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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추사 김정희

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박철상 지음)

by 연송 김환수 2015. 9. 18.

           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박철상 지음

 

   

학예일치의 경지, 조선 예술의 진수 <세한도>를 만나다!

세상 모두 등 돌릴 때 끝까지 신의를 지킨 우선 이상적

그 한 사람에게 바치는 추사 김정희의 연서戀書

 

<세한도>에 담긴 조선시대 학예일치 문인화의 정수를 추사 김정희의 일생과 함께 보여준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리기까지 역관 이상적과 나눈 변함없는 우정, 그리고 그림 속에 녹여낸 학문의 경지를 따라가며 깊이 있는 그림 독법을 제시했다.

 

추사 김정희와 우선 이상적의 가슴 시리는 우정

 

<세한도>가 오늘날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 안에 추사 김정희와 역관 이상적의 가슴 시린 우정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집안이 화를 당해 먼 제주도까지 유배됐을 때, 추사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내도, 절친했던 친구도 세상을 떠나고, 그토록 권세 있는 자들은 발길을 끊었다. 그런데 이때도 변함없이 추사에게 먼 곳에서 구해온 책을 가져다주며 우정을 더욱 굳건히 지킨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우선 이상적이다.

 

고문헌연구가가 ‘읽은’ <세한도>

 

지금까지도 <세한도>를 이야기한 책은 많았다. 주로 미술사학계에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조선시대 학예일치의 경지가 구현된 하나의 정신으로 봐야 한다. 그렇기에 고문헌연구가 박철상 선생이 쓴 <세한도>는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이 책은 박철상 선생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추사 김정희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2003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책 『완당평전』에서 200여 군데에 이르는 오류를 발견한 바 있는 박철상 선생은 『세한도』에서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새 자료를 공개하며 기존의 연구를 바로잡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더했다. 김정희가 편지 한 통 한 통을 보낸 날짜까지 치밀하게 고증했으며,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까지 어떻게 심문을 받았는지, 그날의 현장까지 모두 되살려냈다. 이런 고증이 바탕이 되어 기존의 연구 중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새로운 해석을 더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한도>의 내용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훌쩍 뛰어 넘는다.

 

<세한도>로 보는 조선 문인화 학예일치의 경지

 

지금까지 수많은 저술과 논문의 대상이었던 <세한도>는 당연히 미술사학도들이 다루어야 할 주제처럼 보였지만, 저자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나 형태에만 중점을 두지 않고 <세한도>가 지닌 문화사적 의미를 파헤치는데 중점을 뒀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문화로 본 것이다. 추사는 <세한도>에서 겹쳐 칠하는 묵법을 통해 쓸쓸한 정조를 구현했으며, 청대 화가들의 기법을 모두 펼쳐 보였다.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을 지닌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 염량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같음을 지키는 선비의 지조를 그려냈다. 추위가 매서운 새해,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는 우선 이상적처럼 변치 않는 친구가 있는가? 슬프구나, 비부!

 

이상적은 추사가 유배를 떠나기 전 이미 5차에 걸친 연행을 했었다. 그는 연행할 때마다 추사를 위해 청나라 학계의 최신 정보를 전해주었고, 진귀한 서적들을 구해다주었다. 평소에 교분이 있던 사람들도 바다 밖 멀리 유배된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우선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의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라는 구절이었다. 공자가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우선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선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지만 바다 멀리 유배객 신세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적의 뒤를 봐줄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돈을 줄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붓을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우선의 절개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창문 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한 고목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이 매달린 소나무 하나, 그리고 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썰렁했다. 집 안에는 누가 있을까. 추사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을 것이다.

 

저 앙상한 나무들마저 없다면 그 쓸쓸함을 저 집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싶다. 추사는 또 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자신의 심정을 우선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고맙네. 우선! _본문에서

 

태사공太史公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나 이권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세나 이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공자께서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아! 서한시대처럼 풍속이 순박한 시절에 살았던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권세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비下邳 사람 적공翟公이 문에 방문을 써서 붙인 일은 절박함의 극치라 할 것이다.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쓴다. _본문에서

 

급암이나 정당시 같은 어진 사람들도 세력이 있을 때에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열 배가 되었다가 세력이 약해지면 흩어졌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하비현下邳縣의 적공翟公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에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찾아오는 손님들이 문을 메울 지경이었지만, 벼슬을 잃게 되자 문밖에 새 그물을 칠 수 있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적었다.

 

적공이 다시 정위廷尉가 되자 빈객들이 찾아오려고 했다. 그러자 적공은 문에다 이렇게 써 붙였다. 한번 죽었다 한번 살아나봐야 사귀는 정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졌다 한번 부유해져봐야 사귀는 태도를 알게 된다는데, 나는 한번 귀해졌다 한번 천해졌더니 사귀는 정이 드러났다.” 급암과 정당시 또한 그랬다 할 것이다. 슬프구나!

 

적공의 글은 정치판의 염량세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봐야 상대방의 진심을 알게 되고, 한번 가난해졌다가 한번 부자가 되어봐야 상대방이 어떻게 처신하는지 알게 된다는데, 적공은 정위 벼슬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서 사귀는 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자신의 집 앞에 가득했었는지 그 진심을 알게 된 적공은 그런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 적공만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급암과 정당시 또한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추사 자신이라고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추사는 마지막 부분을 ‘비부悲夫!’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태사공이 「급정열전」의 마지막에 썼던 바로 그 문구였다. 태사공의 심정을 추사는 가장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추사에게 이상적은 정말 시류에 초연한 송백과 같은 인물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어디로들 갔단 말인가. 슬프구나. 비부悲夫! _본문에서

 

지은이 박철상

196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고, 한학자이신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우리 옛 전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조선시대 장서인藏書印에 대한 일련의 연구 성과를 발표함으로써 학계에 장서인의 중요성을 고취시켰고,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의 학문에 대해서는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 밖에도 옛 간찰, 금석문, 조선후기 장서문화, 연행, 여항인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김정희-학예일치의 경지> 특별전 자문위원 등을 담당하였으며, 그림과 책 연구자들의 모임 <포럼 그림과 책>의 공동대표이다. 논문으로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조선후기 목활자 ‘장혼자張混字’ 명칭의 재검토」「추사 김정희의 저작 현황 및 시문집 편간에 대하여」 등 20여 편이 있다. 역서로 『서림청화書林淸話』가 있고, 공저로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문화지형도』가 있다.

 

* 2010년 1월 8일 발행

* ISBN 978-89-546-0991-3 04900  ISBN 978-89-546-0990-6 04900 (세트)

* 140*190 | 252쪽 | 11,000원

* 담당편집 : 구민정 (031-955-2671, vie@munh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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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필 세한도 (金正喜筆 歲寒圖)

 

“세한도”가 귀하고 소중한 이유는 그림이 품고 있는 신의와 우정 때문일 것이다.

 

歲寒(세한) 이란 설 전후(前後) 추위라는 뜻으로, 몹시 추운 한 겨울의 추위를 일컫는 말이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를 살다 1848년 풀려나고도 3년만인 1851년에 다시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났다.

 

歲寒圖(세한도)는 오른쪽 위에 화제(畵題)를 보면 “추운 그림이네”로 시작하면서

 제자의 호인 '우선'을 거명하면서 藕船是賞 阮堂(우선시상 완당 : 우선 보시게 완당)'이라는 제호가 붙어 있는 것만큼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헌종 10년에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스승인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의 변함이 없음에 대한 고마움의 마음으로 그려준 그림이다.

 

제주도는 춥지 않은 곳인데도 세한도가 추운 이미지를 가지는 '歲寒'으로 그려졌기에 실제로는 추운 날씨보다 임금의 총애가 춥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세한도의 '歲寒'의 인용구로 흔히 언급되는 <논어>"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잦나무는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송백시관사시이부조자(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는 그 뜻 자체가 추사 자신에게도 그리고 스승을 대하는 제자에게도 변함없는 마음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동시에 유배가 끝날 때까지 임금에 대한 충성은 유배기간 이전과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다짐의 뜻을 담아 보낸 것이라고 해석된다.

 

세한지송백(歲寒之松柏)은 유배지의 '춥다'는 이미지로, 동시에 임금을 그리는 유배된 신하의 '절개' 이미지로, 겨울철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에서 비유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유배를 보낸 반대편(정적)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든지 임금에 대한 원망(불충)으로 해석을 하여 추가 탄핵을 시도 하였을 것이나 제주에 유배된 추사는 사실상 정치적인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했기에 더이상은 부담도 되고 실익도 없기에 문제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정적들이 세한도(歲寒圖)를 "임금의 총애가 춥다 또는 원망(불충)이다" 라고 해석을 하여 탄핵을 하였다면 추사선생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정적으로부터 모함 받은 경우는 많지만,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남이장군(南怡將軍)은 아깝게도 큰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적의 모함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남이 장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시() 북정가(北征歌) 대목중에 未平國-> 未得國(나라을 얻는다)으로 바뀌어서 상소를 하였다고 한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바위 돌, 칼 갈아버리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강물은 말 먹여 없애고 싶소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남자 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못 지키면

俗世誰稱大丈夫(속세수칭대장부) 누가 대장부라 하겠소

 

남이(南怡) : 1441(세종 23) ~ 1468(예종 원년)

남이 장군은 의령남씨이고 태종의 외손자이며 권남의 사위이다.

1457(세조 3)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67(세조 13)에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하여 1등공신으로 명성을 날렸다.

27세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의 명성을 시기하던 유자광의 참소에 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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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80호 / 김정희필 세한도 (金正喜筆 歲寒圖)

 

 

제 목 : 歲寒圖(세한도) 전문 및 해석

(작성자 林尙喆)

 

1. 세한도의 배경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자 그 간 그와 왕래하던 사람들 중 거의 모두는 발길을 끊게되었으나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호는 우선 藕船>만은 꾸준히 스승을 위하여 책을 구해 보내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변함없이 지극함에 감동하여 유배 5년째인 1844년 그려준 그림이다.

 

2. 歲寒圖(세한도) 전문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차개비세지상유 구지천만리지원 적유년이득지 비일시지사야)

 

지난 해에 만학, 대운의 두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 또 우경의 문편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것이 아니고 천만리의 먼 곳에서 구하였으며, 여러 해를 거쳐 얻었으니 일시의 일이 아니다.

注) 大雲 ------ 운<心+軍>敬의 大雲山房集

晩學 --------- 桂馥의 晩學集

藕耕文編 ------ 賀藕耕의 皇朝經世文編. 120권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차세지도도 유권리지시추 위지비심비력여차 이부이귀지권리 내귀지해외초췌고고지인 여세지추권리자)

 

비록 세상이 도도한 물결같이 오직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데, 그것을 구함에(책을 구하는데) 마음과 힘을 소비함이 이와 같은데도 권세와 이익으로 그것을 돌리지 않고, 이렇게 바다 멀리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돌린 것은 세상이 권력과 이익을 따른 것과 같이 한 것이다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운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 군역세지도도중일인 기유초연자발어도도 권리지외 부이권리시아야 태사공지언비야)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써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함으로써 교분이 소원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중의 한 사람인데도 그 초연함이 있어 스스로 도도한 물결 같은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몸을) 빼었으니, 권세와 이익으로써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준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注)太史公 ------- 司馬遷 또는 그의 부친인 司馬談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 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공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송백시관사시이불조자 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공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 날이 추워진 뒤에 소나무·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이니 추위가 오기 전에도 오로지 송백이요, 추위가 온 이후에도 오로지 송백이다. 성인이 특별히 세한의 후에 그것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나에게 한 것은 앞에서 한 것도 더함이 없고, 뒤에서 한 것도 덜함이 없다.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 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그리하여 앞에서 한 것은 그대가 칭찬받을 만하지 않지만, 뒤에서 한 것은 그대가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정조와 경절일뿐인 것은 아니니 또한 세한의 시기를 당하여 느껴지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비<丕+邑>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오호 서경순후지세 이급정지현 빈객여지성쇠 여하비<丕+邑>방문 박절지극의 비부)

 

아! 西漢의 淳厚한 세상에 급암과 정당시 같은 어진 선비에 있어서도 그 흥망성쇠와 더불어 찾아오는 손님의 많고 적음이 따랐으나 하비<아래 자료 참고> 榜文의 박절함이 극심함은 슬픈 일이로다..>

注)西京 --------- 옛 한<漢>의 수도인 장안<長安>

汲암<黑+音> - 漢의 忠諫을 잘하던 신하

鄭當時 ------- 漢의 진<陳>사람으로서 의로움으로 이름을 떨침

下규<圭+邑> - 지금의 陝西省渭南縣

下비<不+邑> - 지금의 江蘇省 비縣內

榜門 -------- 추사의 유배시 거처하던 가옥의 문에 붙인 죄인 표시 방문(榜文)을 말하는 것으로 사료됨.

夫는 ~로다의 종결어미

 

[보충답변]

세한도의 전체적인 문맥은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 정이 담겨 있는 내용으로 의역은 생략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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阮堂 歲寒圖 跋文(완당 세한도 발문)

세한도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생활 중에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려 보낸 작품이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趍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권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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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저자 : 김정희 | 역자 : 김동석

 

지난 해(1843, 헌종9)만학집(晩學集)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 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浮沈)에 따라 붙좇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下邽) 땅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을 써 붙여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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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필 세한도(金正喜筆 歲寒圖)는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인 우선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조진조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석준의 글과 오세창·이시영의 배관기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추사는 제자처럼 아끼던 역관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고, 이상적은 청나라에 이를 가지고 가서 추사의 옛친구를 비롯한 명사들의 글을 그림에 이어 붙인 저지에 받은 것이다.

 

그 후 세한도는 이씨 문중에게서 떠난 후 130여년 동안 유전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 ~ 1948)[1]에게 들어갔다.

 

세한도는 일제 말에 후지쓰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의 노력과 재력에 힘입어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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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李尙迪)

 

김정희의 제자 ' 우선 이상적 (藕船 李尙迪) '은 그런 김정희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최신의 서적을 구해다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추사 김정희를 따르는 제자가 3천명이라고 회자될 만큼 '추사'는 많은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들 중 사당수는 돈과 실력을 갖춘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을 비롯한 중인층(中人層)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李尙迪)이다. 이상적의 제자도 역관이었던 오경석(吳慶錫 .. 吳世昌이 그의 아들)이고, 오경석(吳慶錫) 역시 청나라의 고증학(고증학)을 연마한 바탕 위에 '추사'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계승 더욱 발전시켜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저술하였다.

  

 오경석(吳慶錫)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었는데, 그의 불교 사상은 다시 절친한 친구이자 개화파(開化派) 지도자인 유대치(劉大致)에게 전해진다. 당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리우던 유대치(劉大致) 역시 중인(中人) 계급인 한의사이었으며, 오경석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대치(劉大致)는 개화파의 주역들인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英孝), 서광범(徐光範)에게 게화사상(開化思想)을 전해 주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연경(연경)에 갔던 '이상적'이 ' 경세문편(經世文編 .. 위 사진)'이라는 책을 구해다 제주도 유배 중이던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어렵게 구한 책을 권력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와 신분이 보장되었을텐데, '이상적'은 바다 멀리 유배되어 아무 힘도 없는 스승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 책을 받은 김정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뭉클한 감정에 눈물짓고 말았다.  

  

  

유배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論語)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子罕)'편의 '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歲 寒 然 後 知 松 柏 之 後 凋 '라는 구절이었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는 의미이다. 

 

 공자(孔子)가 겨울이 되어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김정희 자신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추사'는 '이상적'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松柏)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지만 바다 멀리 유배된 신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제자 '이상적'의 뒤를 봐줄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돈으로 보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 '추사'가 떠올린 것은 송(宋)나라 소동파(蘇東琶)가 그린'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이었다. 소동파(蘇東坡)가 혜주(惠州)로 유배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소동파'의 어린 아들이 부친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먼 곳까지 찾아왔다. 어린 아들이 방문에 너무도 기뻤던 소동파는 아들을 위해 '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을 한 폭 그리고, 아들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언송도" 그림은 전해오지 않고, 소동파가 쓴 글씨만 남아 있었는데, 옹방강(翁方綱)이 소장하고 있었다. 연경(燕京)에 갔을 때 '옹방강'의 서재를 방문했던 '추사'는 그곳에서 소동파의 '언송도'에 쓴 글씨를 보았던 것이다.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아든 '추사'는 소동파를 생각하였다. 혜주(惠州)로 유배되었던 '소동파'의 상황과 제주도로 유배된 자신의 상황이 비슷하였다. 소동파를 위로하기 위하여 멀리 찾아온 어린 아들의 마음이나 멀리서 책을 어렵게 구해 자신에게 보내준 '이상적'의 의리나 비슷하였다. 소동파가 '언송도'를 그렸듯이, '추사'는 자신만의 '언송도'를 그리기로 했다.

 

                                                    세한도 글 내용

  

 

 우선시상(藕船是賞) ... 우선(藕船)은 보아라. 작년에도 만하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보내 주었고, 올해에도 또 우경(藕莖)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보내 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리만리 먼 곳에서 구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구한 것이리니, 세상의 도도한 인심(人心)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찾는 것인데, 이들책을 구하려고 이와같이 마음과 힘을 들였거늘 이것들을 그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갖다 주다니...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권세나 이익때문에 사귄 사이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관계가 멀어지는 법이라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그러한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인데 어찌 그대는 그 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권세를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가 ?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 가장 추운 시절이 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아레 된다..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을 통하여 세한(歲寒)이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푸르르지만 특히 날이 추워진 이후의 푸르름을 칭송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겼기 전이나, 곤경에 처한 후에나 변함없이 잘 대해주거늘, 나의 곤경 이전에는 그대는 칭찬할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聖人)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

  

성인(聖人)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추운 시절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松柏)의 굳은 절조(節操)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세한(歲寒)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오호라 ! 한(漢)나라 시경(詩經)에 후덕하고 인심이 있을 떼, 급암과 정당시 같은 사람도 그들을 찾는 빈객들과 더불어 흥(興)하고 쇠(衰)하였으니, 하비의 적공이 방을 써붙인 것은 세상 인심이 때에 따라 박절하게 변함을 탓하는 것이다. 슬프도다. 완당노인 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추사 김정희'보다 18세 년하(年下)의 중인(中人)이었다. 추사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고 일찍부터 계급의 장벽을 넘어, 재능 위주로 제자를 양성하였으니, 그 문하에서는 진보적(進步的) 양반 자제는 물론 중인(中人)과 서얼(庶孼) 출신의 영민한 자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적(李尙迪)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12번이나 중국에 드나들었는데, 스승이 닦아놓은 연분을 따라 중국의 저명한 문사(文士)들과 교류를 깊이 하였다. 그는 특히 시(詩)로 명성을 얻어 1847년에는 중국에서 시문집(詩文集)을 발간하기도 항ㅆ다. 이상적(李尙迪)은 스승의 세한도(歲寒圖)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歲寒圖) 한 폭(幅)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 아 !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世波)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서 스스로하지 않을래야 아니 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書冊)은 비유컨데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 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表具)를 해서 옛 지기(知己)들에게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이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俗世)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익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李尙迪)은 위 편지의 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譯官)이 되어 북경(北京)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정초에 청(淸)나라의 문인(文人) 16명과 같이 한 자리에서 스승이 보내준 세한도(歲寒圖)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 작품의 고고(高孤)한 품격에 위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 깊이 감격하여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李尙迪)은 이 글들을 모아 1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로 곧바로 제주도(濟州道)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었다.

  

1년이 지나, 세한도를 다시 대하게 된 추사(秋史)의 훼한 가슴에 저 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얼마만큼 큰 위안으로 다가섰는지는 보지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적(李尙迪)은 후에 스승 김정희(金正喜)의 부음(訃音)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知己平生存水墨  평생에 나를 알아준 것은 수묵화이었네   

素心蘭又歲寒松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이상적(李尙迪)은 역관(譯官)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차례나 중국을 다녀왔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45년 전답(田畓)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스승인 '김정희'의 영향으로 시(詩) 외에도 골동, 서화, 금석(金石) 등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는 역관답게 언어에 대한 능숙한 기교가 돋보이며, 당대 여항문인(閭巷文人)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 역관사가(譯官四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여항(여항)이라는 말은 신분제 사회에서 공경대부가 아닌 측들이 생활세계르 범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여항인(閭巷人 ..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에 의해 '여항의 문학예술'이 형성되었고, 뒤이어 사회의 기저층에서 '민중문학'이 성장하였다.            

 

                                          장무사망  長毋相忘

  

붓을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義理)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창문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한 고목(古木)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을 매달고 그 집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소나무 하나, 그리고 잣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눈이 내린 흔적도 없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寒氣)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하고 썰렁했다. '추사'는 또 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이상적(李尙迪)'의 의리(義理)를 칭찬하며 겨울에도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比喩)하는 내용이었다.  

  

 

그림을 마친 '추사'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 우선시상 (藕船是賞) '이라고 썼다. 우선(藕船)은 이상적(李尙迪)의 호(號)이었다. ' 이상적(李尙迪)은 감상하게나...'라는 의미이다.그림을 마친 '추사'는 마지막으로 인장(印章)을 하나 찍었다. ' 장무상망 (長毋相忘) '이라는 인장이었다. '오랫동안 서로 잊지말자 '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그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겠네. 그대 또한 나를 잊지 말게나. 고맙네. 우선(藕船).

 

이렇게 그려진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전해졌고, 이상적은 중국 연경(燕京)으로 사신(使臣)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가져갔다. '이상적'의 친구들은 이 그림을 보자마자 앞다투어 '이상적'의 의리 (義理)에 감동하고, 김정희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글을 지어주었다. '세한도'에 담겨있는 표면적인 의미는 이상적(李尙滴)의 의리에 감동한 '추사'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추사'를 감동시킨 그 의리(義理)와 절개(節介)는 조선 지식인의 피 속에 면면이 이어져온 조선인의 의리(義理)이자 절개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그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으로 변환시켜 이 그림에 담아냈던 것이다.   

 

                                                         세한도의 기구한 운명

  

이렇게 꾸며진 '세한도' 두루마리는 이상적(李尙迪)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에게 넘어갔고, 그뒤에는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閔泳徽)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이 일본인 '후지츠까 치까시 (藤塚隣)'에게 팔아 넘겼다. '후지츠까'는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철학 연구가로 청나라 경학(經學)이 그의 전공이었다.

 

청나라 금석학(金石學)을 연구하면서 그는 당시 조선에도 이 학문이 전파되어 박제가, 유득공,김정희 등 많은 학자들이 중국 학자들과 실시간으로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못 놀랐다. 그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서울로 왔다. 서울에 도착한 '후지츠까'는 인사동 고서점에서 실학자(實學者)들의 관계 자료를 수집하여 새로운 많은 사실을 밝혀내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추사(秋史) 관계 책과 글씨, 편지는 닥치는대로 모았다. 

  

그가 동경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 청조문화의 동점(東漸)과 김정희'에서 후지츠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리하여 청나라 학문은 조선의 영특한 천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만나 집대성되었으니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는 김정희이다 ' 그러던 1944년 여름, '후지츠까'는 태평양 전쟁 말기 다른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살림살이를 싸들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서예가이자 당대의 서화수집가이었던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고 크게 걱정하다가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후지츠까'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는 미군(美軍)의 공습(空襲)이 한창인 때였고, 후지츠까는 노환(老患)으로 누워 있었다. 손재형(孫在馨)은 '후지츠까'를 만나 막무가내로 ' 세한도(歲寒圖)'를 넘겨달라고 졸랐으나, 후지츠까는 단호하게 거절할 뿐이었다. 손재형은 뜻을 버리지 않고 무려 두 달간 매일 찾아가 졸랐다.  손재형은 매일 아침 '후지츠까'를 찾아가 문안 인사만 올리고 되돌아 오곤 하였는데, 후지츠까는 조금도 세한도를 내줄 기미가 없었다. 손재형이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린 지 90일 되던 날 '후지츠까'는 손재형에개 말했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遺言)해서 자네 앞으로 보내줄테니 돌아가라.   그래도 손재형이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열흘 동안 더 문안을 드렸다. 이에 감복한 후지츠까는  그러던 12월 어느날, 후지츠까는 손재형(孫在馨)의 열정에 굴복하여 '세한도'를 건네주면서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으니 잘만 보존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손재형(孫在馨)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하고 나서, 석 달쯤이 지난 1945년 3월 '후지츠까' 가족이 공습을 피해 소개해 있던 사이 그의 서재는 폭격을 당하였고, '세한도'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 남았다. 그후 손재형(孫在馨)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선거자금에 쪼들리게 되자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돈을 끌어다 썼고, 결국 '세한도'는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후지츠까의 아들 ' 아끼나오'는 아버지의 논문을 단행본으로 간행하였고, 부친이 모아둔 나머지 추사(秋史) 자료 2천 점을 2007년 과천문화원(果川文化院)에 기증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는데, 그는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들 ' 아끼나오'는 추사 관련 자료를 모두 기증하면서 어떤 보상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추사 연구에 써달라고 200만 엔을 쾌척하였다.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 이계묵 선생 글 일부 발췌

http://cafe.daum.net/4702km/Brrf/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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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선생이 59세인 1844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歲寒圖> 跋文 - <세한도> 발문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차개비세지상유, 구지천만리지원, 적유년이득지, 비일시지사야.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지, 한 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차세지도도, 유권리지시추, 위지비심비력여차, 이불이귀지권리, 내귀지해외초췌고고지인, 여세지추권리자.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도, 권세와 이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태사공운,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 군역세지도도중일인, 기유초연자발어도도권리지외, 불이권리시아야? 태사공지언비야?

태사공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성글어진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니, 권세와 이익이란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송백시관사시이불조자, 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 성인특칭지어세한이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으셨다(칭찬하셨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연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성인지특칭, 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잘 해준 것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지금보다 덜함이 없다(소홀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송백을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오호! 서경순후지세, 이급정지현, 빈객여지성쇠. 여하비방문, 박절지극의. 비부! 완당노인서.

아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서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짊으로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비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 하비(下邳)는 하규(下邽)의 오기이다.

 

<참고>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급암과 정당시, 하규의 방문 이야기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전한(前漢) 무제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어진 신하들이 현직이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마천은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 언급한 적공(翟公)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해임되자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적공이 다시 관직에 오르자 손님이 다시 몰려오는 염량세태를 풍자하며 대문에 써 붙인 시는 다음과 같다.

一死一生 乃知交情 한번 죽고 한번 삶에 사귐의 정을 알고

一貧一富 乃知交態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유함에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貴一賤 交情乃見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함에 사귐의 정이 드러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