(薛藺)의 요청을 거절하고, 주풍(周豊)의 간청도 사양하면서 이르기를 “세상은 모두 혼탁하고 시대는 오랫동안 혼미하므로 반딧불로는 능히 한밤의 어둠을 제거(除去)할 수 없고, 아교로써 능히 황하(黃河)의 탁류를 막을 수 없다”고 하며, 항상 어두운 현실을 보니 실로 삶의 길이 싫어졌다. 건녕(乾寧) 7년 3월 9일 힐단(詰旦)에 이르러 홀연히 문인(門人)들에게 이르되, “삼계(三界)는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고, 만연(萬緣)은 함께 고요한 것이다. 나는 이제 떠나려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여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곧 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니라”하였다.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단정히 앉아 입멸(入滅)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75세요, 법랍은 56이었다.
이때 하늘빛은 창망하였고, 햇빛은 참담하였으며, 인간은 모두 눈을 잃은 듯 하였고, 세상은 함께 상심에 잠겼으니, 하물며 문하(門下)의 제자들이야 오죽 하였겠는가. 모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제자들은 함께 슬픈 표정으로 천축(天竺) 구시라(拘尸羅)의 법을 본받아 석실(石室)의 서쪽에서 다비(茶毗)하고, 사리 천과(千粿)를 습득하였다. 그 날 밤 황양현 제치사(制置使)인 김견환(金堅奐)이 말하되, “석단(石壇) 위에서 자색 기운이 하늘로 뻗치더니 천중(天衆)이 날아와서 사리를 주워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원중(院中)에 가서 자세하게 그 특수한 상서를 이야기하였다. 대중들이 전해 듣고 깜짝 놀라 쌍림(雙林)으로 가 보았더니, 과연 일백여 과의 사리를 습득하게 되었다. 천인(天人)들이 공경하였고, 스님과 신도들이 애통해 마지아니하였다. (결락) 의(矣) (결락) 이는 강안(江岸) (결락) 현읍(縣邑) 사람들이 원망스러운 것은 산사(山寺)와의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바다의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스님들만이 살고 있으므로, 마치 절벽에 매달린 제비집과 같았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시고 동림(桐林)으로 돌아가서 천우(天祐) 3년에 높이 석탑을 세우고 그 금골(金骨)을 안치하였다. 대사(大師)는 영악(靈岳)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선천적으로 지혜로웠고, 선의 종지(宗旨)를 깨달아 무생(無生)의 언덕에 올랐으며, (결락) 가는 곳마다 선(禪)의 종지만을 물었고, 거주(居住)하는 장소마다 현리(玄理)를 참구하였으니, 진승(眞乘)이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대중은 구름처럼 모여 들었고 모인 사람은 바다와 같았으며, 학인(學人)을 지도하되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스님은 중생을 위해 현생(現生)하였으며 곳을 따라 교화하여 일정한 장소가 없었으니,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선관(禪關)을 크게 열고 대교(大敎)를 천양하여 말세(末世)에 있어 마군을 소탕하고, 삼조(三朝)에 걸쳐 왕도(王道)를 부호(扶護)하여 풍거(風竅)와 같이 숙연한 위엄을 떨쳤으며, 항상 (결락) 우로(雨露)가 만물을 생성케 하는 것과 같이 덕을 베풀어서 중생의 마음 밭에 뿌렸고, 심지어는 깊은 진리를 가르치고 도타운 뜻을 일러 주었다. 이와 같은 위업이 혹은 학도(學徒)들의 입으로 전파되기도 하고, 혹은 승사(僧史)에 실려 있기도 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는 여종·홍가·신정·지공(如宗·弘可·神靖·智空) 등 1천여 인이나 되었다. 이를 모두가 석성(石城)이 무너질까 염려하며, 함께 사리를 모신 높은 언덕이 능곡(陵谷)으로 변할까 걱정한 나머지 임금님께 표상(表狀)을 올려서 비석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달라고 주청하였다. 효공대왕은 일찍부터 스님의 빛나는 도풍(道風)을 앙모하여 항상 불교를 존숭한 까닭에 시호를 징효대사(澄曉大師)라 하고, 탑명을 보인지탑(寶印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어 한림학사이며 전(前) 예부시랑(禮部侍郞)인 박인범(朴仁範)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인범이 왕명(王命)을 받고 비문을 짓기 전에 와병으로 죽었으니, 장학(藏壑)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결락) 그리하여 이 일은 문인(門人)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되었다. 방진(芳塵)은 점차 사라지고 아직 정석(貞石)을 새기지 못하게 되자 문인들의 뜻을 모아 행장(行狀)을 초안해서 내운(乃雲) (결락) 학려(鶴唳)와 같은 애절한 진정(陳情)을 임금께 알렸다.
이 때 상(上)이 신기(神器)와 빛나는 보도(寶圖)를 전해 받고, 천명(天命)을 이어 선왕의 뜻을 계승하며, 이를 뒷사람들에게 널리 보여 주고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법답게 높은 공적을 찬양하라 하시지만, 인연(仁渷)은 재주가 토봉(吐鳳)이 못될 뿐만 아니라 학문도 망양(亡羊)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계과(桂科)에는 비록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나, 제구(虀臼)에 대해서는 상수(傷手)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는 바는 억지로 붓을 잡아 비문을 지었으니, 이로써 국왕의 은혜를 갚고 아울러 문인(門人)들의 뜻을 위로함이니, 앞의 뜻을 거듭 밝히고자 이에 명(銘)을 짓는 바이다.
대각의 대승법이여! 묘도(妙道)를 열어주고,
능인(能仁)의 비밀법(秘密法)이여! 중생을 인도하네.
진위(眞僞)를 분간함이여! 시대(時代)를 깨우쳤고
범부(凡夫)가 곧 성인(聖人)이여! 모두가 부처로다.
오산(鼇山)에 빼어남이여! 기골(奇骨)을 받아 낳고,
학수(鶴樹)서 열반함이여! 보신(報身)을 화장했네.
비로소 그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언제나 빛난 그 이름! 날마다 새롭도다.
장례의 법요무(法要式)이여! 정성을 다하였고,
법을 계승한 제자는 천명(千名)이 넘네!
달빛이 조문(弔問)함이여! 햇빛은 침침하고,
나원(奈苑)에 뿌려줌이여! 그 감로(甘露) 사라졌네.
▨▨장로(▨▨長老)
운초장로(雲超長老)
▨지주인화상(▨持主人和尙):형서(夐栖)
예홍장로(乂洪長老)
용덕(龍德) 4년 세차(歲次) 갑신(甲申) 4월 15일에 비문은 완성되었으나, 국가가 다난(多難)하여 이기(二紀)를 지낸 후에야 비로소 사군(四郡)의 연진(煙塵)이 사라지고, 일방(一邦)의 전란이 평정되었다.
천복(天福) 7년 갑진 6월 17일에 세우고, 최환규(崔奐規)는 글자를 새기다.
【陰記】
삼가 현철(賢哲)과 승속 제자들의 존위(尊位)를 기록하여 다음에 배열(排列)한다.
능선사주(能善寺主)
승전사주(乘全寺主)
총월사주(聰月寺主)
최허대덕(崔虛大德)
홍람대덕(弘㑣大德)
계정대통(契貞大統)
경보대통(慶甫大統)
성언대덕(性言大德)
왕요군(王堯君)
왕소군(王昭君)
▨▨대왕(▨▨大王)
필영대왕(弼榮大王)
영장정광(英章正匡)
왕경대승(王景大承)
청단▨주(淸端▨主)
김일소판(金鎰蘇判)
긍달소판(兢達蘇判)
왕규좌승(王規佐承)
권▨좌승(權▨佐承)
왕순좌승(王詢佐承)
왕렴좌승(王廉佐承)
성준원보(誠俊元甫)
▨▨▨상(▨▨▨相)
김환아찬(金奐阿飡)
김휴장사(金休長史)
일휴랑(鎰休郞)
▨순원보(▨順元甫)
희열조(希悅助)
긍열조(兢悅助)
식영한찬(式榮韓飡)
관질한찬(寬質韓飡)
긍일해찬(兢鎰海飡)
현달원보(賢逢元甫)
관헌원보(官憲元甫)
겸상해찬(廉相海飡)
윤달원보(允逢元甫)
헌옹원윤(憲邕元尹)
사윤일철찬(師尹一哲飡)
간영아간(侃榮阿飡)
장검사상(章劍史上)
필형대감(弼邢大監)
요겸랑(姚謙郞)
최방원윤(崔芳元尹)
기오원윤(奇悟元尹)
기달원윤(奇達元尹)
지연정위(知連正衛)
여일정조(與一正朝)
평직아간 명주(平直阿干 溟州)
기내 명주(奇柰 溟州)
김예경 명주(金芮卿 溟州)
연세대감 명주(連世大監 溟州)
왕간내 원주(王侃奈 原州)
덕영사간 죽주(德榮沙干 竹州)
제종사간 죽주(弟宗沙干 竹州)
송암사상 공주(宋嵒史上 公州)
평직촌주 제주(平直村主 提州)
귀평일길간 제주(貴平一吉干 提州)
견필촌주 냉주(堅必村主 冷州)
견화사간 신지현(堅奐沙干 新知縣)
월지산인 신지현(越志山人 新知縣)
애신사간 우곡군(哀信沙干 又谷郡)
능애사간 우곡군(能愛沙干 又谷郡)
세달촌주 내생군(世達村主 奈生郡)
식원댁삼 냉수현(式元大監 冷水縣)
명환촌주 주연현(明奐村主 酒淵縣)
강선조 별근현(康宣助 別斤縣)
전립방 소랑(全立房所郞)
길사촌주 단월이(吉舍村主丹越駬)
최산내은(崔山㭆听)
당시의 삼강(三綱)과 전명위열(典名位列)
원주(院主):희랑장로(希朗長老)
전좌(典座):흔효상좌(昕曉上座)
사(史):도증선사(道澄禪師)
직세(直歲):낭연선사(朗然禪師)
▨검교유나(▨檢校維那):낭선장로(良善長老)
당유나(堂維那):계융상좌(契融上座)
지객(持客):계렴선사(契廉禪師)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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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1964년 3월 3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작은 보살상으로 높이 17.5cm이다.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랫동안 흙속에서 침식된 흔적이 뚜렷하며, 불에 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반가상은 오직 백제와 신라에서만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 보살상으로 새롭게 고구려의 예를 확인할 수 있어 주목된다.
머리에는 산 모양의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고개를 약간 숙여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네모난 형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난다. 상체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잘록한 허리가 그대로 드러나며, 하체에는 치마를 걸치고 있다.
치마에는 무릎 위쪽으로 선으로 새긴 주름의 형태만 간략히 묘사하다가 대좌(臺座)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늘어져 여러 겹의 수직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연꽃무늬 대좌 위에 왼발을 내려 놓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채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대고 있는데 팔과 손이 떨어져 나가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큰 편이나 가냘픈 몸매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생각에 잠긴 보살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든 연대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출토지가 확실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으로 주목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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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삼국시대 6세기 후반, 국보 78호, 높이 83.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보살상으로 높이는 80㎝이다. 1912년에 일본인이 입수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를 나오게 하고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 띤 얼굴을 만들었다.
상체는 당당하면서도 곧고 늘씬한 모습이며, 하체에서는 우아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율동적이어서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목 뒤로 돌아 양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교차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하체에 입은 치마는 다소 두툼해 보이는데 U자형 주름이 능숙하게 새겨져 있다.
왼발을 올려 놓은 타원형의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재질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주름, 명상에 잠긴 듯한 오묘한 얼굴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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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국보 83호, 높이 9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이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근거가 없으며,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얼굴은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고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고, 목에 2줄의 목걸이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꽃무늬 대좌(臺座)를 밟고 있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왼손으로는 오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하반신을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얇게 표현하여 신체 굴곡이 잘 드러나며, 연꽃무늬 대좌를 덮은 옷자락은 깊고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왼쪽으로 옥을 꿴 치마의 띠가 내려가고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는 긴 촉이 달려 있어 광배(光背)를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준다.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다 연대가 내려와 삼국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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