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3품 통정대부 방규석(方圭錫) 화찬(画賛)
방규석(方圭錫)선생은 독립운동가 방한민(1900. 1. 6 ~ 1968. 2. 9)선생의 부친이다.
방규석(1862.5.8~1944.9.1)선생은 조선 철종 13년(1862)에 태어나 조선 고종 22년(1885년) 무과에 합격하여 정3품직인 해방영 간역청상 가자 통정대부(海防營 看役請賞 加資 通政大夫)를 지냈고, 1908년 민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도 15년간 논산 강경면과 성동면장으로 추대된 바 있다.
海防營(해방영) : 조선(朝鮮) 말엽(末葉) 경기(京畿), 황해(黃海), 충청(忠淸) 삼도의 수군(水軍)을 통할(統轄)하던 군영(軍營). 뒤에 통위영이라 고치어 불렀음.
해방아문(海防衙門) : 조선 말기에 경기·황해·충청도의 수군을 통할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으로 일명 해방영(海防營). 1883년(고종 20) 12월 5일 고종이 경기도 연해 지방 해방병포(海防兵砲)의 훈련을 통할시킬 목적으로 독판통상사무아문(督辦通商事務衙門) 민영목(閔泳穆)을 기연해방사무(畿沿海防事務)로 임명한 데서 비롯되어, 이듬해 1884년 1월 4일 부평부(富平府)에서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1886년 3월 다른 군영의 명칭 예에 따라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沿海防營)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군제(軍制)는 총융사영(摠戎使營)을 모방하여 시행되었으며, 최고책임자의 명칭은 총관기연사무(摠管畿沿事務)에서 기연해방사로 바뀌었다.
이 아문은 본래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군제 변통(軍制變通)과 함께 신설되었던 것으로, 1888년 4월 또 한 번의 군제 변통을 겪게 됨으로써 친군오영(親軍五營)의 우영(右營) 및 후영(後營)과 함께 하나로 합하여져 통위영(統衛營)으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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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규석은 당시 면민들의 신망을 받아 1921년 성동면장 재직시에 면민일동 이름으로 공렴비(청백리비)가 세워졌으며 80년이 지난 지금도 오랜 풍상을 이기며 굳굳하게 세워져 있다.
방규석은 총독부의 가시가 되어 1926년 1월 논산군수 후지이(藤井熊之助)에 의해 사직 권고를 받았다.
이에 당시 성동면민들은 면민대회를 열고 부당한 사직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며 방규석 면장 유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방한민은 1900년 1월 16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북정 77번지에서 아버지 방규석(方圭錫)과 어머니 조현정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방한민의 형 방한승(方漢昇)은 동아일보 창립 기자를 거쳐 매일신문, 경성일보 기자로, 동생 방한호(方漢昊)는 중외일보, 매일신보 기자로서 3형제가 모두 기자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경매시장에 방규석(方圭錫) 선생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산수 화찬(画賛)
조선 융희 4년 (1910년) ** 화찬(画賛) : 그림의 여백에 써 넣는 시문
방규석의 아들인 독립운동가 방한민은 성질이 온순하고 영특하였으며 다섯 살때 서당에서 수학하였고, 여섯 살때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과정을 마치고 보습과(補習科) 2년과정을졸업하였다.
또한 선생은 15세에 공주농학교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한 후, 수원권업모범농장(수원농림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잠업에 대해서 공부했다.
방한민은 19세에 김해김씨 현규의 여식 김한배(金漢培)와 결혼한 후 슬하에 독자 방준영(方駿榮)을 두고 1919년 잠업에 대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도쿄(東京) 서원(西原니시하라) 잠계전문학교(蠶系專門學校)로 유학을 떠났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1년 후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선생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전민족이 항거한 3ㆍ1운동을 겪으면서 항일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20년 방한민은 고향인 논산을 떠나 서울에 상경하였다. 이무렵은3ㆍ1운동 시기 우리민중의 격렬한저항에 놀란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표면적이나마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 우리민족 신문발간이 추진되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간 방한민은 창간준비를 하는 조선일보사에 엄격한 입사시험을 통과하여 입사하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3월5일에 창간하여 총16면으로 창간호를 내놓았는데 창간23일만인 1920년3월28일자 신문부터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압수당하기 시작하였다.
방한민은 조선일보의 사회부기자로서 최국현(崔國鉉), 홍 덕유(洪悳裕) 등 반일사상이 투철한 젊은 엘리트 기자들과 더불어 반일기사를 활동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고, 항일기자로 소문이 자자했던 아성 방한민은 그의 형 방한승(方漢昇, 동아일보 창립기자)의 도움으로 1921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자로 활약 할 수 있게 된다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항일투쟁활동을 위해 일본행을 결행했다.
선생은 1922년 4월 도쿄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경제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재일한인유학생을 모아 『문화신문』을 창간했다.
1922년 7월 니가타현(新瀉縣)에서 발생한 조선인 노동자 학살에 대한 진상보도와 한인유학생 항의데모를 주도했다. 선생은 이로 인해 요주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어 일본을 떠나야 했다.
선생은 1922년 12월 귀국했으나 이듬 해 1월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경에 잠시 머물던 선생은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대성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일제의 대성학교 폐쇄조치 이후 선생은 김정기(金正琪)ㆍ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고 사회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며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선생은 1923년 8월 개산툰과 용정을 연결하는 '천도경편 철도'개통기념식에 참석하는 조선총독을 처단하고 일본영사관 및 은행 등을 폭파하여 민중봉기를 도모할 준비를 진행 중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선생은 1928년 6월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가출옥했다.
선생은 가출옥 후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중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사회주의자 안상훈(安相勳)의 '열성자대회 사건', 즉 조선공산당 서울파 재조직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1929년 6월 또 다시 붙잡혔다.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언도받고 1937년 10월이 되어서야 출옥했다. 광복 이후 수원농대에서 잠사농업 강의를 하였으며, 1952년 우리나라의 공업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교포들과 국내 유지의 정성어린 성금 등으로 인하대학을 설립할 때 설립위원으로 참여하고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가족 관계
방한민은 충청남도 논산의 온양 방씨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방달주(方達周)의 자(字)는 성거(聖居)로 조선 후기 선약장군(종4품)과 용양위부사과(종2품)를 역임하였다.
그는 충남 논산 덕유정의 사백(射伯)을 지내기도 했고, 사계좌목 4권의 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방달주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방한민의 백부(伯父)인 방관석(方觀錫, 1859년 11월 6일생)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방규석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 태어나 조선 고종 22년(1885년) 무과에 합격하여 정3품직인 해방영 간역청상 가자 통정대부(海防營 看役 請賞 加資 通政大夫)를 지냈고, 1908년 민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도 15년간 논산 강경면과 성동면장으로 추대된 바 있다.
방규석은 당시 면민들의 신망을 받아 1921년 성동면장 재직시에 면민일동 이름으로 공렴비(청백리비)가 세워졌으며 80년이 지난 지금도 오랜 풍상을 이기며 굳굳하게 세워져 있다.
방규석은 총독부의 가시가 되어 1926년 1월 논산군수 후지이(藤井熊之助)에 의해 사직 권고를 받았다.
이에 당시 성동면민들은 면민대회를 열고 부당한 사직에 대해 격렬히 항의하며 방규석 면장 유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하였다.
방한민의 형 방한승(方漢昇)은 동아일보 창립 기자를 거쳐 매일신문, 경성일보 기자로, 동생 방한호(方漢昊)는 중외일보, 매일신보 기자로서 3형제가 모두 기자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할아버지 : 방달주(方達周, 1826년 12월 24일 ~ 1890년 8월 3일)
큰아버지 : 방관석(方觀錫)
아버지 : 방규석 (方圭錫, 1862년 5월 8일 ~ 1944년 9월 1일)
어머니 : 조현정
형 : 방한승 (方漢昇)
동생 : 방한호 (方漢昊)
본인 : 방한민 (方漢旻)
부인 : 김한배 (金漢培)
아들 : 방준영 (方駿榮)
손자 : 방병건
그의 손자인 방병건은 '독립유공 애국지사유족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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