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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추사 김정희

완당 김정희 선생의 호는 343개, 503개

by 연송 김환수 2015. 9. 17.

완당 김정희 선생의 호는 503개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다양한 號(호)를 사용했다.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호는 100여개에서 200여개가 있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김정희의 명호(名號)만을 조사하고 연구해 그 숫자가 정확하게 343개라고 주장하는 책까지 나왔다.

 

오제봉(吳濟峯)이 조사, 수집한 ≪추사선생아호집 秋史先生雅號集≫에 의하면 무려 503개나 된다.

 

이렇듯 많은 김정희의 호에 대하여 오제봉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변화무쌍한 선생의 서체(書體)만큼 아호의 변화도 무진하게 표일하면서도 각 아호에서 풍기는 맛이 다양하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이나 정서·취향 따위를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이를테면 귀양살이의 서러움을 노구(老鷗)라 표현하였고, 물가 생활에서 해당(海堂)·금강(琴江), 노장의 사상 속에서는 선객(仙客), 공자를 생각하며 동국유생(東國儒生), 불타를 생각하며 불노(佛奴)·아미타(雅彌陀)·호경금강(護經金剛)·산제거사(羼提居士)·고경산방(古經山房) 등을 썼으며, 선정(禪定) 속에 노닐 때는 방외도인(方外道人)·무용도인(無用道人)·설우도인(雪牛道人) 등 생각나는 대로 구사하였다.

 

시정어린 시구가 바로 아호로 등장한 것도 있으니, 부용추수차린거(芙蓉秋水此隣居)·해당화하희아손(海棠花下戱兒孫)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국수를 먹다가 문득 최면노인(嘬麵老人), 취흥이 도도하면 취옹(醉翁)이라 한 것은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백반거사(白飯居士) 같은 우스꽝스런 것도 있으며, 정희추사(正喜秋史)라고 거꾸로 써서 장난스러운 것도 있고, 아념매화(我念梅花) 같은 정서적인 것도 있다.”

 

호의 글자수는 두 자인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한 자·석 자·넉 자로 된 경우도 있고, 이보다도 많은 글자수로 된 것도 있다. 김정희의 호에 ‘향각자다처로향각노인(香閣煮茶處鱸香閣老人)’의 10자의 것이 있다.

 

최준호씨는 김정희가 ‘추사’라는 호를 처음 사용했던 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추사 바로 전에 썼던 명호가 현란(玄蘭)이다. 즉, 김정희는 최소한 1808년(23세) 여름에서 1809년(24세) 중국 연경에 가기 얼마 전까지 현란을 사용하다가 추사로 바꾸었다.”(『추사, 명호처럼 살다』, 아미재, 2012. P87)

충남 예산 출신인 김정희 선생의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과파(果坡)·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말년인 1856년 봉은사에 머무를때 지은 노융(老融)이라는 아호가 있는데 이뜻은 불가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임종을 하게된 과천 관악산 아래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쓰던 아호는 과농(果農)이다. 과농이란 과천에 사는 농부라는 뜻이다.

 

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의 판전(板殿)’ 두 글자를 욕심 없는 필치(筆致)로 완성(完成)하였고, 그 옆에 낙관(落款)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 하였는데, “71살된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 라고 하였다.

'과(果)'자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당시의 별호인 '과로(果老). 과옹(果翁)'을 의미한다

 

청나라 사신을 따라갈때 옹방강이라는 실학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김정희는 옹방강 선생을 기리기 위해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옹방강의 호인 담계(覃溪)와 보소재(寶蘇齋)를 본따서 자신의 호를 보담재(寶覃齋)라 짓기도 하고, 완원의 완(阮)자를 따서 완당(阮堂)이라고 했다. 또 옹방강선생으로 부터 해동문호를 받기도 했고, 김정희는 불교에 심취하여 천축고 선생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번의 귀향후 에는 노과라는 호를 즐겼다고 한다.

 

대표적 아호인 '추사(秋史)'의 의미는 추기(秋氣)와 같이 말고 맑은 품격에 의리(義理)를 위해서는 집중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에 덧붙이자면 추사의 집안은 대대로 노론 이었지만 추사는 당론(黨論)보다는 원칙(原則)에 투철했던 분으로 추사라는 아호는 평소 추사의 인격에도 부합된다는 얘기 입니다

 

주요 호로는, 고계림인, 과도인, 광천, 구경, 노련, 농장인, 다문, 동이지인, 동해낭환, 동해필생, 백반거사, 보담재, 삼고당, 병완, 완당, 완수, 완암, 완파, 취옹, 추재, 해외문인, 행향자, 향남 등이 있으며, 한중일서명사전(韓中日署名事典) 문창호 편저(文昌鎬 編著)를 찾아 보시면, 이 외에도 200개 이상이 등록되어 있다.

 

호(號)와 자(字) 짓는 법

http://blog.daum.net/yescheers/8597670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명선(茗禪)이라는 호 (왼쪽 명선)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알려졌지만 위작 논란에 휩싸였던 茗禪’(명선·차의 경지와 선의 경지가 같다는 뜻·간송미술관 소장)은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이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고 지적한 바 있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70911/84885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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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200군데 이상 틀렸다

재야학자 박철상씨 신랄한 비판 저자 유홍준 교수 한문 해석 잘못 등 60여곳인정

 

박철상씨는 '완당평전'에서 '완당'이라는 호의 내력을 설명한 부분이 근거 없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또 진위가 불분명한 사실을 책에 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1년 전 명지대 유홍준 교수(미술사)가 조선 후기 대학자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를 집대성한 완당평전’(3·학고재 펴냄)을 펴내자 추사의 부활’ ‘마음 닦는 감동적인 책등 온갖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한 30대 재야학자로부터 완당평전은 태생적으로 과()가 공()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책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논쟁이 촉발된 것은 계간 학술지 문헌과 해석’ 2002년 겨울호였다. 박철상씨(36)는 기고문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전체적으로 200군데가 넘는 오류가 있다며 그 중 40군데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대표적인 오류로 지적된 부분이 널리 알려진 김정희 선생의 호 추사대신 완당을 제목으로 쓰게 된 경위. ‘완당선생전집이 있고 추사체가 있는 마당에 어느 쪽 호를 제목으로 쓰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유교수가 완당과 추사를 작품 시대를 구분하는 근거로 삼고 30대 이후부터 완당이라는 호가 널리 알려졌다고 설명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반증으로 실제 추사가 말년까지도 추사라는 호가 들어간 인장을 즐겨 사용했음을 들었다. 완당의 스승인 완원이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는 대목도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밖에 추사의 시구 중 하늘 아래엔 명사가 많다 하니(日下多名士)’에서 일하(日下)란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가리키는 말이며, 박제가가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설명에서 해()자를 계()자로, ()자를 금()으로 오독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유교수가 김경연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하면서 벽락문(碧落文)자법이 하늘에서 떨어진 듯하여로 해석했으나 글자의 법식이 벽락문과 비슷하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벽락문은 당나라 때 비문인 벽락비의 글자라고.

 

학자로서 무책임한 행위

 

이에 대해 완당평전을 펴낸 학고재측은 출간 초기부터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돼 이미 출판사 홈페이지에 정오표(正誤表)를 만들어 놓았고 새로 책을 찍을 때 모두 수정했다해석상의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닌 명백한 오류라면 앞으로 개정판에서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유교수도 정오표를 내며 단순 오자, 초서 해독의 오류, 한문 해석의 잘못, 관련인물 생몰년 등 명백하게 잘못된 곳이 60여 군데나 된다고 인정하고 저자로서의 무지와 불성실이 부끄럽지만 이런 오류는 가능한 한 빨리 바로잡고 기왕에 읽는 독자들에게 알려드리는 것이 그나마 잘못을 덜 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솔직히 털어놓은 바 있다.

 

그러나 박철상씨는 몇 개의 오자나 오역을 고치는 수준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유교수의 완당평전에서 드러난 수많은 오류는 실수로 볼 수 없다. 기존에 번역된 추사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거나 관련자료를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인용하고, 진위가 불분명한 작품까지 소개한 것은 학자로서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유교수는 한겨레신문에 공개한 답글에서 나는 미술사가이지 한문학자가 아니다라고 옹색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학계의 관심은 스타급 미술사학자의 저술 태도와 저술 내용을 아울러 비판한 고서연구가 박철상씨에게 쏠렸다. 일각에서 박씨의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 문헌과 해석’(편집인 안대회 영남대 교수) 팀의 공동작품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안교수는 전적으로 박씨의 연구이며, 글을 검토한 결과 근거 있는 비판이라고 판단해서 문헌과 해석에 게재했다고 설명했다.

 

박씨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전주 출신으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현재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서읽는 소리에 반해 고문 연구를 취미로 삼았다는 정도다. 2년 전 추사의 인장을 연구하며 인연을 맺은 안교수의 권유로 문헌과 해석팀에 합류했다고. 박씨처럼 만만찮은 강호의 고수들이 지금 강단 학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발행일 : 2003 01 30 (370 )

쪽수 : 68 ~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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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호는 343추사는 파란만장한 일생 대변하는 명호"

[CBS노컷] 입력 2012.11.13 14:21

 

신간 '추사, 명호처럼 살다'

 

 

[CBS문화부 한상미 기자] 명호 추사는 18091028(24)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가기 바로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중국 문인들을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준비한 명호인데 이를 통해 일종의 모색과 전환을 꾀한 셈이다.

추사는 단독으로 혹은 다른 명호나 단어들과 합쳐져 복합명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추사김정희, 추사정희, 추사거사김정희, 여수동곡인추사, 시생김정희추사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예를 갖추는 글 또는 내용이 공적인 글에 쓰였다. 한편 나이 들어서는 노사를 쓰기도 했다. 수많은 추사 명호 중 파란만장한 김정희의 일생을 대변하는 명호가 바로 추사이다. (본문내용 중)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명호(名號:어떤 사람이나 사물에게 주어지는 성명과 별호 등을 포함해 이르는 모든 칭호) 343개를 분석한 책이 나왔다.

 

저자 최준호 아산미술문화재단 대표는 책 '추사, 명호처럼 살다'(아미재 펴냄)에서 추사의 작품 속 명호 343개를 대명호, 한글 명호, 도형화된 문자부호 명호 등 13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저자는 1988'김정희 새 낙관 53개 햇빛'이라는 기사를 보고 "과연 추사의 명호는 몇개일까?"하는 생각이 들어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사의 명호와 말미구를 연구해 책으로 펴냈다고 밝혔다.

 

저자는 명호가 추사의 세상 소통 수단이었다고 설명한다. 명호뿐만 아니라 편지나 글 마지막에 있는 말미구에도 주목했는데 말미구는 자신, 또는 주변을 대변하는 독특한 언어 도구였다.

 

각 명호를 소개하면서 관련 작품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 다음 각 작품의 말미구 속 명호와 후미운 및 기타 운들의 구조, 의미, 용법, 이들과 관련된 내용 등을 분석하고 고찰했다.

mimi@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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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품 낙관 주인 금세 알수있죠”

2008-03-17 02:53:00 편집

 

韓中日 서예가-화가 6만명 署名사전 나와 옛 문인들은 작품의 내용이나 흥취에 따라 다양한 호를 새겨 낙관을 찍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사용한 호만 해도 200여 개에 이른다.

 

옛 서화, 문집, 간찰(편지)에 작가의 이름 없이 낙관만 덩그러니 찍혀 있거나 처음 보는 호만 있을 때 누구의 작품인지 궁금하다. 낙관은 작품의 진위를 가늠할 수 있는 변수이기도 하다. 이럴 때 활용할 수 있는 사전이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추사를 비롯해 명필가 석봉 한호(1543∼1605), 중국 진나라의 서예가 왕희지(307∼365), 일본 최초 수묵화가 셋슈(雪舟·1420∼1506) 등 한국 중국 일본의 문인이나 화가 등 명인(名人) 6만 명의 호, 자, 별칭 20만 개를 한데 모은 ‘한중일 서명사전’이다.

 

중국 연변대 예술대학 객원교수인 문창호(53) 씨가 수년간 사재를 털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추사가 보낸 간찰에 적힌 ‘노완(老阮)’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추사의 본명과 생몰연대, 출생지, 주요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파격적 화풍으로 유명한 청나라 화가 주탑(1624∼1703)은 팔대산인(八大山人)이라는 호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사전에는 인옥(人屋), 주중계(朱中桂) 등 25개의 별칭을 실었다. 2885쪽에 달하는 이 사전은 두 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방대하다.

 

이 사전에는 문 교수의 집념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이 사전을 보고 있으면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 흙을 퍼 날라 산을 옮겼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떠오른다.

 

문 씨는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한 ‘정통파’는 아니다. 통계학을 전공한 뒤 대기업을 다녔으며 고미술이 좋아 간찰과 서화 3000점을 수집하다가 ‘보는 눈’이 생겼고 감정 실력도 수준급이 됐다. “고미술품에 찍힌 낙관의 주인을 모르는 소장자가 많아 안타까웠어요.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 하지만 그 많은 호와 서명을 한데 모으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사전을 만들겠다고 하자 무모한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소리부터 들렸다. 하지만 문 씨는 “‘그렇다면 나라도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마침 2002년 명지대에 문화예술대학원 예술품감정학과가 생기자 문 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늦깎이로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사전 편찬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해 한국고미술감정협회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다.

 

문 교수는 사전 편찬 작업이 1∼2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홀로 고금의 문헌을 뒤지고 20만 개에 이르는 항목을 빠짐없이 정리하는 동안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두문불출했다. 사전 편찬에 들어간 비용만 해도 5억5000만 원. 시골의 땅 6000평을 팔고 서울의 37평짜리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도 모자라 사채도 썼다. 올해 3월 드디어 사전이 나왔다. 비용이 모자라 350부밖에 찍지 못했다.

 

 

 

한 권에 30만 원. 누가 이 사전을 살지도 막막하다. 그래도 문 씨는 뿌듯하다. 묵묵히 기다려 준 부인과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고맙기만 하다.

 

“우리 고미술품 감정의 발전을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장 작품이 누구 것인지 알아야 가치를 가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태어나서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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