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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추사 김정희

영의정 권돈인의 세한도

by 연송 김환수 2015. 9. 20.

세한도(歲寒圖) - 권돈인

 

歲寒(세한) 이란 설 전후(前後) 추위라는 뜻으로, 몹시 추운 한 겨울의 추위를 일컫는 말이다. 세한도(歲寒圖) 화제(畵題)를 보면 “추운 그림이네” 이런 뜻이다.

 

영의정을 지낸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세한도는 추운 겨울이지만 아늑하고 평온해 보이는 풍경에서 보듯이 포근한 느낌이 드는 친구간의 잊지말자는 우정이 담겨있는 그림이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는 외롭고 허전한 느낌이 들지만  세한도가 품고 있는 신의와 우정 때문에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權敦仁筆歲寒圖 (권돈인필세한도)

 

권돈인(權敦仁) : 1783~1859 / 조선 말기 문신 서화가/ 1845년 영의정

종류 : 수묵화

재질 : 지(紙) / 종이에 먹 

기법 : 지본수묵 (紙本水墨)

크기 21.0 x 101.5cm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歲寒圖(세한도)제목 서체는 추사의 솜씨로 알려져 있다. 두 거장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합작도인 셈인데 이재 권돈인의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가려져 덜 알려졌지만 비슷한 시기에 세한도를 남겼다.

 

세한도 하면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지만, 조선 후기 삼정승을 지낸 이재(彛齋) 권돈인(1793-1859)'세한도'를 남겼다. 이재와 추사는 같은 시대 사람으로 추사와 서첩을 주고받았던 절친한 관계였다.

 

 

세한도 제목 옆에 찍힌 장무상망(長毋相忘 : 서로 오래 잊지 말자)이란 인장을 보면 서로의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長장

 

             忘망         相 상

 

                    毋무  

 

 

 

 

권돈인은 추사보다 세 살 위지만,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서첩을 합벽(合璧)하거나 서로 그림을 주고받는 등 돈독한 우정을 자랑했는데 추사는 이재에게 묵란을 그려주었고 특히, 모질(耄耋)은 추사가 귀양가면서 권돈인에게 축수(祝壽)그려준 고양이 그림이다.

 

 

모질(耄耋)은 고양이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조선초부터 말기까지 문인화가 및 직업화가의 구별 없이 모두가 즐겨 그린  고양이와 나비를 소재로 한 동물화이다.

 

모질(耄耋)70세를 지칭하는 의미로 축수(祝壽)를 위해 즐겨 그렸으며 자녀를 여럿 둔 노부부의 장수를 기원하는 목적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참고로 猫蝶(묘접) 고양이와 나비라는 뜻인데, 늙은이라는 뜻을 가진 耄耋(모질)과 중국어의 발음이 마오디에(màodié)로 같다. 즉 나비와 고양이와 함께 그린 것을 <모질도耄耋圖>라고 한다.

 

중국어로 (고양이 묘)70세 노인을 뜻하는 ()와 발음이 같고, (나비 접)자는

80세 노인을 뜻하는 ()과 발음이 같아서 모질도는 장수를 상징한다.

 

()70세 노인을, ()80세 노인을 말하는데 중국의 <예기禮記>70세를 라 하고, 80세를 이라 적혀 있다. 따라서, 70세부터 80세까지 노인을 모질(耄耋)이라 한다.

81세가 되면 90을 바라본다고 해서 망구(望九)라 한다. 망구라는 말은 본래 좋은 뜻이었지만, 지금 나쁜 말로 쓰는 할망구는 망구(妄嫗), 즉 나잇값도 못 하는 망령된 할미라는 뜻이다.

 

   

    추사 김정희 모질도 : 모질도 작어 대방도중 (耄耋圖 作於 帶方道中)


수도청 경찰국장을 지낸 장택상 소장품(구장舊藏)으로 이작품은 6.25때 불타 없어졌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시대 경매도록에 실린 것으로 모질도는 오래 살라는 축수의 뜻이 있다.

추사(완당)선생이 1840년(55세)때 대방도중(帶方道中)에 그렸음을 밝히고 있는데, 대방(帶方)은 남원의 별칭으로 남원을 지나면서 그린 고양이 그림으로 나비는 없다. 벗 권돈인에게 보냈다.

 

 

 

이 권돈인의 세한도는 모질도에 대한 답례로 권돈인이 추사에게 준 것으로 벗에 대한 따사로운 정이 담겨 있다.

때로는 글씨도 두 사람의 구별이 힘들 정도로 유사해 넓은 의미로 추사파에 속한다.

권돈인은 송시열의 애제자인 권상하의 5대손으로 관직은 영상에까지 올랐다.

 

이재의 세한도는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먼저 추사가 '세한도'라 제목을 썼고, 그림에 이어 두 발문이 첨부되어 있다.

 

이재의 세한도는 추사의 것과 다른데 추사는 마른 붓질, 즉 갈필을 써 쓸쓸한 느낌을 더해주지만, 이재는 물기 많은 농묵을 썼다.

 

소재도 추사는 소나무와 잣나무, 초가집을 그렸지만, 이재는 소나무·잣나무·바위 등 세한삼우(··)를 초가집과 함께 그렸다. 아늑하고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다.

 

사방 벽이 없는 모옥은 바위·뒤뜰의 대나무·두 그루의 소나무·매화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조촐하고 담담한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선비 그림이다.

추사는 권돈인의 세한도가 형사(形似)에서 벗어난 높은 경지이며, 시뿐만 아니라 그림 또한 뛰어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재가 쓴 제발과 추사가 붙인 발문을 보면 그림 읽기의 깊이가 달라진다.

 

 

因以歲寒三双圖(인이세한삼쌍도) 一幅以實詩言(일폭이시시언) - 우랑(又閬)

                                                 * 우랑(又閬) : (彛齋) 권돈인의 다른 호

畵意如此而後(화의여차이후) 爲形似之外(위형사지외) 此意雖(차의수) 古名家得之者絶少(고명가득지자절소) 公之詩不拘於閬工畵亦然(공지시불구랑화역연) - 阮堂(완당)

                                                 * 완당(阮堂) : 추사(秋史) 김정희 다른 호

 

이재는 '세한삼우도 한 폭에 시의를 담았다'고 적었고 / 그림과 제발을 본 추사는 발문으로 답했다. '그림의 의미가 이 정도는 되어야 형사 너머에 있는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 하겠다.

이 뜻은 옛날 명가라 해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畵意如此而後 爲形似之外 此意雖 古名家得之者絶)'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발문 전체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畵意如此而後, 爲形似之外, 此意雖, 古名家得之者絶少, 公之詩不拘於閬工畵亦然. 阮堂.

화의여차이후, 위형사지외, 차의수, 고명가득지자절소, 공지시불구어랑공화역연. 완당.

 

그림의 의미가 이 정도는 되어야 형사(形似) 너머에 있는 자기마음을 표현했다 할 것이다. 이 뜻은 옛날의 명가(名家)라 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공의 시만이, 송나라 시인 반랑(潘閬) 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림 또한 그렇다.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쓰다.

 

추사가 지적했듯이 이재가 세한삼우 중 매화를 그리지 않은 것은 형사 너머를 의미했을 것이다. 안 그렸지만 그린 거나 진배없다.

 

형사(形似) : 동양화에서 대상의 형태를 정확하게 닮도록 표현하는 것

예술작품이 사물의 외형을 완전히 흡사하게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언어를 운용하는 수법이 신기의 경지에 이르러 형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솜씨를 감탄할 때 쓰였다.

'형사(形似)'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닮게 그리는 것을 뜻하고, '신사(神似)'라 함은 사물이나 인물의 외형적인 형태보다는 그 대상이 갖는 내면의 정신을 닮게 그려내는 것을 의미한다.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권돈인필세한도 / 권돈인(權敦仁, 1783~185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재 권돈인’이 당파의 회오리바람에 몰려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祧遷禮)에 관한 주장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1851년 순흥(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되었다.

 

순흥 합도동 (順興 蛤島洞 현, 동촌 조개섬)에 귀양와 9년간 유배살이 할 때, 적소(謫所)인 조개섬(蛤島洞)에서 날마다 소수서원과 송학산(松鶴山) 그리고 학다리(鶴橋)와 구십아홉칸 양반댁을 오갈때, 해오라기 백로가 흥주벌의 논(畓)과 솔(松)을 번갈아 오르내리면서 노니는 장면을 보고 지은 시로 그가 소수서원 학자수림을 보고 다시 영감을 받아 세한도(歲寒圖) 한 폭을 그렸다.

 

因以歲寒三双圖(인이세한삼쌍도) 一幅以實詩言(일폭이시시언) - 우랑(又閬)

세한 삼우도 한 폭에 시의를 담았다.  - 우랑 -

  *** 권돈인의 호는 이재(彛齋), 우랑(又閬), 우염(又髥), 번상촌장(樊上村庄),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이다.


이것을 제주도에 유배살이하던 친구 추사(秋史) 김정희에게 인편으로 보내 발문을 받아오게 한 것이 지금 서울 용산 국립박물관에 있다. 추사도 이재의 작품을 참고하여 그 무렵 탐라도(제주도)에서 세한도를 남기게 된다. (* 다수의 학자는 추사의 세한도 이후에 이재의 세한도가 그려졌다고 평하는데 그려진 연대는 불명확 하다. 추사의 세한도가 앞섰다면 추사의 세한도가 그려진 1844년 이후 제주도 유배살이중에 발문을 받아왔던지, 아니면 제주도 유배살이 시절이 아닌 1851년 이후 함경도 북청 유배살이중에 추사한테 발문을 받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 권돈인이 1851년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를 왔다가 1859년 충청도 연산으로 이배를 가는데 그해 그곳에서 죽는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해는 1840년이고 돌아오는 해는 1848년이며 세한도를 그린 해는 1844년이다. 추사는 유배에서 돌아와 3년후인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추사가 1840년 귀양을 가면서 '모질'이라는 작품을 그려주었는데 그 때 권돈인이 추사에게 그려준 작품이 '세한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만 본다면 이재의 세한도가 먼저 그려졌을 것으로 보이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추사의 세한도(1844년)그림을 먼저 접하고 이재의 세한도가 그려졌다고 평한다. 제발에 적은 이재의 시는 1851년 이후 유배지 순흥에서 지었다고 한다. 因以歲寒三双圖(인이세한삼쌍도) 一幅以實詩言(일폭이시시언) - 우랑(又閬)   *** 이재(彛齋), 우랑(又閬)  권돈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도 100여개에서 최대 503개의 별호를 사용했다.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보담재(寶覃齋), 담연재(覃硏齋),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 다양한 ()

http://blog.daum.net/yescheers/8599029

 

 

국보 제180호 / 김정희필 세한도 (金正喜筆 歲寒圖)

완당 김정희 세한도 오른쪽 하단에 찍은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

 

 

               相 상   長장

 

               忘망    毋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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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돈인 (權敦仁)

 

1783(정조 7)1859(철종 10).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서화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彛齋), 우랑(又閬), 우염(又髥), 번상촌장(樊上村庄),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우의정을 지낸 권상하(權尙夏)5대손이며, 군수를 지낸 권중집(權中緝)의 아들이다.

 

1813(순조 13)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正字: 조선 시대 홍문관·승문원·교서관에 속한 정구품 벼슬)와 헌납(獻納: 조선 시대 사간원의 정오품 벼슬)을 거쳐, 1819년과 1835(헌종 2)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과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뒤 184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851년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祧遷禮)에 관한 주장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1859년 연산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그곳에서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서화에 능하여 일생을 친밀히 지냈던 김정희(金正喜)로부터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예서체(隷書體) 비문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전혀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서화를 얻으면 김정희와 연구하여 감식안을 높이기도 하였다.

 

유작으로 세한도(歲寒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김정희의 세한도와 화풍상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김정희의 세한도가 갈필(渴筆)로 다루어져 싸늘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비하여, 그의 세한도는 안온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간단 명료한 구도라든가 넘치듯 배어 있는 농축된 문기(文氣) 등은 사의(寫意)를 지향하여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크게 진작시켰던 김정희의 화풍과 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