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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체룡만관(迢遞龍灣館) - 상촌선생(象村先生) 시(詩)

by 연송 김환수 2016. 10. 13.

상촌선생집 제9권 시() 오언율시(五言律詩) 123

 

용만관에 머물러 체소를 송별하면서 그의 운에 차하다

[龍灣館留別體素次其韻] 2. 이공 춘영(李公春英)이다

 

나그네의 뜻 정히 흔들리는데 / 客意正搖落 (객의정요락)

타관에서 또 떠난 이를 보내노니 / 殊方又送行 (수방우송행)

슬프고 즐거움은 부질없는 세상 경력이요/ 悲歡空閱世 (비환공열세)

가고 머무름은 점점 마음만 상하네 / 去住轉傷情 (거주전상정)

변새의 눈은 하늘이 깜깜하게 내리고 / 塞雪連天暗 (새설련천암)

관문 구름은 땅에까지 질펀한데 / 關雲接地平 (관운접지평)

어찌 견디랴 돌아보는 곳에 / 那堪回望處 (나감회망처)

계속해서 머나먼 길 막혀있음을 / 脈脈滯脩程 (맥맥체수정)

 

()

 

머나먼 용만관에 있자니 / 迢遞龍灣館 (초체룡만관)

쓸쓸한 나그네의 한이 새로운데 / 蕭條客恨新 (소조객한신)

강가의 매화는 응당 눈을 띠었겠고 / 江梅應帶雪 (강매응대설)

관문 버들은 봄을 맞으려 하리라 / 關柳欲迎春 (관류욕영춘)

변새 기러기가 소식 더디 전해와 / 朔雁傳書濶 (삭안전서활)

이별의 회포로 꿈만 자주 꾸는데 / 離懷作夢頻 (리회작몽빈)

관에 오르매 시름 정히 태산 같아라 / 登臨正愁絶 (등림정수절)

남국엔 아직도 풍진이 안 멎었으리 / 南國尙風塵 (남국상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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錄 象村先生 詩 麗山 閔順基 (록 상촌선생 시 여산 민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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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관 (龍灣館)

 

조선 시대 중국으로 가는 시신 행차 길에 설치한 객사(客舍)의 하나. 평안도 의주(義州)에 설치되었음. 의주의 옛 지명이 용만현(龍灣縣)이었던 것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함. 성종 15(1484)에 처음으로 설립했으며, 숙종 44(1718) 중문과 대문을 세웠음. 헌종 9(1848)에 상칙방(上勅房)과 동대청(東大廳)을 건립하였음. 의주가 중국으로 가는 사신 행차의 중요한 경유지였던 관계로 그러한 시설물들이 다수 건립되었으며, 여기에서 중국 사신을 자주 영접하고 교역 등을 행하기도 했음.

 

용례

참장 곽몽징이 황제가 하사한 은 2만 냥을 가지고 오자, 임금이 서문 밖으로 나가 영접하고 용만관에 이르러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황은이 망극합니다.” 라고 하니, 곽몽징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은이 속히 전달되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나를 보냈습니다.” 하고서, 이에 서로 읍하고 좌정하여 은 꾸러미를 내놓고 세어보도록 청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황제의 하사품을 받음에 있어 어떻게 감히 세어보겠습니까? 사체에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곽몽징이 말하기를, “조정의 법도가 지극히 엄중하니 세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굳이 세어보도록 하였다.; 參將郭夢徵 賫皇賜銀二萬兩來 上出迎于西門外 到龍灣館行禮 上曰 皇恩罔極 夢徵曰 皇帝 恐其不能速達 送俺來也 於是相揖而就坐 內出銀鞘 因請數之 上曰 受皇賜 何敢數也 恐傷事體 夢徵曰 朝廷法度至嚴 不可不數 强數之[선조실록 권제27, 15장 뒤쪽16장 앞쪽, 선조 25624(임자)]

 

원래 객사란 각 군현이나 역참에 설치하여 사신들의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 : 맞아들이고 보냄)이나 숙박 등의 제반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통 ()’으로 통칭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역() 또는 참()을 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현의 객사를 지칭한다. 용만관의 명칭과 유래는 고려시대에 의주를 용만현(龍灣縣)이라고 한 데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압록강을 용만이라 불렀던 데에서 기인한 것 같다.

 

이 용만관은 1484(성종 15)에 목사 이강정(李康正)이 창건하였으며, 1718(숙종 44)에 중문과 대문을 세웠다. , 1843(헌종 9)에 윤치정(尹致定)이 상칙방(上勅房)과 동대청(東大廳)을 건립하였다.

 

용만관이 대중국 사행로의 중요한 경유지인 의주에 설치된 것은 그만큼 의주가 사신왕래상 주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당시에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용만관은 임시로 국사를 처리하는 곳이 되었으며, 명나라 장수나 사신의 영접은 주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그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의 개시무역(開市貿易)이 성행하게 되자, 용만관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용만관은 사신의 숙소로서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무역에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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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집(象村集)

상촌선생집 서문

()

문집을 올리는 차자 [文集投進箚子]

상촌집 서(象村集序)

상촌선생집 서(象村先生集序)

상촌집 서(象村集序)

상촌집 서(象村集序)

신 상국 상촌의 유고를 읽고[讀申相國象村稿]

신 상국 상촌고의 서[申相國象村稿敍]

상촌집 서(象村集序)

 

상촌선생집 제1상촌선생집 제37

 

상촌선생집 제38권 응제록

상촌선생집 제39권 내집 제1

상촌선생집 제40권 내집 제2

상촌선생집 제41권 외집 1

상촌선생집 제42권 외집 2

상촌선생집 제43권 외집 3

상촌선생집 제44권 외집 4

상촌선생집 제45권 외집 5

상촌선생집 제46권 외집 6

상촌선생집 제47권 외집 7

상촌선생집 제48권 외집 8

 

상촌선생집 제49상촌선생집 제60

 

상촌선생집 발문

상촌선생집 부록 1

상촌선생집 부록

상촌선생집 부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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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意正搖落殊方又送行悲歡空閱世去住轉傷情塞雪連天暗關雲接地平那堪回望處脈脈滯脩程

 

迢遞龍灣館蕭條客恨新江梅應帶雪關柳欲迎春朔雁傳書闊離懷作夢頻登臨正愁絶南國尙風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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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집 제15권 시() 칠언율시(七言律詩) 111

 

벽제로 돌아와서 (還到碧蹄)

 

암담한 시름의 병 날로 침범하는데 / 愔愔愁疾日交加

까마득한 용만에서 세월을 보냈다네 / 迢遞龍灣送歲華

사마 타고 본국 떠난 경우와는 다르지만 / 駟馬縱然殊去國

뜬인생 고향집에 돌아감이 가장 즐거워 / 浮生莫樂是還家

바람은 단비 불어 가는 행차 따르는데 / 風吹好雨隨征蓋

고향 산천 바라보며 역마차를 재촉하네 / 望入鄕原促傳車

저물녘에 벽제의 외론 관소 향하는데 / 暮向碧蹄孤館裏

종남산빛 바야흐로 푸른 노을 띠었네 / 終南山色正蒼霞

 

천마산(天磨山)에 사는 중의 시축(詩軸)에 예전 운으로 차운하다

용만(龍灣)에 있을 적에 지었다.

 

젊은 시절 화장사서 함께 묵은 적 있는데 / 同宿華藏記少時

십 년 만에 천애에서 다시금 또 만났구려 / 十年重見在天涯

내 스스로 형역 속에 부생 늙음 불쌍한데 / 自憐形役浮生老

슬프게도 산인 역시 눈썹에 눈 내렸구려 / 惆悵山人亦雪眉

 

[D-001]화장사(華藏寺) : 경기도 장단(長湍)의 보봉산(寶鳳山)에 있는 절이다.

 

산인(山人) 법륜(法輪)의 시권(詩卷)에 차운하다

 

이월에다 삼월까지 허송세월 보내면서 / 斷送二月兼三月

객관에서 문 닫은 채 참선하듯 지내었네 / 客居閉門如坐禪

화로 속에 한 점 불꽃 아직까지 남아 있어 / 惟有鑪心一點火

향 탄 재가 식으려다 다시금 또 불붙누나 / 香灰欲冷又重然

 

연위사(延慰使)로 가는 현옹(玄翁)의 시에 차운하다 2

 

시름 성의 포위를 풀 계책 전혀 없거니와 / 愁城無計解重圍

나그네 옷 전당 잡혀 술 취함도 괜찮으리 / 一醉何妨典客衣

새끼 제비 그 역시도 봄 늦은 걸 알고서는 / 燕子亦知春事晩

꽃 스치고 비 젖으며 온 맘 다해 나는구나 / 掠花霑雨盡情飛

 

날리는 꽃 지는 버들 분분하여 어지럽다 / 飛花落絮亂繽紛

소낙비에 거센 바람 불어 들판 어둑하네 / 急雨顚風野外昏

외론 객관 쓸쓸하여 찾아오는 객 없기에 / 孤館悄然無客到

병든 이후 사흘 동안 문도 열지 않았다오 / 病來三日不開門

 

원운(原韻)

현옹(玄翁)

 

수침향은 모두 타고 그림 병풍 둘렀는데 / 水沈燒盡畵屛圍

병이 많던 사마상여 옷을 벗지 못하였네 / 多病相如未褪衣

열두 개의 옥 난간에 봄이 이미 깊었기에 / 十二玉欄春事晩

주렴 가득 비바람에 살구꽃이 날리누나 / 滿簾風雨杏花飛

 

 

이별 시름 봄날의 한 심사 한층 분분한데 / 離愁春恨轉紛紛

비바람은 싸늘하고 변경 해는 어둑하네 / 風雨凄凄塞日昏

남산 아래 옛집 정원 불현듯이 떠올리매 / 忽憶故園南岳下

배꽃 모두 떨어지고 대문 굳게 닫혔으리 / 梨花落盡掩重門

 

[C-001]현옹(玄翁) : 신흠(申欽 : 1566 1628)의 호이다. 신흠은 이 밖에도 현헌(玄軒), 상촌(象村), 방옹(放翁) 등의 호를 썼다.

[D-001]병이 많던 사마상여(司馬相如) : 한나라의 문장가인 사마상여는 평생 동안 소갈증(消渴症)을 앓아 고생하였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서경(西坰) 사상(使相)의 시에 차운하여 동행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다

 

한식인데 꽃 안 피어 이미 철이 늦었거니 / 寒食無花已太遲

적막 속에 봄 보내는 때를 어찌 견디리오 / 更堪寥落送春時

응당 알리 살짝 웃다 찡그리는 뜻 속에는 / 應知淺笑輕嚬意

동군 이미 떠난 뒤에 그리는 맘 담겼음을 / 留作東君去後思

 

원운 중서(中書) 김군(金君)이 배꽃과 살구꽃 몇 가지를 꺾어서 보냈기에 기뻐서 절구 한 수를 지어 사례하였다.

 

서경(西坰)

 

살구꽃은 일찍 피고 배꽃은 또 늦게 피어 / 杏花最早梨花遲

먼 변경의 봄날 빛이 한꺼번에 다 왔다네 / 絶塞春光來一時

진중할사 청심당의 위에 있는 나그네가 / 珍重淸心堂上客

병든 중에 꽃 보내어 그리운 맘 위로하네 / 病中相寄慰相思

 

[D-001]동군(東君) : 사계절 가운데 봄을 맡은 신의 이름이다.

[D-002]청심당(淸心堂) : 청음이 살던 집의 당호(堂號)이다.

 

송도(松都)를 떠올리다

 

송도 경력 그 자리는 한가로운 자리였고 / 松都經歷亦閑官

시냇가의 띠풀 집은 몇 칸 겨우 되었다네 / 溪上茅茨屋數間

직무 파해 돌아오면 해가 한참 남았기에 / 衙罷歸來日尙早

발 걷고 휘파람 불며 푸른 산을 바라봤네 / 捲簾孤嘯看靑山

 

운모(雲母)로 만든 등()

 

빙옥보다 더 깨끗해 티끌 하나 안 묻었고 / 潔於氷玉無瑕累

맑기는 또 유리 같아 쪼아 갈지 않았으니 / 淸比琉璃不琢磨

백은으로 지은 궁궐 수정 주렴 아래에서 / 宜向白銀宮闕夜

한밤중에 항아 얼굴 비추는 게 마땅하리 / 水晶簾下照姮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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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象村) 신흠 (申欽,1566 ~ 1628)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인수(宋麟壽)의 딸이다. 어릴 때 소인수와 이제민(李濟民)에게 학문을 배웠다.  

 

1585년 진사 ·생원시에 합격, 이듬해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이조좌랑, 이듬해 이조정랑·사복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올랐다. 그 후 형조참의·이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판윤이 되었다.

1613년 계축화옥이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1616년 춘천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 즉위와 함께 예문관·홍문관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해 우의정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란하였으며,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효종2년)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

       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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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 신흠(象村 申欽)

 

조선 시대 한문학의 태두, 신흠(申欽, 1566~1628) 선생. 본관 평산(平山). 자 경숙(敬叔). 호 현헌(玄軒경당(敬堂백졸(百拙남고(南皐현옹(玄翁상촌(象村방옹(放翁)이라 하였다. 시호 문정(文貞).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목숨을 살리고 대신 순절한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어머니 송씨(宋氏)가 가슴에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튿날 공을 낳았는데,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오른쪽 뺨에 탄환만한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1585년 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대사간이던 외삼촌 송응개(宋應漑)가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공박하려는 것을 말렸더니, 그때 정권을 쥔 동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경원의 훈도를 거쳐 광주향교의 훈도를 지내는 등 높은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으로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했고, 이어서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정철은 공에게 삼남(三南)의 기무(機務)를 모두 맡기니, 영리한 아전과 법규에 익숙한 자 수십 명을 불러서 장부와 문서를 나누어 주어 일제히 읽게 하였다. 또한 군사와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을 글로 올리게 하였는데 문서가 번잡하였고 하소연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판결하니 명쾌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599년에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오르고, 형조, 이조, 예조, 병조 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가선대부 예문관 제학에 이어 예조·병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도승지, 예문관 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소북파의 우두머리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냈다. 이어서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궁리를 하던 중, 때마침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에 연루된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은 출세를 할 수 없는 서얼출신으로서 사회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파는 이들이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허위 자백케 하여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 교동도에 위리안치 하고,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시켜 소사(燒死)하게 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1613년 계축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화옥(癸丑禍獄=계축옥사)이라 한다.

 

이 때 신흠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어 김포 선영 밑에서 살았는데, 한 칸 초가에서 편안히 거처하며 집 이름을 하루암(何陋菴)’이라 써 붙이고 유유자적한 삶의 자세로 일관하였다. 3년 후에 춘천으로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도 신흠은 초가집을 짓고 방암(放菴)’이라 하였다. 이러한 삶 속에서도 소박한 선비의 모습을 작품 속에 담아 낸 것이 있으니, “서까래 기나 짧으나 기둥이 기우나 틀어지나 / 두어칸 모옥(茅屋)이 적음을 비웃지 말라 / 어즈버 만산나월(萬山裸月)이 다 내 것인가 하노라.”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신흠의 운명은 바뀌어 인조 조정의 첫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 예문관의 으뜸 자리에 오르니, 이른바 양관대제학을 겸한 막강한 자리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연달아 맡았다.

 

정묘호란(1627) 때에는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여 전주로 피란하였으며, 962세 나이로 영의정에 오른 후 질병을 무릅쓰고 오랑캐 사신을 접견하고 귀가하다가 쓰러져 수레에 실려 집에 돌아와서 별세하니 모든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어진 정승이 죽었으니 나라 일도 끝장이다.”하였고, 세자가 직접 상가에 와서 조문하였다.

 

연려실기술집이 가난하여 간간이 꾸어 먹어도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며, 거처하는 집과 자는 방이 기울고 허물어져서 집안사람들이 수리하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집은 수리하여 무엇하느냐.’ 하였고, 죽을 때에도 의복이 한 벌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1651(효종2)에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문집으로 상촌집이 있다. ‘영창대군 신도비문과 묘지명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묘소는 부인 전의 이씨와 함께 광주 퇴촌면 영동리 산 12-1번지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묘비는 1628(인조 6)에 건립되었는데 뒷면에 새겨진 비문은 그가 직접 지은 것이다. 1699(숙종 25)에 건립된 신도비는 총 높이 335의 대형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 감각과 세부적으로 생동감 있는 조각 표현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신흠은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명을 떨쳤고,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선조의 신망이 두터웠다. 정주(程朱)학자로 이름이 높아, 월사 이정구(李廷龜), 계곡 장유(張維), 택당 이식(李植)과 함께 한문학의 태두로 손꼽히고, 조선 4대 문장가로도 칭송된다. 또한 임진왜란 전후로 폭증한 대명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 정리, 각종 의례 문서 작성에 참여하는 등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 했다.

 

이정구는 공의 신도비문에서 붓을 잡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생각하지 않고 휘둘러대는 듯하면서도 전중(典重)한 글이 노련하게 작성되면서 한 점 하자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문장이 시()보다 훌륭하다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런데 시를 보면 더욱 맑고 깨끗하여 아취가 있었으며, 남의 흉내를 일체 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였으니, 이런 측면에서는 역시 시가 문장보다 우월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신도비문)” 신흠은, 그의 청빈한 마음을 담아 이런 시조를 남기기도 했다.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무쳐셰라 / 산골마을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구나

시비(柴扉)를 여지 마라, 날 찾즈리 뉘 이시리 / 사립문 열지마라. 이렇게 묻혀 사는 나를 찾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밤즁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 다만 방중에 나타난 한 조각 밝은 달 그것만이 내 벗인가 하노라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 한 편이다. 산촌에 은거하면서 청정한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은사(隱士)의 심경을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공은 1627(인조5) 94, 영의정에 오른다. 하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 신흠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였다. 일곱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여의고,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송기수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으며 쓸쓸하게 성장하였다. 송기수가 여러 손자들을 가르치면서 ()’자를 내주면서 글을 짓게 하니 공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지만물 가운데 봄이 맏이다.”고 하자 송기수가 감탄하며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공은 비록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친가는 물론 외가와 처가 모두 명문세가였고, 훗날 아들 익성이 선조 임금의 사위가 되기까지 하였으며, 마침내는 최고의 관직에 까지 올랐으니 막강한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사로운 욕심을 내지 아니하여 양식을 빌려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자주 끼니를 거를 만큼 곤궁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흠잡을 데 없는 그의 가문을 당대 제일로 칭송하였다.

 

신흠의 신도비는 좌의정인 월사 이정구가 짓고, 영의정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으며, 이조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는데 이런 내용이 전한다.

 

“(생략)지성으로 우애하며 친족과 화목하게 지냈다. 홀몸이 된 누님과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어미처럼 섬겼는데, 집안에 시끄러운 말이 전혀 없었다. 스스로 왕실과 혼인을 맺은 일 때문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큰 며느리를 맞을 때 집이 좁고 누추하여 측근에서 관례에 따라 수선할 것을 청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집이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를 행하기는 충분하다며 끝내 기둥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중략) 빈곤한 생활을 태연히 견디면서 즐기고 좋아하는 욕심이 전혀 없었으며, 일찍이 집안 일에 마음을 쓴 일이 없었다. 산나물에 껍질만 벗긴 조밥을 먹어도 괴로워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싫어하였기에, 문을 닫고 앉아있으면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환란을 만나면 지조와 행실을 더욱 굳게 지켰고, 귀하고 높은 자리에서는 가득찬 데 따르는 화를 더욱 경계하였다.”

 

신흠은 아들 둘과 딸 다섯을 두었다. 장남 익성은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져 부총관에 올랐고, 차남 익전(翊全)은 도승지에 이르렀다. 손자로는 대사간 면(), 함경도 도사 최(), 이조판서 정()이 있어, 후세가 매우 번창하였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每日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남아 있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열우신지) 버드나무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상촌 신흠 선생의 야언(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