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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수준 이르렀던 조선시대 수학자들

by 연송 김환수 2014. 8. 14.

[취재파일] 세계적 수준 이르렀던 조선시대 수학자들 

세계수학자대회 개최국 한국의 수학 전통

이상엽 기자|입력2014.08.12 16:21

 

내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2014 서울세계수학자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가 열립니다. 전 세계 수학자들이 참여해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대중들에게 강의도 하는 이번 대회에서는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 메달(Fields Medal) 시상식도 열립니다.

 

지금까지 16개국에서 52명의 수상자만을 배출한 필즈 메달은 전 세계의 저명한 수학자들이 한 번 쯤은 꿈꾸는 상입니다. '수학자로서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노벨상처럼 매년 주지도 않고 4년에 한 번만 시상하는데다, 나이 제한까지 있어 만 40세가 넘으면 수상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표롱을첨(縹礱乙㡨) : 홍길주(洪吉周,1786~1841)

 

이 필즈 메달을 받은 한국인은 아직 없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수상은 어려워 보입니다. 한국인 필즈 메달 수상자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사고력 계발 보다는 입시에만 치중한 문제풀이 위주의 수학 교육 때문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기본 개념을 길러주기보다는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데만 집중하는 학교 교육에 책임을 돌리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최석정(崔錫鼎)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에도 위대한 수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영의정까지 지낸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아주 체계적인 수학책으로 유명한 저서 '구수략(九數略)'에서 세계 최초로 9차 마방진을 만들었습니다.

 

마방진이란 가로 세로 9칸씩 81개의 칸에 숫자를 1에서 81까지 하나씩 넣었을 때 가로와 세로,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 더해도 합이 같도록 이룬 배열을 말합니다.

 

 

최석정의 9차 마방진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더해도 합이 369가 나옵니다.

 

어떤 방법을 이용해 이런 신기한 마방진을 만들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수학자인 오일러의 발견보다 60년 이상 빠른 발견입니다.

 

18세기에 활동한 중인 출신 수학자 홍정하(洪正夏, 1684~?)는 중국 수학자 하국주(何國柱)와 만난 자리에서 서로 수학 실력을 겨루다 천원술(天元術)이라고 하는 고차방정식 문제를 내 중국 학자가 대답하지 못하게 만들어 완승을 거두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의 수학은 생각보다 그 수준이 높았습니다. 일종의 주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산판(算板)과 수를 세는 데 쓰는 막대기인 산가지만 갖고도 제곱근은 물론 10차 방정식의 해까지 구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조선 수학은 특히 산가지를 사용한 계산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중국의 경우 명나라 이후 상업적 필요 때문에 주판이 널리 보급되면서 산가지가 사라졌지만, 상대적으로 상업의 발달이 늦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산가지를 사용한 계산법이 오래 유지되었습니다.

 

 

 

고차방정식이나 제곱근처럼 상당히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풀이도 산가지를 사용하는 방법이 발전하면서, 이런 고수준의 문제들을 산가지만 갖고 척척 풀어내는 조선 사신을 본 청나라 관리들이 깜짝 놀랐을 정도입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자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뺄셈과 나눗셈만으로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알아냈습니다. 이 방법은 홍길주가 자신의 저서 '숙수념(孰遂念)'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어린아이들도 쉽게 할 수 있는 풀이법"이라고 말할 정도로 간단하면서도 아주 독창적인 사고가 엿보입니다.

 

예를 들어 36의 제곱근을 구해볼까요? 먼저 36을 반으로 나누고 나눈 값을 1부터 오름차순으로 뺍니다. 따라서 36의 반인 18에서 시작해 1을 빼고, 그 다음 17에서 2를 빼고, 그 다음은 15에서 3을 빼고.. 이렇게 하나씩 더 큰 숫자를 빼 나갑니다.

 

계속 빼 볼까요. 12에서 4를 빼면 8, 다시 5를 빼면 3... 그런데 3에서 다시 6을 빼려니 음수가 돼 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남은 3의 2배인 6이 이번 차례에 빼려는 6과 같을 때 바로 36의 제곱근이 됩니다.

 

무척 간단하면서도 신기하죠? 이 방법은 정수뿐만 아니라 소수점이 붙은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훗날 등장하는 수열의 합을 구하는 방법과도 같은 원리입니다. 또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방법보다 더 편리하고 정확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조선시대 수학적 전통이 더 널리 확산되고 이어져 왔더라면 근대 유럽 수학이 발견한 수열과 극한의 원리까지도 독자적으로 다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듭니다.

 

홍길주는 이 밖에도 부정방정식이나 황금분할, 원에 내접하는 다각형의 성질, 세 정수로 이뤄진 직각삼각형의 조합 등 여러 수학 분야에 대한 독창적인 풀이법을 발견해 조선 수학의 명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한때 조선의 수학은 세계와 대등한 수준으로 그 우열을 다투었습니다. 한국 수학이 이번 2014 서울세계수학자대회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재도약의 길로 들어서길 기대합니다.

이상엽 기자scien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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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학자 최석정, 과기인 명예의 전당에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2013년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대상자로 조선후기 수학자인 최석정 선현과 한만춘 전 연세대 이공대학장을 선정했다고 7일 밝혔다.

 

최석정 선현은 저서인 `구수략`(九數略)에서 세계 최초로 9차 직교라틴방진을 발견하고 이를 활용해 마방진을 만들었다.

 

 최석정 (崔錫鼎)

구수략 (九數略)

 

이는 세계적인 수학자인 오일러의 발견보다 6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알려졌다.구수략은 기본연산과 마방진 연구 등을 소개한 조선시대 수학책이다. 마방진은 가로·세로 n x n 칸에 1부터 n의 제곱까지의 수를 한 번씩 써 넣어 각 행과 열, 대각선의 각 방향 합이 모두 같게 한 정방행렬이다.

 

라틴방진은 가로·세로 n x n 칸의 각 행과 열에 서로 다른 n개의 수를 한 번씩 배치한 것이며, 만약 두 개의 n차 라틴방진을 하나의 방진으로 포갰을 때 모든 경우의 수를 표현할 수 있다면 이를 n차 직교라틴방진이라고 한다.

 

한만춘 박사는 1961년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 557호)를 직접 제작해 우리나라 전기전자공학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공관식 전자장치를 사용해 고등 미적분 계산을 실시간으로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는 디지털 컴퓨터가 도입되기 전인 1960∼1970년대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도왔고, 컴퓨터 기술개발의 토대를 마련했다.

 

국립과천과학관에 있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는 이번 헌정 대상자를 포함해 세종대왕, 장영실, 허준, 우장춘 등 총 31인의 업적을 전시할 예정이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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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숙종대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정치적ㆍ사상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숙종대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등과 함께 소론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정계와 사상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최석정은 숙종 후반기에 10번 이상 정승에 올랐는데, 이처럼 오랫동안 최고의 직책에 자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정치노선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관의 기저에는 사상적으로 주자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양명학, 음운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개방성이 있었다.

숙종이 신임한 영원한 정승

최석정의 초명은 석만(錫萬), 호는 명곡(明谷) 또는 존와(存窩), 자는 여화(汝和),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최후량(崔後亮)의 아들로 태어나 응교(應敎)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병자호란 때에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고 영의정까지 역임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그의 조부가 된다.

 

1666년(현종 7)에 진사가 되고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翰林會薦)에 뽑혀 사관으로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應製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1685년(숙종 11) 부제학으로 있을 때 스승인 윤증(尹拯, 1629~1714)을 변호하고 김수항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87년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후 이조참판ㆍ한성부판윤ㆍ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최석정은 1697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는데 당시 최대 현안은 청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을 허가받는 것이었다. 청나라에서는 [대명회전]을 근거로 세자 책봉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최석정은 [대명회전]에 기재된 것은 중국의 예식과 관계된 것으로 외번(外藩)과 종번(宗藩)의 법 적용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제시하였다.

 

최석정은 세자 책봉을 실현시키고 1697년 9월 6일 숙종에게 보고하였다. 1699년에는 좌의정으로 대제학을 겸임하면서 [국조보감]의 속편 편찬과 [여지승람]의 증보를 건의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1701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장희빈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충청도 진천에 부처되었다. 석방 후에는 1702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이후에는 전후 8번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숙종대 정국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최석정은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국가적 현안의 구석구석에 자신의 손길을 미쳤다. 숙종대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고 보급하는 측면에서 서원과 사우가 대거 설치되고, 조선시대판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단종에 대한 복권과 추숭 작업이 완성되는 시기였다.

 

최석정의 문집인 [명곡집] 권 20에는 <단종부알태묘의(端宗祔謁太廟議>, <단종묘알설위의(端宗廟謁設位議)>, <장릉복위설과거의(莊陵復位設科擧議)> 등 단종의 추숭에 관계된 기사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최석정은 노론과 소론,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당쟁의 시대를 살았지만, 기본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하였기에 국가의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현안을 해결하는 관료로서 큰 역할을 했다.

 

최석정이 소론의 입지를 지킨 정치가라는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실록의 졸기(卒記)이다.

 

최석정의 졸기는 [숙종실록]과 [숙종실록보궐정오] 2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먼저 노론 세력이 주도하여 편찬한 [숙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최석정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經術)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士論)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태사(台司)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으며, 남구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을 조술(祖述)하여 명분과 의리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한 지시를 받았는데, 임금의 총애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그러나 소론이 주도하여 [숙종실록]을 보완한 [숙종실록보궐정오]의 기록은 최석정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판중추부사 최석정이 졸했다. 최석정은 자가 여화(汝和)이고, 호가 명곡(明谷)인데, 문충공 최명길의 손자이다. 성품이 청명하고 기상이 화락(和樂)하고 단아했으며, 총명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남구만과 박세채를 따라 배웠는데, 이치를 분별하여 깨달아 12세에 이미 [주역]에 통달하여 손으로 그려서 도면을 만드니, 세상에서 신동이라 일컬었다.

 

구경(九經)과 백가(百家)를 섭렵하여 마치 자기 말을 외듯이 하였는데, 이미 지위가 고귀해지고 늙었으나 오히려 송독(誦讀)을 그치지 않으니, 경술(經術)ㆍ문장ㆍ언론과 풍유(風猷)가 일대 명류의 종주가 되었다.

 

산수(算數)와 자학(字學)에 이르러서는 은미(隱微)한 것까지 모두 수고하지 않고 신묘하게 해득하여 자못 경륜가로서 스스로 기약하였다. 열 번이나 태사(台司)에 올라 당론을 타파하여 인재를 수습하는 데 마음을 두었으며, [대전]을 닦고 밝히는 것을 일삼았다…….

소론의 학맥을 계승하다

17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사상계는 주자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노론이 사상계를 주도해가면서 존주론(尊周論)과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재야의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원시유학(原始儒學) 및 노장사상에 대한 재조명이 시도되고, 소론의 일부 학자들은 최명길이나 장유의 경우에서처럼 양명학 등 새로운 학문 조류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였다.

 

학파로서의 노론과 소론의 분립에 대해서는 노론은 이이에서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흐름을 계승했고, 소론은 성혼의 내외손(內外孫)을 포섭하면서 성혼(成渾, 1535~1598)을 앞세우는 학파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측면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소론의 연원이 되는 성혼 계통의 학풍은 탈주자성리학적인 학풍을 보이며 절충주의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최석정의 사상 형성에서는 성혼의 학맥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가계(家系)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증조부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은 성혼의 문인으로 광해군 때 이이첨 일파에 의해 축출되기도 하였으나 영의정까지 지냈다.

 

조부인 최명길은 양명학에도 일정한 관심을 가졌으며, 관제 개혁안 등에 있어서 자신의 적극적인 견해를 제시하면서 인조대의 대표적인 관료로 활약했다. 아버지 최후량(崔後亮)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최석정은 박세채ㆍ남구만 등 소론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이들과 행로를 같이했다.

 

아우인 최석항(崔錫恒, 1654~1724) 역시 영의정을 지냈으며, 경종과 영조 연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에 소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아들인 최창대(崔昌大, 1669~1720) 역시 소론의 입지를 지켰는데, 특히 최석정의 지시를 받아 노론과 소론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소론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명문장을 남겼다.

 

최석정이 최창대를 시켜 지은 <사창대이서중(使昌大貽書中)>에는 ‘노론은 당(黨)을 위주로 의론하여 사류들이 싫어하는 반면에 소론은 모든 일을 당을 초월해서 논의하여 공평하게 처리한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최창대는 노소분립의 발단은 1680년 경신옥(庚申獄)의 처리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으며, 노론은 집권당으로서 국명(國名)을 얻어 그 기반이 견고하나 그 근본이 협잡으로 계략을 삼은 데 있으며 소론의 본색은 공론과 관평(寬平)한 것이라 하여 소론의 정당함을 내세웠다.

 

이 글은 아들 창대를 시켜서 지은 것이지만, 공론과 관평을 중시하는 소론의 입지에 깊은 자부심을 보인 최석정의 정치관이 피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학, 천문학, 서학 등을 다양하게 수용하다

최석정은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양명학에는 가학(家學)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 주목된다. 양명학은 명나라 중기에 새로운 시대사조로 등장하여 일세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에서는 배척되었다. 그러나 양명학에 대한 수용과 보급은 명종대의 심성논쟁(心性論爭)을 통하여 그 수용 기반이 형성되어 남언경이나 홍인우와 같은 양명학자가 나타났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군관 중에 양명학자가 포함된 것도 양명학의 수용에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말~인조대에는 이항복(李恒福)ㆍ신흠(申欽)ㆍ장유(張維)ㆍ최명길 등이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압송당하게 되었을 때 아들인 최후량에게 왕양명의 저술을 인용하여 편지를 보내면서 왕양명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조부의 학풍을 이어 최석정도 양명학에 상당한 조예를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최석정에 대한 양명학 관계 기록은 양명학을 비판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지만, 왕양명을 양명자(陽明子)라고 한 점이 주목을 끈다. 또한 최석정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정제두(鄭齊斗, 1649~1736)와 꾸준히 서신을 교환하였다.

 

서신 중에는 최석정 스스로 장유(張維)로 인하여 양명학을 알았고, 그로 인하여 왕양명의 문집과 어록을 읽으면서 경탄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최석정은 예학에도 해박하여 [예기류편(禮記類編)]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기류편]이 주자의 주석과 어긋났다고 하여 불태워진 것을 보면 그의 사상이 당시 사류의 보편적인 흐름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석정은 역학과 수학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났으며 이는 [구수략]의 저술로 이어졌다. 그는 [구수략]을 통해 주역의 괘를 바탕으로 한 상수학적 이해, 마방진 연구, 무한대와 무한소의 개념을 선보이는 등 당대의 수학적 성과를 정리하고 연구했다.

 

최석정의 학문적 특징으로 또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의 범위가 넓다는 점이다. [숙종실록]의 보궐정오 최석정 졸기에는 12세에 이미 [주역]에 통달했음과 함께 산수(算數)와 자학(字學)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났음을 기술하고 있다. 역학과 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구수략(九數略)]의 저술로 이어졌다.

 

[구수략]은 주역의 괘에 나타난 형상과 변화를 응용하여 이수(理數)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하는 상수학적(象數學的)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책으로 당시의 수학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구수략]은 갑ㆍ을ㆍ병ㆍ정(부록)의 4편으로 이루어졌다.

 

갑편은 주로 가감승제(加減乘除)의 4칙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 을편은 이들 기본연산(基本演算)을 다룬 응용문제, 병편은 개방(開方)ㆍ입방(立方)ㆍ방정(方程) 등에 관해서, 그리고 정편은 문산(文算)ㆍ주산(籌算) 등의 새로운 산법 및 마방진(魔方陣)의 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석정은 천문학에도 자질을 보였는데, [연려실기술]에는 최석정이 성력(星曆)을 잘 해독하여, 관상감 교수를 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서학(西學)을 일부 수용하고 있음도 나타난다.

 

[구수략]에 인용된 서적의 목록 중 [천학초함(天學初函)]은 서양 계통의 책이며, [명곡집]의 <우주도설> 등에도 서학(西學)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는 것이 주목된다.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제시한 최고의 정객

17세기 중, 후반의 조선사회는 양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치유된 상황에서 예론과 북벌론, 호패법, 호포법, 양역변통론, 주전론(鑄錢論) 등의 사회정책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간의 정책 대립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당시 가장 쟁점이 되었던 사회문제는 군제(軍制)의 개편과 군역의 폐단에 대한 극복 방안이었다. 군제에 대한 최석정의 입장은 진관체제를 기간으로 하는 조선전기 향병 중심 방어책의 기반 위에서 자강(自强)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최석정은 군문(軍門)의 증설로 인해 파생되는 양역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1708년에 올린 <진시무사조차(陳時務四條箚)>에서, 최석정은 양역의 폐단으로 이웃이나 친족이 군역을 지게 되는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인징, 족징의 폐단을 언급하고 ‘혁인족이제민원(革隣族以除民怨)’할 것을 주장하였다.

 

최석정은 이어서 전폐(錢幣)를 바로 잡아 백성의 곤궁함을 해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전폐의 시행은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구도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하루 빨리 혁파해야 한다고 하였다. 최석정은 군역의 방안으로 호포(戶布)와 정전(丁錢)을 시행하는 것에도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최석정은 호포법의 시행으로 각 호에 변칙적으로 친척들이 들어가는 것을 경계했으며, 정전법 또한 백성의 유망을 촉진시켜 족징의 폐단을 일으키는 점을 우려하였다.

 

이외에도 숙종대 후반 적극 추진되던 산릉의 역사(役事)에 대해 백성이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는 무리라고 판단하여 이를 점차 줄여갈 것을 주장했다.

 

최석정의 경세관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경향은 현실 가능한 정책을 점진적으로 추진하려 한 점이다. 특히 그가 제시한 정책들은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추진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무 행정 담당자로서 크게 정책을 구상하고 실무적으로 이를 실천해 간 것이었다.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올린 시폐 10조목에는 당시의 사회경제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주요한 내용은 직관(職官)의 효율적인 운영, 선거(選擧) 제도의 개선, 전결(田結)의 총수 조사와 합리적인 부세(賦稅) 부과, 필요 없는 군문(軍門)의 혁파 등이었다. 대체적으로 최석정의 경세관은 현실가능한 정책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며 사회의 모순점을 해결해 나가는데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17세기 후반 소론의 정치적, 사상적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최석정의 학문 형성의 기반과 학문의 특징, 경세관 등을 살펴보았다. 최석정은 당시의 주류적 흐름이었던 예학이나 존주대의론(尊周大義論)과 같은 명분론이나 성리철학의 이론적 심화의 측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성리학의 실천성 문제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성리학을 보완할 수 있는 천문, 수학, 서학 등 다양한 학문 조류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진적이고 현실 가능한 사회정책들을 수행해 나갔다.

 

최석정은 숙종대 소론의 핵심 인물로 10번 이상 정승의 위치에 있으면서 국정을 이끌어갔던 최고의 정객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치적 비중이나 관료로서의 역할에 비해 그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기반이 소론이었고, 영조대 이후 노론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된 것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여겨진다.

 

숙종 후반 10여 차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내외 정치 현안의 중심에 섰던 인물 최석정. 최석정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히 이어졌으면 한다

글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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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 (崔錫鼎)

 

이칭별칭 : 자 여시(汝時), 여화(汝和) / 호 존와(存窩), 명곡(明谷) /

              시호 : 문정(文貞)

출생 - 사망 : 1646년(인조 24) ~ 1715년(숙종 41)

본관 : 전주(全州)

저서(작품) : 예기유편, 명곡집36권

대표관직(경력) :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가족관계 : 할아버지 최명길(崔明吉) / 아버지 최후량(崔後亮)

 

정의

1646(인조 24)∼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기남(起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명길(鳴吉)이고,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후량(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응교 후상(後尙)에게 입양되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9세에 이미 ≪시경≫과 ≪서경≫을 암송했고, 12세에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했고,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翰林會薦)에 뽑혀 사관으로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동안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비판한 오도일(吳道一)을 변호하다가 삭직되기도 하였다. 또한 1676년(숙종 2)의 응지소에서는 윤휴(尹鑴)를 비난하고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하다가 삭출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일단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후 1689년 기사환국까지 승정원승지·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과 제학을 역임하였다. 1686년에는 조선인이 청나라의 국경을 넘어들어간 사건이 국제 문제로 비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호조참판으로서 부연(赴燕)하기도 하였다.

 

1685년에는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명재의서 明齋疑書≫가 이이(李珥)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윤선거(尹宣擧)의 강도(江都) 사건이나 이이의 입산(入山)한 잘못은 똑같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2년 후 노소분당이 심각해지자 윤선거를 옹호한 나양좌(羅良佐)의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노론세력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장희빈(張禧嬪)에 대한 총애 문제를 들추어낸 이세구(李世龜)를 옹호하고 청류(淸流)로 지칭되는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들을 힘써 선발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안동부사·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물러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에 임명된 뒤에는 서얼 출신을 삼조(三曹)에 소통하자는 건의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7년 우의정에 올랐고,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의 일부 서용을 주장하는 입장을 개진, 노론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단종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 논의가 일어나자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고 반대하였다.

 

이 해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賜死)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또한 붕당 문제보다 도학(道學)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로 파직, 유배의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 해 석방되어 진천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입상(入相)하였다. 이 후 노론세력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면서 의리론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을 공격하자 이를 변호하였다.

 

또 임보(林溥)·이잠(李潛)의 옥사에서는 왕세자의 처지에 문제되지 않도록 안옥(按獄)하여 노론의 비난을 샀으며, 여기에 민암(閔黯)의 아들까지 사형에 처한 것은 비법적 처사라고 비난했던 사실까지 들추어지고, 그의 저서 ≪예기유편 禮記類篇≫가 주자의 주와 다르다며 비판받는 등 노론의 집중 공격을 받자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퇴하였다.

 

1715년 기사(耆社 :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 해 사망하였다. 청주 대율리(大栗里)에 장례지냈으며, 뒤에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했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야승 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 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 明谷集≫ 36권이 현재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현종실록』『숙종실록』『국조방목』『명곡집』『곤륜집』

           『연려실기술』『청선고』『당의통략』

 

 

구수략 (九數略)

 

조선 후기의 문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수학책.

내용4권 2책. 목판본. 

갑·을·병·정(부록)의 4편으로 엮어졌다. 갑편은 주로 가감승제(加減乘除)의 4칙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 을편은 이들 기본연산(基本演算)을 다룬 응용문제, 병편은 개방(開方)·입방(立方)·방정(方程) 등에 관해서, 그리고 정편은 문산(文算)·주산(籌算) 등의 새로운 산법 및 마방진(魔方陣)의 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원)영의정 최석정(崔錫鼎) 묘-전주최씨-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37-15

 

최석정[崔錫鼎, 인조 24년(1646)∼숙종 41년(1715)],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 완성부원군 지천 최명길(崔鳴吉)의 손자, 한성좌윤 완릉군 최후량(崔後亮)의 아들로,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신동이란 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남구만(南九萬)·이경억(李慶億)의 문인으로, 박세채(朴世采)와 종유하면서 학문을 닦아, 초시에 장원, 진사시에 장원, 동시에 생원시 합격,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발령받아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관직생활 초기는 여러 이유로 삭직과 사퇴를 거듭하여 순탄치 않았으나 1689년 기사환국까지 승정원승지·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과 제학·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으로 안동부사·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물러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의 사형을 주장하였고, 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를 거쳐 1697년 우의정에 올라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단종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을 반대하였고, 인현왕후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하였으며, 또한 붕당문제보다 도학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로 파직, 유배의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해 석방되어 진천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이후 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입상(入相)하였으며,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퇴하였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하였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적 관료의 성격이 강하여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하였던 행정가였으며,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특이한 이력은 세계 최초로 '9차 직교라틴방진'을 발견하는 등 새롭고 독창적 내용이 담긴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수학책을 펴낸 수학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2013년 10월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헌정 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지천 지산서원·오창 송천서원에도 배향되었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37-15로 할아버지 지천 최명길 묘역에서 200m쯤 더 올라가서 오른쪽 산록에 있다. 그리고 최석정 묘 바로 뒤에는 11대조인 고려 완산군 최재(崔宰)의 묘가 연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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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방진 (魔方陣 magic square)

 

방진(方陣)·마법진이라고도 하는데,영어의 'magic square'를 번역한 말이다. 정사각형의 1변에 나열된 수의 개수 n에 따라서 n방진, 즉 3방진, 4방진, 등이라 한다.

 

합은 3방진에서 15, 4방진에서는 34, 5방진에서는 65가 되며, n방진에서는 n(n2+1)/2가 된다.

 

방(方)은 정사각형, 진(陣)은 나열한다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3,000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우(禹)가 낙수(洛水)의 치수공사를 할 때 나타난 거북의 등껍데기에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을 낙도(洛圖)·하도(河圖)·낙서(洛書) 등이라 하였고, 이것과 오행설(五行說)을 결부시켜 일백수성 이라거나 사록목성(四綠木星)이라 하여 운세 판단에 응용하기도 했다.

 

 

마방진이란 그림과 같이 가로, 세로, 및 대각선에 있는 각각의 합이 같도록 배열한 것을 말한다.마방진은 가로, 세로 3×3 형의 방진에서 4×4, 5×5, 6×6 …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 수 있다.

 

먼저, 빈칸이 9개 있는 정사각형을 만들고(그림 A),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1, 2, 3, … 9까지의 숫자를 그림B와 같이 쓰고, 정사각형의 바깥쪽에 있는 각 숫자를 그 줄에서 가장 먼 자리에 있는 칸으로 옮겨쓴다.

 

즉, 1은 9 바로 위에, 3은 7옆에 그리고 9 는 5 위에 오도록 한다

 

 

 

4×4 형은 가로, 세로 4줄로 된 칸을 만들고 그림처럼 대각선 2개를 긋는다. 그리고 각 칸마다 A, B, C…와 같이 이름을 붙인다. 먼저, 1을 A칸에 둔다.

 

그러나 대각선이 있기 때문에 쓰지 않고 그대로 둔 채 2를 다음 B칸에 3을 C칸에 써 넣는다.

 

6, 7은 F, G칸에 들어가야 하지만 대각선이 있기 때문에 그만 두고, H에 8을 넣고, I에 9를 넣는다. J, K에는 10, 11이 들고, N, O에 14, 15를 넣는다.

 

다음은 대각선상에 있는 칸을 메워 간다. P에 1을 A에 16을 둔다. 이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5, 14, 13 …과 같이 거꾸로 D에 13을 F, G, J, K, M에 각각 11, 10, 7, 6, 4를 채우면 4×4 형의 마방진은 완성된다.

 

 

 

5×5 형의 마방진도 3×3 형의 같은 방법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식으로 7차, 9차의 마방진도 만들 수 있다. 마방진의 '方'자는 정사각형을 나타내는 말이다.

 

9차 마방진의 예 <출처 : 위키피디아>

 

정사각형에 오른쪽과 같이 1부터 9까지의 수를 대입하면 가로,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15로 같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것에 신비로움을 느껴 때로는 마귀를 쫓는 부적으로도 사용하게 되었고, 서양에서도 매직 스퀘어(Magic Square)란 용어가 사용되었다.

 

마방진에 쓰이는 숫자는 중복하여 쓰면 안 되고, 자연수를 꼭 한 번씩만 써야 한다. 이미 완성된 마방진을 보면 간단한 것 같으나 실제로 시도해 보면 매우 어렵다.

 

 

 

마방진의 기원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약 3000년 전 중국의 우(禹)나라의 우왕(禹王)이 강의 치수 공사(治水工事)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처음으로 생각해 내었다고 한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결과 매우 큰 수의 마방진까지도 만들어 내었다. 일반적으로 홀수 개의 마방진은 다음과 같은 규칙으로 만들 수 있다. 화살표와 같이 진행하여 작성한다. 5×5의 마방진을 예로 알아본다

 

 

 

마방진이란 일반적으로 1에서 n2까지의 자연수를 n행(가로줄), n열(세로줄)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중복없이 배열하여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의 선에 따른 수의 합이 전부 같게 되도록 만든 것을 말한다.

 

여기서 정사각형의 한 변에 배열된 자연수의 개수 n에 방향의 선에 따른 수의 합은 3방진은 15, 4 방진은 34, 5방진은 65, …, n방진은 n(n2+1) / 2 이다.

 

우리나라에도 30세에 진사 시험에 수석 합격하고, 그 후 부제학, 이조참판, 우의정, 좌의정, 대제학 그리고 마침내는 영의정 등 왕조의 주요 직책을 모두 거쳤던 수학자 최석정(1646∼1715)이 다음 그림과 같은 마방진 비슷한 것을 창안하여 그의 수학 저서인 「구수략」(九數略)에 실었다.

 

1에서 30까지의 수를 한 번씩만 사용하여 만든 마방진으로, 각 육각형의 수의 합은 같다.

 

 

 

마방진(魔方陳)이란 가로, 세로, 대각선 위의 합이 모두 같아지도록 수를 나열한 것이다. 여기서, 방(方)은 정사각형, 진(陳)은 나열한다는 뜻이다. 마방진은 마법진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영어의 magic square를 번역한 말이다.

 

기원전 5000년경 하(전설 속의 중국의 고대 왕국)의 우왕이 계속되는 황하의 범람을 막기위해 제방 공사를 시작할 때, 한 마리의 거북이 흘러 내려왔는데 그 거북의 등에 마방진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 거북이 흘러 내려온 이후 홍수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마방진에 관한 가장 오래 된 이야기이다. 그 후, 마방진은 신비한 전설과 같이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의 상인들에 의해 서아시아, 남아시아, 유럽으로 전해졌다. 16세기에는 독일인 뒤러의 동판화 '멜랑콜리아'에 마방진이 그려진 것이 동기가 되어 전 유럽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럽에는 신비주의라 불리는 사상이 있어, 그 사상에서 기인한 점성술이라든가 연금술이 현재의 과학과도 같이 연구되었다. 멜랑콜리아 1514년에 그려진 동판화로 그림 속의 4방진은 유럽의 방진으로서는 가장 오래 된 부류에 속한다.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

멜랑콜리아 에는 생각에 잠겨 있는 수학자의 뒤에 마방진이 걸려 있다. 왜 이 그림에 마방진을 그려 넣었을까? 거기에는 먼저 고대 그리스의 의학에서 시작된 '사성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성론은 인간의 몸 안에는 네 종류의 액체가 흐르고 있는데, 그 중 어느 것이 더 많은 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이 정해진다고 하는 이론이다.

 

즉, 혈액이 많은 '다혈질'의 사람은 활동가, 담즙이 많은 '담즙질'의 사람은 변덕쟁이, 점액이 많은 '점액질'의 사람은 끈질긴 성격의 사람, 흑담즙이 많은 '우울질'의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성론에 따라, 창의적인 사람, 즉 수학자 등은 우울질의 인간으로 보고, 이들은 측량, 건축, 연금의 신인 토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색에 열중하여 우울질이 높아지면, 이러한 토성의 영향을 지워 버리고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목성의 보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점성술사는 마방진을 별과 연관지어 3방진은 토성, 4방진은 목성, 5방진은 화성, 6방진은 태양, 7방진은 금성, 8방진은 수성, 9방진은 달의 상징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