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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사주학)/풍수이야기

사도와 남연군과 흥선군과 육관도사의 천하명당

by 연송 김환수 2016. 4. 30.


조선의 르네상스로 전해진 정조시대의 이면

 

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 2015.12.27 10:15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6):사도와 남연군과 흥선군과 육관도사의 천하명당()]

 

 

최근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립현충원 묘역에서 커다란 돌덩어리가 일곱개 나온 것을 두고 봉황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 전 대통령측에서는 그분이 영면할 자리가 현충원에서도 명당이라는 증거라고 하지만 다른 말도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로, 그는 봉황알이 일곱개나 나오면 봉황의 항문이 파열된다고 비판했습니다. 김두규씨 같은 풍수가들 사이에서도 돌 무더기가 나오는 땅은 좋은 곳이 아니라는 말이 조선일보 Why 지면에 보도된 바 있지요.

 

논란을 보며 사도세자를 떠올렸습니다. 조선 후기는 사도(思悼)세자 후손들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극적인 삶을 마친 사도의 삶이 최근 영화를 통해 조명됐는데 역사는 조선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부자 갈등에서 비롯됐음을 보여줍니다. 사도의 가계도를 살펴볼까요? 사도세자는 다섯 아들을 뒀습니다. 첫째 의소세손(世孫)은 세살 때 사망했지요. 둘째 아들이 22대 임금 정조(正祖)입니다. 정조와 사도의 관계는 수원 화성(華城)과 융건릉을 다룬 문갑식의 기인이사’ 27회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경기도 화성의 융릉은 조선 왕조의 능가운데서도 명당으로 꼽힌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서얼을 등용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폈습니다. 실학이 융성하고 나라의 힘도 회복돼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시기를 맞았지만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혹자들은 암살당했다는 주장을 접지않습니다. 정조 치하에서 사도가 낳은 정조의 세 이복동생들은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맨먼저 사도의 셋째 아들인 은언군 이신은 천주교와 연루돼 사약을 받았습니다. 사사(賜死)된 것입니다.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 담도 강화도로 유배된 뒤 아버지처럼 사사됐습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꿈꿨던 정조가 건설한 수원 화성행궁 입구에 서있는 나무다. 여기서 소원을 빌면 잘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은언군 집안의 화()는 여기서 그치지않았습니다.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상계군 담의 처이자 은언군의 며느리였던 신씨도 사사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집안이 쑥대밭이 된 것입니다. “권력은 결코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이토록 비정합니다. 사도의 넷째아들이자 정조의 또다른 이복동생인 은신군 이인도 역모에 연루돼 제주도로 위리안치됐다가 병사(病死)합니다. 사도의 다섯째 아들이자 정조의 막내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 역시 역모죄로 사사됩니다. 왕가의 피()는 이렇게 무섭지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채 숨을 거둔 창경궁 내 회화나무다. 오른쪽이 선인문이다.

 

이러고보면 우리가 조선 초기 세종대왕과 버금가는 치세를 이뤘다고 칭송하는 정조의 화려한 개혁 정치의 이면에는 동생들의 비참한 말로(末路)가 가려져있는 것입니다. 정조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처럼 절대왕조시대에는 왕의 동생들이 잠재적 경쟁자로 감시받는게 당연했습니다. 또 사색당파가 워낙 심했기에 정조에게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당한 세력들이 정조의 이복동생들을 부추겨 권력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가 떼죽음을 당한 일도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이다.

 

여하간 사도의 다섯아들은 모두 이런 삶을 살았는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정조가 죽자 왕위는 아들 순조가 계승합니다. 어린 순조 대신에 정조에게 앙심을 품었던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개혁정책을 모두 되돌리는 반동의 시대를 엽니다. 그런데 순조(23) 이후 문제가 생깁니다. 순조에게는 큰아들 효명세자가 있었는데 스물한살에 사망합니다. 둘째아들 헌종(24)이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문제가 생깁니다. 정조의 혈손(血孫)이 모조리 끊어진거지요.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후계자로 삼아야할 것인가? 여기서 조선 후기를 뒤덮은 사도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지요. 다시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봅니다. 정조의 바로 밑 이복동생이자 사도의 셋째아들인 은언군에게는 다섯아들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큰아들 상계군 담은 죽고 둘째-셋째 아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살았지만 넷째아들 풍계군은 은언군의 동생이자 역시 사사당한 은전군의 양자로 입적되며, 다섯째 아들 전계군은 벽지인 강화도에서 종친으로서 명분만 유지한 채 숨을 죽이며 삽니다. 그 전계군의 세 아들가운데 막내가 바로 강화도령철종으로 25대 임금이 되지요. 철종이 들어온 궁궐은 안동 김씨가 장악했으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철종 대에 조선은 지금 국사시험문제에 자주 등장하는 삼정(三政)의 문란을 겪습니다.

사도세자의 먼 후손인 남연군 묘다. 이대 제왕지지, 즉 두대에 걸쳐 왕을 배출한다는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있다.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사도의 넷째아들인 은신군은 아들없이 제주에서 병사한 뒤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세번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南延君)을 양자로 받습니다. 이 남연군이 흥녕군-흥완군-흥인군-흥선군 등 네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복잡한 계보를 잘 이해하셨나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남연군 사후(死後) 시작됩니다. 종친이라는 명분만 유지한 채 안동 김씨 집안의 전횡에 시달리던 남연군의 네 아들 가운데 흥선군은 이를 갑니다. 조금이라도 안동 김씨들에게 잘못 보이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이 희대의 풍운아는 겉으로는 파락호처럼, 광인(狂人)처럼 행세하면서 집안의 부흥을 꾀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사귑니다. 왕실 집안의 인물에게는 비록 먹을 것이 없어도 천하의 술사(術士)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당대의 명풍수 정만인이라는 설도 있고 이름없는 풍수쟁이라는 설도 있지만 1822년 흥선군에게 한 지관이 찾아와 이장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서 이 지관은 안동 김씨에게 설움을 당하고 있던 흥선군의 귀가 번쩍 뜨일만한 이야기를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충청도 덕산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연군 묘에서 봤을 때 왼쪽 부분이다.

 

흥선군은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2대 천자가 나오는 가야산을 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만 하면 또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선임기자라는 녀석이 풍수얘기만 한다고 흥분하는 분들이 있는데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내용은 황현(黃玹)선생이 쓴 매천야록을 비롯해 충청도 향토 사학자들은 상식처럼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원군이 현장이 가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관이 말한 그 땅에는 이미 가야사가 있었으며 명당이라는 자리에는 금탑(金塔)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흥선군은 계략을 꾸밉니다. 먼저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금탑 뒤 기슭으로 옮기지요.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소유로, 흥선군은 그 후손들에게 묫자리를 완전히 이장할 때까지 잠시 빌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아버지 시신을 옮겼으니 두번째는 가야사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숭유억불정책이 강한 조선시대였지만 유서깊은 절을 없애는게 쉽지는 않은 일일텐데 흥선군은 아예 막무가내식 방법을 동원하고 말았습니다. 그 방법에 대해선 설()이 엇갈립니다. <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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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군의 명당터 쟁탈의 결말, 오페르트 도굴사건

 

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 2015.12.27 10:16 | 수정 : 2015.12.27 11:32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6):사도와 남연군과 흥선군과 육관도사의 천하명당()]

 

<편에서 계속>

 

흥선군이 거액을 주지에게 뇌물로 준 뒤 스님들을 몰아내고 절에 불을 질렀다는 설과 충청감사에게 중국에서 최고로 치는 단계벼루를 뇌물로 준 뒤 스님들을 쫓아냈다는 설 등입니다. 절을 폐하고 탑을 헐기 전날, 흥선군 형제는 같은 꿈을 꿨다고 합니다. 꿈에 수염이 백설처럼 흰 노인이 나타나 외쳤습니다. “나는 탑신(塔神)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일을 벌인다면 네 형제가 모조리 폭사하고 말리라!” 놀란 형제들이 서로 꿈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같이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흥선군만은 달랐다지요. “꿈에 탑신이 나타날 정도면 이곳은 진정 명당(明堂)”이라고 한 것입니다. 형제들을 설득해 탑을 부수자 바위가 드러났습니다. 흥선군이 도끼를 내려치자 바위는 최후의 저항이라도 하듯 도끼를 튕겨내는 것이었습니다. 흥선군은 이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말라는 것이냐!” 이러면서 다시 도끼질을 하자 마침내 바위마저 깨져버렸습니다.

 

그런데 흥선군이 없앤 가야사는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면 수덕사보다 큰 절로 짐작된다지요. 꿈에 등장했다는 금탑은 공주 마곡사(麻谷寺) 대웅전 앞에 있는 탑처럼 탑 윗부분을 구리쇠로 씌운 라마교 양식이며 절 자체는 공민왕 7(1358)에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어쨌거나 절을 없애고 탑을 부순 흥선군이지만 마음이 편할리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훗날 고종이 즉위한 뒤 목수를 보내 은덕에 보답한다는 뜻의 보덕사(報德寺)를 지었지만 이 보덕사는 가야사에 비하면 그 규모가 비교할 바가 못된다고 합니다. 흥선군은 이렇게 절을 없애고 그 다음해인 1845년 남연군 묘를 조성하는데 여러가지 장치를 했다고 하지요. 훗날의 도굴(盜掘)에 대비해 철() 수만근을 붓고 강회를 발랐던 겁니다. 명당터를 마련한지 7년뒤부터 흥선군은 행복한 조짐을 느낍니다.


남연군 묘를 올라가면서 본 장면이다. 묘에서 봤을 때 오른쪽으로 가야산 자락이다.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을 얻은 것입니다. 흥선군엔게는 모두 세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재면, 이재황, 이재선 입니다. 이 가운데 둘째 재황을 순조의 큰아들로 21살 때 사망한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증)의 양자로 입적시킨 것인데 이 둘째아들이 철종 사후 대가 끊긴 왕위를 잇게된 것입니다. 여기서 남연군 묘를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곳을 간 것은 예산 수덕사를 오가며 경허선사와 만공스님, 옹산 스님을 취재할 때였습니다. 남연군 묘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가보니 풍수가들은 보통 남연군 묘를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다. 뒤로 가야산 서편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있는 석문봉(石門峰)이 주산(主山)이며 옥양봉, 만경봉이 좌청룡, 가사봉, 가엽봉에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우백호가 된다!”

 

또한 묘 앞쪽 평야를 지나 60리 떨어진 봉수산(鳳首山)이 안산(案山)이 되며 옥녀폭포-가사봉 계곡의 물이 와룡담에 모였다가 묘 앞으로 굽이쳐 흐르니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임수(臨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연군 묘에서 보아 왼쪽에 돌부처(상가리 미륵불)가 있는데 앞이 아닌 골짜기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남연군 묘에서 상대적으로 지세가 약한 그쪽을 비보하려 부처를 세웠다는 설과 이 석불이 흥선군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남연군 묘에서 봤을 때 왼쪽에 서있는 상가리 미륵불이다. 미륵불은 남연군 묘를 등지고 서 있는데 그 이유를 두고 설이 많다.

 

이렇게 절을 없애고 명당을 얻어 고종과 순종을 배출했지만 과연 이곳이 진정한 명당일까요? 훗날의 역사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고종 5년인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남연군 묘는 도굴을 당하는 수모를 겪지요. 오페르트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봅니다. 유대계 독일인이자 인류학자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살면서 모두 세차례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도굴을 하기 2년전인 1866년 오페르트는 조선 정부에 통상(通商)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지요. 2년 뒤인 18684월 그는 조선으로 오기 전, 100여명으로 구성된 세력을 규합합니다. 여기엔 중국 상해 미국영사관에 근무했던 미국인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젱킨스, 프랑스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 등 백인 8명과 말레이시아인-조선인-중국인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오기전 북()독일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지금 서해안고속도로 휴게소인 행담도(行擔島)에 정박하다가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했습니다. 이들은 조선 관리들에게 우리는 러시아에서 왔다며 총칼을 휘두르고 위협을 했습니다. 겁을 집어먹은 조선 관리들이 사라지자 오페르트 일당은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이 묘를 파헤치자 덕산군수와 몇몇 주민들이 제지했지만 서슬퍼런 위협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지요. 날이 밝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남연군 묘에서 봤을 때 정면이다.

 

조선 주민들이 몰려오자 오페르트 일당은 미처 남연군 묘를 다 파헤치지 못하고 도주하지요. 아예 도망간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영종도 부근까지 북상합니다. 오페르트의 만행은 조정에 알려지는데 뜻밖에도 흥선군에게 오페르트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인걸 알지만 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내말을 듣지않는다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우환을 당할 것이니.”

 

그야말로 협박문을 받아든 흥선군은 겁을 먹기는커녕 서양 오랑케 즉 양이(洋夷)를 추척하라고 명하는 한편 그 이면에 천주교도의 내응(內應)이 있다고 보고 천주교 탄압에 박차를 가합니다. 조상의 묘를 파헤친 이 사건은 조선의 앞날에 영향을 끼칩니다.

 

1866년 병인양요로 가뜩이나 서양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가운데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까지 일어나자 조선은 쇄국으로 국가방침을 정하지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오페르트는 도굴에 실패한 후 영종도에서 다시 조선군과 싸웁니다. 425일 영종도에 상륙해 격렬한 전투를 폈는데 조선군의 피해도 컸지만 오페르트 일당 가운데 2명도 죽지요. 조선은 그들의 목을 베 효수한 뒤 서울로 가져와 전시했습니다. 불안한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조치였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429일 오페르트는 황해도 장연(長連)의 찬도, 풍천 회렴곶까지 진출했다가 비로소 되돌아갑니다. 오페르트 일행의 만행은 머지않아 중국 상해에 있는 서양 외교가에도 알려집니다. 특히 그 배후에 젠킨스가 있었다는 사실에 미국은 충격을 받지요. ‘최고 문명국가라고 자부했던 미국이 남의 묘를 파헤쳤다며 조소의 대상이 되자 미국은 젠킨스를 체포해 법정에 세웠으며 오페르트 역시 증인으로 소환됐습니다. 이때 젠킨스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기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며 해괴한 주장도 펴지요. “조선 왕국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세계일주를 시켜주고 이 일을 통해 은둔국 조선을 세계에 알리려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한 것입니다. <편에 계속>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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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부친 묫자리 선정해준 육관도사가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비판한 이유

 

문갑식 선임기자 입력 : 2015.12.27 10:17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6):사도와 남연군과 흥선군과 육관도사의 천하명당()]

 

<편에서 계속>

 

젠킨스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고 독일인 국적인 오페르트도 아무 책임도 지지않고 자기나라로 되돌아갔습니다. 오페르트는 이후 금단(禁斷)의 나라 조선 기행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는 조선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오페르트는 이후 한번도 조선을 찾지 않았는데 훗날 이 사실은 독일에도 알려져 반 유대풍조에 불을 붙이는 원인이 됩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시선이 극도로 나빴는데 유대계 오페르트가 독일 망신을 시켰다는 비판이 일게 된 것입니다. 이후 역사는 여러분이 아는대로 쇄국정책에 이은 일본과의 강화도 수호조약, 한일병합으로 이어져 조선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지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남연군의 천하명당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흥선군은 아시다시피 명성황후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파란만장한 말년을 보내다 1898년 사망합니다. 그런데 이 흥선군 역시 묘를 여러 번 이장합니다.

 

융릉가는 길에 있는 다리다. 왕릉 주변에는 항상 개천이 흐르는데 이것은 땅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이 개천들은 금천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있다가 일제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했으며 1966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한 것입니다. 경기도 화성의 융건릉(사도-정조의 묘), 남연군 묘, 흥선군 묘를 답사하며 근대사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있겠습니다. 지금 남연군 묘는 주말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풍수동호회들로 만원입니다. 최근 이곳을 찾았더니 경상도-전라도에서까지 달려온 풍수동호회원들이 수맥을 찾는다며 몇시간이고 남연군 묘를 서성이고 있더군요. 남연군의 혼이 있다면 뒤숭숭했을 겁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묻힌 건릉은 상대적으로 입지가 좋지않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남연군 묘쪽에서 계속 직진해 올라가면 현대 풍수사에서 이름을 남긴 한 인물이 잠들어 있습니다. 바로 육관도사로 알려진 고 손석우(孫錫佑·1928~1998)씨의 묘입니다. 육관도사는 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인물인데 유명한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선친의 묘를 잡아준 일화입니다. 김 전 부장은 1970년대 중반 건설부장관으로 재임할 때 부친이 사망하자 손석우씨에게 묫자리를 봐달라고 했으며 손씨가 터를 골라주며 말했습니다. “이곳은 군왕지지(君王之地)!” 그런데 장용득씨(1999년 작고)라는 또다른 풍수가에게 그 땅을 봐달라고 하자 장씨는 여기 묘를 쓰면 3년 내에 장남이 이금치사(以金致死) 당한다며 말렸다지요. 이금치사란 쇠붙이를 잘못 써 죽는다는 뜻입니다.


남연군 묘에서 위로 가면 육관도사로 이름을 떨친 풍수가 고 손석우씨의 묘가 있다. 이곳도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단골로 찾는 장소다.

 

김 전 부장측은 장씨의 말 대신 손씨의 말을 믿었으며 얼마 후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장씨는 괘씸죄에 걸려 거의 도피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장씨의 말 한마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습니다. 몇 년 뒤 신군부가 집권하자 장씨는 또다시 조사를 받게됩니다. 수사관들은 당신이 김재규 부친의 묫자리를 명당이라고 했느냐고 추궁했고 장씨는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 겨우 화를 면했습니다. 육관도사는 이외에도 현충원에 있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묫자리는 육관도사와 쌍벽을 이룬 청오 지창룡(池昌龍)선생이 잡아준 것입니다. 육관은 청오를 비난하며 “(박대통령) 묘를 잘못 잡아 외아들(박지만씨를 지칭)이 감옥을 들락거리고 가족간에 분란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이 됐으니 육관도사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 궁금합니다. 내친 김에 청오 지청룡선생(2003년 작고)은 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 다음과 같은 예언도 남겼다고 합니다.

 

다음대는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그 후 가장 불쌍한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한사람의 쫓겨나는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그 다음 성군(聖君)이 나와 나라를 부강케할 것이다!”

 

청오의 말대로라면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고 김대중, 가장 불쌍한 대통령은 고 노무현, 한사람의 쫓겨나는 대통령은 이명박, 성군은 박근혜 대통령이 되는 셈인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육관도사의 묘는 남연군 묘에서 차로 5분쯤 올라가면 길이 막힌 곳 바로 옆에 있습니다. 여기도 예외없이 풍수동호회원들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어 잠든 육관도사도 뒤숭숭할 것 같습니다. 육관은 사망하기전 자식들을 불러놓고 내가 죽으면 사망한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말고 내가 잡아놓은 터에 묻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과연 그 자리에서 보니 조망이 탁 트였고 앞으로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습니다만 주변은 약간 달랐습니다.

 

손선생 묘에서 볼 때 오른쪽은 너덜바위가 널려있고 개울이 아닌 산골짜기로 물이 줄줄 흐르고있었는데 이것도 수맥이 아닐까요? 풍수는 시대를 막론하고 관심의 대상인데 제가 궁금했던 것은 가야산도립공원에 어떻게 개인 묘를 썼는가 였습니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