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 이야기
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 추사 김정희 / 서울시 유형문화재84호
77㎝×181㎝ 크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소장(所藏)하고 있는이 작품(作品)은 봉은사(奉恩寺) 경판전(經板殿)을 위해 추사(秋史)가 세상(世上)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大字 懸板)으로, 고졸(古拙)한 가운데 무심(無心)의 경지(境地)를 보여주는 명작(名作)으로 칭송(稱頌)되고 있다. (*고졸(古拙) :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
추사(秋史)는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한 대자(大字)로 ‘판전(板殿)’ 두 글자를 욕심 없는 필치(筆致)로 완성(完成)하였고, 그 옆에 낙관(落款)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 하였는데, “71살된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 라고 하였다.
'과(果)'자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당시의 별호인 '과로(果老). 과옹(果翁)'을 의미한다.
추사체(秋史體)의 졸(拙)함이 극치(極致)에 달해 있어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하지만, 졸(拙)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天然)스럽게 살아 있어 불계공졸(不計工拙, 잘 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도 뛰어넘은 경지(境地)라고 한다.
졸(拙)의 의미는 서툴다, 곧 솜씨 없음을 뜻하는 글자다. 글자의 구조를 보면 ‘재주[才] 부림을 내보낸다[出]’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러니 기교를 부리지 않는 볼 품 없는 상태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라고 해석함이 좋다. 옹졸하다는 뜻으로 ‘졸렬(拙劣)’이나 ‘졸장부(拙丈夫)’ 같은 말에 쓰인다. 전(轉)하여 자신이나 자신에게 딸린 물건을 겸손히 이르는 경우에 쓰기도 한다. 승려가 스스로를 낮추어 ‘졸승(拙僧)’이라 칭한다든지, 자신의 글을 낮추어 ‘졸문(拙文)’ 혹은 ‘졸고(拙稿)’라고 이르는 것 등이 그런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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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의 板殿(판전) 편액은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 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1856년 10월 추사 김정희는 봉은사에 있었다.
당시 봉은사에는 남호 영기 스님이 화엄경, 정확하게는 화엄경수소연의본 80권을 직접 손으로 베껴 쓰고 이를 목판으로 찍어 인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추사는 이미 전부터 봉은사의 불경 인출작업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일찍이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또 한 승려 영기는 자칭 남호라는 자로서, 연전에 [아미타경]과 [무량경]을 판각하여 또한 이미 강상에 전달했던 자이니, 아마 생면은 아닐 듯합니다.
이 두 승려가 대원을 발하여 [화엄경]을 간행하려 하고 있으니, 그 뜻이 또한 가상합니다."
이 화엄경판이 마침내 완성되어 경판전을 짓고 보관하게 되니 그 현판 글씨를 완당에게 부탁한 것인데 그때가 1856년 9월 말이었다.
판전(板殿)은 불교 경전을 새겨 놓은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을 뜻하며 이 판전에는 화엄경판이 안치되어 있다.
板殿(판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말년작품으로, 왼쪽에 세로로 七十日果病中作(칠십일과병중작)이라 쓰여진 바와 같이 그가 71세 때 병중에 쓴 글씨로 유명하다. 이 글씨를 쓴 3일 후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져 온다.
추사는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한 대자로 <판전> 두 글자를 욕심 없는 필치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옆에 낙관 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이라고 했다.
즉 '71세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 라는 뜻으로 이 글씨가 결국 완당의 절필이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러운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완당평전 2권, 유홍준, 학고재
<판전(板殿)>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 서툰듯 기교를 부리지 않고 소박하고 겸손)함이 극치에 달했는데 이쯤 되면 불계공졸(不計工拙 : 잘되고 못됨을 따지지 않은 경지)을 뛰어 넘은 경지 아니면 극과 극이 만나는 것이다.
봉은사 <판전>의 현판 액틀에는 작은 글씨로 누군가가 써놓은 오래된 글씨가 하나 있는데 그 내용은 완당이 이 글씨를 쓰고 난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완당의 최후이다. 그날은 병진년 10월 10일이다.
완당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다른 이야기나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이 대작은 아무리 봐도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날 노인이 감당할 글씨가 아니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생의 마지막 기력을 <판전> 두 자를 쓰는데 다 바쳤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생의 마지막 창조적 열정을 판전 두글자에 모두 쏟아 승화시킨 추사선생의 마지막 불꽃인 셈이다. (* 승화(昇華) : 어떤 현상이 더 높은 상태로 발전하는 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자는 원춘, 호는 추사·완당 등 매우 많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18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823년 규장각 대교를 지냈고 1836년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그 뒤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세기 후반 북학의 중심인물인 박제가의 제자로서 일찍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서 북경에 들어가 그곳의 원로대학자 옹방강과 중년학자 완원을 만나 스승·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고, 1848년 석방되었으나 1851년 헌종의 묘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주창자로 지목되어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풀려났다. 그 뒤 만년에 과천 등에 머물면서 시문과 서화로 자적하였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지향하며 고증적 태도를 견지했던 학자이다. 또 그는 서화에 두루 뛰어났으며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발견·고증하는 등 금석학에도 뛰어났다.
저작으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이 전한다. 글씨는 예서(隸書)와 해서·행서를 많이 썼다. 예서는 전한(前漢) 시대의 고풍스런 예서를 바탕으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 추사 서예의 백미를 이루었고, 해서는 구양순(歐陽詢)을 위시한 당나라 해서풍에 옹방강의 서풍을 가미했으며, 행서는 붓을 틀고 꺾는 전절(轉折)이 강렬하고 붓에 먹을 많이 안 묻히고 쓴 갈필(渴筆)이 심한 특유의 개성을 이루었다.
김정희는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七十一果病中作 (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과노(果老)·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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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80호 / 김정희필 세한도 (金正喜筆 歲寒圖)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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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필 세한도(金正喜筆 歲寒圖)는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인 우선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조진조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석준의 글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추사는 제자처럼 아끼던 역관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고, 이상적은 청나라에 이를 가지고 가서 추사의 옛친구를 비롯한 명사들의 글을 그림에 이어 붙인 저지에 받은 것이다.
그 후 세한도는 이씨 문중에게서 떠난 후 130여년 동안 유전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 ~ 1948)[1]에게 들어갔다.
세한도는 일제 말에 후지쓰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의 노력과 재력에 힘입어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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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李尙迪)
김정희의 제자 ' 우선 이상적 (藕船 李尙迪) '은 그런 김정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을 구해다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추사 김정희를 따르는 제자가 3천명이라고 회자될 만큼 '추사'는 많은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들 중 사당수는 돈과 실력을 갖춘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을 비롯한 중인층(中人層)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이다. 이상적의 제자도 역관이었던 오경석(吳慶錫 .. 吳世昌이 그의 아들)이고, 오경석(吳慶錫) 역시 청나라의 고증학(고증학)을 연마한 바탕 위에 '추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계승 더욱 발전시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저술하였다.
오경석(吳慶錫)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었는데, 그의 불교 사상은 다시 절친한 친구이자 개화파(開化派) 지도자인 유대치(劉大致)에게 전해진다.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리우던 유대치(劉大致) 역시 중인(中人) 계급인 한의사이었으며, 오경석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대치(劉大致)는 개화파의 주역들인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英孝), 서광범(徐光範)에게 게화사상(開化思想)을 전해 주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연경(연경)에 갔던 '이상적'이 ' 경세문편(經世文編 .. 위 사진)'이라는 책을 구해다 제주도 유배 중이던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어렵게 구한 책을 권력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와 신분이 보장되었을텐데, '이상적'은 바다 멀리 유배되어 아무 힘도 없는 스승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 책을 받은 김정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뭉클한 감정에 눈물짓고 말았다.
유배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論語)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子罕)'편의 '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歲 寒 然 後 知 松 柏 之 後 凋 '라는 구절이었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는 의미이다.
공자(孔子)가 겨울이 되어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김정희 자신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추사'는 '이상적'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지만 바다 멀리 유배된 신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제자 '이상적'의 뒤를 봐줄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돈으로 보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 '추사'가 떠올린 것은 송(宋)나라 소동파(蘇東琶)가 그린'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이었다. 소동파(蘇東坡)가 혜주(惠州)로 유배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소동파'의 어린 아들이 부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먼 곳까지 찾아왔다. 어린 아들이 방문에 너무도 기뻤던 소동파는 아들을 위해 '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을 한 폭 그리고, 아들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언송도" 그림은 전해오지 않고, 소동파가 쓴 글씨만 남아 있었는데, 옹방강(翁方綱)이 소장하고 있었다. 연경(燕京)에 갔을 때 '옹방강'의 서재를 방문했던 '추사'는 그곳에서 소동파의 '언송도'에 쓴 글씨를 보았던 것이다.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아든 '추사'는 소동파를 생각하였다. 혜주(惠州)로 유배되었던 '소동파'의 상황과 제주도로 유배된 자신의 상황이 비슷하였다. 소동파를 위로하기 위하여 멀리 찾아온 어린 아들의 마음이나 멀리서 책을 어렵게 구해 자신에게 보내준 '이상적'의 의리나 비슷하였다. 소동파가 '언송도'를 그렸듯이, '추사'는 자신만의 '언송도'를 그리기로 했다.
세한도 글 내용
우선시상(藕船是賞) ... 우선(藕船)은 보아라. 작년에도 만하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보내 주었고, 올해에도 또 우경(藕莖)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리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구한 것이리니, 세상의 도도한 인심(人心)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찾는 것인데, 이들책을 구하려고 이와같이 마음과 힘을 들였거늘 이것들을 그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갖다 주다니...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권세나 이익때문에 사귄 사이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그러한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인데 어찌 그대는 그 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권세를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가 ?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 가장 추운 시절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아레 된다..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을 통하여 세한(歲寒)이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푸르르지만 특히 날이 추워진 이후의 푸르름을 칭송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겼기 전이나, 곤경에 처한 후에나 변함없이 잘 대해주거늘, 나의 곤경 이전에는 그대는 칭찬할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聖人)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
성인(聖人)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추운 시절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松柏)의 굳은 절조(節操)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세한(歲寒)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오호라 ! 한(漢)나라 시경(詩經)에 후덕하고 인심이 있을 떼, 급암과 정당시 같은 사람도 그들을 찾는 빈객들과 더불어 흥(興)하고 쇠(衰)하였으니, 하비의 적공이 방을 써붙인 것은 세상 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추사 김정희'보다 18세 년하(年下)의 중인(中人)이었다. 추사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고 일찍부터 계급의 장벽을 넘어, 재능 위주로 제자를 양성하였으니, 그 문하에서는 진보적(進步的) 양반 자제는 물론 중인(中人)과 서얼(庶孼) 출신의 영민한 자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적(李尙迪)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12번이나 중국에 드나들었는데, 스승이 닦아놓은 연분을 따라 중국의 저명한 문사(文士)들과 교류를 깊이 하였다. 그는 특히 시(詩)로 명성을 얻어 1847년에는 중국에서 시문집(詩文集)을 발간하기도 항ㅆ다. 이상적(李尙迪)은 스승의 세한도(歲寒圖)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歲寒圖) 한 폭(幅)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 아 !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世波)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서 스스로하지 않을래야 아니 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書冊)은 비유컨데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 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表具)를 해서 옛 지기(知己)들에게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이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俗世)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李尙迪)은 위 편지의 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譯官)이 되어 북경(北京)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정초에 청(淸)나라의 문인(文人) 16명과 같이 한 자리에서 스승이 보내준 세한도(歲寒圖)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 작품의 고고(高孤)한 품격에 위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 깊이 감격하여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李尙迪)은 이 글들을 모아 1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로 곧바로 제주도(濟州道)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었다.
1년이 지나, 세한도를 다시 대하게 된 추사(秋史)의 훼한 가슴에 저 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얼마만큼 큰 위안으로 다가섰는지는 보지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적(李尙迪)은 후에 스승 김정희(金正喜)의 부음(訃音)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知己平生存水墨 평생에 나를 알아준 것은 수묵화이었네 素心蘭又歲寒松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이상적(李尙迪)은 역관(譯官)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차례나 중국을 다녀왔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45년 전답(田畓)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스승인 '김정희'의 영향으로 시(詩) 외에도 골동, 서화, 금석(金石)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는 역관답게 언어에 대한 능숙한 기교가 돋보이며, 당대 여항문인(閭巷文人)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 역관사가(譯官四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여항(여항)이라는 말은 신분제 사회에서 공경대부가 아닌 측들이 생활세계르 범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여항인(閭巷人 ..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에 의해 '여항의 문학예술'이 형성되었고, 뒤이어 사회의 기저층에서 '민중문학'이 성장하였다.
장무상망 (長毋相忘)
붓으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義理)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창문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한 고목(古木)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을 매달고 그 집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소나무 하나, 그리고 잣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寒氣)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썰렁했다. '추사'는 또 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이상적(李尙迪)'의 의리(義理)를 칭찬하며 겨울에도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比喩)하는 내용이었다.
그림을 마친 '추사'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 우선시상 (藕船是賞) '이라고 썼다. 우선(藕船)은 이상적(李尙迪)의 호(號)이었다. ' 이상적(李尙迪)은 감상하게나...'라는 의미이다.그림을 마친 '추사'는 마지막으로 인장(印章)을 하나 찍었다. ' 장무상망 (長毋相忘) '이라는 인장이었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자 '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그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네. 그대 또한 나를 잊지 말게나. 고맙네. 우선(藕船).
이렇게 그려진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전해졌고, 이상적은 중국 연경(燕京)으로 사신(使臣)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가져갔다. '이상적'의 친구들은 이 그림을 보자마자 앞다투어 '이상적'의 의리 (義理)에 감동하고, 김정희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글을 지어주었다. '세한도'에 담겨있는 표면적인 의미는 이상적(李尙滴)의 의리에 감동한 '추사'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추사'를 감동시킨 그 의리(義理)와 절개(節介)는 조선 지식인의 피 속에 면면이 이어져온 조선인의 의리(義理)이자 절개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그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변환시켜 이 그림에 담아냈던 것이다.
세한도의 기구한 운명
이렇게 꾸며진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李尙迪)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에게 넘어갔고, 그뒤에는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閔泳徽)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이 일본인 '후지츠까 치까시 (藤塚隣)'에게 팔아 넘겼다. '후지츠까'는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철학 연구가로 청나라 경학(經學)이 그의 전공이었다.
청나라 금석학(金石學)을 연구하면서 그는 당시 조선에도 이 학문이 전파되어 박제가, 유득공,김정희 등 많은 학자들이 중국 학자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못 놀랐다. 그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서울로 왔다. 서울에 도착한 '후지츠까'는 인사동 고서점에서 실학자(實學者)들의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 새로운 많은 사실을 밝혀내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추사(秋史) 관계 책과 글씨, 편지는 닥치는대로 모았다.
그가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 청조문화의 동점(東漸)과 김정희'에서 후지츠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리하여 청나라 학문은 조선의 영특한 천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만나 집대성되었으니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는 김정희이다 ' 그러던 1944년 여름, '후지츠까'는 태평양 전쟁 말기 다른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살림살이를 싸들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서예가이자 당대의 서화수집가이었던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고 크게 걱정하다가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후지츠까'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는 미군(美軍)의 공습(空襲)이 한창인 때였고, 후지츠까는 노환(老患)으로 누워 있었다. 손재형(孫在馨)은 '후지츠까'를 만나 막무가내로 ' 세한도(歲寒圖)'를 넘겨달라고 졸랐으나, 후지츠까는 단호하게 거절할 뿐이었다. 손재형은 뜻을 버리지 않고 무려 두 달간 매일 찾아가 졸랐다. 손재형은 매일 아침 '후지츠까'를 찾아가 문안 인사만 올리고 되돌아 오곤 하였는데, 후지츠까는 조금도 세한도를 내줄 기미가 없었다. 손재형이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린 지 90일 되던 날 '후지츠까'는 손재형에개 말했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遺言)해서 자네 앞으로 보내줄테니 돌아가라. 그래도 손재형이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열흘 동안 더 문안을 드렸다. 이에 감복한 후지츠까는 그러던 12월 어느날, 후지츠까는 손재형(孫在馨)의 열정에 굴복하여 '세한도'를 건네주면서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잘만 보존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손재형(孫在馨)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하고 나서, 석 달쯤이 지난 1945년 3월 '후지츠까' 가족이 공습을 피해 소개해 있던 사이 그의 서재는 폭격을 당하였고, '세한도'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 남았다. 그후 손재형(孫在馨)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선거자금에 쪼들리게 되자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고, 결국 '세한도'는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후지츠까의 아들 ' 아끼나오'는 아버지의 논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고, 부친이 모아둔 나머지 추사(秋史) 자료 2천 점을 2007년 과천문화원(果川文化院)에 기증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는데, 그는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들 ' 아끼나오'는 추사 관련 자료를 모두 기증하면서 어떤 보상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추사 연구에 써달라고 200만 엔을 쾌척하였다.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 이계묵 선생 글 일부 발췌
http://cafe.daum.net/4702km/Brrf/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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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이광사의 친필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에 얽힌 추사 김정희 이야기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원교 이광사의 친필 편액
이광사(李匡師, 숙종 31년(1705) ~ 정조 1년(1777))는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의 시조이다.
원교 이광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현판은 추사 김정희(1786~1856년) 때문에 불태워져 사라질 뻔 했다.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놓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추사 김정희이다.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오랜 지기였던 초의를 만나기 위해 해남 대흥사를 들린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8년 3개월(1840~1848년) 유배를 살았다.
귀향 가는 처지였지만 대웅전에 이광사가 쓴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초의선사에게 “조선의 글씨를 망친 이가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결국 초의선사는 추사의 극성에 이광사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9년 뒤 추사는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려서 초의선사에게 예전에 잘못 보았다며 떼어놓은 이광사의 현판이 있으면 다시 달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 오랜 귀향 살이 동안 호기가 누그러진 것도 있겠지만 세상과 글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위> 유배 떠나기 전 대흥사에 남긴 추사 현판 글씨, 예서체에 한껏 멋을 부려 획이 기름지고 굵다.
<아래> 유배 후 예산 화암사에 남긴 추사글씨. 기름기를 제거하고 자신만의 글씨체를 완성했다.
대흥사에 있는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편액)은 추사가 귀향 갈 때 쓴 글이다.
가로획이 반복되는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 무(無)자를 간단한 무(无)자로 대체하고, 한 획 한 획 무게감 있게 쓴 글씨는 큰 칼을 차고 성 아래를 내려다보는 대장군의 위엄이 깃들어 있다.
한 자 한 자에 세상을 내려다보는 호기로운 기상이 배어 있다.
참고로 원교 이광사는 향토색이 짙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가로 동쪽나라의 진짜 글씨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국진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조선사회가 자성의 움직임,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 것을 찾자는 자주적 운동에서 탄생한 글씨체이다.
대흥사 침계루 편액 이광사 글씨로 물 흐르듯 유려하다.
백련사 만경루 편액 이광사 글씨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으로 쓴 글씨처럼 꿈틀댄다.
대흥사 해탈문 이광사 편액, 글씨가 미끈하면서 힘차다.
지리산 천은사 편액 이광사 편액, 불의 기운을 다스려야한다며 물 흐르듯 수체(水體)로 썼다.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와 친분이 두터웠던 옥동 이서에 의해 탄생되었고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 글씨체이다.
추사 이전 조선의 서체는 원교 이광사가 이룩한 개성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동국진체가 크게 유행을 한다.
그러나 추사는 중국 한나라 때의 비문글씨체야 말로 진짜 글씨라는 주장을 했는데, 추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원교의 글씨는 정말로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는 해괴한 글씨로 보였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별세하기 3일 전에 남겼다는 서울 봉은사의 ‘판전(板殿)’이라는 편액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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