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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

by 연송 김환수 2014. 10. 20.

[단독] 국보급 '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

YTN 원문 |입력 2014.10.19 17:29

  

[앵커]

 

조선시대 장수가 아니라 문신과 선비들이 쓰던 환도가 처음으로 발견됐습니다.

 

희귀성뿐 아니라 칼자루와 칼집에 새긴 문양의 아름다움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됩니다.

 

전설적인 초서 명필 글씨도 역시 처음 발굴됐습니다.

 

황보선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어른 팔 길이의 칼집에 구름이 흐르고 용이 꿈틀댑니다.

 

쇠로 된 칼자루에는 물고기가, 코등이에는 연꽃문양이 새겨졌습니다.

 

 

 

 

 

모두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아름답습니다.

 

칼날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무사가 쓰던 게 아니라 조선의 문신과 선비가 차고 다니던 호신용 환도입니다.

 

김천 성산이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보물이 이번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되면서 '조선 선비의 칼'이라는 존재가 처음 확인됐습니다.

 

희귀성과 예술성, 역사성까지 국보급 문화재로서 3박자를 모두 갖췄습니다.

 

 

 

 

 

 

 

 

 

 

 

[인터뷰:곽낙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선시대 사대부에서도 칼을 갖고 있는 사람들, 학문을 하면서 무예까지 겸비한 인물들이 꽤 있습니다."

 

초서 광초체의 전설로 불리는 고산 황기로의 증손자, 양계 이하가 쓴 제갈량 출사표 서첩도 나왔습니다.

 

황기로의 적통으로서 이하의 호방한 명필을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인터뷰:심영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3백여 자라는 방대한 자료라는 점에서도 서예사는 물론 한국 문화사에서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점의 귀중한 유물을 비롯해 모두 930점을 3개 가문이 기증하거나 기탁했습니다.

 

전문기관에 넘겨진 조선 중기부터 구한말의 다양한 유물을 통해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YTN 황보선

http://www.ytn.co.kr/_ln/0106_201410200452074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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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성산이씨 이하(李?) 후손가에서는 양계(陽溪) 이하(李?)가 동래부사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 초서 대자로 제갈량의 '전후출사표(前後出師表)'를 기록한 서첩

 

18세기 전반기인 현 종손의 9대조 이사언 이후 대대로 내려오던

호신용 환도

 

 

이사언 (李思彦)

본관(本貫) : 성산(星山)

 

이력(履歷)

사언(思彦) 27 正言(정언) 무과등과. 훈련원주부. 성품이 근엄하고 방정하며 지행이 조촐하여 辛未(1811)년 봄에 변방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10월 정사에서 12월에 청요의직으로 옮겨 논의되었으나 한달을 못 채우고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 淸要의 職 - 중요한 직의 높은 관직.

 

정언 (正言) :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에 있던 정6품직.

정원은 2명으로 모두 문관(文官)이었다. 왕에게 간쟁(諫諍)·논박(論駁)하는 일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있던 좌·우 정언을 1392년(태조 1) 7월 좌·우 습유로 복원했다가, 1401년(태종 1) 7월 다시 좌·우 정언으로 정해졌다. 〈경국대전〉에는 좌·우 정언이 아닌 정언으로만 실렸다. 사간원의 정언 이상 대사간(大司諫)까지의 관원을 모두 '대장'(臺長)이라고 일컬었다.

 

주부 (主簿) : 조선시대의 종6품 관직.

각 아문의 문서와 부적(符籍)을 주관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돈녕부·봉상시·군자감·사역원·훈련원 등 동반·서반의 30여 관아에 설치되었던 종6품직이다. 1392년 조선의 태조가 즉위하면서 반포한 신관제에 따라 그대로 두었던 종6품과 종8품 주부(注簿)·부사(副使) 등이 점차 바뀌어져 1466년(세조 12) 1월 관제개정 때 모두 종6품 주부로 정해졌다. 1746년(영조 22) 새로 한성부에 1명을 두었고, 돈녕부·군자감·관상감에는 1명씩 인원을 줄였으며, 장악원·훈련원 등에는 인원을 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인원의 증감과 함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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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李?)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아버지는 병자호란 이후 절의를 지켜 개령 삼봉에서 두문불출한 숭정처사 이상규(李相規)[1596~1645]이다.

 

[활동 사항]

이하(李?)지금의 김천시 개령면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문과에 급제하였다. 1660년(현종 1) 사헌부감찰에 오르자,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자의대비[인조의 비, 효종의 어머니]의 복상을 기년복[1년 동안 입는 상복]으로 정한 것이 부당하다며 송시열 등과 맞섰으나 실패하였다. 1663년(현종 4) 고향 개령에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독서를 일삼는 한편 『대동유현록(大東儒賢錄)』을 편찬하였다. 1675년(숙종 1) 사헌부장령으로 부르자, 다시 출사하여 서인의 대공설[9개월 동안 상복을 입음]을 반대하여 기년설을 관철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서 물러나야 하였다.

 

1676년(숙종 2) 동래부사에 제수되었으나, 1680년(숙종 6) 경신옥사에 연루되어 삼수로 귀양 가 7년을 지냈다. 그곳에서도 문을 잠그고 책을 벗 삼아 『소학(小學)』, 『예기(禮記)』, 『근사록(近思錄)』, 『이정전서(二程全書)』 등을 깊이 연구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1686년(숙종 12) 유배지가 흥양으로 옮겨져 공의 깊은 학문은 저술로 남겨지지 못하였다. 1688년(숙종 14) 4월 8일 귀양지에서 영면하였다. 이하는 덕림서원을 창건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웠다.

 

[학문과 저술]

이하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배웠다. 4세에 이미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번득인다’라고 한문 구절을 엮을 만큼 명민하여, 아버지가 그를 기린아로 기대하는 바가 컸다고 한다. 학문하는 태도가 진지하여 깊은 곳까지 파헤쳤으며, 경사에 널리 통하였을 뿐 아니라 예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동유현록』을 편찬하였고, 문집 4권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증산면 금라리 뒤에 있으며, 후손 정헌공 이원조가 비명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이하가 수령으로 다녀간 곳에는 청백리로 추앙되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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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로 (黃耆老, 1521-1567)

 

본관 덕산(德山). 자 태수(食戒). 호 고산(孤山)·매학정(梅鶴亭).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은 별좌(別坐)를 지냈다.

 

만년에 낙동강의 서쪽 보천산(寶泉山) 위에 정자를 짓고 고산정(孤山亭) 또는 매학정이라 이름을 지어 그곳에서 필묵(筆墨)과 독서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필법이 뛰어났고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 불렸으며 충주(忠州)의 승지 이번(李蕃)의 비문을 썼다. 저서에 《고산집(孤山集)》이 있다.

 

조선시대 16세기를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 이다. 황기로는 10대 전반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면서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세상 밖에 나서지 않고 조용하게 사는 선비로서 글쓰기와 책읽기로 평생을 일관해온 은둔자였다.

 

황기로의 호인 고산(孤山) 또한 송(宋)의 은둔 군자 임포(林逋)가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매화와 학과 함께 살았던 것을 흠모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황기로의 초서는 당(唐)의 회소(懷素, 725-785)와 장필(張弼, 1425-1487)의 서풍(書風)이 곁들여진 것이라 한다. 그의 글씨는 변화가 크고 과장되게 쓰는 흘림글씨 형식인 ′광초(狂草)′ 이다.

 

필획의 맥락이 실줄기처럼 끊어지지 않게 이어 쓰는 것을 ′연면초(連綿草)′라고 한다. 황기로는 이렇게 힘과 변화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격이 부족했던 광초 영역의 글씨에 격조를 불어넣었다. 황기로의 초서는 조선 중기 서예에서 개성적인 면모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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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씨 (星山李氏)

 

이능일(李能一)을 시조로 하고 이방(李芳)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성산 이씨(星山李氏)의 시조는 고려 개국 공신인 이능일(李能一)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성산현(星山縣)[지금의 성주군] 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이었는데 12년간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큰 공훈을 세웠다.

 

고려가 건국된 후 태조 왕건의 딸인 정순궁주(淨順宮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壁上佐命功臣)으로 벼슬은 정일품인 사공(司空)에 이르렀으며, 성산군(星山君)으로 봉해졌기에 이때부터 이능일을 시조로 하는 성산 이씨가 탄생되었다.

 

이능일(李能一)의 초명은 이능(李能)이었는데, 고려 태조가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뜻으로 통일을 상징하는 일(一)자를 내려 능일(能一)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능일은 성산 일대에서는 신격화된 인물로 오래 전부터 이곳 주민들은 성황사(城隍祠)를 세우고 이능일의 초상(肖像)을 모시며 국가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해 왔다고 한다.

 

조선 명종 때 성주목사로 부임한 김윤제(金允悌)는 이를 미신이라 하여 성황사를 철거하고 이능일의 초상을 불태우게 하였는데, 그 후 일대에 이름 모를 질병이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이능일의 초상을 다시 모시고 사죄하는 글로 제사를 드리니 전염병은 물러가고 안녕을 되찾았다고 한다.

 

성산 이씨로 처음 영천에 입향한 사람은 이능일의 17세(世)손인 이석보(李錫保)의 넷째 아들 이방(李芳)이다.

[입향 경위]

경학이 뛰어나 천거되어 참봉을 역임한 이방(李芳)이 영천으로 입향한 동기와 연대는 불분명하다. 다만 아들인 처야당(處野堂) 이언기(李彦沂)가 스스로 지은 처야당 기문의 내용을 살펴볼 때 처음 정착한 곳이 이수(二水)가 합쳐지고 비옥한 주남 평야가 펼쳐진 전촌(錢村)[지금의 도동 지역]으로 추측된다.

 

전촌은 이방의 부인 창녕 성씨의 친정이 있던 마을이다. 부인 의인(宜人) 창녕 성씨는 진사 성영준(成永俊)의 딸이며, 성영준 역시 처가가 있는 영천으로 처음 입향하였다. 성영준의 부인 용궁 전씨는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역임한 전영창(全永昌)의 딸로, 전영창 역시 처가가 있는 이곳 영천에 처음 입향하였다.

[현황]

입향 이후 인물을 향지(鄕誌) 『영양지(永陽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인물편 성산 이씨 조에는 입향조 이방(李芳), 영릉참봉(英陵參奉) 이언기(李彦沂),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직장(直長)을 역임한 이국빈(李國賓),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감무(監務)를 지낸 이군빈(李君賓), 장사랑 정읍훈도 이용빈(李用賓), 병자호란 때 호종의 공으로 호군(護軍)을 제수받은 이즐(李瀄), 사천현감(泗川縣監) 이심(李淰), 문과 급제 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이세익(李世益), 무과 급제 후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른 이유호(李孺虎), 비서승(秘書丞) 이희수(李熙守), 후릉참봉(厚陵參奉) 이희목(李熙穆), 효릉참봉(孝陵參奉) 이한기(李漢基)가 있다.

 

이들 성산 이씨는 주로 영남권에 세거지를 이루고 살고 있으며, 주된 세거지는 관향지인 경상북도 성주군 일대로 가천면 화죽리, 수륜면 신정리, 용암면 대봉리, 선남면 문방리, 월항면 대산리, 월항면 안포리, 선남면 오도리, 대가면 용흥리 등이다.이 가운데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는 행정 명칭보다 ‘한개마을’이라 불리며 성산 이씨의 전통마을로 이름이 높다.

 

이 외에도 경상북도 고령군에는 고령읍 본관리와 덕곡면 예리, 경상북도 의성군에는 단밀면 주선리와 서제리, 주남동 및 안계면 일원과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와 지례면 일원,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인곡리와 합천읍 외곡리,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명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등이 집성촌이다.

 

영천 입향조 후손들 중 외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곳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六通)마을로 임란 공신인 국헌공(菊軒公) 이국빈(李國賓)의 후손들이 이주해 터전을 잡고 살고 있다.

 

영천에는 남포공(南浦公) 이군빈(李君賓)의 후손들이 완산동에 세거하고 있으며, 지오공(芝塢公) 이용빈(李用賓)의 후손들은 고경면의 대의리[당시의 거곡]를 중심으로 용전리·창상리·상리리와 영천시 언하동 새미(泉味)마을 등에 약 1천여 호가 있다.

[관련 유적]

영천 지역에는 입향조 배위 묘소 및 처야당 이언기(李彦沂)와 배위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봉성재(鳳城齋)를 비롯하여 이언기의 처야당(處野堂), 이군빈(李君賓)의 남포정(南浦亭), 이한기(李漢基)의 침수정(枕漱亭), 이근기(李謹基)의 돈산정(遯山亭)이 있다.

 

또한 선대의 묘재인 성산재(聖山齋), 검산재(儉山齋), 추원재(追遠齋), 추모재(追慕齋), 유곡재(柳谷齋)가 있으며, 처야당 선생 유허비각(處野堂先生遺墟碑閣)과 후학을 양성하던 거곡서당(巨谷書堂)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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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이씨(星山李氏)와 시조가 다른 성주이씨 (星州 李氏)

 

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인물이다.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시조인 이순유(李純由)는 알평의 후손으로 신라 말엽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순왕조(敬順王朝ㆍ927~935년)에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장경의 손자 이승경(李承慶: 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특별한 공적을 세웠다.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으므로 농서이씨라고도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후손 중 이승경은 원나라로 진출하여 중국의 농서 이씨를 형성하였으며, 명나라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이 그의 후손이었다.

 

성주(星州)는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성주의 옛 지명으로, 본래 고대 육가야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인데 신라때 본피현이라 하다가 757년에 신안현으로 개칭하여 성산군에 속하였다. 그 후 벽진군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경산부로 개칭하였다가 경종 때 광평군이 되었으나, 그 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인조 때 성산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에 성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분파

밀직공파(密直公派) - 이백년 이숭인, 이숭문

참지공파(參知公派) - 이천년 이문빈, 이문점, 이유

시중공파(侍中公派) - 이만년 이사분, 이성, 이장, 이비, 이존지, 이존예,

이영모, 이군모, 이예

유수공파(留守公派) - 이억년 이거, 이준

문열공파(文烈公派) - 이조년 이향, 이용, 이환, 이민, 이익, 이은, 이검,

이해, 이제, 이발, 이직, 이수, 이이, 이갈, 이아

 

인물

이인복 - 주자학에 밝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가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인기 - 이백년의 아들, 고려 평양부윤

이인임 - 고려 말기의 무신, 정치인

이숭인 - 호는 도은으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과 더불어 고려 말기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이광적 - 대사헌 이언충의 증손, 조선 삼조에 걸쳐 60년 간이나 입사

              했던 명신으로 90세에 숭정대부에 올랐다.

이충건 - 영의정 이직의 현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이조정랑을 지냈고 호당(湖堂)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이종일 - 구한말에 제국신문사 사장을 지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

              으로 손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가 옥고를 치루었고,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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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 99  성산이씨(星山李氏)

 

시조 이능일은 성산 일대 통치하던 호족

정복규 승인 2013.09.03 16:34:21

 

이우당·이찬호·이효상·이태영·이문희 등

 

시조 이능일(李能一)은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는 신라 말엽 성산 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으로 12년 동안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다. 그 뒤 태조 왕건의 딸 정순궁주와 결혼, 부마가 된다. 후에 성산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星州)는 옛 이름이 ▲성산(星山) ▲벽진(碧珍) ▲광평(廣平) ▲경산(京山) ▲가리(加利) 등 무려 5개나 된다. 성주와 옛 이름 5개 등 모두 6개의 각각 다른 이씨의 본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성산이씨는 성주이씨, 경산이씨 등으로 불린 적이 많다.

 

광평이씨도 ‘성산.광평이씨’로 묶어 불리면서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뿌리가 전혀 다르다. 다만 똑같이 성주를 근거지로 해서 번성했기 때문에 한 집안으로 착각하는 예가 많았다.

 

이 같은 혼동을 없애기 위해 성산이씨 대종회측은 지난 1914년 문중회의에서 본관을 시조가 살던 신라 때의 당시 지명인 성산으로 못을 박았다.

 

성산이씨(星山李氏)는 고려 초기부터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당시 이견수(李堅守)는 이광(李匡)과 이직(李直)등 4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5부자가 모두 과거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후 정당문학과 종2품에 오른 이우당(李宇唐),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이여충(李汝忠), 금산 군사(郡事)를 지낸 이여신(李汝信), 안염부사(按廉副使)를 지낸 이여양(李汝良)등이 고려시대의 인물이다.

 

현대 인물은 청담(靑潭) 이찬호(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이효상(국회의장), 이호석(제헌의원), 이영식(사회사업가), 이기욱(경제학박사, 재무차관), 이태영(李泰永. 의학박사), 이태영(李泰榮, 문학박사, 대구대교수), 이헌재(연세대의대 교수), 이상홍(뉴코리아관광개발 대표이사), 이영환(대검 차장검사), 이문희(천주교 대주교), 이민석(해군준장), 이중호(부산산업대학장), 이상연(보훈처장), 이문호(경북대교수), 이병진(대구교대교수), 이수빈(동방생명사장), 이문조(영남대교수), 이진호(숭실대교수), 이중달(경희대교수), 이영기(경영학박사), 이태성(계명대교수), 이영찬(계명대교수), 이방석(건국대 법정대학장), 이규석(국민대학장), 이길영(숭실대교수), 이동호(공학박사), 이영범(대구대교수), 이동구(경북대교수), 이천수(계명대교수), 이주희(부산수산대 교수), 이종국(상명대교수), 이재현(미국 유세에렐대교수), 이우일(경북대교수), 이종덕(재미교수), 이상호(경기은행장), 이정호(국민은행감사), 이호정(재일실업인), 이향기(미국 가주대교수), 이일영(서울고법 부장판사), 이명식(대구대교수), 이창섭(충남대교수), 이동훈(육군준장), 이원영(주스웨덴공사), 이완(자유중국 육군중장), 이태호(농학박사), 이규영(변호사), 이원달(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우석(동아수출공사사장), 이명환(삼성정밀공업이사), 이종석(대산의원장), 이호재(검사), 이종주(재일 실업인), 이기창(코리아헤럴드 이사) 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본관 성산(星山)은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성주(星州)의 옛 지명이다. 주요파는 ▲인주공파 ▲금산공파 ▲정언공파 ▲봉익공파 ▲기국공파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58명이 있다. 문과 5명, 무과 15명, 사마시 36명, 음양과 2명이다.

 

집성촌은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경북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 경북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경북 성주군 대가면 용흥리, 경북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경북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경북 의성군 단밀면 주선리 등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75,210명이다. 서울 9,415명, 부산 9,268명, 대구 17,861명, 인천 1,647명, 광주 205명, 대전 993명, 울산 2,052명, 경기 6,751명, 강원 583명, 충북 804명, 충남 576명, 전북 529명, 전남 502명, 경북 12,482명, 경남 11,423명, 제주 119명이다. 대구, 경북, 경남 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