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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이준(李儁) / 초명 이선재(李璿在) 유묵(遺墨)

by 연송 김환수 2015. 10. 2.

이준(李儁) / 초명(初名) : 성재(性在), 선재(璿在)

 

출생 : 1859. 1.21(철종 10), 함경남도 북청

사망 : 1907.7.14(광무 11), 네덜란드 헤이그

경력 : 한성재판소 검사보, 평리원 검사, 대한협동회 부회장, 국민교육회 회장,

          헤이그 특사단 부사

본관 : 전주(全州)    

초명 : 성재(性在) · 여천(汝天) · 선재(璿在).

           *** 초명(初名) : 처음에 붙인 이름. 아이 때 이름.

자 : 순칠(舜七),

호 : 일성(一醒) · 해사(海史) · 청하(靑霞) · 해옥(海玉).

 

아버지는 병관(秉瓘)이며, 어머니는 청주이씨(淸州李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명섭(命燮)과 숙부 병하(秉夏)에게서 양육되었다.

 

1887년(고종 24) 북청의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인재양성을 위해 고향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했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 종9품)이 되었으며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장박(張博)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협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해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또한 같은 해 12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가 조직되자,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하다가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했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된 뒤 1905년 5월 윤효정(尹孝定)·양한묵(梁漢默) 등과 같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으며,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지어 동지들과 함께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운니동에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으며 함경도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하여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힘썼다.

 

1906년 평리원(平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에 임해 결국 법부대신과 알력을 빚어 취임 8개월 만에 파직당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3월 하순 극비리에 고종을 만나 세계각국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에 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고 고종의 밀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헤이그 특사단의 부사(副使)가 되어 4월 22일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했으며 다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했다. 그곳에 만국평화회의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6월 25일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1국을 대표하여 참석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부되었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회의 참석의 길이 막히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순국(殉國)했다. 시신은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특별시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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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검사의 표상으로서 이준

 

검사 이준이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 밀사로 갔다가 자결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건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검사로서의 이준은 더욱 더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1906년 10월 황태자의 재혼 가례를 맞이하여 고종황제가 은사령을 내렸고, 평리원 검사 이준은 평리원 소관 죄인 중에서 은사 대상자의 명단을 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법부에서 형사국장과 문서과장을 통해 법부에서 작성한 명단을 이준에게 참고하라고 전해왔다.

 

이준은 은사 대상자 명단 작성은 검사의 고유권한임을 강조하면서 법부안의 수용을 거절했다. 이준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되어 복역 중인 나인영, 오기호를 사면자 명단에 포함시키고, 정치범들을 은사대상자 명단의 첫머리에 올렸다.

 

하지만 법부의 직속상관이었던 형사국장 김낙헌은 이준이 작성한 명단은 그대로 올리지 않고 다른 중죄인을 명단에 넣어 고종황제에게 보고했다. 이준은 이를 시정하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되자, 1907년 법부형사국장 김낙헌을 다음과 같이 고소했다.

 

이번의 赦典에 李裕寅씨는 放釋되고 奇山濤씨는 放釋되지 않은 일에 대하여 평리원검사 李儁씨가 형사국장 金洛憲씨의 법을 집행하는 행정이 公平하지 못하다고 하여 법부에 공소하였다. 그런데 그 부에서 해당 소장을 접수하지 않고 청원하라 하였다(≪皇城新聞≫ 1907년 2월 11일 不平則鳴).

 

그러자 법부는 2월 20일 하관이 상관을 고소한 죄로 이준을 체포하여 심판하라는 통첩을 평리원에 보냈다. 이준 검사는 항명죄로 구속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준의 체포 사실이 알려지자 대한자강회, 서북흥학회, 국민교육회 등이 이준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평리원은 이준에게 ‘하관이 상관을 고소하고 문서과장 이종협이 공문을 파괴한 것도 상사의 지시를 어겨 격례가 아니므로 이준의 행위는 월권한 것’이라고 하며 유죄로 인정되었으나,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인해 면관되지는 않고 다시 평리원 검사로 출근하게 되었다.

 

이준의 위 사례에서 검사는 국가의 대표가 되어 형법상 독립한 권한을 가지며 공소 제기의 권한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준은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보방의 대상을 두고 법부의 상관을 고소한 강단 있는 검사였다. 또한 이준 검사가 감옥에 갇힌 죄수의 처지를 걱정하고 걱정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평리원검사 李儁씨가 음력 섣달그믐에 평리원에 와서 각 죄수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오늘 밤이 다른 밤과 다르니 감옥에 갇혀 한해가 지나가니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않겠는가? 죄의 경중은 막론하고 부모와 처자를 받들고 거느리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어떤 지경에 이르겠는가? 앞으로 개과천선하면 태황제 폐하의 흠휼하시는 성지를 봉승하는 뜻이 되고 자기 자신도 크게 유익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고기국과 밥 한 그릇씩을 각 죄수에게 먹으라고 줌으로 일반 죄수 등이 이준 검사의 자애심을 크게 칭송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皇城新聞≫ 1907년 2월 18일).

 

즉 아무리 죄를 지은 죄수라고 해도 한해가 바뀌는 우리의 민족 설날에는 차마 그들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고기국과 밥을 들고 감옥으로 가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개과천선할 것을 권하였던 것이다. 검사 이준은 강직한 기개로 불의와 싸우고 검사의 독립성을 지킨 강단 있고 강직한 검사였을 뿐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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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 할복자살의 진상은?>

 

기사입력 2007-06-23 06:30 18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어제 동경전보를 접한 즉 이준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18일 호외)

 

'이준씨는 분기를 이기지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중(同友會中)으로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황성신문 1907년 7월19일)

 

헤이그 특사 이준은 1907년 7월15일 네덜란드 현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처음 보도한 일본의 진서신문(鎭西新聞)은 '이준은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하고 어제 장의를 집행…'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이준이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서 피를 뿌렸다고 보도했으며 황성신문은 이준이 복부를 갈라 자살했다고 전했다.

 

대한매일신보ㆍ황성신문이나 진서신문 중 한 쪽은 오보를 낸 셈이다. 양쪽의 보도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이었을까?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2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헤이그 특사가 국외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 통해 이준의 사인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자세하게 분석했다.

 

사실 이준의 사인은 이미 50년 전에 결론이 났다. 1956년 이준의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자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개월 간에 결쳐 각종 문헌자료의 기록과 각계인사의 증언을 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할복자살은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구"였다.

 

조사결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배델과 협의해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the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와 가진 인터뷰에도 할복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준의 할복자살 소식은 이미 조선 전토로 번진 뒤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독립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 쳐보세'라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또 민족주의 진영의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장 많이 이용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는 '충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렸다'고 서술했다.

 

이후에도 이준의 순국은 할복자살로 전해졌다. 최근에도 여당의 한 유력인사가 '이준열사가 배를 갈라…'라고 발언했을 정도다.

 

이 연구원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956년과 1962년 이준의 죽음을 분사(憤死)로 정리한 이상 사인에 대한 논란은 종식할 때"라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 애국정신의 상징적 교재가 됐으며 국외 한인사회 공동의 정신적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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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 기념관

 

http://www.yijunpeacemuse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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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李儁,1859~1907) 열사 유묵(遺墨)

 

<학문을 구함은 봄에 비를 바라는 마음보다 간절하고,

마음을 갖기는 항상 밤에 우뢰를 듣는 것과 같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의 글이다.

이준열사 글 영인본

 

求學切於春望雨 구학절어춘망우

배움의 길을 찾는 것은 봄에 비를 바라는 것보다 간절하고,

持心恒若夜聞雷 지심항약야문뢰

마음가짐은 항상 밤에 우뢰를 듣는 것과 같다.

 

李儁烈土 글씨 발견 東京서

(토쿄 14일 申禹植특파원)

 

 1907년(光武 11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분사(憤死)한 一醒 李儁열사의 글씨가 13일 방일중인 李元基씨 (월간문화재 사장)에 의해 「토쿄」의 한 소장자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폭 19cm, 길이 110cm의 시고지(詩稿紙)에 쓴 이 대련(對聯)에는 「長想思」란 수인(首印)과 함께 「一醒 李儁」의 이름 아래 두개의 낙관이 있다.

 

 

李 儁烈土의 對聯 휘호 중 한폭

 

(서울신문 1979.12.14)  일본에서 발견된 이준 열사의 글씨

 

 

동아대학교 석당 박물관 이준열사 유묵 (李儁烈士 遺墨)

 

대련원문

快心事過必爲殃 쾌심사과필위앙

爽口物多終作疾 상구물다종작질

마음에 유쾌한 일이 지나치면 반드시 재앙이 되고

입에 맞는 음식이 많으면 끝내는 질병이 되고 만다.

 

산에서 내려와 곧 강에 이르니

가볍고 빠르게 떠가는 작은 배가

서쪽으로 돌아서니 석벽이라

옮겨 되돌아 서며 곁눈으로 보니

산의 나무와 풀이 뒤늦게 새롭더라 

 

西隣巳富憂不足   東老雖貧樂有餘

서린사부우불족   동로수빈악유여

白酒釀來綠好客   黃金散盡爲收書

백주양래록호객   황김산진위수서

 

서쪽의 이웃 사람은 이미 부자가 되었건만 부족함을 근심하고

동쪽의 늙은이는 비록 가난하나 즐거움이 넉넉하구나

흰 술을 빚어오는 것은 좋은 손님을 맞아 인연을 맺는 까닭이요

돈을 풀어 쓰는 것은 책을 사 들이기 때문이로다 

 

 

衆鳥高飛淚痕濕 중조고비루흔습

不知心恨誰  불지심한수

많은 새들이 높이 날면서 눈물이 가득하구나

알지 못하니 마음속에 누구를 한하는고

 

唐 杜牧 江南春(당 두복 강남춘)

 

千里鶯啼綠映紅(천리앵제녹영홍) 강남 천리에 꾀꼬리 울고 꽃들은 화샇게 피었는데,

水村山郭酒旗風(수촌산곽주기촌) 강마을 산고을 마다 주막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네.

南朝四百八十寺(남조사백팔십사) 옛날 남조 때 지은 사찰이 사백팔십 곳이 있었는데,

多少樓臺煙雨中(다소누대연우중) 얼마나 많은 누대들이 자욱한 이슬비에 젖고 있었을까.

朝鮮 海玉居士 李璿在(조선 해옥거사 이선재)

 

이준(李儁,1859~1907) 열사의 작품입니다. 이선재李璿在는 이준 열사의 초명初名입니다.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 803~862)의 시 강남의 봄(江南春)란 시로써 고풍스러운    남경의 풍광을 읊었다고 합니다.

 

1895년 2월 26일(음력 2월 2일) "백성을 가르치지 않으면 국가를 견고케 하기 어렵다"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국왕의 <교육입국조서>가 공포되었고, <한성사범학교 관제>(5월 10일), <외국어학교 관제>(6월 11일), <소학교령>(9월 7일)이 반포되었다.

 

▲ 1895년 12월 28일(음력 11월 13일)자 관보에 실린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 명단 47명.

    우등생 함태영과 이선재 등의 이름이 보인다. ⓒ프레시안

 

▲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과 "순국"으로 유명한 이준(李儁·1859~1907).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으로 그 당시 이름은 이선재(李璿在)였다. ⓒ프레시안

 

특기할 것은 다른 법률들에 앞서 <법관양성소 규정>이 4월 19일에 반포되고 25일부터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5월 17일부터 교육을 시작한 법관 양성소는 12월 25일 제1회 졸업생 47명을 배출했다. 초기에 법관양성소의 교육 기간은 6개월이었다.

 

법률가는 성직자, 의사와 더불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대표적인 전문 직업이다. 근대적 국가를 지향함에 있어 근대식 교육을 받은 법률가를 양성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법관양성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재현된 검사 임명장 동판

 

이준 열사의 흉상과 동판은 한국근현대사학회 이사인 국민대 이계형 박사와 부산대 법대 문준영 교수의 고증을 거쳐 재현한 것이다.

 

 

이준(이선재) 열사 / 고시 / 한국 최초의 검사인 이준 열사가 쓴 글.

충직함과 소박함이 어우러져 강직한 기개가 느껴진다. 50 x 138 cm.

 

이준(李儁)열사의 유묵 심항구학<心恒求學>

마음은 항상 배움의 길을 찾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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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매시장에 나온 이선재(이준) 유묵 한국에 있는 "이선재인"라는 낙관과 다르다.

일본에서 출품되는 글들의 낙관이 각각이니 진위여부는 전문가에 맡겨야 할 것 같다.

 

아래 낙관들을 비교해 보면 전서체 낙관이 각각 다르므로 진위에 의심이 가고 인장이 유묵 작품의 진위여부를 확인해 보라고 하는 것 처럼 보여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국에 있는 "李璿在印 이선재인" 낙관을 진품으로 가정해 볼 때 

일본에 있는 李璿在印(이선재인) 낙관들을 보면 / 인장의 전서체가 작품마다 서로 다르고 한국에 있는 인장 서체와도 다르니 이준열사가 여러개의 인장을 보유하고 있던것인지 아니면 위조된 유묵 작품에 가짜 인장을 찍은 것인지는 전문가의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일본 경매작품의 낙관은 육안으로 봐도 서툰 솜씨로 인장을 세긴 것처럼 보이는데 예전에는 전문가에게 인장 파는일을 맡긴경우도 있지만 직접 파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유묵의 진위여부는 전문가를 통해서 알아보고 구매에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겠습니다. 참고로 서체의 진위여부를 먼저 분석해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감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낙관의 진위여부라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최근 거래된 일본 경매시장의 이준열사 유묵

유묵의 진위여부는 독자의 판단에 맡겨봅니다.

終了日時(日本時間): 2015年 6月 13日 22時 36分 30秒

現在の価格 : 200,900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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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은 37세 때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에 입학한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법관양성소는 입학시험에 합격하거나 기존의 관직에 있던 사람들로 6개월간 수학케 하여 사법관의 자격을 부여한 최초의 사법기구였다.

당시 평균 나이가 30세였음을 감안할 때 이준의 나이는 많은 것이었다.

 

38세 때 우등생을 제치고 가장 먼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었으나 탐관오리 처리 문제로 고위층과 갈등을 빚다가 33일 만에 면관 당하게 된다.

 

이후 이준은 미관말직에서는 뜻을 펼 수 없다는 판단아래 적극적인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유아 때 이름인 이성재에서 이선재(李璿在)로 바꿨던 그는 이준(李儁)으로 개명하고, 호를 일성(一醒)으로 사용하게 된다. 준(儁)은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이요 일성(一醒)은 세상을 한번 깨우친다는 뜻이다.

 

1895년 서재필과의 협성회 조직, 1896년 상동교회 청년회장직 피선, 같은 해 독립협회 평의장 직무수행 등 본격적인 행보를 거듭하던 이준은 반대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과 함께 친일내각과 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포살령을 내린 상태에서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압송도중 군중의 손에 구타당해 숨지고,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백성들에게 잡혀 맞아죽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이준은 법무대신 장박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면서 일본 망명을 권하고 장박, 유길준, 조희연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망명 도중 이준은 유길준과 박영효에게 법학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사를 밝혀 1896년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하게 된다. 유학기간 중 이준은 일인들에게 글씨를 써주며 그 사례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일본 경매시장에 이선재라는 낙관의 이준열사의 글들이 가끔 보이는데 서체와 낙관의  진위여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1. 충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준

 

이준열사는 1859년 1월 21일(음력,1858년 12월 28일) 함남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발열동에서 이병관과 청주 이씨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 18대 손이다. 완풍대군 이원계공은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형이며 환조대왕의 맏아들로서 남에서는 왜군을 무찌르고 북에서는 홍건적을 쳐부순 공으로 벼슬이 영상에 이른 고려 말년의 공신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기울어져 가고 국민의 마음은 동생 성계에게로 쏠리게 되자 형인 완풍대군은 난처했다. 동생 성계를 따르자니 지금까지 충성해온 고려조에는 역적이 될 것이요, 고려왕의 편을 들자니 나라는 이미 기울어져 소용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완풍대군은 아래의 시(詩)를 써 놓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디메뇨 지하에서 태백, 중옹을 만나 놀고 싶구나 같은 처지에서 처신함이 다르다 말하지 마라 형만으로 가는 바다에 뗏목 띄울일 없으리라 #형만은 중국 초나라 시절 태백, 중옹이 살았던 곳"]

 

2. 무작성 상경하여 대원군을 만나다.

 

이준의 어릴 때 이름은 성재(性在)이다. 이준의 나이 세 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할아버지에게서 자랐다. 허나 6살 때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이준의 아버지는 큰 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이준을 돌봐주던 할아버지는 큰 할아버지였다. 이 분이 사망하자 이준은 원래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준의 고향 북청에서 러시아인들의 무례한 요구들을 가까이서 접하고, 외세의 침입에 관한 얘기들을 들으며 성장하였다.

 

이준열사의 나이 12살 때 북청향시에 응하여 합격했으나 나이가 워낙 어려 합격하고도 급제하지는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준은 시험지를 들고 나와 북청 남문루에 올라 오가는 사람들에게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이 사실이 북청 마을에 널리 퍼지게 되자 주만복이라는 사람이 이준의 할아버지에게 자기 딸과 이준을 혼인시킬 것을 제안하여 이준은 12살의 나이에 장가를 들게 되었다. 주만복은 이준에게 각별한 사랑을 쏟아 이준은 전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학문에 매진 할 수 있었다.

 

세상에 눈을 뜨면서 이준은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17세 때 집에 편지를 써놓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이준은 고향사람들인 북청물장수들의 거처에서 물장수들이 전해주는 소식들을 들으며 얹혀 지냈다. 당시 나라의 사정은 운양호가 부산항에 들어와 포격을 하는 등 공포심을 조성하던 때였다. 조정내부 갈등이 일어나고 나라의 좌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던 시국상황에서 이준은 대원군이 의정부에서 서울의 경운궁 거처로 왔다는 소식에 접한다.

 

이준은 무작정 대원군을 만나기 위해 경운궁으로 갔다. 대원군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면서 이준을 맞이했다. 이준은 여기서 대원군과 시국을 논하고 나라의 앞날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대화를 나눴다. 인사 청탁이나 문안 인사 정도로 생각하던 대원군은 이준의 영민함에 놀라게 되고, 당대에 강직하기로 소문나 고종황제가 아끼던 형조판서 김병시 대감에게 가 볼 것을 권유한다.

 

3. 인생의 은인 김병시의 문객이 되다

 

대원군으로부터 이준의 됨됨이를 이미 듣고 있던 김병시 대감은 이준에게 자기 집에 머물면서 공부도 하고, 일도 거들 것을 권한다. 이로서 이준은 김병시 대감의 비서 겸 문객이 된다. 당시 시국상황은 척화파와 개화파의 갈등 속에서 일본의 무력시위가 더욱 강해지는 때였다.

 

어렸을 때 외세를 걱정하던 이준의 생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한 후 개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항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준은 역시 같은 생각을 지닌 최익현 대감을 존경하여 찾아가 인사를 했고, 최익현이 유배를 당할 때 숭례문까지 배웅을 하기도 한다.

 

김병시 대감은 이준을 총애하였고, 어디든지 데리고 다녀 주위 사람들은 이준을 부대신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김병시대감은 이준의 과격한 성격을 우려하면서 성격을 다스리라는 충고도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준을 찾아온 고향친구에게 김병시 대감의 아들 김용규 소유의 담뱃대로 담배 대접을 하던 중 때마침 들어온 김용규가 이를 목격하고, 상민에게 담뱃대를 물렸다하여 이준을 책망한다. 이준은 김병시 대감의 아들에게 “그 따위 양반의 자존심을 버려라. 사람 있고 물건 있지 양반물건이라고 사람위에 있단 말이냐”면서 김용규의 담뱃대를 분지르고, 보따리를 싸서 김병시 집을 떠난다.

 

김병시의 아들 김용규는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함흥감사 이돈하에게 이준을 체포하여 치욕감을 씻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돈하는 북청에 사람을 보내 이준을 잡아오도록 명령하였다. 먼저 온 사람이 이준에게 피하라고 귀 띰을 해 주자 이준은 이돈하를 찾아가 “담뱃대 하나로 벌을 준다면 이는 공법이 아니라 사법”이라 역설하였다. 이돈하는 이준의 말에 공감하여 오히려 이준을 후히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 김병시: 조선 후기 문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동학농민운동 때 청일 양군의 개입을 극력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농민운동 후 폐정 개혁을 적극 주장하여 교정청을 설치하게 하고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임하여 군국기무처독판에 취임하고, 중추원으로 개편됨에 따라 의장이 되었다.

 

1896년(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 중심의 내각이 조직되어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대당 보수파로서 개국(開國)을 반대하고, 1895년의 단발령에도 특진관(特進官)으로 있으면서 이를 반대하였다. 문집에 《용암집》이 있다.

 

4. 뒤늦게 출발한 인생행로

 

이준은 26세 때 함경도시(咸鏡道試)에 합격하였다. 이준의 나이 30세 때 고향 북청에 경학원(經學院)을 세웠다. 서원의 파벌과 악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이준이 김병시 대감을 찾아가 고종에게 별원을 만들 것을 주청하여 후에 북청농업공립학교가 되는 경학원을 설립한 것이다.

 

1889년 이준은 김병시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다. 한성주보가 신지식을 전파하고 있었고, 거리에 외국인도 많았으며, 영어와 서양문화까지 가르치는 육영공원이 설립되는 등 서울은 급변하고 있었다. 이준은 명문대가의 자손들인 이시영, 이회영, 이상설 등 연하의 청년들과 교우관계를 맺는다.

 

1893년 이준의 나이 35세 때 김병시 대감이 이준에게 결혼문제를 꺼냈다. 이준은 한사코 사양했으나 김병시 대감은 남자가 큰일을 하려면 부인의 내조가 필요하다면서 자신의 부인과 의자매로 한 집안처럼 가까이 지내는 집안의 규수를 중매하였다. 이 분이 바로 이화여고 출신의 이일정이다. 남편 이준과 17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던 이일정은 평생 면관과 유배, 감옥생활과 태형 등으로 고달픈 인생행로를 걷는 이준의 반려자이자 동지로서 집을 팔아 서울의 안국동에 안현부인 상점을 개점하여 청백한 이준의 경제활동을 도왔고, 이준이 감옥에 들어가면 가두집회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때 신문에 격문을 기고하는 등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기업인이자 여성운동가로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다.

 

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한국에 파병되는 등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일본이 민비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앞세워 정권을 세우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 혼란스러워지자 김병시 대감은 이준을 고향 부근의 순릉의 참봉으로 내려 보낸다. 순릉은 이성계의 조모 경비의 릉이다.

 

5. 미관말직에서 벗어나 구국의 길로 향하다

 

37세 때 이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에 입학한다.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법관양성소는 입학시험에 합격하거나 기존의 관직에 있던 사람들로 6개월간 수학케 하여 사법관의 자격을 부여한 최초의 사법기구였다. 당시 평균 나이가 30세였음을 감안할 때 이준의 나이는 많은 것이었다.

 

38세 때 우등생을 제치고 가장 먼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었으나 탐관오리 처리 문제로 고위층과 갈등을 빚다가 33일 만에 면관 당하게 된다. 이 후 이준은 미관말직에서는 뜻을 펼 수 없다는 판단아래 적극적인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유아 때 이름인 이성재에서 이선재(李璿在)로 바꿨던 그는 이준(李儁)으로 개명하고, 호를 일성(一醒)으로 사용하게 된다. 준(儁)은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이요 일성(一醒)은 세상을 한번 깨우친다는 뜻이다.

 

1895년 서재필과의 협성회 조직, 1896년 상동교회 청년회장직 피선, 같은 해 독립협회 평의장 직무수행 등 본격적인 행보를 거듭하던 이준은 반대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과 함께 친일내각과 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포살령을 내린 상태에서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압송도중 군중의 손에 구타당해 숨지고,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백성들에게 잡혀 맞아죽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이준은 법무대신 장박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면서 일본 망명을 권하고 장박, 유길준, 조희연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망명 도중 이준은 유길준과 박영효에게 법학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사를 밝혀 1896년 와세다 대학 법과에 입학하게 된다. 유학기간 중 이준은 일인들에게 글씨를 써주며 그 사례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1898년 9월 국내로부터 비보가 날아왔다. 이준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김병시 대감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준은 비록 망명객의 신세였고, 학업도중이었지만 즉간 귀국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고국을 떠난지 2년 6개월만에 돌아온 이준은 김병시 대감댁으로 직행하여 그의 영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6. 만민공동회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다

 

당시 국내정치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1년여 동안 머무는 동안 친러파의 횡포가 심해지고 외세에 이권을 내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독립협회는 이를 저지하고 민족자존을 지키고자 체제를 정비하고 대중운동을 통해 한러은행의 폐쇄와 고종황제로 하여금 개각을 단행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준은 민영환, 박정양 등 개혁파 관료들이 진출하자 민영환과 뜻을 함께 하고, 독립협회가 추진하는 관민공동회(관리와 백성의 공동토론회)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준은 독립협회의 윤치호 회장이 대회장을 맡고, 이상재 부회장의 사회를 맡고 진행하는 관민공동회의 총무장이 되어 대회를 주관하였다.

 

민초인 백성들이 구름같이 운집한 가운데 각부 대신들이 이 자리에서 협의한 내용을 고종황제에게 아뢸 것이라 약속하여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이준이 연설대에 올라 연설하였다. “대황제라 존칭하고 대한제국이라 환칭하여 천하만국에 향하여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오늘 궁중이 과연 어떠하며 부중(府中)이 과연 그 어떠한가. 인순(因循)과 고식(姑息)이 고리를 맞물고 있지 아니한가. 철도는 어디로, 광산은 어디로, 산림은 어디로 갔나. 뇌물이 성행하니 이것도 충량한 관료라 할 수 있을까. 국세와 민정은 누란에 있어도 자기 자신만 잘 살 궁리만하면 잘 살아질 것이냐?”고 연설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중추원 의장 한규설은 “관리와 백성들이 협의하는 것은 500년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의결한 6개 조목은 모두 법률안에 원래 정해진 사안들이다. 관리와 백성이 합심하여 범위를 넘지 말고 영원이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관리와 백성들이 합의한 헌의 6조는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에게 기대하지 아니하고 관민이 동심협력하여 전제왕권을 견고케 할 것. 2. 외국과 이권에 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재정은 탁지부에서 모두 관리하고 예산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황제가 정부에 그 뜻을 물어 임명할 것. 6. 장정을 실천할 것.

 

위의 정신에 따라 중추원에 의관 50명을 선출하는데 백성들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기뻐하였으나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으로 고종황제가 독립협회의 해산명령과 함께 이 모임에 참석한 대신들을 모두 면직시키고, 독립협회의 간부 17명을 구속시키게 된다. 독립협회 간부들이 구속되자 이준은 독립협회 회원들을 이끌고 경무청으로 달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 농성에 들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대중운동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

 

이준이 이끄는 군중은 독립협회 간부 석방, 공개재판, 헌의 6조 실행, 친러 수구파 관료 퇴진 등의 요구로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격려를 받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친러 수구파는 보부상을 동원하여 농성장을 습격하였고,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한다. 이에 성난 군중들이 역습에 들어감으로서 서울 장안은 혁명전야와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에 고종황제와 친러(親露) 수구파 정부는 이준이 이끄는 만민공동회의 요구사항인

 

o 황국협회 인물 8명 처벌,

o 보부상의 혁파,

o 개혁정부 수립 등을 모두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황국협회 간부는 구속되고, 독립협회 윤치호는 한성판윤에, 부회장 이상재는 의정부 총무국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독립협회는 의연금이 쇄도하고 지방조직도 갖춰지기 시작하였다. 고종황제가 중지시켰던 중추원의 개원을 허락하면서 중추원 의원의 3분의 1인 17명을 독립협회에서 추천할 수 있도록 하자 독립협회는 더 이상 정부와의 마찰을 원치 않고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나머지는 수구파들로 채워지게 됨으로서 의회의 성격은 사라지고 자문기관의 성격으로 역할이 축소되게 된다.

 

중추원이 개원되고 독립협회 출신 최영덕의 제안으로 의정부에 인재를 추천하기 위한 무기명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일본과 미국에 망명중인 박영효와 서재필도 추천되었다. 박영효가 다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고종황제와 수구파는 다시 독립협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구속되었던 황국협회 사람들을 방면하고, 독립협회에게는 해산명령을 내린 것이다. 힘을 얻은 황국협회는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이에 이준, 이상재, 이승만, 이동녕 등 10여명이 미국 대사관 등 주한 외교공관으로 대피했다. 황국협회 사람들은 독립협회 사무실의 기물과 문서 등을 마구 짓밟았다. 이에 대해 이준은 종로에 연설대를 만들어 남궁억, 윤효정 등과 함께 황국협회 타도와 정부탄핵 연설을 하였고, 이승만은 배재학당 동창생과 시민들로 황국협회를 습격하여 그곳을 지키던 장정과 유혈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고종황제는 독립협회를 해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것에 대해 각국의 반응을 타진하였던바 러시아와 주한 일본 공사 가토가 군대사용을 권했고, 다른 나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친러파가 많은 정부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일본은 앞으로 한국을 공략함에 있어 최대의 장애가 독립협회일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계산된 입장 표명이었다.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해산명령과 함께 군대와 보부상 그리고 친정부 시위대를 풀어 독립협회를 공격케 했고, 독립협회 출신을 모든 관직에서 내 쫒았다. 그리고 독립협회 지도부를 모두 구속시켰다.

 

# 윤치호: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을 결성한 후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 이상재: 한말의 정치가·사회운동가.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복역했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을 준비했다.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 조선일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 서재필: 한말의 독립운동가.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남궁 억: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 궁내부 별군직(別軍職),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 토목국장(土木局長) 등을 역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양양군수(襄陽郡守),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을 지내고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7. 개혁당 조직에 참여하다

 

당시 일본은, 변화와 수구를 놓고 갈등하는 중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개방을 유도한 세계 열강 속에 끼어있었다. 1902년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세계전략을 추진하였다. 한국 역시 변화와 수구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외세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자기 세력의 노선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극심한 내부 대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준은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운동에 뛰어들고,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등과 함께 개혁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명문대가 출신도 아니고, 경성 사람도 아니며, 일찌감치 출세한 사람도 아닌 이준은 10년 전후의 후배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조직에 참여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강직하고 의협심 있는 성격, 세상을 보는 선각자적 지식과 판단력, 후배들에게 헌신하는 동지애, 탁월한 연설능력 등 이준의 남다른 퍼스낼리티와 능력은 혼란한 시국상황 속에서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진가를 발휘하게 되고, 인생계급장인 나이 값이 추가되어 이준의 사회적 위치는 확고부동하게 상승되고 리더로서의 역량이 발휘되어 40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구국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면서 개혁당을 만드는 주역의 한 사람이 된 이준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같이 활동한 정순만, 이현석, 유종익 등과 함께 적십자사를 설립하였다.

 

러일전쟁을 백인종과 황인종의 싸움으로 인식하던 당시에 특히 친러 수구파에 의해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고, 종내는 러시아에 나라를 빼앗길 수 있다고 느낀 이준은 적십자사를 통해 러일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일본의 부상병 치료를 위해 적십자사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준의 행동은 중립노선을 견지하던 정부의 정책과 배치되었기 때문에 1904. 3. 23.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 이동휘: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때 공산당으로 전향, 이승만·안창호 등과 대립했다.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양기탁: 한말의 언론인·독립운동가. 1904년 영국인 E.T.베셀과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를 발간하였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8. 황지문권을 탈환하다

 

1904. 2. 23.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일본은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한을 일본인에게 주고, 그 경영을 일본정부의 방침에 따르도록 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추진하였다.

 

그 뒤 6월 달에는 일본공사의 외교공문을 통해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인 나까모리에게 특허해 줄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계약서 초안을 조선정부에 제출하고 승인을 강요하였다.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일체의 경영권과 거기서 얻게 되는 모든 권리를 50년간 나까모리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빗발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이상설은 나까모리의 황무지 개간 청구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다. 황성신문 등 언론도 논설과 기사를 통해 황무지 개간권과 관련해 일본의 행위를 규탄하였다. 시민들은 ‘보안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황무지 개간권 문제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것이므로 이것이 철회될 때까지 집회를 계속하겠음을 선언하였다.

 

이준과 정순만은 감옥에서 풀려나 몸을 추스린 다음 보안회에 가담하여 이준은 총무를, 정순만은 간사를 맡아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준은 일본공사가 일본헌병과 경찰을 보안회 사무소에 출동시켜 해산을 강요하면서 폭력을 사용하고, 신문을 검열하여 황무지 약탈에 반대하는 활동에 대한 보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황무지 불하 취소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4년 8월 송병준, 윤시병 등이 보안회에 대응하는 유신회(뒤에 일진회로 개칭)를 만들어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헌병대는 일진회를 도와 보안회장 이건석을 체포는 등 보안회를 와해시켜 나갔다. 이준은 이상설, 이상재, 이동휘 등과 보안회의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이어나가 결국 일본공사로부터 황지문권을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협동회를 앞장서 이끌던 이준 등이 일본헌병에 강제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지만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 정순만: 일제강점기 미국과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 이후 미국과 만주에서 동포들의 독립사상 고취와 항일 민족교육에 힘썼다. 1907년에는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해외밀사 파견을 돕기도 했다. 1896년 3월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에 참여하였고, 만민공동회 일로 투옥 당하기도 하였다. 이상설과 함께 서전서숙을 운영하고, 이승만, 박용만 등 재매 독립운동가와 함께 국제적 활동도 하는 등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다.

 

9. 공진회를 조직해 친일매국단체 일진회에 맞서다

 

이준은 보안회와 대한협동회를 통해 일제의 개척권 요구를 물리친 뒤 1904년 12월 5일 진명회를 도왔다. 진명회는 보부상들이 황국협회를 등에 업고 독립협회를 없애는데 협력한 점을 뉘우치고 친일단체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상민회(商民會)를 개칭한 것이다.

 

한편 송병준이 만든 일진회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진보회를 통합하여 전국적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진보회는 원래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 선생의 지령을 받아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조직한 단체로서 설립초기에는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고 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주창하다가 일제의 소탕령이 내리자 송병준이 이용구를 회유하여 일진회에 통합시킨 것이다.

 

이준은 한성감옥에서 알게 된 진명회의 나유석과 함께 진명회를 ‘공진회’라 개칭하고 전국규모의 조직 확대에 나서면서 회장직을 맡았다. 이준을 정점으로 조직체계를 갖춘 공진회는 아래 취지의 강령을 담아 고종황제에게 청원하였다.

 

o 황실의 권위는 전범(典範)으로 규정된 것만을 존중할 것.

o 정부 명령은 법률과 규칙으로 규정된 것만 복종할 일.

o 인민의 의무와 권리는 고유 규범 안에서만 자유롭게 할 것.

위와 같이 이준은 이미 100여 년 전에 법치와 준법을 주창한 것이다.

 

이준은 재산권의 피해를 받은 백성들을 상대로 법률구제사업을 실시하고, 궁궐에 드나들거나 관직에 있는 무당, 점쟁이들을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잡배로 규정하고 이들의 척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감언이설과 횡포가 심해지고, 당국에서 이들의 처리에 미온적이자 이준은 공진회원들로 하여금 이들을 잡아오도록 하여 공진회 사무실에서 자복케 한 후 평리원 검사 김정목에게 보내 엄히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일반인들이 스스로 경찰권을 행사해 현직 고관을 체포하여 평리원에 이송하고 검사를 소환해 질문한 경우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정부는 이준 등을 체포하여 재판 없이 이준과 윤효정에게는 종신징역, 나유석에게는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공진회는 재판 없이 선고한 평리원 재판장 민병한을 고소하였다. 이 때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권중현은 이준과 윤호정에게 ‘고위관리에게 추잡한 욕설을 한 사람은 먼 변방으로 보내 군역에 복무시킨다’는 형률(刑律)과 ‘충군하는 사람은 태형100대에 3,000리 귀양(유배)에 준한다는 법조문에 따라 마땅히 태형 100대와 종신 징역에 처해야 하지만 사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정상 참작한다’며 태형 100대에 징역 10년에 처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나유석에게는 태형 100대에 징역 15년에 처할 것을 고종황제에게 상주하였다.

 

고종황제는 세 등급을 감해 모두 귀양을 보내라는 조처를 내려 이준과 윤효정은 유배 3년, 나유석은 5년을 받고 황해도의 철도(鐵島)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 뒤 민영환, 이용익 등의 간청으로 고종황제의 조칙에 의해 이준 등은 특별 석방되었지만 공진회는 더 이상 주목할 만한 활동을 못하게 되었다.

 

10. 국민교육운동을 실행하다

 

1905년 3월 유배에서 풀려난 이준은 국민교육회 창립 멤버로서 이준과 공진회 활동을 함께 한 김정식을 따라 서울의 연동교회에 입교한 뒤 국민교육회에 참여하였다. 국민교육회는 이원긍, 홍재기, 김정식 등 연동교회 신자들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당시엔 정동교회에 의법회가, 상동교회에 상동청년회가, 연동교회에 국민교육회가 소속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국민교육회는 기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준은 기독교 정신에 국한하여 국민계몽을 내세우기 보다는 국민 대다수를 포용할 수 있는 교육문제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준의 국민교육회 참여는 정치를 철저하게 배제했던 교회 중심의 국민교육에 정치적 색깔을 가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1905년 7월 주영 대리공사 이한응의 자결을 애도하는 조문을 ‘국민교육회 회원일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1903년 주영 공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이한응은 제1차 한일협약과 제2차 영일동맹 후 한국의 위상이 추락되고 외국인으로부터 받는 모욕을 참을 수 없어 가족에게 유서를 보낸 후 자결한 것이다. 이준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획책을 막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였고, 여기에 국민교육이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1. 헌정연구회를 조직하다

 

이준은 1905년 5월 24일 윤효정, 심의승, 양한묵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창립하였다. 국민교육회를 통해서는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고, 헌정연구회를 통해서는 법치주의를 확립해 나가는 방책을 강구하자는 것이었다. 헌정연구회는 회장에 장기렴, 부회장에 이준, 평의원에 윤효정, 사무장에 심의성 등이 임원으로 선임되었고, 연동교회와 국민교육회 멤버들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진회 때 함께 활동하였던 보부상 출신들은 관련 분야의 지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헌정연구회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전횡을 막고, 친일세력 일진회 활동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준은 한국과 일본에서 근대 법학을 공부하고 서구의 정치학이나 국가학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헌정연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헌정연구회는 ‘헌정요의’를 통해 국가의 본의, 국가와 황실의 분별, 국가와 정부의 관계, 군주의 주권, 국민의 의무, 국민의 권리, 독립국의 자주민 등 근대 법치국가의 틀을 잡아가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12. 나라를 구하려고 몸부림치다

 

러일전쟁을 승리고 마감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한국 보호권을 인정받아 한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구체화시켜 나갔으며, 러시아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만주철도를 빼앗아 중국대륙 정복을 위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동북아 강국으로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때에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딸인 엘리스와 상원의원 뉴랜즈 부부, 해군대장 특레인 부부 등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이준과 민영환은 한미공수동맹을 제안하였다.

 

이준은 민영환과 포츠머스 조약 이후의 일본의 한국정책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 등을 봐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준은 일본에 가서 박영효, 양한묵, 이기, 나인영(나철) 등을 만나 일본의 정치상황을 전해 듣고, 망명시절에 사귄 일본인을 만나 일본이 강대국들로부터 한국을 보호국으로 두는데 양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급히 귀국한 이준은 민영환에게 위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러일전쟁 후 일본의 기세가 왕성해짐에 따라 친일단체 일진회는 각 단체에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서를 돌리는 등 매국행위에 앞장섰다. 민영환은 상해에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려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준은 급히 상해로 건너갔고, 민영환은 주불공사로 있는 그의 동생 민영찬에게 상해로 건너가 이준을 돕도록 하였다.

 

한편 프랑스에는 고종황제의 측근인 이용익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상해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산동성 연태항에 이르렀을 때 일본영사가 서울에 있는 일본공사에게 보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종황제는 모의가 탄로 날 것을 우려하여 이용익을 면직시켰고, 이용익은 방향을 바꿔 프랑스로 건너갔던 것이다.

 

또한 상해에는 고종황제가 루즈벨트에게 보낼 친서를 지닌 헐버트가 머물면서 엘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은 상해에 도착한 뒤 주불공사 민영찬과 헐버트를 만나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야욕을 서구 열강에 알려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 급한 일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이준이 작성한 문서를 헐버트가 번역하여 각국에 타전하였다.

 

그리고 이준은 기독교청년회와 국민교육회로 하여금 이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미국인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언론에 종사하였던 헐버트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들고 본국으로 들어가 백악관에 전하려 하였으나 외교문서는 국무성 소관이라는 이유로 접수를 거절당했다. 헐버트는 국무성으로 갔으나 국무성 관계자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문서가 접수된바 이미 일본의 협박과 강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였다.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영친왕의 귀국을 기념하여 촬영된 사진으로 이왕직 관리들과 중추원 인사 그리고 총독부 관료들과 일본 군인과 경찰 고위 관계자들이 참가하여 총 3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인물의 면면을 보여준다

 

13. 결국 나라를 빼앗기다

 

이준이 상해에서 세계 각국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발송하고 있을 무렵 뒤늦게 고종황제가 미국에 특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1905년 11월 9일 가쓰라 일본수상은 이토히로부미를 한국에 급파하여 외교권을 빼앗기 위한 조처를 밟아나갔다. 서울에 도착한 이토히로부미는 고종황제를 배알하고 일본왕의 친서를 전했던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

 

11월 15일에는 고종을 재차 배알해 ‘한일협약안’을 내밀었는데 조정의 반대에 부딪혔다. 11월 17일에는 일본공사가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고종황제가 머물고 있는 덕수궁 중명전으로 고종을 찾아가 어전회의를 열 것을 강요했다.

 

무장한 일본군 병력들이 중명전을 애워 싼 가운데 고종황제가 불참한 채 어전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불렀다.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는 회의를 주재해 나갔다. 이토는 이날 회의에 참석한 참정대신 한규철,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무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재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에게 한 사람 한 사람씩 조약체결에 찬반을 물었다.

 

이때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지만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 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도 이토의 강압에 못 견뎌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고 말았다. 박제순, 이재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은 이토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약의 일부분을 수정한 뒤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 조약문에 서명하였다. 이때 조약에 서명한 5명이 이른바 ‘을사오적’인 것이다.

 

이른바 을사조약은 이 같은 강압과 날조로 인해 이뤄졌으며, 이로써 한국은 일본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황성신문사 사장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발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문에 조인한 매국대신들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망국의 통한을 절규하였다. 유생들의 상소운동이 이어졌고, 전 참판 홍만식을 시작으로 수많은 우국지사들의 자결순국이 이어졌다.

 

14. 민영환이 자결하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 특진관 이근명 등과 함께 대궐로 가서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강력 청원하였다. 그리고 조병세는 황제의 재가와 참정대신의 인준이 없는 조약은 무효라면서 조약체결의 책임자인 박제순과 이에 서명한 이지용 등을 모두 처단하여 국법을 바로 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느낀 민영환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결을 결심하였고, 11월 30일 전동 이완식의 집에서 고종과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자결을 결행하였다. 민영환의 순국소식은 곧 전국 각지의 국민에게 전해졌으며 장안의 시민들이 삽시간에 민영환의 집에 몰려들어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이상설은 종로로 뛰어나와 시민들을 모아놓고 “민영환이 죽은 오늘이 바로 전 국민이 죽은 날이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민영환 한 사람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전 국민의 죽음 때문이다”라고 연설한 뒤 땅에 있는 돌에다 머리를 찧고 쓰러졌다. 이상설은 머리가 깨지고 유혈이 낭자한 채 기절하고 말았다. 군중들에 의해 들것으로 집에 실려 간 이상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민영환이 국민에게 남긴 유서>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하는 가운데 모두 전멸될 것이로다. 장차 경쟁에서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으리니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니, 영환은 죽어도 살아서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나니, 바라건데 우리 동포형제들은 천만번 더욱 분투하여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게하여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황천에 가서도 기꺼워 하리라. 저 어둡고 깊은 죽음의 늪에서도 기뻐 웃으리로다.- 대한매일신보 1905. 12. 1. -"]

 

민영환의 뒤를 이어 조병세도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한 뒤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그 뒤 전 참판 이명재, 학부주사 이상철, 이설, 전 참판 송병선, 진위대 상등병 김봉학 등의 자결항쟁이 잇따랐다. 나인영, 오기호 등은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고, 일제와의 무력항쟁을 통해 주권을 되찾으려는 의병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15. 상동교회 청년회장으로 활동하다

 

한편 민영환의 자결소식을 들은 이준은 나라를 잃은 슬픔과 믿고 의지하던 동지의 죽음에 통곡을 하며 서울에 돌아왔다. 을사조약 후 전국 교회에서는 구국기도회가 열렸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가 전국 감리교회 엡윗청년회 연합회를 소집하자 각 지역 엡윗회원들이 서울 상동교회로 모여들었다. 이준은 연동교회의 교인이었지만 1904년 투옥되었을 때 자주 면회를 오던 전덕기와 친밀한 관계로 준회원 자격을 얻어 상동청년회에 관여하게 되었다. 상동교회는 다른 교회 출신자에게도 준회원 자격을 부여하여 상동청년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민영환, 이상설, 이회영 등은 상동교회의 후원자로서 수시로 상동교회에 모여 구국의 뜻을 모아나갔다. 이준은 상동교회 엡윗회 대표로 참석했고, 김구, 이동녕, 조성환도 참여하는 등 상동교회는 구국운동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다. 다섯 명을 한 반으로 나눠 이에 연명하여 상소를 하자는 전덕기 목사의 제안에 따라 이준은 조약폐기에 대한 상소문과 <오적 격토문>을 직접 쓰고 최재학, 신상언, 이시영, 전석준 등 다섯 명이 연명으로 서명한 다음 대한문 앞에서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 무장한 일본군 헌병대가 몰려오자 이준은 가두연설로 맞서며,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주권을 죽음으로 지키는 일 뿐이다”라고 절규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일본헌병을 상대로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이준을 구속하고, 상동교회 주도 아래 펼쳐지는 항일운동의 싹을 자르기 위해 선교사와 교인들을 감시하다가 끝내 엡윗청년회를 해산시켰다.

 

16. 교육운동과 법치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다

 

(1) 국민교육회장을 맡다

 

상동교회 청년회가 해산 당한 후 이준은 국민교육회장으로 선출되어 국민계몽에 적극 나섰다. 처음 기독교인이 중심을 이루던 교육회는 유정수, 현채, 이갑, 민병두, 유근 등 비기독교 회원들도 급증하였다.

 

이준은 국민교육회가 모태인 보광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노동청년과 상공청년의 계몽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준은 교과서 편찬을 국민교육회 역점사업으로 추진하여 <신찬소물리학>, <대동역사학>, <초등소학>, <초등지리교과서>, <신찬소박물학> 등 국한문 혼용체로된 교과서를 간행하였다.

 

이준은 “교육은 국방”이라면서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남의 나라 청년보다 십 배의 정열을 내서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면서 <3천리에 3천개 학교 설립>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준의 애국행위엔 거침이 없었다. 정부관료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는가 하면 을사늑약에 반대해 자결한 <7충신> 추도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2) 한북흥학회를 발기하다

 

국민교육회장직을 수행하던 이준은 독립협회 이후 보안회, 국민교육회, 상동청년회 등에서 같이 활동한 함경도 단천 출신인 이동휘와 이용익의 아들 이종호 그리고 이용익과 관련을 맺던 오상규, 유진호 등과 뜻을 같이 하여 함경도 경약소를 사무소로 정하고 한북흥학회를 발기했다.

 

이 단체는 교육운동을 표방하는 비정치적 단체로 내세웠지만 실은 민권의 신장을 목표로 민지개발을 통한 실력의 양성과 단합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활동은 구국운동, 계몽강연, 토론운동, 청년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재정은 프랑스에 있던 이용익의 손자가 주로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교육구국운동으로 함경도에 다수의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구국을 위해 투쟁하는 국권회복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여기서 이준은 계몽강연, 토론활동을 통해 일반 민중을 계몽하고 민지를 개발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뒤 한북흥학회는 평안도, 황해도 중심의 서우학회와 통합해 서북흥학회로 개편하고, 이준은 이갑, 안창호, 이종호 등과 교육사업에 총력을 집중한다. 이준은 서북흥학회를 모태로 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인 오성학교와 광신중상업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3) 법안연구회장을 맡다

 

이준은 「법안연구회」회장에 취임하여 법안과 법 운영 등에 관해 연구하였다. 법안연구회는 이준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모여 법정과 법령의 안건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제대로 운영되게 하기위한 조직이다. 이준은 법안연구회 회장직을 맡아 법안의 연구 비평이나 장래에 응시할 법안을 깊이 있게 토의하여 짧은 기간에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법안연구회를 확대시켜 홍재기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여 헌법을 속히 실행하여 인권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당시 한국은 일본에 의해 독립이 위협받던 시기였고, 특히 일진회 등의 친일매국단체에 대응하여 국권유지의 방책을 모색하는 정치단체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였기에 합법적 투쟁단체로 헌정연구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회장에 장기렴, 부회장에 이준, 사무장에 심의성 등이 참여하였고, 평의원으로 윤효정, 홍재기, 이기, 이윤종, 양한묵, 윤병 등이 선출되었다. 연동교회의 국민교육회 멤버인 김정식, 이원긍, 서병철, 유진형, 서병길 등도 참여하였다.

 

17.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다

 

이준은 평리원 검사를 그만둔 후 대한자강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재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나라의 빚 때문에 국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국가채무를 보상운동이다. 일본이 한국에 부채량을 늘려 국가재정을 좌지우지 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전략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1907년 2월 중순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 등이 금연을 통해 국채를 갚아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김광제와 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채 1천3백만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금연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는 발기취지를 밝힌 뒤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고 직접 모금운동에 나섰다.

 

이것이 각 신문에 게재되자 각계의 호응이 불같이 일어나고 고종황제와 관료들도 동참의사를 피력했다. 특히 많은 부녀층이 참여하여 각종 패물을 보내오는 등 범국민적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준은 공개재판 사건이 일단락되자 부인 이일정 여사와 함께 국재보상운동에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이준은 관리들의 부인을 참여시키고, 전국적으로 강연활동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독려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조직이 없다보니 적지 않은 문제점이 야기되었다. 이에 김광제, 이면우, 박용규, 이종일, 서병규 등은 국채보상지원금종합소를 설치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1907년 4월 1일 국채보상전국연합운동의 임시회합을 가졌다. 이튿날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이준은 명칭을 국채보상연합회의소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순한글로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문제점을 해소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은 이준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면서 임원이 교체되기도 하였지만 꾸준히 전개되었다. 당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모임은 국채보상기성회이고, 주 활동언론사는 대한매일신보로 양기탁과 베델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통감부는 모금액을 두 사람이 마음대로 소비하였다면서 양기탁을 구속시켰고, 베델을 해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의 지도자를 불신케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양기탁은 그 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국채보상운동의 불길이 꺼진 후였다.

 

<<법조사 첫 페이지에 기록될 역사적 인물 평리원 검사 이준>>

 

1. 황제의 인척에게 징역10년刑을 구형하다

 

이준 검사는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임명된다. 그는 검사가 된 이후 조신들의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 임관 1개월 만에 면직된다. 이준 검사는 이후 독립협회 평의장 역할을 맡은 다음, 대한보안회를 조직해 일제의 황무지 불하 취소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6월 18일 의금부의 후신으로 대한제국의 최고 사법기관이 된 ‘평리원’ 소속 검사로 재임용 됐으며, 한 달 뒤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된다. 헤이그 특사로 떠나기 1년 전의 일이다. 평리원은 적십자회와 공진회 활동으로 이준을 기소하고 재판한 기관이다. 이준이 평리원 검사로서 직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정확하게 남아있다.

 

이준은 임관초기 다른 법관들은 손을 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권세가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사이의 산송을 엄정하고 공정하게 처리,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준이 검사로 임명된 특별법원은 황족인 예양도정 이재규의 형사피고사건을 재판하기 위하여 1906년 8월 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설치됐던 특별법원을 말한다.

 

정3품 벼슬에 오른 고종황제의 인척 이재규는 한홍석, 일본인 등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경기도 가평군 소재 전답의 문권과 증권을 위조하여 자기소유로 만들었고 황족의 지위를 이용하여 토지를 빼앗았다. 이에 1906년 5월 가평군에 사는 한병교가 이재규 등을 고소하였다.

 

평리원에서는 특별법원을 개정하여 법부협판 김규희, 구명조, 판사 이규식 등이 특별법원 판사를 맡고, 검사 이준과 이건호, 정석규 등이 특별검사를 맡게 되었다. 이때 이준은 이재규에게 10년 징역을 구형하였으나 이재규는 고종의 명에 의해 유배형으로 완화되었다. 이 준 열사의 부당구속 성토대회는 법조인의 보람이었다고 자랑하였다. 한국 제1호의 변호사 홍재기는 법조인의 길을 걸어오면서 가장 보람으로 여긴 일이 있다고 하였다

 

1906년 이 준(李 儁)열사가 부당 구속을 당하자, 당대의 지식인 11명과 함께 이준열사 부당 구속사건 성토대회를 개최한 일이었다. 이준열사는 당대에 백성들로부터 호법신(護法神)이라고까지 추앙받은 법치주의자였다. 한편 홍재기 변호사의 아들인 홍종민(洪鍾敏)변호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준열사의 「생사관(生死觀)」을 읽고는 인생관을 뚜렷이 세우고 삶을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하며, 참으로 정신이 번쩍 나는 글이 아닐 수 없었다고 극찬하였다.

 

2. 법무대신을 고소하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어 생을 마감하기 전, 이준은 굽힐 줄 모르는 지사형 법률가의 기질을 발휘하였다. 은사(사면)안의 작성을 둘러싸고 법부의 간부와 평리원 검사 이준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1906년 10월 황태자의 재혼가례를 맞이하여 고종황제가 은사령을 내렸다. 평리원 검사 이준은 평리원 소관 죄인 중에서 은사대상자의 명단을 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법부에서는 형사국장과 문서과장을 통해 법부에서 작성한 명단을 이준에게 참고하라며 전해 왔다. 이준은 은사대상자 명단작성은 검사의 고유권한임을 강조하면서 법부안의 수용을 거절하였다. 이준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정치범들을 은사대상자 명단의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법부는 이준이 작성한 명단을 그대로 올리지 않고 명단을 변경하여 고종황제에게 보고하였다.

 

1907년 2월 이준은 이에 반발하여 법부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하였다. 2월 20일 법부는 하관이 상관을 고소한 죄로 이준을 체포하여 심판하라는 통첩을 평리원에 보냈다. 이준의 체포사실이 알려지자 대한자강회, 서북학회, 국민교육회 등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이 평리원으로 몰려와 이준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준은 3일 만에 일시 보석의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이준은 석방 후 법부 문서과장 이종협, 평리원 수반검사 이건호를 피고로 평리원에 고소를 하였다.

 

이준이 제시한 고소사실은 다음과 같다.

 

<법부 문서과장 이종협은 그 직권이 단지 소송을 접수하는 것에 그치고 검사의 직권이 없는데도 범과를 논죄하라고 하며 통첩을 하여 월권을 범하였고, 또한 상관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임의로 통첩한 것이니 법을 왜곡하여 사사로이 평리원 검사에게 촉탁한 것이다. 이건호는 이러한 사문서를 받아 본부에 보고하지 않고 함부로 동료를 체포하였으니 응당 보고를 하지 않고 법을 왜곡하여 촉탁을 받은 것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준이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한 자들을 석방시키려고 하다가 체포되었다는 것은 외교상으로도 중대한 문제였다. 때문에 법부에서 통감부에 평리원의 경비를 강화하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평리원 검사 이준이라는 자가 가례에 관련한 특사인원 중에서 일한협약(日韓協約)에 반대한 범죄인의 특사를 아울러 시행할 것을 주장하고 그 의론이 법무대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분격하여 동 대신을 칙명위반이라고 참방(讒謗)하고 법무대신을 고소”한 것에 대하여 평리원은 이준을 체포하였다.

 

3월 2일 평리원은 이준을 재판정에 인치하고 고문경찰과 일본헌병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재판을 개정하였다. 이준은 재판에 앞서 공판정에서 기독교도로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고, “하관이 상관을 기소하는 법률이 있느냐?”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형법대전의 관련조항을 보여주며 항변하였다. 평리원은 이준에게 하관이 상관을 고소하고, 문서과장 이종협이 온 공문을 파괴한 것도 상사의 지시를 어겨 격례가 아니므로, 이준의 행위는 월권한 것이라고 하여 태형100대에 처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준은 이에 불복하여 판사가 법률에 어두움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 경찰에 의해 감옥에 구금되었다. 고종황제는 이준의 형을 태형70대로 감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태형100대면 당연 면관이지만 고종이 특명으로 면관을 막아준 것이다.

 

이준은 속을 바치고 석방된 3월 13일 다시 평리원 검사로 출근했다. 이준은 뜻을 굽히지 않고 3월 16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법부대신과 평리원 재판장 이하 관리와 법관들을 모두 면직하고 벌을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준은 청원서에서 “검사는 국가의 대표가 되어 형법상 독립의 권한을 가지며 공소제기의 권한”을 가진다는 언급에서 검찰제도에 대한 이준의 지식이 드러나고 있다. 법부형사국장 김낙헌은 이준과 같이 법관양성소를 제1회로 졸업한 자이다. 그는 이준과 달리 줄곧 법부와 평리원, 기타 관직을 오가며 고종을 측근에서 보좌하였던 인물이고 이원긍이나 이건호는 독립협회에서도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이 청원서에 이준은 법부대신 이하영, 형사국장 김낙헌, 평리원의 검사와 판사들을, 허위로 주본을 올린 죄, 고의로 사람의 죄를 더하고 뺀 죄, 법을 굽힌 죄와 그것을 촉탁한 죄, 월권의 죄로 규탄하였다. 법무대신 이하영은 이준이 고종황제의 감형으로 검사직을 유지하자, 통감부의 하세가와 사령관과 일본인 법무보좌관에게 사안을 설명하고, 분풀이라도 하듯이 재판에 관여한 평리원 판사들에게 상관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처결하였다는 이유로 견책처분을 내린다. 또한 법관의 체모를 손상하였다 하여 이준의 면관을 요청하는 주본을 고종에게 올려 결국 이준은 면관 되었다.

 

3. 검사 이준에 대한 평가

 

현직 검사가 법부와 평리원의 사법관리들을 기소하고 탄핵한 것은 근대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 사건 직후 고종황제는 이준이 비록 정치적 바람에 의해 면직되긴 했지만 그 기개를 높이 평가해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한다.

 

이준은 구한말 제1세대 법률가로서 서구열강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자강과 자주, 즉 문명국의 반열에 서는 독립적인 주권국가 건설 요체가 법치의 실현에 있음을 주장하고 실천한 행동가이다. 이준은 대한제국이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했던 1907년 평리원 검사로서 그의 신념을 여실히 펼쳐 보였다. 대관들의 비행을 규탄하고 제소하는 활동을 펴왔으며, 공진회 회장으로 있을 때 정부 고관들을 규탄하다가 처벌을 받은 예도 있었다.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검사의 직권과 법의 수호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법치의 확립을 통하여 자강과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실천하였기에 가능했다. 1년도 채 안 되는 평리원 검사 재직기간 이준은 법부와 평리원의 사법 관리들보다 더 법률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준은 법관양성소나 당시의 법 실무와 법 교육이 아니라 독립협회 이래의 자주 민권 자강운동이 길러낸 지사형 법률가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준은 우리의 근현대 법조사의 첫 페이지에 기록될 역사적 인물이다.(=부산대학교 법과대학 문용준 교수의 논문에서)

사단법인 일성 이준열사기념사업회 http://www.leeju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