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2권,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6월 8일(경오) 2번째기사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내구마 한 필과 의복 등을 내리다
*** 내구마(內廐馬) : 조선시대에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기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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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군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에게 서신을 보내고, 인하여 내구마(內廐馬) 한 필, 옷 한 벌과 갓·신을 내리었다. 그 서신에, *** 호군(護軍) : 조선시대 5위(五衛)의 정4품 무관
“비바람을 맞으며 들에서 지내니 심히 괴롭겠도다. 경(卿)은 늙은 어머니가 있어 멀리 진양(晉陽)에 살고 있는데,
임인년에 경이 변경(邊境)의 경비가 급하여 미처 어머니를 뵈옵지 못하고 명령을 받고 바로 떠났는데,
이미 진(鎭)에 가서는 인덕(仁德)으로써 군사를 어루만져 주고 위엄으로 적을 방어하여, 간사한 도적들이 전쟁을 그만두고 변방의 백성이 편안하게 되니,
나는 은연중에 경을 장성(長城)과 같이 의지하게 되었도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대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지극한 애정과 그대가 고향의 어머님을 사모하는 생각으로 벌써 5년이나 지났으니, 내가 어찌 잠깐 동안이나마 마음 속에 잊을 때가 있겠는가.
이에 장수를 보내어 경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자 하여 여러 조정 신하에게 물어 보았으나 실로 그 적임자가 드물도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전진(戰陣)에서 용맹이 없는 것은 효도(孝道)가 아니다. ’고 하였으니,
경이 변경(邊境)에서 마음을 다하는 것이 또한 어찌 큰 효도가 아니리오.
또한 내가 경의 뜻을 살펴서 특별히 구휼(救恤)을 더하니 경도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나를 위해 충성을 바쳐주기 바라노라.
지금 호군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경에게 잔치를 내리고, 인하여 의관과 마필을 내리노니, 이르거든 받아 주오.
무더운 여름에 식사에 조심하여 몸을 돌보오.” 하였다.
경복(敬復)이 변방을 진무(鎭撫)한 뒤로는 야인(野人)들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물러나 도망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면서 말하기를,
“이번 절제사라고 해서 어찌 이곳에 오래 있겠는가. 반드시 바뀔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그를 존중하여 그 임무에 오래 있게 하고, 그 어머니를 후하게 위로하여 특별한 상을 더 내려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29장 A면
【영인본】 3책 31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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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 32卷, 8年(1426 丙午 / 명 선덕(宣德) 1年) 6月 8日(庚午) 2번째기사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내구마 한 필과 의복 등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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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遣護軍洪師錫, 致書于咸吉道兵馬都節制使河敬復, 仍賜宮醞、內廐馬一匹、衣一襲、笠靴。 其書曰:
甚苦暴露。 卿有老母, 邈居晋陽, 歲在壬寅, 卿以邊警之急, 不遑覲省, 受命卽行。 旣赴鎭, 仁以撫卒, 威以禦敵, 姦寇載戢, 邊民以寧, 予之倚卿, 隱若長城, 然倚閭之望、陟屺之思, 已五年矣。 予何頃刻而忘于懷耶? 玆欲遣將, 代卿之任, 謀諸廷臣, 實難其人。 古人有言曰: “戰陣無勇, 非孝也,” 則卿之盡心塞上, 又豈非孝之大者乎? 且予體卿之意, 特加存恤, 卿宜自寬, 爲予効忠。 今遣護軍洪師錫, 賜卿宴, 仍賜衣冠、馬匹, 至可領也。 夏暑, 强食自愛。 自敬復鎭邊, 野人畏威退遁不敢近曰: “此節制使, 豈能久居此乎? 必有見代之日。” 上重之, 使久其任, 厚慰其母, 特加賞賜。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29장 A면
【영인본】 3책 31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정(軍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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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서신을 통한 인재활용법을 한마디로 정리히여 보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을 살펴 보아도, 당신(卿 :하경복)을 대신할만한 적임자가 없다. (主義募能 無以易卿 주의모능 무이역경)
조선시대에 임금님의 격려 편지와 하사품을 받고 충성을 다하지 않을 신하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하경복 (河敬復)
이칭별칭 : 시호 양정(襄靖) 유형 : 인물 시대 : 조선 출생 - 사망 : 1377년(우왕 3) ~ 1438년(세종 20) 성격 : 무신 성별 : 남 본관 : 진양(晉陽) / 진주(晉州) 대표관직(경력) : 경상도병마절도사
1377(우왕 3)∼1438(세종 20).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진양(晉陽, 진주(晉州).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지내고, 상호군이 되었다.
1410년 무과중시에 급제한 뒤 첨지총제(僉知摠制)가 되었으며, 길주도조전지병마사(吉州道助戰知兵馬使)를 거쳐 경원병마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첨지총제가 되었고, 다음해 경성등처병마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가 되어 국경을 수비하였다.
1414년 동지총제에 올랐고, 1423년(세종 5) 함길도도절제사를 거쳐 1427년 의정부참찬에 올랐다. 1430년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 함길도병마절제사를 겸임하였다.
1432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15년간이나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였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야인들을 진무하여 변경지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1433년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편찬할 때 총재로 참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계축진설(癸丑陣說)』이다. 이것을 진도(陣圖)와 함께 주인(鑄印)으로 간행하여 군사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1435년 찬성에 승진하였고, 곧이어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있다가 다시 경상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활을 잘 쏘았으며, 개국 초기에 국가의 무비(武備)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 국가의 기틀을 견고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용재총화(?齋叢話)』 『대동기문(大東奇聞)』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경현사 경남 하동군 옥종면. 경남문화재자료 제171호.
양정 하경복, 하경리, 양정의 아들인 강장공을 배향하고 있다. 정현사는 정조 10년(1784) 유림들이 세웠으며 이곳에는 하경복을 대신해 노모를 모신 하경리, 그를 이어 북방에서 여진족을 토벌한 그의 아들 강장공과 손자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경현사는 세종대왕때 북방개척의 영웅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한 양정공 하경복(襄靖公 河敬復,1377~1438), 그의 아우인 참의공 하경리(參議公 河敬履), 양정공의 아들인 강장공 하한(剛莊公 河漢)과 손자인 경절공 하숙보(敬節公 河淑溥)를 배향하고 있으며 진양 하씨 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경현사에 배향된 4명의 인물 중 대표격에 해당하는 양정공 하경복 장군은 하동군 출신, 조선 전기 태종부터 세종대에 활약한 무장으로 특히 세종대왕 치세에 북방개척 당시 함길도병마절제사로 부임하여 15년간이나 거친 북방에서 여진 즉 야인(野人)의 침입을 방비하였고 6진개척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하경복 장군이다.
하경복 장군의 후임으로 함길도병마절제사로 온 사람이 바로 북방의 대호(大虎)란 별칭으로 유명한 절재 김종서 장군으로 그는 7년간 함길도에서 복무하였다.
양정공 하경복 장군은 김종서 장군의 전임자이며 4군 개척과 파저강 전투의 영웅인 정렬공 최윤덕 장상(貞烈公 崔潤德 將相)과 비슷한 서열에 서는 사람이다.
김종서 장군의 6진개척도 하경복 장군이 경략해온 바탕 위에서 이룬 것임을 생각해 보면 그의 공적에 비해 그에 걸 맞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배향된 인물들, 참의공 하경리의 경우, 북방의 영토수호와 야인토벌에 오랜 기간을 진력한 하경복 장군을 대신하여 그의 본가를 중심으로 한 진주 주변의 9개 군현의 목민관을 역임하며 노모를 봉양한 효행으로 유명하고, 강장공 하한과 경절공 하숙보 또한 양정공의 뒤를 이어 무장으로서 뛰어난 용맹을 보이며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구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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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 연보 : 진양하씨(晉陽河氏)
1377년高麗 禑王 3, 1세 진주 서면 이하리수곡면 사곡리에서 탄생하다. 1402년 太宗 2, 25세 무과 초시에 급제하다. 1407년 太宗 7, 31세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9월 25일 세자가 정조하례正朝賀禮를 위해 명나라에 갈때 사복관司僕官으로 수행하다. 1410년 太宗 10, 34세 무과 중시에 합격하여 첨총제로 초수超授된 후 상호군에 오르다. 5월 21일 길주도 조전助戰지병마사로 떠날 때 궁시弓矢를 하사받다. 6월 1일 경원 병마사에 제수되다. 1411년 太宗 11, 35세 1월 12일 호용시위사 절제사에 제수되다. 3월 30일,“경원진을 파하니 병마사 하경복은 돌아오라”는 명을 받다. 1414년 太宗 14, 38세 동지총제로 승진하여 함길도 도절제사에 제수되다. 1418년 太宗 18, 42세 5월 9일 좌군동지총제로 승진하다. 6월 24일 의용위장군절제사義勇衛掌軍節制使로 제수되다. 8월 12일 삼군도진무에 제수되어, 8월 27일 우군총제로 승진하다. 1419년 世宗 1, 43세 7월 4일 밭 20결을 하사받다. 1421년 世宗 3, 45세 5월 4일 상왕과 왕이 종루에 거둥하여 관전하는 석전石戰에 참가하다. 「척석군擲石軍 150여명과 방패군防牌軍 300여명이 어울려 싸우는데, 방패군의 총제 하경복, 상호군 이징석 등이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패하였다. 경복이 돌에 맞아 다치자 상왕이 걱정하며 “경복의 무리가 크게 다 치지 않았는가?”하고 물으니, 경복이 억지로 일어나 누樓에 오르면서“크게 상하지는 않았습니다.”하였다.」 1422년 世宗 4, 46세 윤12월 26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제수되다. 이후 10년간 연임하다. 1423년 世宗 5, 47세 12월 11일 우군도총제로 승진하다. 1424년 世宗 6, 48세 9월 25일 전일前日에 여진 300여명이 경원부에 침입했을 때 장군이 기병을 이끌고 나가 물리친 후 노획한 전과를 상계하니 임금이 호군 강중경을 보내 내온內醞 210병과 말, 옷 등을 하사하였다. 11월 2일,「임금이 이르기를“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이 변방에서 근일에 승전한 공로가 있는데 그 어미가 멀리 진주에 있고 또 집이 가난하니 어미를 받들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떠하랴. 임금으로 신하를 부리는데 그들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하고는 곧이어 그 어미에게 능‧견綾絹 각 1필과 쌀 30석을 내리다.」 12월 19일 아우 지곤남군사知昆南郡事 경리(참의공)와 함께 임금에게 사은전謝恩箋을 올리다. 1425년 世宗 7, 49세 1월 11일,「호조와 이조에 명해“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의 가족이 서울에 있으니 다른 예에 의해 녹을 주라”하였다.」 7월 11일 함길도 도절제사의 임기가 두 차례나 만료되어 이조에서 직무를 대신할 자를 찾기가 어렵다고 논의한 후 성달생을 후임으로 의논하였다. 뒤에 성달생이 평안도 도절제사로 천거되니 장군은 다시 유임되다. 1426년 世宗 8, 50세 6월 8일 호군 홍사석이 어찰御札과 하사한 내구마內廐馬, 옷, 갓, 신 등을 함길도 도절제사 진중陣中으로 가져오다. 7월 18일 임금이 모부인에게 쌀 30석을 내린데 대해 아우 참의공이 사은전謝恩箋을 올리다. 1427년 世宗 9, 51세 3월 20일 경직京職 의정부 참찬을 겸하게 되어 자급資級이 높아지다. 12월 20일 “만약 북변이 안정되면 귀향하여 모친을 뵈는 것이 좋겠다”는 전지를 받다. 1428년 世宗10, 52세 1월 4일,「함길도 도절제사 의정부 참찬 하경복이 내현來現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1월 7일,「“참찬 경복이 어머니를 뵙기 위해 진주로 돌아가니 경상감사에게 전지하여 그 어머니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도록 하고 미두米豆 30석을 내려라”라고 명하였다.」 2월 3일,「임금이 예조에 전지를 내려“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이 본 도本道로 돌아가니 전별餞別하라”한 후, 또 지신사 정흠지, 대언 김자 등에게 명하여“내선內膳을 싸가지고 가서 그를 위로하라”하였다.」 1430년 世宗12, 54세 7월 3일 판좌군도총제부사로 승진하다. 8월 2일 판좌군도총제부사에 승진된 것을 사은謝恩하는 전戔을 올리다. 12월 30일 토표土豹를 잡은 공功으로 옷감 한 벌을 하사받다. 1431년 世宗 13, 55세 7월 17일,「“하경복을 다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고 새로 제수한 성달생의 길떠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1432년 世宗 14, 56세 3월 18일 내직으로 들어와 판중추원사(종1품)에 보직되다. 9월 5일 모부인의 나이가 75세이니 귀향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겠다고 상소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433년 世宗 15, 57세 7월 4일 진서陣書를 편찬하는데 총재로 참여하여 형판 정흠지, 대제학 정초,병조우참판 황보인 등과 함께『계축진설』을 편찬하여 바치다. 12월 12일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받고 참판 심도원과 함께 현지로 떠나다. 1434년 世宗 16, 58세 4월 3일,「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잔치를 열어 함길도 도체찰사의 노고를 위로 하였다.」 1435년 世宗 17, 59세 2월 1일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어 의금부 제조를 겸하다. 4월 18일,「임금이 무과 응시생들의 격구를 시험하고 사정전에 나아가 좌의정최윤덕, 찬성 하경복 등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함길도 도제사 김종서가 참예參預하고 대군大君과 여려 군君들이 시연侍宴하였다. 최윤덕의 군관 상호군 최숙손 등 18 인과, 하경복의 군관 사정이사창 등 6인을 함께 불러서 먹였다.」 9월 4일,「“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의 어머니가 병중病中이니 불러서 어머니를 뵙게 하고 함길도 도순검사로 떠나는 하경복으로 하여금 그 사무를 겸하여 처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9월 6일 함길도 도순검사都巡檢使로 길을 떠나니 야인을 방비하고 군기軍紀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1436년世宗 18, 60세 5월 9일 도순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함길도 지방의 괴질로 죽은 사람 의 수數를 실제보다 많이 상계하였다는 사유로 파면되다. 5월 24일,「사헌부에서“하경복을 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합니다.”하고 상소하였으나 임금은 고향으로 내려가 모친을 봉양하라는 명을 내렸다.」 12월 27일 경상우도 병마도절제사에 서용되다. 1437년 世宗 19, 61세 8월 6일,「임금이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는 내용에 전前 도절제사 都節制使 하경복이 전일前日 임금에게 헌의獻議한 것을 인용하였다.」 1438년 世宗 20, 62세 8월 17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지에서 별세하다. 9월 8일 임금이 제문祭文을 내리다. 10월 19일 임금의 특명으로 백석동 오향午向에 예장禮葬하다. 1456년 世祖, 2년 3월 8일,「직제학 양성지가,“무성묘武成廟를 세워 신라 김유신, 고구려 을지문 덕, 고려조 유금필, 강감찬, 양 규, 윤 관, 조 충, 김취려, 김경손, 박 서,김방경, 안 우, 김득배, 이방실, 최 영, 정 지, 그리고 본조本朝의 최윤덕과 하경복 을 배향하게 하소서.”라고 상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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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무신 하경복(1377∼1438)의 묘소. 경상남도기념물 제53호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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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이야기 - 세종의 인재활용]
과감한 인재등용… 조선의 황금기를 열다
세종 즉위 반대해 유배 중이던 황희, 능력 높이 평가해 다시 불러들여
기생 아들 관노 장영실·무장출신 최윤덕 정승 임명 등 적재적소 배치
국가 인재의 보고인 집현전 최대한 활용… ‘함께하는 정치’ 모범 보여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의 큰 줄기 속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주연과 조연으로 구분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큰 사건과 주연에 대해서는 모두들 잘 알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은 사건과 인물들은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역사책에 단 한 줄로 기록된 ‘결정적 하루’ 또는 ‘결정적 인물’을 찾아내는 일은 역사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길러준다.
이번 호는 탁월한 인재활용 리더십으로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한 세종에 관한 이야기다. <편집실>
[역사 속 이야기 - 세종의 인재활용] 과감한 인재등용… 조선의 황금기를 열다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세종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자인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백성들을 위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업 서적과 의학 서적의 간행,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자격루·측우기 등 각종 과학기구의 발명, 국경 개척과 궁중음악 완성 등 세종대의 찬란한 민족문화의 성과들은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다. 그런 세종의 모습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역량이 있는 국가의 인재를 폭넓게 활용한 점이다. 세종시대 하면 어느 시대보다 떠오르는 인물이 많다. 황희·김종서·최윤덕·박연·장영실·이순지·성삼문·박팽년 등 세종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인물은 세종의 인재활용 리더십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자신을 반대한 황희까지 포용하는 리더십
세종의 인재 등용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반대 세력까지 포용한 점이다. 세종시대, 아니 우리 역사상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황희(黃喜·1363~1452) 정승. 사실 그는 세종이 왕세자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대표 인물이었다. 1418년 태종이 장자인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할 때 황희는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장자 세습 원칙을 파기하면 후에도 그런 전례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황희는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의 길에 올랐지만, 1422년 세종은 황희를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비록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지만 반대 이유가 분명했고, 선왕인 태종을 잘 보좌하던 정치인 황희의 능력을 높이 샀다.
1423년 5월 예조판서에 임명된 황희는 대사헌,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쳐 1426년 5월에는 우의정, 1427년 1월에는 좌의정, 그리고 1431년 69세의 나이로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황희는 정승으로 재임할 때 몇 차례 뇌물 청탁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세종은 황희를 끝까지 지켜주었다. 과(過)보다는 공(功)이 크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세종이 황희를 선택한 것은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일 처리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황희를 신임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황희는 관후(寬厚)하고 침중(沈重)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으며, 풍후(豊厚)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세종은 황희가 70세가 되어 사직을 청하자 궤장(임금이 국가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내린 궤와 지팡이)을 하사하였으며, 황희가 연로하자 초하루와 보름에만 조회(朝會)하도록 명할 정도로 국가 원로를 최대한 배려하였다. 세종의 절대적인 신임이 역사상 손꼽히는 명재상 황희를 배출하는 근본 원인이 된 것이다. 세종대에는 황희 외에도 맹사성·유관·허조 같은 뛰어난 재상이 배출되었는데, 국가 원로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각 분야 전문가 등용해 ‘드림팀’을 꾸리다
세종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용하지 않았다. 국가가 필요하다면 자신의 정치 노선에 반대한 황희나 신분이 천한 장영실, 그리고 아직은 가능성만 보였던 성삼문, 박팽년을 등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황희와 같은 명재상, 북방 개척을 한 김종서와 최윤덕, 집현전의 성삼문과 신숙주, 음악가 박연, 천민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까지 세종시대에 배출된 인재의 면면들은 우리 역사에서도 가히 ‘드림팀’이라고 부를 만하다.
세종시대 과학자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 장영실(蔣英實)은 동래의 관노(官奴) 출신이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본래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요즈음으로 보면 아버지가 중국인인 다문화가정 출신으로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노비가 된 인물이다. 당시에도 기생의 아들을 등용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세종은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하며 장영실을 적극 변호해주었다. 이어 자격루를 만든 장영실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며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주었다.
“(장영실은)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곁에서 나를 가까이 모시었다. 이제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는데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원나라에도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장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과 자질로 인물을 평가한 세종의 눈이 장영실이라는 천재 과학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음악가로 평가받는 박연(朴堧·1378~1458)은 세종이 그의 음악적 자질을 알아본 경우였다. 세종은 음악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으면서 당시 음악이 고려의 전통 음악인 향악(鄕樂)과 중국 주나라에서 비롯된 제례 음악인 아악(雅樂), 당·송 시대의 중국 음악인 당악(唐樂)이 뒤섞여 있는 것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이때 세종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박연이었다. 박연은 충북 영동 출신으로 4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궁중음악 정비라는 세종의 특명을 받고 악학 별좌(別坐)에 임명되자 음악의 정비와 악기 제작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표준음을 마련하고 경기도 남양에서 채취한 경석을 이용하여 편경(編磬)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북방 개척의 주역으로 활약한 최윤덕(崔潤德·1376~1445)과 김종서(金宗瑞·1383~1453) 역시 세종의 믿음으로 등용된 인물이다. 최윤덕은 음직으로 벼슬에 진출하여 무과에 급제하였다. 태조 때부터 활약한 전형적인 무장으로 쓰시마섬 정벌에 공을 세웠는데, 세종은 최윤덕의 이러한 경험을 여진족 정벌에 적극 활용했다. 1433년 최윤덕이 여진족 정벌을 성공하고 돌아오자 세종은 그를 우의정, 좌의정에 연이어 임명하였다. 최윤덕은 세종시대 유일한 무장 출신 재상이었다.
김종서는 문과 출신으로 젊은 시절 언관과 승지를 맡으면서 강직하고 똑 부러진 일처리 능력을 보여 세종의 눈에 들었다. 세종은 북방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김종서를 북방으로 보냈다. 세종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보좌하던 김종서의 추진력과 지휘 능력을 알아본 것이었고 김종서는 세종의 명에 당시에도 힘든 오지 근무를 기꺼이 수용하였다. 이후 김종서는 세종의 북방 개척 최일선에서 활약하면서 6진 개척의 최고 주역이 되었다. 김종서가 중심이 되어 개척한 육진(六鎭)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여섯 진을 말하며, 세종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싱크탱크 집현전의 설치와 인재 활용
분야마다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성과를 얻어내는 세종의 인재등용 리더십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기관이 집현전(集賢殿)이었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그리고 집현전에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를 모았다. 신숙주·성삼문·정인지·최항 등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에 설치되어 1456년(세조 2)에 없어질 때까지 약 37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집현전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이곳에서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학문과 문화적 업적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에는 세종대에서 단종대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거쳐갔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국조방목》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학자 전원이 문과 급제자 출신임이 나타난다. 그것도 수석인 장원 급제자가 정인지를 비롯하여 16명, 2등이 6명, 3등이 신숙주 등 11명, 4등이 7명 등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5등 안에 합격해 명실상부한 최고 인재들이 발탁되었던 것이다. 이 우수한 인재들에게 세종이 부여한 임무는 독서와 학문연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국가 주요 간행물의 편찬 사업이었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로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집현전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세종 스스로도 학문이 뛰어난 군주였지만 홀로 정책을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한 것에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한 세종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는 주로 고제(古制)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의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였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전개되었다. 집현전 소속 학자들은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받았다. 세종이 이들을 국가의 기둥으로 키워나간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수백 종의 연구보고서와 50여 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역사·의례·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이 편찬되어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 학자들은 옛날의 제도와 현재 상황을 참작하여 정책 과제들을 해결하고 이를 세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러한 연구와 편찬사업은 세종 당대에 완성된 것도 많았지만 《고려사》의 완성은 세종대에 시작하여 문종대에 완성되었다. 그만큼 긴 안목을 가지고 과제를 부여하고 이를 완성한 점도 주목된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의 정책 결정을 하지 않고 다수 인재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의 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쟁쟁한 인적자원은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이라는 국가 인재의 보고(寶庫)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도 세종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신병주 = 건국대 사학과 교수.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 KBS TV 프로그램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불멸의 이순신>의 자문을 맡았으며, 현재 <역사저널, 그날>의 패널로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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