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 23 <끝>]
‘집이 곧 사람이라’ 청송심씨와 덕천동 심부자댁 송소고택(청송)
손동욱기자 2013-10-21
심처대의 선행에 고마움 느낀 노스님은 묏자리를 알려주는데…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의 만석꾼이던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지은 집으로 모두 7동 99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송심씨는 9대에 걸쳐 만석꾼 소리를 들으며,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영남의 대부호로 명성이 높았다.
송소고택에서는 여느 한옥과는 달리 헛담을 볼 수 있다. 아녀자들이 대문으로 들어서면 빤히 사랑채가 보이는데, 내외법이 엄격하던 시절에는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가는 게 매우 곤혹스러워 헛담을 쌓았다고 한다.
송소고택의 안채와 사랑채 사이 담장에는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은 안채에서 사랑채에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뚫었다고 한다.
◆ Story Briefing(스토리 브리핑) : 이야기(줄거리) 상황 설명
송소 심호택(松韶 沈琥澤)이 지은 집이라 하여 송소고택(松韶古宅)이다.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있어서 ‘덕천동 심부자댁’으로도 불린다. 심호택은 조선 영조 때의 만석지기 재력가였던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이다.
1880년(고종17) 즈음, 호박골(청송군 파천면 지경리)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옮기면서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바로 송소고택이다. 13년에 걸쳐 지어졌고, 규모는 99칸에 이른다.
청송심씨는 1960년대까지 9대에 걸쳐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영남의 대부호로 명성이 높았다.
송소고택은 2002년부터 고택 체험시설로 개방되었고, 2007년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관광의 최고상인 ‘2011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기도 했다. 11대 종손인 심재오씨와 종부 최윤희씨, 그리고 삽살개 껌껌이가 고택을 지키고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마지막편은 영남의 대부호로 유명했던 청송심씨와 송소고택에 대한 이야기다.
#1. 심처대(沈處大)와 청송심씨
휘적휘적 앞서나가던 스님이 걸음을 멈춘 곳은 산언덕이었다. 고즈넉하니 오감(五感)이 편안해지고, 환하니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스님은 한참을 침묵했다. 청년은 영문을 몰랐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스님이 청년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묘를 쓰시게.”
부드러우나 단호한 말투였다.
“하고, 지금 가진 심성을 잘 지켜 살아가시게. 하면, 대대로 발복할 걸세.”
스님은 다시 조용해졌다. 청년은 스님이 무슨 말이라도 더 얹어주길 바랐지만, 스님은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도저히 앓아 누웠던 노인이라고 여길 수 없는, 담대하고 가벼운 걸음이었다. 때는 조선 영조(英祖, 재위 1724∼76)조였고, 곳은 호박골(청송군 파천면 지경리)이었으며, 청년은 심처대(沈處大)였다.
심처대가 스님을 만난 것은 사흘 전이었다. 청년 심처대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혼자서 들일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살림이라 늘 끼니가 부실한데다가 볕까지 뜨겁다 보니, 청년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공양해야 했다.
어렵사리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청년은 잠시 주저앉아 호흡을 고르고는 보퉁이에서 주먹밥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수상한 움직임이 들어왔다. 산짐승인가. 도적인가. 다 아니었다. 기력을 잃고 핏기마저 다 가신 노스님이었다.
심처대는 망설이지 않고 스님에게 주먹밥을 권했다. 혼자 먹기에도 부족한 작은 덩어리로 본인도 허기가 져 식은땀을 흘릴 지경이었지만, 청년은 스님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것이 심처대의 성정(性情)이었다. 스님도 청년의 형편을 알고도 남았기에 몇 번이나 마다하였다. 하지만 심처대의 따뜻한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주먹밥을 받아들어 달게 먹고는 길을 떠났다.
심처대는 빈속을 달래가며 해거름까지 일을 했다. 그리고 돌아가던 길에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스님이 개울가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스님을 업어 집까지 옮겨갔다. 그러곤 정성껏 돌봐 살려내었다. 하여 스님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심처대의 부모님 묏자리를 잡아준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심처대는 잊지 않고 스님이 일러준 자리에 두 분을 모셨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열심히, 성실히 일을 했다. 스스로의 노력에 하늘의 복까지 보태져 심처대는 점점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심처대는 재산에 집착하지 않았고, 재력을 이용해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다. 거기엔 그만한 내력이 있었다.
심처대는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이었다. 청송심씨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가 넷, 부마가 넷, 정승이 열셋으로 전통적인 명문대가다.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 고려시대 종9품 문관의 품계)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가 시조다.
청송심씨는 심홍부의 증손인 덕부(德符)와 원부(元符) 등 크게 두 가문으로 나뉜다. 심처대는 심원부의 후손이었다.
심원부는 고려말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洞,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충신이었다. 후손들도 영남과 청송 일대에 내려와 숨어 지내고 있었다. 현재 청송에 흩어져 사는 후대들은 원부의 후손이 많다.
반면에 심원부의 형인 심덕부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세상을 호령했다. 그의 아들 심온과 손자 심회는 3대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 조선시대 3대가 정승에 오른 집안은 청송심씨, 달성서씨, 청풍김씨뿐이다. 심덕부와 심원부, 두 형제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산 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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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심호택(沈琥澤)과 송소고택
호박골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덕천동이었다.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그 언저리 땅은 질이 아주 좋았다. 심처대의 7대손인 심호택은 그곳에 집을 새로 지어 옮길 생각이었다.
“호박골이 외져 숨어살기는 좋으나, 너무 좁지 않으냐. 손님과 객은 날로 느는데, 집이 옹색하니 모시기 민망하구나. 또 무엇보다도 우리 청송심씨 문중이 덕촌동에 터를 잡고 있는 만큼, 우리도 가서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늘 아들들에게 말하던 바였다.
장소가 정해지자 심호택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당연히 그에 따라 자금도 함께 움직였다. 큰 사건이기 때문에 소식은 금세 밖으로 퍼져나갔다.
현금을 크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도둑들을 부추겼다. 결국 그들은 심호택이 없는 날을 골라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횡포와 난동이 말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집을 부수고 사람을 때리는데, 그 누구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망을 갔다. 그때 심호택의 노모(老母)가 나섰다.
“재물이 탐이 나면 재물만 가져가면 그만일 것을, 어찌 집을 부수고 애먼 사람을 해치는가?”
백발이 성성한 늙은 아녀자가 담대히 나서 호통을 치자 도둑들은 당황했다. 별다른 대거리를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멈칫거리는데, 부인이 성큼성큼 도둑들에게 다가섰다.
“온 집안을 뒤집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곳간으로 안내할 터이니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게.”
하고는 곳간 문을 열어주었다. 도둑들은 처음엔 쭈뼛거렸다. 하지만 곧 그 안의 재물을 한 짐 한 짐 들어 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참 후,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듯 배를 두들기며 왁자하게 떠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털고, 그렇게나 쓸어갔는데도 심호택의 재산은 끄떡없었다.
덕촌동의 집은 무려 13년에 걸쳐 지어졌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대목장이, 당시 궁궐 건축에나 쓰던 적송(赤松)으로 완성했기 때문에, 풍화에도 잘 견뎠다. 게다가 99칸이었다. (여기서 1칸이란 방 한 개가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를 세는 단위다.) 이는 양반이 누릴 수 있는 최대 크기였다.
덕촌동 이주 후에도 심호택의 부(富)는 착실하게 늘었다.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 땅을 안 밟고는 나가지 못할 정도였고, 조선팔도 어디를 가도 심부자네 땅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만큼 세금도 많이 냈다.
갑오개혁(1894년) 즈음, 나라에서 명이 떨어졌다.
“화폐의 가치 변동이 심하니 세금은 은화로 납부하라.”
심호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여 안계고을(의성군 안계면)에 있던 전답을 모두 처분해 은화로 바꾸었다.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고을의 은화란 은화는 모두 심호택에게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부피와 무게 또한 어마어마했다. 그 은화를 청송으로 가져오는 운반 행렬이 무려 10리(약 4㎞)에 이르렀다.
#3. 지금 송소고택은…
지금 송소고택은 청송심씨 11대 종손인 심재오씨가 지키고 있다. 50년 가까이 서울과 청송을 오가며 집을 관리해 오다가, 몇해전 아예 서울 생활을 접고 청송으로 내려왔다.
심씨는 아직도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약했던 이범석 장군을 비롯해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 등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이 송소고택에서 묵고 갔던 어릴 때의 기억이 뚜렷하다.
그것은 심씨의 고택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에게 집은 그냥 집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의 증인이자 세월의 기록, 아니 역사와 세월 그 자체였다. 심씨의 노력으로 송소고택은 대한민국 관광의 최고상인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고, 연간 수만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2007년에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송소고택은 대지 약 8천520㎡(2천500평)에 7동 99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보은 선병국가옥(報恩 宣炳國家屋,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개리)과 함께 조선의 3대 99칸 집이다. 집은 경북도 북부 민가양식이다. 크게 대문채·안채·별채·큰 사랑채·작은 사랑채·사당 등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고, 각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이 있다.
여느 한옥과 달리 송소고택에 들어서면 먼저 ‘ㄱ’자형의 헛담을 만나게 된다. 큰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 사이 마당에 있는데,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을 사랑채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헛담은 대문이나 사랑채에서 아녀자들이 있는 안채를 보지 못하도록 설치했다고 해서 ‘내외담’이라고도 한다.
특히 대문으로 들어서면 빤히 사랑채가 보이는데, 내외법이 엄격하던 시절에는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사랑채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사랑채를 가리는 헛담이 수줍게 두 손을 포개듯 들어서 있는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헛담뿐이 아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담장에는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구멍담’이라고 한다. 이 구멍의 수는 사랑채에서 보면 6개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다. 안채 구멍 1개에 사랑채 구멍 2개를 45도 각도로 연결해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지만,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 이 구멍은 안채에서 사랑채에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뚫었다고 한다.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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