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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사주학)/풍수이야기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居龍仁)

by 연송 김환수 2017. 4. 27.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居龍仁)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한 사람이 살았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사람으로 남의 머슴살이를 하였으나 워낙에 정직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이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총각이 안타까워 그와 처지가 비슷한 여자와 혼례를 치러 주었다.

 

부부는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부인은 매일 남편을 위해 십 리나 떨어진 산골짜기로 점심을 갖다 주었다. 남편이 점심을 먹는 동안 아내는 고생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화전을 일궜다.


그 사이 피곤한 남편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산 밑으로 돌이 굴러떨어졌다. 놀란 아내는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갔지만, 이미 남편은 돌에 치어 죽은 뒤였다.


아내는 대성통곡하며 우리 남편을 살려 달라.”고 울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수천 근이나 되는 돌을 치울 수가 없어 돌 밑에 남편을 묻었다.

 

죽은 남편은 저승에 갔다. 저승의 최참판이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아무개 몇살이라 했더니, “너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다. 그러니 다시 내려가 살아라.” 하였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고 내려왔으나 시신이 큰 바윗돌에 치어 죽어 있으므로 접신할 수가 없었다.


용인사람은 할 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충청북도에 있는 진천의 오백 석 부잣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그 집 아들이 사십이 안 돼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자, 그 집 어머니가 혹시나 아들이 살아날까 하는 마음에 일주일이 되도록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있었다.

 

접신을 못하고 있던 용인사람은 죽은 진천사람의 신체에 가서 접신하여 살아났다. 살아난 용인사람은 매일같이, “용인군 이동면 묘봉리에 내 처가 몇 살이고, 아무 아무 해에 장가를 들었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인마를 거느리고 묘봉리를 찾아갔더니, 그곳에 소복을 입은 여자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부인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달라고 하여 마신 후, 우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실 저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이 집에 시집왔는데 불과 일 년도 안 돼서 남편이 죽었습니다. 믿고 살 사람이 없어 이렇게 매일같이 웁니다.”


이 말을 들은 진천 어머니는, “그러면 당신은 내 며느리요. 당신 남편이 저승에 갔다가 우리 아들한테 접신을 했으니 우리 집으로 같이 갑시다.” 하고는 가마에 태워 진천으로 데리고 갔다. 진천에 도착해 보니, 남편의 얼굴은 다르지만 음성은 틀림없이 같았다.

 

이렇게 해서 용인사람은 진천사람이 되어 진천부인과 용인부인을 데리고 살게 되었다.

진천 본부인에게 두 아들을 낳고 용인부인에게서는 세 아들을 낳고 칠팔십 년을 살다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자 진천아들과 용인아들 사이에 아버지의 혼백을 서로 모시겠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명관으로 이름난 진천군수한테 가서 송사를 하게 되었다.

 

살아서는 어디서 살았느냐?”고 진천군수가 물어 보자 아들들은 한 목소리로 진천서 살았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진천군수는, “그래? 그럼 생거진천했으니 사거용인해라.” 하였다. 살았을 때는 진천에서 살았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살라는 판결이었다. 그래서 혼백을 용인아들이 모시게 되었다. 이로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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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 사거용인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 땅이 좋다는 말이다. 따라서 용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대체로 명당으로 인식되어왔다.

조선조 중엽, 용인사람 김생원과 진천사람 황진사가 같은 날 동시에 사망을 했다. 그런데 염라대왕 앞에 불려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랄 판결을 들었다. , 용인사람 김생원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저승사자가 실수하여 잘못 데려왔다는 것이 아닌가염라대왕은 김생원을 다시 지상의 세계로 내려 보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김생원이 집에 와 보니 김생원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 해버려서 김생원의 영혼이 들어 갈 몸이 없지 않는가. 부득불 같은 날 동시에 죽은 진천 황진사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뼈대있는 양반의 가문답게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던 황진사네 식구들은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장례식을 치르는 중에 황진사가 도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었다 살아난 황진사가 자신은 용인의 김생원이라며 집으로 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바람에 식구들은 또 한바탕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소식을 들은 용인의 김생원 가족들이 진천으로 달려왔고, 두 집안의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얘기를 듣더니 서로 자신의 부친이라며 서로 모시겠다고 다툼이 일어났다.

 

결국 송사가 벌어져서 그들 모두는 진천현감 앞에 대령하게 되었는데, 양쪽 집안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진천현감이 명 판결을 내렸다.

 

용인의 김생원이 환생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러나 진천 황진사의 몸을 하고 다시 태어났으니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명 판결이다. 용인 김생원의 자식들이 진천으로 이사를 왔고, 두 가족이 모두 김생원을 극진히 모시다가 김생원 사후에는 용인으로 가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결국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명 판결이 오늘날의 대한민국 용인 땅을 명당으로 인식시키는 근거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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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거진천 사후용인명당많은 용인

 

최인진 기자 ijchoi@kyunghyang.com

 

김대중 전 대통령 선영,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 경기 용인지역은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죽어서 묻혀야 후세에 복을 가져온다는 속설 때문에 유명인들의 무덤이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2년전 쯤인 1995년을 전후해 부모의 묘를 용인으로 이장했다. 당시 묘 자리는 유명 풍수가가 점지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당선됐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에버랜드 호암 미술관내에 자리잡고 있다. 매년 11월 이 전 회장의 기일에 맞춰 범 삼성 일가가 추모식을 갖는다. 조중훈 전 회장의 묘소는 하갈동 대한항공 연수원 내에 있다. 마북동 현대연구소에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일가의 종중 묘가 있다. 이곳에는 정 전 회장의 장남인 정몽필 인천제철 회장의 묘가 있다.

 

종교계에서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묘소가 모현면 천주교 공원묘원에 있다. 김 추기경의 묘소는 선종 직후부터 지금까지 천주교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문화계에서는 박목월 시인이 대표적이다. 모현면 용인공원묘원에 있는 박 시인의 묘소에는 시의 정원이 조성돼 문학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의 조부 묘도 양지면에 있었지만 지금은 이장한 상태다. 이밖에도 장차관급 이상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의 묘소도 즐비하다.

 

역사속 인물들도 있다. 처인구 모현면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가 있다. ‘현인을 사모한다는 모현(慕賢)이라는 지명처럼 1년 내내 많은 역사 답사객들이 찾고 있고 이에 걸맞게 묘역은 상석,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곡담, 호석, 난간석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정몽주 선생은 1392년 음력 44일 선죽교에서 피살된 뒤 황해도 풍덕군에 우선 묻혔다가 1406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는 조선 중기 문신 조광조(1482~1519)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는 조선 전기 문신 이석형(14151477)의 묘가 있다. 이석형은 1441(세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 급제한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다.

 

국정을 농단한 비선실세최순실의 부친인 고 최태민의 묘도 용인에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최씨 묘는 영동고속도로 용인 IC 인근 능선의 동쪽 산자락 끝에 있다. 풍수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이 일대는 용인의 3대 명산인 석성산 정기를 내려받은 명당으로 알려졌다. 최씨 가족들이 이 곳에 법을 어기면서 까지 묘를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조만간 다른 곳으로 이장할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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