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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부채 이야기

by 연송 김환수 2015. 8. 28.

추사 김정희 부채 이야기

 

조선후기 철종임금 시대에 글씨로 유명한 김정희(金正喜)가 자기의 집에서 하루밤 묵고 가는 부채장사의 부채에 글씨를 써 주어 이득을 보게 한 이야기가 있다.

 

김정희가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전에 못보던 부채짐이 놓여져 있으므로 청지기에게 물었더니, 부채장사가 부채를 팔러 왔다가 해가 저물어 하룻밤 묵고가기를 청하므로 객방에 묵고 있다 하므로, 그런가하고 사랑채에 들어가 앉았는데, 그 날따라 심심하기도 한데다 조금 전에 보았던 부채에 글씨를 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 청지기 : 양반집에서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

 

그리하여 청지기더러 그 부채짐을 마루로 들여놓게 하고는 부채를 한아름 꺼내어 쓰고 싶은 글귀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마침내 꺼내온 부채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쓰고 말았다.

 

이튿날 부채장수가 떠나려고 부채짐을 풀어 조사해보니 주인영감이 모든부채에 글씨를 써 놓았으므로 부채 장수는 물건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며 탄식이 대단하였다.

 

이를 본 김정희가 말하기를 “이 부채를 팔 때에 추사선생이 쓴 글씨 부채라 하고 값을 몇 곱절 내라고 하면 너도나도 다 사갈 것이니, 자네 나가서 팔아보게나.” 하자 그 부채장수는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거리로 나가 일러주는대로 하였더니 부채가 순식간에 다 팔렸다.

 

부채장수는 김정희를 찾아가 앞으로도 글씨 써주기를 간청하였으나, “그러한 것은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은 해서는 안되네.” 하고 써주지 않았다 한다.

 

추사 김정희 묵란도(墨蘭圖)

추사 김정희 지란병분(芝蘭並芬)

 

추사 김정희의 부채그림 지란병분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저마다 팔을 걷어 한 수씩 적어 넣은 예술의 콘서트같은 작품으로  정교하고 세련된 꾸밈에 애쓰지 않고 졸박하게 그려낸 지초와 난초의 향기가 부채질 끝에 흘러나올 듯하다.

 

추사는 부채의 중심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는 진하게 영지를 그려 넣었다.

 

추사가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남은 먹으로 장난하다.”라고 관서(款書)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이재 권돈인(權敦仁)이 발문을 썼다. 권돈인은 “백년이 지난다 해도 도(道)는 끊어지지 않고, 만 가지 풀이 모두 꺾인다 해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썼다. 지초와 난초는 친구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지란병분(芝蘭並芬) 부채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로 그 당시 대수장가인 창랑 장택상(滄浪 張澤相),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유복렬(劉復烈), 김찬영(金瓚永) 등과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 좋은 명품을 구입하면 가까운 친구나 유명인사들을 초빙하여 한상을 잘 차려내고 물건의 품평을 하였다.

 

일종의 살롱문화를 대신한 것인데 여기서 서로 자신의 감상 느낌과 물건의 유래나 그 물건이 나온 동기와 같은 정보가 오가며 때로는 배관한 느낌을 글로 적기도 하였는데, 한번은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인 삼월백화점에서 추사의 작품전이 열렸다.

 

당시 조선에 나와 있던 일본인 상류층에게는 추사작품 수집붐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전시회에 경성제국대학 의대 병리학과 교수였던 덕광(德光)이 자신의 소장품인 추사의 부채그림을 출품했다.

 

소략한 갈필(渴筆)로 영지버섯 2개와 난화 2개를 같이 그렸으며 선면(扇面)에는 지란의 향이 그윽해 남은 먹으로 붓을 놀려 보았다는 지란병분 희이여묵(芝蘭竝芬 戱以餘墨)이라는 화제를 썼고, 친구인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의 찬사와 제자인 대원군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과 홍우길(洪祐吉)의 제문(題文)이 그림의 격조를 한껏 더하였다.

 

감식가이기도 하였던 창랑(장택상)은 이 물건을 점 찍어 두고는 거간꾼인 이순황(李淳璜)을 시켜 흥정을 하게 하였는데 이순황은 德光에게 산 값의 열배를 줄터이니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머뭇거리는 덕광(德光)에게 "저런 정도는 얼마든지 구하여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비슷한 것을 구하여 준다"고 장담을 하여 5원에 구입한 것을 50원에 사 주었다.

 

그 후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3백원까지 올랐으나 장창랑(장택상)이 다시 거둬 들이니 德光은 안달이 났다.

 

이순황은 德光을 피해 다녔고 해방이 되자 德光은 제자인 이여성(李如星)을 통하여 자신의 소장품을 전부 팔아 처분하고 일본으로 귀국했으니 조선의 수집가들은 기회를 잡았다.

 

다시 경성구락부 경매에 간송 전형필씨가 7백원의 거금으로 부채를 입수하여 오늘날 추사작 지란병분의 선화(芝蘭竝芬의 扇畵)는 간송미술관에 영구수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