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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인문고전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시(禪詩)

by 연송 김환수 2016. 8. 23.


다음은 불교의 게송(偈頌)이며, 선불교의 선시(禪詩)로 유명한 송나라 야부도천(冶父道川, 야보도천) 선사의 작이다

"야보도천"으로 읽는 견해도 있지만 관용발음을 존중하여 "야부도천"으로 기록한다.

     冶父道川 (야부도천,  yě fù dào chuān) 

     참고로 야부(冶父)선사 또는 야보선사로 혼용하여 쓰고 있기도 합니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月輪穿沼水無痕  (월륜천소수무흔  
智慧存於明者心  (지혜존어명자심)   
如淸水在於深井  (여청수재어심정)   
三日修心千載寶  (삼일수심천재보)   
百季貪物一朝塵  (백계탐물일조진)   

대나무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이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 흔적이 남지 않네
지혜는 밝은 사람 마음에 있는데,
맑은 물이 깊은 샘에 있는 것과 같다네.
단 삼 일이라도 마음 닦으면 천 년이나 가는 보배요
백 년을 탐한 재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티끌과 같네.


 

선시(禪詩)

선시(禪詩)는 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짤막한 율문으로 나타낸 시를 말한다. 선시(禪詩)는 시()와 선()의 만남이다. 선시는 범불교적 종교시가 아닌 불교 선종(禪宗)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정신적 경지를 표현한 운문문학이다.

 

모든 형식이나 격식을 벗어나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적(禪的) 사유(思惟)를 담고있는 불교시시 유형의 하나로 선()과 시()가 합일화 되어진 용어로서, '선과 시', '선적인 시', '선의 시적 표현', '시의 선적 표현'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원래 선은 사유수(思惟修) · 정려(靜慮)로 풀이되는데, 이 사유수와 정려는 시의 내면적 소성(素性)과 부합되기 때문에 선과 시는 쉽게 결합될 수 있겠다. , 선이 불교의 한 유파이면서도 모든 형식이나 격식을 벗어나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든 사유(思惟)를 포용할 수 있는데, 이는 철학에 있어서 논리적 사고를 제거하고, 예술에 있어서 형식과 기교를 버리는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

 

선시의 시작은 게송(偈誦)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송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가타(gatha, 伽陀)의 음역인 게()와 중국어 풍송(諷誦)의 송()이 합쳐 이루어진 말로 운율의 형식을 갖춘 경전의 일종으로, 경전에서 불설이 설해지는 양식과 성질을 열두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12분교의 하나이다.

 


 야부도천 (冶父道川, 야보도천)


중국 송나라 때 임제종 스님이다. 강소성(江蘇省) 고소(姑蘇) 옥봉(玉峰) 사람으로 속성이 적()씨이다.

 

야부도천(冶父道川)중국 남송(南宋: 1127~1279)대의 사람으로 속성은 적(), 이름은 삼()이다. 젊어서 군의 집방직(執方職, 군대의 궁수<弓手>)로 있다가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출신은 곤산의 적씨(狄氏)였고 이름이 적삼(狄三)이었다. 여기 삼()은 대가족 집안의 세 번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추측한다.

 

금강경 오가해(金剛經 五家解)중에서도 야부송(冶父頌)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일생은 모든 인간이 부처가 될 근본성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동(齊東)의 도겸(道謙)선사에게서 도천(道川)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정인계성(淨因繼成)에게서 법통을 받아 임제(臨濟)6세손이 된다.

 

처음 동제겸(東齋謙)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크게 깨치고 건염(建炎, 1127~1130)초에 천봉(天峰)으로 가서 정인사(淨因寺) 반암(蹣庵) 계성(繼成) 문하에서 인가를 받고 그의 법을 이어 임제종 후손이 되었다.

 

뒷날 다시 동제 스님한테 돌아가 법을 펼치니 출가한 스님들과 세상 사람들이 그의 법력을 흠모하였다.

금강경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스님이 게송으로 답하니, 이것이 유명한 천로금강경주(天老金剛經註)이다.

안휘성(安徽省) 야부산(冶父山) 실제선원(實際禪院) 주지를 역임하였지만 그 분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입적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대그림자 뜰을 비질하고 있다
먼지 하나 일지 않는다
달빛이 물밑을 뚫고 들어간다
수면엔 흔적 하나 남지 않는다.

借婆衫子拜婆門 禮數周旋已十分 (차파삼자배파문 예수주선이십분)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죽영소계진부동 월천담저수무흔)


7언절구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 시는 첫 1, 2구가 선의 심오한 경지를 읊고 있어 상당한 양의 설명을 요한다.

따라서 3, 4구만 한역한 것인데 이것만으로도 시적 영감이 감전되는 듯한 맛을 짜릿하게 느낀다.

 

극도로 절제되고 차분한 감정에 섬세한 필법이 읽을수록 독자를 압도하고 매료시킨다. 시적 상황을 영상으로 떠올리면 이처럼 아름답고 고요한 풍광은 없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선적 이미지스트가 얼마나 예리한가.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상호연관시키는 능력이라고 한다.


무사무욕(無私無慾)의 태도로 세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인의 심성을 우리는 원시인이나 어린애의 그것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야부의 이 시는 이미 그마저 뛰어넘은 천부적 선적 관찰을 내보이고 있다.

 

선사들의 삶과 죽음 문제를 깨치고 난 초월의 경지에서 노래한 이 시에서 우리는 고도의 정제된 정신적 수준과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자연관조의 결과가 선적으로 착색되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가 빚어지는 가를 야부가 이시를 통해 여실히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야보 선사는 송나라 때 유명한 스님으로 법명은 도천(道川), 법호는 야부(冶父). 우리나라에는 금강경오가해에 야보송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시는 고요한 세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차분하고 섬세하고, 동양적인 독특한 이미지도 있다. ‘대 그림자의 비질은 현실에서 도저히 상상해 낼 수 없는 절대 저편의 세계이다.

 

원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움직임이 없고(不動) 흔적이 없는(無痕) 세계이다. 선시(禪詩)는 이처럼 일상 언어의 논리를 넘어 그 상상이 비약적이고 초월적이다.


이것은 선시 자체가 선()의 깨달음을 반영한 시이기 때문다. 야보 선사는 출가 전부터 법문 듣기를 좋아했다. 법회가 열린다는 소식만 들으면 원근을 불문, 만사 제치고 달려갔다.


그가 벼슬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직무태만죄로 태형(笞刑)을 맞게 되었다. 형틀에 묶여서 곤장을 맞으면서도 법문 내용에 골몰하였다.

 

그 때문에 곤장을 몇차례 때렸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형을 집행하던 관리가 화를 내면서 사정을 두지 말고 치라고 호통을 쳤다.

이 말에 곤장을 때리던 형리(刑吏)가 억울하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곤장을 내리쳤다. 이 순간 곤장이 부러지고 야보는 아픔을 못이겨 아이구!’ 소리와 동시에 천지가 열리며 크게 깨쳤다는 일화가 있다.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 [集註金剛般若波羅蜜經()]

 

  집주금강반야바라밀경 권하

 

1417년 공림사에서 간행한 금강경 주석서. 하권. 보물 제1223. 11책 목판본. 개인 소장.

 

유형 : 문헌

성격 : 불경주석서

제작시기 : 1417

권수·책수 : 11

간행·발행·발급자() : 우희열, 허이, 공림사

소장처 : 한솔종이박물관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223

문화재 지정일 : 1995719

 

정의

1417(태종 17) 공림사(空林寺)에서 간행한 금강경 주석서.

 

내용

(). 11. 목판본. 보물 제1223. 이 책은 금강반야바라밀경에 대한 53()의 주해(註解) 가운데 왕일휴(王日休), 진웅(陣雄), 부대사(傅大士), 안여여거사(顔如如居士), 야부도천선사(冶父道川禪師), 약눌선사(若訥禪師), 육조대사(六祖大師), 자암승미선사(茨菴僧微禪師), 지자선사(智者禪師) 등의 주석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금강경 전체 32분과 가운데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부터 제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까지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는 수경게(收經偈)가 실려 있고 영경사(永慶寺)의 도과법사(道顆法師)의 석본(石本)을 저본(底本)으로 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본문의 교정표(校正表), 육조대사(六祖大師)의 서문(序文), 지자 청량 이선사 송(智者 淸凉 二禪師 頌), 간행발(刊行跋)과 간기(刊記)가 붙어있다. 이 가운데 간행발 이외에는 간행 당시의 저본(底本)에 붙어 있던 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판본은 신주(信珠) 등의 화주(化主)로 전도관찰사(前都觀察使) 우희열(禹希烈)과 전통선랑목주감무(前通善郞木州監務) 허이(許彛) 등에 의해서 1417년에 공림사에서 간행된 것이다.

 

금강경의 주석서(註釋書)로 우리나라에는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가 널리 유통되었는데 비해 처음 나온 새로운 자료이다. 한솔종이박물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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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부송(冶父頌 )

 

山堂夜靜坐無言 寂寂寥寥本自然  (산당야정좌무언 적적요요본자연)

何事西風動林野 一聲寒雁淚長天 (하사서풍동림야 일성한안루장천)


(冶父頌) 金剛經莊嚴淨土分. (야부송) 금강경장엄정토분

 

깊은 밤 절에 말없이 앉았으니

고요하고 적요함 본래 자연 그대로네.

그런데 무슨 일로 서풍은 수풀을 흔드는고.

한 소리 찬 기러기 장천을 울고 가네.

 

冶父 道川禪師는 생몰년대가 확실하지 않다. 금강경 오가해를 보면 禪智가 번뜩인다.

간단명료한 禪詩로 금강경을 會通치고 있다. 五燈會元 五燈嚴總等無爲軍冶父라 했다.

실재 狄氏 이름은 이다. 弓手로 있다가 東齊謙首法化를 받고 參禪을 익히다가 出家하여 淨團繼成禪師認可를 받았다.

 

야부 송은 僧俗을 막론하고 널리 애송되었다.

詩情이 매끄럽고 간결함이 深山속에 옹달샘 맛이라. 읊으면 읊을수록 감미롭다.

은 금강경 莊嚴淨土分이다. 應無所住以生其心莊嚴淨土分 核心이다.

山寺의 정경과 금강경 핵심을 드러낸 禪詩. (화정)

 

야부 송(冶父頌)

 

千尺絲綸直下垂 一波纔動萬波隨 (천척사륜직하수 일파재동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야정수한어부식 만선공재월명귀)

 

천길 낚시 줄 곧 바로 내렸는데

한 파도 일자 만 파도 출렁인다.

밤 깊어 물도 찬데 고기는 물지 않고.

달빛만 가득 싣고 빈 배만 돌아가네.

 

도 역시 冶父 頌이다. 金剛經 五家解에 있는 知見不生分偈頌이다. 冶父스님 偈頌中 白眉頌이다.

큰 스님들의 法門에 단골 메뉴 이다. 그 만큼 널리 애송되는 偈頌이다.

禪詩禪師宗風 道格 따라 어떤 것은 하고

어떤 것은 하며 어떤 것은 하고 어떤 것은 하며 또는 하고 하며 한 것도 있다.

 

나름대로 격조와 품격을 지니고 있다. 偈頌은 금강경 삼십이분 중 삼십일분 속한다.

삼십일분은 知見不生分이다. 知見衆生見四見을 말한다. 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四見이다.

核心 뜻은 四見을 내지 말라다.

偈頌 末句에 달빛만 가득 실고 빈 배로 돌아가네, 가경의 뜻과 딱 부합 된다.

고깃배는 고기를 싣고 가야 한다.

그런데 달빛만 가득 실고 빈 배로 간다. 거기에 깊은 뜻이 함축 되었다.

배는 가는데 어부는 보이지 않고 달빛만 가득 실고 간다. 知見을 내지 말라가 의 뜻이다.

어부니 배니 강이니 달이니 따지면 벌써 틀린 소리다.


의 뜻과 對比 해 보면 偈頌의 뜻이 확 드러난다.

역시 야부스님 다웁다. 참 좋지 않는가? 한 평생 공부해서

이런 偈頌 하나쯤 지어보는 것도 멋진 삶이 아니겠는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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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尺絲綸直下垂 천척사륜직하수

一波動萬波隨 일파동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한어부식

滿船空載月明歸 만선공재월명귀

 

천 척 긴 실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막 일더니 만 물결이 따라 이누나.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와 물고기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 훤히 달빛만 싣고 돌아오도다.

 

운흥사본(雲興寺本)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오는 도천(道川) 야부(冶父) 스님의 금강경송(金剛經頌)’이다. 야부(冶父)스님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중국 남송(南宋: 1127~1279)대의 사람으로 속성은 적(), 이름은 삼()이다. 군의 집방직(執方職)에 있다가 재동(齊東)의 도겸(道謙)선사에게서 도천(道川)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정인계성(淨因繼成)에게서 법통을 받아 임제(臨濟)6세손이 된다.

 

이 시에서 마지막 구를 배에 가득히 허공만 싣고 달 밝은 데 돌아오도다.”라 흔히 번역하는데, ‘라는 동사의 빈어가 될 수 없다. 부사로 보아야 옳다. 직역하면 가득한 배에 아무 것도 싣지 않고 달 밝은데 돌아오도다.”이다. 가득한 배인데 아무 것도 싣지 않았고 달 빛 속에 돌아온 것이니 그 배엔 달빛만 실릴 뿐이다. “배에 가득 훤히 달빛만 싣고 돌아오도다.”로 해석하는 것이 원래 뜻에 가깝고 시의 이미지도 제대로 살리는 것이리라.

 

오늘 이 시를 놓고 대가들과 다른 해석을 하련다. 이 선시에서 핵심어는 물고기와 어부이다. , 달빛, 낚시 등도 중요한 어휘이나 두 낱말의 의미에 따라 달라지기에 이들은 물고기와 어부의 종속어다.

 

물고기는 중생어부는 깨달은 이

 

이 시에서 어부의 핵심의미는 상즉상입(相卽相入)과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어느 가을날 낚시를 하는데 입질조차 오지 않았다. 그때 낚시찌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앉았다. 단풍은 산 그림자를 안은 채 호수까지 내려와 물에 드리우고 수평을 이룬 연록빛 호수에 맵시 있게 색동무늬의 찌가 수직을 이루었는데 빨간 고추잠자리가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취하여 한참을 멍 하니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처럼 낚시에 몰두한 어부는 내가 어부인지 물고기인지 그 경계를 넘어선다. 바다와 하늘, 물과 땅, 나와 물고기의 경계를 넘어설 때 낚시는 도()의 경지에 이른다. 이 상태가 바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니 어부는 화엄 중에서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모든 차별을 하나로 아우른 원융(圓融)의 경지이다. 사람으로 치면 이 경지에 이른 선사나 부처이다. 강가에서 고요히 낚시를 하고 있는 어부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간이자 대상과 합일을 이룬 주체이다. 물고기를 얼마나 잡느냐가 아니라 이 경지에 이르느냐 이르지 않느냐가 바로 진정한 어부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라 할 정도로 상즉상입과 물아일체는 어부의 본체이다.

 

사람이 상즉상입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바라보면 그 순간 그는 부처이다. ‘어부부처라면, ‘물고기는 바다에 널려 있으며 포획을 기다리는 것이니 중생(衆生)’의 의미를 갖는다. 물고기가 중생이라면 중생이 부처에 낚임은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해탈을 이룸이다. 낚시는 자비행(慈悲行)이며, 배는 자비행을 이루는 방편(方便)이다. 바다는 중생이 있는 속계(俗界)이며, 달빛이 있는 바다 밖은 이를 초월한 세상이다.

 

그럼 물고기가 물지 않음은 무슨 의미인가? 중생은 본래 청정(淸淨)하며 그들 마음속에 이미 부처가 자리 잡고 있다.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심(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달빛은 차별없이 만물을 비춰

 

일체의 중생이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馬鳴, 大乘起信論)

 

만일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곧 다른 경계가 없어지고 중생 또한 본래의 청정함으로 돌아

가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니, 중생은 부처의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어부가 달빛만 싣고 돌아옴은 당연한 일이다. 빈 배는 모든 것이 원래 공()함을 나타낸다. 바다와 배, 어부와 물고기, ()과 속()의 경계,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공()하다. 그렇게 깨닫고 보니 달 빛 아래 차별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삼라만상이 빛난다. 그러니 빈 배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어부의 의미가 부처가 아니라 신선이나 선비라면, ‘하나가 양식, 먹을거리를 의미하듯 물고기는 부분과 전체관계를 바탕으로 자연의 환유라는 의미를 형성한다. 자연의 한 대상인 물고기를 낚음은 어부가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경지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물지 않는다. 물고기가 물고 물지 않음은 중요하지 않다. 물고기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빈 배이다. 달빛이 바다를 비추니 바다와 하늘, 배와 물고기가 하나가 된다. 달빛을 가득 실어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루었으니 빈 배는 하나로 돌아간다. 조선조의 어부가는 대개 이 점에 주목하였다.

 

어부선사(禪師)’라면, ‘물고기(), 혹은 부처의 마음이다. 물고기의 실체는 인간의 포획의 대상이란 것이다. 인간이 잡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 진리, (), 진여실체, 욕망, 명예, 권력, 향락, 행복등이다. 물고기는 이런 의미를 갖는다. 이 가운데 선사가 잡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선사는 도에 이르려 하고, 낚시는 도에 이르는 방편이므로 언어기호를 의미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서 보듯 물고기와 통발은 도()와 언어기호의 비유이다. 선사는 언어기호를 통하여 도에 이르려 한다. 그러나 물고기는 물지 않는다. 도는 언어 저 너머에 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물고기처럼 눈에 보이고 낚시에 낚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사람의 본성은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타고나므로 스스로 그 지혜를 부리어 늘 관조(觀照)하기에 글자를 빌리지 않아도 된다. 미혹한 자는 말로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마음으로 행한다.”(惠能, 六祖壇經)

 

물아일체니 어느 고기 낚으랴

 

천 척 낚싯줄을 드리웠음에도 물고기가 물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다. 선사는 배라는 방편을 이용하여 부처님의 마음에 이르려 하지만 언어는 방편일 뿐이다. 야부의 금강경송금강경법의 상()이라고 말 한 바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즉 법의 상이 아니며 법의 상이라고 이름하는 것뿐이다.”라는 대목을 주석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인 것임은 이 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금강경송을 지은 야부의 입장에서는 이 뜻으로 야부송을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빈 배는 그런 행위나 인식이 모두 공()함을 의미한다. 그 바다와 빈 배에 달빛이 두루 어느 곳도 가리지 않고 비춘다. 그리 분별심을 떠날 때, 달빛 아래 바다와 하늘, 물고기와 나의 구분이 사라질 때, 낚시를 거두고 달빛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문득 자기 마음속의 물고기를 찾을 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을 구체적 행동이 아니라 추상적 행동으로 제한하면, ‘어부자신의 의지대로 세계를 해석하는 자, 곧 철학자이다. 그가 물고기라는 대상세계를 알고자 하여 낚시를 던진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경지이다. 물고기는 물지 않는다. 대상세계는 알 수가 없다. 대상은 허상인 것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낚시를 거두니 달빛이 빈 배에 가득하다. 달빛이 비추어 배와 달이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 배가 달빛이고 달빛이 곧 배인 경지가 된다. 배와 달빛은 서로가 서로를 헤살놓지 않고 동시에 비추고 동시에 서로에 침투하여 서로를 이룬다. 인식하고 추구하려는 대상은 공이지만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萬法歸一), 달빛을 가득 실은 배는 결국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른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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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道川 (야부도천)

 

得樹攀枝未足奇(득수반지미족기) 나뭇가지 잡음은 족히 기이한 일이 아니니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水寒夜冷魚難覓(수한야냉어난멱) 물은 차고 밤도 싸늘하여 고기 찾기 어려우니

留得空船載月歸(유득옹반재월귀) 빈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 오도다.

 

冶父道川 (야보도천)

 

蚌腹隱明珠 (방복은명주) 조개 속에 진주가 들어 있듯

石中藏碧玉 (석중장벽옥) 돌 속에 옥이 감추어 있듯

有麝自然香 (유사자연향) 사향을 지니면 저절로 향기로운데

何必當風立 (하필당풍립) 하필이면 바람 앞에 서야 하랴.

千尺絲綸直下垂 (천척사륜직하수) 천 척의 낚싯줄을 곧게 드리우니

一波載動萬波隨 (일파재동만파수) 한 물결 일어나매 많은 물결 따라 인다.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한어부식) 밤은 고요하고 물을 차서 고기는 물지 않고

滿船空載月明歸 (만선공재월명귀) 배에 허공만 가득 싣고 밝은 달 속에 돌아온다.

 

山堂靜夜坐無言 (산당정야좌무언) 산 집 고요한 밤, 말없이 앉았으니

寂寂寥寥本自然 (적적요요본자연) 고요하고 고요해서 본래 이러하구나.

何事西風動林野 (하사서풍동임야) 무슨 일로 서풍은 잠든 숲 깨워

一聲寒雁淚長天 (일성한안루장천) 한 소리 찬 기러기 장천을 울며 가는고.

 

 

法相非法相 (법상비법상) 법상과 비법상이여

開拳復成掌 (개권복성장) 주먹을 펴니 다시 손바닥이로다.

浮雲散碧空 (부운산벽공) 뜬구름이 푸른 하늘에서 흩어지니

萬里天一樣 (만리천일양) 만리의 하늘이 온통 푸른 하늘이더라.

 

 

三佛形儀總不眞 (삼불형의총부진) ,, 화신의 형상과 거동은 다 진실이 아니고

眼中瞳子面前人 (안중동자면전인) 눈 가운데 동자는 그대 앞의 사람이라.

若能信得家中寶 (약능신득가중보) 만약 능히 집에 있는 보배를 믿기만 하면

啼鳥山花一樣春 (제오사화일양춘) 새 울고 꽃 피는 것이 한결같은 봄이로구나.

 

 

多年石馬放毫光 (다년석마방호광) 여러 해 동안 돌말이 빛을 토하니

鐵牛哮吼入長江 (철우효후입장강) 쇠소가 울면서 장강으로 들어간다.

虛空一喝無迹 (허공일갈무종적) 허공 향한 저 고함소리 자취도 없더니

不覺潛身北斗藏 (부각잠신북두장) 어느 사이 몸을 숨겨 북두에 들었는고.

 

中国古代有个禅宗和尚青源惟信禅师得道以后说老僧三十年前来参禅时见山是山见水是水及至后来亲见知识有个入处见山不是山见水不是水而今得个休歇处依然见山是山见水是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얘기(이 말은 송나라 청원 유신 선사의 말로 성철 스님이 대중화했다

야부 송()

 

야부(冶父)스님은 속성은 추()씨요 이름은 삼()이다. 생몰연대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송나라(1127-1130)사람으로 군의 집방직(執方職)에 있다가 재동(齊東)의 도겸(道謙)선사에게 도천(道川)이라는 호를 받았고 정인게성(淨因繼成)의 인가를 얻어 임제(臨濟)6세 손이 된다.

그의 게송(偈頌)은 중국선의 극치를 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금강경 오가해’(金剛經五家解)밥이 오면 밥 먹고, 잠 오면 잠잔다.”(飯來開口睡來合眼)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금강경을 통해 자기의 견해를 송으로 후학들에게 많이 알려졌는데, 간결하면서도 한번에 내리치는 듯한 그의 활구(活句)는 후학들에게 큰 안락과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야부도천(冶父道川)스님의 게송을 여기 소개한다.

 

마하대법왕 摩訶大法王 크고 크신 대법왕이시여

무단역무장 無短亦無長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음이로다.

본래비조백 本來非皂白 본래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지만

수처현청황 隨處現靑黃 곳에 따라 청황으로 나타나도다.

 

화발간조염 花發看朝艶 꽃피어 아침의 고운 모습 보이고

임조축만상 林凋逐晩霜 나무들 낙엽 지니 늦서리 내리도다.

질뇌하태격 疾雷何太擊 천둥은 어찌 그리 크게 치는 가

신전역비광 迅電亦非光 빠른 번개도 역시 빛이 아니로다.

 

범성원난측 凡聖元難測 범부, 성인 원래 측량키 어려워

용천기도량 龍天豈度量 천용 팔부 인들 어찌 헤아리리오.

고금인불식 古今人不識 예나 지금이나 아는 사람 없어서

권립호금강 權立號金剛 방편으로 금강이라 이름 하네.

 

 

원제영상 猿蹄嶺上 원숭이는 고개위에서 울고

학려임간 鶴唳林間 학은 숲속에서 우는데

단운풍권 斷雲風犈 조각구름은 바람에 걷히고

수격장단 水激長湍 물은 긴 여울져 흐르도다.

최호만추상오야 最好晩秋霜午夜 가장 좋은 늦가을의 서리 내린 한 밤에

일성신안각천한 一聲新雁覺天寒 새끼 기러기 한 소리가 찬 하늘을 알리네.

 

격장견각편지시우 隔墻見角便知是牛 담 넘어 뿔을 보면 문득 소 인줄 알고

격산견연편지시화 隔山見煙便知是火 산 넘어 연기를 보면 문득 불 인줄 알도다.

독좌외외천상천하 獨坐巍巍天上天下 홀로 앉아 높고 높음이여 천상천하거늘

남북동서찬구타와 南北東西鑽龜打瓦 동서남북에서 거북과 기와로 점을 치도다.

 

이희아불희 爾喜我不喜 너는 기뻐도 나는 기쁘지 않네.

군비아불비 君悲我不悲 그대 슬퍼도 나는 슬프지 않으이

안사비새북 鴈思飛塞北 기러기는 북쪽 집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고

연억구소귀 燕憶舊巢歸 제비는 옛집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도다.

 

허공경계기사량 虛空境界豈思量 허공 경계를 어찌 사량하겠는가.

대도청유이갱장 大道淸幽理更長 대도가 맑고 깊어 그 이치 더욱 길도다.

단득오호풍월재 但得五湖風月在 다만 五湖에 풍월이 있음을 안다면

춘래의구백화향 春來依舊白花香 봄이 옴에 여전히 백화가 향기로우리.

 

신재해중휴멱수 身在海中休覓水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 물을 찾지 말고

일행영상막심산 日行嶺上莫尋山 매일 산위를 행하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

앵음연어개상사 鶯吟燕語皆相似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

막문전삼여후삼 莫問前三與後三 前三과 더불어 後三을 묻지 말지어다.

 

산시산수시수불재심마처 山是山水是水佛在甚麽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느냐?

 

유상유구개시망 有相有求皆是妄

무형무견타편고 無形無見墮偏枯

당당밀밀하증간 堂堂密密何曾間

일도한광삭태허 一道寒光爍太虛

 

상이 있고 구함이 있음은 이 모두 이요

無形 無見은 치우친 소견에 떨어짐이로다.

당당하고 밀밀하여 어찌 간격이 있으리오.

한 길 찬 빛이 큰 허공을 빛내도다.

 

금불부도로 金佛不度爐

목불부도화 木佛不度火

니불불도수 泥佛不度水

 

금불은 화로를 지나지 못하고

목불은 불은 건너지 못하며

니불은 물을 건너지 못하도다.

 

종일망망 終日忙忙

나사무방 那事無妨

불구해탈 不求解脫

불락천당 不樂天堂

단능일념귀무념 但能一念歸無念

고보비로정상행 高步毘盧頂上行

 

종일 바빴다

어떤 일에도 방해되지 않아

해탈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천당을 즐기려 하지 않는다.

다만 능히 한 생각 무념으로 돌아가면

높이 비로정상을 걸으리라.

 

운기남산우북산 雲起南山雨北山

나명마자기다반 驢名馬字幾多般

청간호묘무정수 請看浩渺無情水

기처수방기처원 幾處隨方幾處圓

 

구름은 남산에 일고 비는 북산에 내리며

나귀이름에 馬字가 얼마나 많던고.

청컨데 넓고 아득한 無情水를 보라

어느 곳이 모를 따르고 어느 곳이 둥글더냐?

 

정인설사법 正人說邪法

사법실귀정 邪法悉歸正

사인설정법 邪人說正法

정법실귀사 正法悉歸邪

강북성지강남귤 江北成枳江南橘

춘래도방일반화 春來都放一般花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설하면

邪法이 다 正法으로 돌아오고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설하면

正法이 다 사에 돌아가리라

강북에선 탱자가 되고 강남에서 귤이 된다.

봄이 오면 모두 같이 꽃이 필걸세

 

파정칙운횡곡구 把定則雲橫谷口

방하야월락한담 放下也月落寒潭

 

파정하면 구름이 골짜기에 걸리고

방하하면 달이 찬 못에 떨어진다.

 

방복은명주 蚌腹隱明珠

석중장벽옥 石中藏碧玉

유사자연향 有麝自然香

하용당풍립 何用當風立

활계간래흡사무 活計看來恰似無

응용두두개구족 應用頭頭皆具足

 

조개 속엔 밝은 구슬 숨어 있고

돌 속엔 푸른 옥 감추었네.

사향이 있어 자연히 향기 나고

어찌하여 바람 앞에 섰으리오

살림살이 보면 흡사 없는 듯하여

응용하면 낱낱이 구족하리다.

 

산당정야좌무언 山堂靜夜坐無言

적적요요본자연 寂寂寥寥本自然

하사서풍동림야 何事西風動林野

일성한안려장천 一聲寒鴈唳長天

 

고요한 밤 산당에 말없이 앉아

적적하고 고요함이 본래 그대로인데

무슨 일로 서풍이 임야를 흔드나

한 소리 기러기가 장천을 울리는 것을

 

입해산사도비력 入海算沙徒費力

구구미면주홍진 區區未免朱紅塵

쟁여운출가진보 爭如運出家珍宝

고목생화별시춘 枯木生花別是春

 

바다에 들어 모래를 세는 것은 힘만 소비하는 것

구구히 홍진에 허덕임을 면치 못하리.

내 집에 보배를 꺼내어 본들

고목에 꽃이 피는 특별한 봄만 하리.

 

자소래래관원방 自小來來慣遠方

기회형악도소상 幾廻衡岳渡瀟湘

일조답착가향로 一朝踏着家鄕路

시각도중일월장 始覺途中日月長

 

소 시절부터 돌아다녀 먼 길은 익숙하다

형악산을 돌아 소상 강 건너기 몇 번이던가

하룻날 아침에 고향 길 밟으니

도중에서 보낸 세월이 긴 것을 알았네.

 

원관산유색 遠觀山有色

근청수무성 近廳水無聲

춘거화유재 春去花蕕在

인래조불경 人來鳥不驚

 

멀리 바라보는 산은 빛깔이 있는데

가까이 물소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네.

봄은 가버렸지만 꽃은 아직도 피어있고

사람이 와도 새가 놀라지 않더라.

 

구죽생신순 舊竹生新筍

신화장구지 新花長舊枝

우최행객로 雨催行客路

풍송편범귀 風送片帆歸

죽밀불방유수과 竹密不妨流水過

산고기애백운비 山高豈礙白雲飛

 

묵은 대에서 새순이 나고

새 꽃은 옛 가지에서 피어

비는 나그네 길 재촉하고

바람은 조각배의 길을 돌리네.

대나무 빽빽해도 물 흐름 방해치 않고

산이 높다한들 흰 구름을 흘러감을 막으리오.

 

모탄거해수 毛呑巨海水

개자납수미 芥子納須彌

벽한일륜만 碧漢一輪滿

청광육합휘 淸光六合輝

답득고향전지온 踏得故鄕田地穩

갱무남북여동서 更無南北與東西

 

한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키고

겨자 속에 수미산을 드리운다.

푸른 하늘에 달 둥그니

맑은 빛이 육합에 빛나도다.

고향땅 전지를 둘러보니

다시 남북동서랄 것이 무언가

 

여도단수 如刀斷水

사화취광 似火吹光

명래암거 明來暗去

나사무방 那事無妨

가리왕가리왕 歌利王歌利王

 

수지원연랑 별유호상량 誰知遠煙浪 別有好商量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고

불로써 빛을 부는 것과 같도다.

밝음이 오면 어둠이 가시니

무슨 일이라도 방해되지 않도다.

가리왕 가리왕이여!

누가 遠煙浪에 달리 좋은 사량 있음을 알리오.

 

사대원무아 四大元無我

오온실개공 五蘊悉皆空

확락허무리 廓落虛無理

건곤만고동 乾坤萬古同

묘봉억억상여고 妙峯嶷嶷常如故

수관전호괄지풍 誰管顚號括地風

 

사대가 원래 아가 없음이요

오온이 다 공하도다.

텅 비어 허무한 이치

하늘땅은 만고에 같도다.

묘봉은 높고 높아 옛과 같으니

땅을 휩쓸고 가는 회오리바람 누가 막으리오.

 

조유남악 朝遊南嶽

모왕천태 暮往天台

추이불급 追而不及

홀연자래 忽然自來

독행독좌무구계 獨行獨坐無拘繫

득관회처차관회 得寬懷處且慣懷

 

아침에는 남악 산에서 놀고

저물면 천태 산에 가도다.

쫓으려 해도 미치지 못하더니

홀연히 저절로 오네.

홀로 행하고 홀로 앉아 걸림이 없으니

너그러운 생각이 있음에 또한 너그러워 짐이로다.

 

일권타도화성관 一券打倒化城關

일각적번현묘채 一脚趯翻玄妙寨

남북동서신보행 南北東西信步行

휴멱대비관자재 休覓大悲觀自在

대승설초상설 大乘說最上說

일봉일숙흔 一棒一倏痕

일장일악혈 一掌一握血

 

한 주먹으로 화성의 관문을 타파하고

한 발로 현묘의 울타리를 차서 뒤엎도다.

남북동서를 마음대로 행하니

대비 관자재를 찾지 말지어다.

대승설 최상승 설이여,

한 방망이 한 가닥 흔적이요

한 손바닥 한줌의 피로다.

 

여군동보우동행 與君同步又同行

기좌상장세월장 起坐相將歲月長

갈음기손상대면 渴飮飢飡常對面

불수회수갱사량 不須回首更思量

 

그대와 함께 걷고 함께 행했네.

않고 일어서기 함께한 오랜 세월

목마르면 마시고 주리면 먹으며 서로대한 것들

바라건대 머리 돌려 다시 생각지 말지어다.

 

억천공불복무변 億千供佛福無邊

쟁사상장고교간 爭似常將古敎看

백지상변서흑자 白紙上邊書黑字

청군개안목전관 請君開眼目前觀

풍적적수연연 風寂寂水漣漣

사가인지재어선 謝家人秖在魚船

 

억척 부처님 공양은 복이 끝이 없으나

옛 가르침을 항상 보고 지니는 것만 하겠는가?

백지위에 검은 글자를 써서

청건데 그대가

눈을 열어 목전을 바로 볼지어다.

바람은 고요하고 물결은 잔잔한데

집 떠난 사람 마침 저 어선위에 있네.

 

양약고구 良藥苦口

충언역이 忠言逆耳

냉난자지 冷暖自知

여어음수 如魚飮水

하수타일대용화 何須他日大龍華

금조선수보리기 今朝先授菩提記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린다.

차고 더운 것은 스스로 아는 것은

고기가 물을 먹는 것과 같다.

어찌 모름지기 다른 날에 용화세계를 기다리리오.

오늘 아침에 먼저 수기를 받았음이로다.

 

타고롱비파 打鼓弄琵琶

상봉양회가 相逢兩會家

군행양유안 君行楊柳岸

아숙도두사 我宿頭沙

강상만래소우과 江上晩來疎雨過

수봉창취접천하 數峯蒼翠接天霞

 

북치는 이와 비파타는 이가

한 집에서 서로 만났다.

그대는 버들언덕을 거닐고

나는 나루터에서 잠을 잔다.

강위엔 때늦은 성근비 지나가고

봉우리마다 푸른빛이

노을 하늘에 닿아 있네.

 

상시천혜하시지 上是天兮下是地

남시남혜여시여 男是男兮女是女

목동당착목우아 牧童撞着牧牛兒

대가제창나나리 大家齊唱囉囉哩

시하곡조만년환 是何曲調萬年歡

 

위는 하늘이고 밑은 땅이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목동이 목동을 만나니

이무슨 곡조인가 만년의 기쁨이로다.

 

시법비법불시법 是法非法不是法

사수장용활발발 死水藏龍活鱍鱍

시심비심불시심 是心非心不是心

핍새허공고도금 逼塞虛空古到今

지자시절추심 秖者是絶追尋

무한야운풍권진 無限野雲風捲盡

일륜고월조천심 一輪孤月照天心

 

옳은 법이다 그른 법이다 하면 이는 법이 아니다.

죽은 물에 숨은 용이 활발하도다.

옳은 마음 그릇 마음이라 하면 이것은 마음이 아니다.

허공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렇다.

다만 이것이니라. 찾아도 찾지 못함이로다.

한 없이 펼쳐져 있는 구름 바람이 다 거두어들이고

둥근달이 고고히 천심을 비추네

 

차파삼자배파문 借婆衫子拜婆門

예수주여이십분 禮數周旅已十分

죽영소계진부동 竹影掃階塵不動

월천담저수무흔 月穿潭底水無痕

 

노파에 적삼을 빌려 입고 노파에 문전에서 절을 하니

예의는 충분한 것 같아

대 그림자를 쓸어도 움직임은 하나도 없어

달이 연못을 뚫었지만 흔적조차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