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 예 방/인문고전

방은자불우(訪隱者不遇) - 낙화유수(落花流水) 유래

by 연송 김환수 2016. 10. 10.

방은자불우(訪隱者不遇)의 뜻은 은자(隱者)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 은자(隱者) : 은인(隱人), 산야에 묻혀 숨어 사는 사람

전당시(全唐詩) 권오백구십팔(卷五百九十八)에 실려 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落花流水認天臺(낙화유수인천대)

꽃이 떨어지고 물이 흐르니 세상의 넓음을 알겠구나.

 

半醉閑吟獨自來(반취한음독자래)

술에 반쯤 취하여 한가히 시를 읊으며 홀로 왔다네.

 

惆悵仙翁何處去(추창선옹하처거)

슬프구나, 선옹(仙翁)은 어디로 갔는가.

 

滿庭紅杏碧桃開(만정홍행벽도개)

붉은 살구꽃과 푸른 복숭아 꽃만 활짝 피어 뜰에 가득하구나.

 

乙酉新春(을유신춘)을유년 새봄에

錄孟浩然詩(록맹호연시) 맹호연시를 쓰다   墨耕(묵경) 劉永泰(유영태)

 

낙화유수(落花流水)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고변(高駢=고병)의 시() 방은자불우(訪隱者不遇)에서 유래한 성어(成語)로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꽃이 떨어져 물위로 흐르다" 의 뜻으로 늦은 봄의 풍경을 구경하며 지은 ()의 한 구절이다.

 

낙화유수(落花流水)는 가는 봄의 경치를 비유한 고사성어로 살림살이, , 세력 등이 약해져 보잘것없이 쇠퇴해 감을 비유하여 사용되기도 하고,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을 남녀에 비유하여, 꽃은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며, 물은 꽃을 싣고 흘러가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을 비유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고병(高騈=고변) : 당나라 시대 시인 (출생  미상 ~ 887년)

 

당나라 유주(幽州) 사람. 자는 천리(千里). 고숭문(高崇文)의 손자다. 대대로 금군장령(禁軍將領)을 지내 자주 병사를 이끌고 서남쪽에 주둔했다.

희종(僖宗) 때 태평(太平)과 진해(鎭海), 회남(淮南)의 절도사를 지냈고,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과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 등을 역임했다. 항소(黃巢)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중국에 있던 최치원(崔致遠)이 그를 위해 쓴 격문(檄文)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 유명하다.

나중에 반란군의 기세에 놀라 내부적으로 알력이 일었는데, 결국 양주(揚州) 일대를 지키면서 할거했다.

광계(光啓) 연간에 부장(部將) 필사탁(畢師鐸)에게 살해당했다. 저서에 문집이 있다.

 

-------------------------------------------------------------

高騈(고병, 唐:821-887)

 

중국 당(唐)나라 말기의 절도사(節度使). 자는 천리(千里), 유주(幽州) 출생이다. 금군(禁軍)의 장교에서 출발하여 안남도호(安南都護)·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를 역임하였고, 당항(黨項)과 남소(南詔)의 토벌에 공적을 세웠다.

 

광명 2년(881년) 고병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최치원은 도통순관으로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7월 8일에 반란의 수장 황소를 꾸짖는 격문, 이른바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최치원의 격문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의논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는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그만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당 전역에 퍼졌으며, 최치원은 고병의 도통순관으로서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병은 희종 중화 2년(882년) 정월에 출병할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제도행영병마도통직에서 파해졌지만, 이후로도 최치원은 고병 개인의 종사관으로서 그럭저럭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계원필경》은 바로 이때 최치원이 지은 글과 여러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황소(黃巢)의난 때는 절동(浙東)에 침공하는 황소군을 격파하여 푸젠[福建(복건)]·광둥[廣東(광동)]방면으로의 전진(轉進)을 한때 무력화시켜 관군의 총수가 되었다. 그러나 치소(治所) 양주(揚州)에 주둔한 채 장안(長安)을 점거한 황소군의 토벌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형세를 관망할 뿐이었다.

 

결국 조정으로부터 반역의 의심을 받아 총수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본디 신선(神仙)·방술(方術)을 좋아한 그는, 그때부터 그 탐닉의 정도가 지나쳐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였고 마침내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실존했던 낙화유수 : 본명 김태련(1929(1932) ~ 2006. 11. 2)

서울대 출신의 인텔리 주먹패로 동대문파 소속이였다. 이정재의 동대문파 행동대장 출신으로 별명은 위와같이 낙화유수. 다큐멘터리에도 등장한바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 일이 옳은일인줄 알았다고 전했다. 고대생 습격 사건을 두고 우연한 충돌이었다고 두둔하기도 했다. 말년까지도 이정재의 은혜를 강조하는 발언을 해오며 이정재와 동대문파를 옹호했다.

 

경호회사를 운영하며 고문으로 있다가 2006년 사망했다. 원로 주먹패의 사망이라 일본 야쿠자와 삼합회에서도 비밀리에 조문 인사를 보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매년 그의 추모식에는 전국에서 약 100여명의 후배들이 모인다.

 

요즘 주먹세계에서 의리가 사라졌다지만 이들은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낙화유수는 말그대로 참, 유유낙락하게 사셨다.

 

그의 별명은 서울대 상대(52학번) 시절 여학생들이 붙여줬다.

그것이 별칭으로 굳어지면서 실명보다 낙화유수란 별칭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단국대 출신 장윤호를 만나면서 주먹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1962년 이정재가 군사혁명 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유지광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구속돼 힘을 상실했을 때 '동대문사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5·16 직후 재판장에 서기도 했다. 

당시 재판관들은 대부분 서울대 출신들이었다.

 

대학 시절 그와 친했던 당시 혁명재판부 양준모 판사가 재판장에 선 그를 보고 "김태련, 아니 자네가 외교관이 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서 있느냐"며 기가 막혀 했는 일화도 있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당당했다.

 

서울대 출신이면서 주먹을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우리는 절대 깡패가 아니다. 협객이다. 법을 어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약한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어.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렸지."

 

그가 석방되자 군사정부는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쿠데타 정권을 도우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협객의 길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생전 필자에게 "내가 걸어온 길이 사람에 따라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협객의 길을 걸어왔음을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태어나도 협객의 길을 걷겠다"고 덧붙였다.

 

2000년부터 당뇨 증세가 있어 100kg의 몸무게가 70kg으로까지 줄었든 그는 일주일에 두번씩 투석을 하고 틈 나는 대로 양로원을 돌면서 불우한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다.

 

지금도 그의 후배들은 큰형님의 뜻을 받들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낙화유수 후계자 조병용씨는 30년 가까이 보좌했다.

---------------------------------------------------------------

낙화유수 / 남인수 노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紅桃花)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迎春花)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 소식을 편지로 쓰자

 

한국가요사에서는 낙화유수란 제목의 두 가지 노래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낙화유수는 가요황제 남인수가 불렀던 노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로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강남달’로 알려진 노래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흔히 ‘강남달’로 불리기도 하는 이 노래의 원제목은 낙화유수입니다.

 

192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88년 전, 극장 단성사(團成社)에서 상영되었던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로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영화는 만능 대중연예인 김영환(金永煥)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개봉되던 날, 단성사 무대 아래에서 12세 소녀가수 이정숙(李貞淑)이 파들파들 떨리는 가련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마이크 앞에서 불렀습니다. 이정숙은 이 영화의 감독을 맡았던 이구영(李龜永, 1901~1973)의 누이동생으로 유명한 음악가 홍난파 선생으로부터 동요를 지도받고 있었지요.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불망초(不忘草)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우네

 

멀고 먼 님의 나라 차마 그리워

 적막한 가람 가에 물새가 우네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람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강남에 달이 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浮萍)의 잎사귀에 벌레가 우네

 차라리 이 몸이 잠들리로다

 님이 절로 오시어서 깨울 때까지

 

-낙화유수(강남달)- 전문

 

영화각본을 쓰고, 주제가의 작사, 작곡까지 도맡았던 김영환은 1898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작사, 작곡활동을 할 때는 김서정(金曙汀)이란 예명, 변사활동을 할 때는 본명 김영환으로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주임변사 노릇까지 담당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인이었으며 영화감독에다 바이올린 연주까지 잘 했으니 참으로 다재다능한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었고, 장안의 화제가 드높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서울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4년 영화 ‘장화홍련전’ 감독으로 첫 데뷔했던 김영환에게는 그러나 지울 수 없는 출생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진주권번 기생으로 김씨 성의 청년화가와 사랑에 빠져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 태어난 아기가 바로 김영환입니다. 하지만 권번대표는 기생을 다른 부잣집 첩실로 들여보내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청년화가는 오해를 품고 냉정하게 애인을 떠나버립니다. 낙담에 빠진 기생은 아기를 혼자 남겨둔 채 진주 남강으로 나가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자란 김영환은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깊은 트라우마를 항시 잊지 못합니다.

 

마침내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김영환은 어머니의 비극적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한 편을 기획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무성영화 낙화유수였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기생 춘홍(春紅)의 배역은 충남 보령 출신의 배우 복혜숙(卜惠淑, 1904~1982)이 맡았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춘홍이 강물로 투신하러가는 장면에서 변사 김영환은 울음 섞인 절규로 목이 메었습니다.

 

“강남의 춘초(春草)는 해마다 푸르고

 세세년년(歲歲年年)에 강물만 흘러간다.

 아, 남방(南方)을 향하야 떠난 기생 춘홍의 운명은

 장차 어찌나 될 것인가?”

 

무성영화 시절, 김영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항시 말쑥한 용모에 고급스런 양복차림으로 인력거에 앉아서 권번을 향해가는 그의 화려한 모습이 장안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김영환에게 환심을 얻으려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고, 김영환은 그들에게 물 쓰듯 돈을 뿌려 댔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곧 비정하게 변하는 법. 무성영화 시절은 떠나가고, 1930년대부터 토오키(talkie)를 기본으로 하는 발성영화시대가 펼쳐지게 되면서 김영환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시들고 말았습니다.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예전처럼 만담, 난센스, 유행가가사 등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이미 그의 전성기는 지나간 다음이었습니다. 뒤이어 찾아온 좌절과 방황을 이기지 못하고 김영환은 아편에 손대기 시작하다가 기어이 마약중독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구걸하는 거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936년, 비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영화 <낙화유수>의 여주인공 역을 담당했던 배우 복혜숙은 충무로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있던 김영환을 직접 만나 약간의 용돈까지 전해주었다는 회고담도 있지만 사실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구체적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화가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재주꾼 김영환은 자신의 출생과정에 얽힌 자전적(自傳的) 슬픈 이야기를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아냄으로써 영화 낙화유수는 한국근대민족문화사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훌륭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노래 낙화유수는 한국가요사에서 최초의 창작가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비록 비전문음악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가요작품이었지만 일찍이 중심을 잃고 방황하던 식민지시절에 대중문화의 진정한 방향성을 제시해준 중요한 방향키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10편 가량의 영화작품과 20편 가량의 가요작품으로 초창기 한국대중문화사의 빛나는 별이 되었던 대중연예인 김영환! 비록 그의 삶은 굴곡이 많고 불행하였으나 그가 흘렸던 땀과 노력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동순  dslee50@hanmail.net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 가요는 윤심덕의 사의찬미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노래가 한 곡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견해에 동조할 사람들도 많을 거라 믿는다.

 

그 음악은 다름아닌 '낙화유수'다. 이 음악은 무성 영화시절의 주제가라면 어떨지는 몰라도, 어떻든 간에 같은 제목의 영화 해석 곡으로 나왔으니까 주제곡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928년에 무성영화로 나왔던 다음해인 1929년에 낙화유수의 해설자(변사) '김영환'씨가 영화를 보다 실감나게 해설하기 위해서 만든 노래가 같은 제목의 노래

'낙화유수'이다.

 

당시의 음반 자켓에는 '김서정' 작사 '김영환' 작곡으로 되어있으나 '김서정' 역시 '김영환'씨의 또 다른 이름이고 보면 한 사람이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하고 영화의 해설까지 한 것이다.

 

물론 음반을 취입한 연도로만 따진다면 '사의 찬미'가 앞설 것이다. 이 음악은 1926년에 나온 걸로 되어있으니까 3년은 빠른 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음악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대중가요로 보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음악의 곡은 다뉴브 강의 물결이란 음악에 가사만 개사를 해서 붙인 음악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중 가요가 아니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을 상대로 한 음악은 '낙화유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노래(낙화유수)는 당시 동요를 주로 불렀던 '이정숙'이라는 가수가 불렀는데 이 가수는 가요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동요나 민요 또는 가곡 등으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낙화유수'가 공전의 히트를 치자 신카나리아가 재 취입(리메이크)해서 부르므로 이 노래는

한국 최고의 가요가 되었다.

75년이 흘러간 지금도 '낙화유수'는 어른들의 입을 통하여 불려지는 것을 보면 이 노래가

얼마나 사랑을 받았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워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정서에 맞는 우리의 노래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