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 표씨(新昌表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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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씨(表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성씨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신창(新昌)ㆍ양주(楊洲)ㆍ죽산(竹山)ㆍ충주(忠州)ㆍ공주(公州) 등 37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신창(新昌) 단본(單本)으로 알려져 있다.
신창 표씨(新昌表氏)는 고대(古代) 오계시대(五季時代ㆍ오대의 문란해진 시대를 일컬음)에 후주(後周)의 이부상서(吏部尙書) 표대박(表大?)이 고려 광종 11년(960년) 장(張)ㆍ방(方)ㆍ위(魏)ㆍ변(邊)ㆍ윤(尹)ㆍ진(秦)ㆍ감(甘)ㆍ황보(皇甫) 등 8성과 함께 고려에 들어와 귀화함으로써 연원(淵源)이 이루게 되었다.
▲ 충남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학선산에 자리한 신창 표씨 유허비.
표대박(表大?)의 세 아들인 덕린(德麟)은 고려조(高麗朝)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덕귀(德龜)는 찬성사(贊成事)에, 성익(聖翼)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어, 후손들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ㆍ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라 온창백(溫昌伯ㆍ온창은 신창의 옛 지명)에 봉해인 인려(仁呂)를 중시조(中始祖ㆍ일세조)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경북 상주시 모동면 금천1리 백화산 아래 자리한 2세 표광원(表光遠)의 묘는 현존하는 제일 윗대의 묘이다.
▲ 경북 상주시 모동면 금천1리 백화산 아래 자리한 3세 표을충(表乙忠)의 묘.
인려(仁呂)의 아들 2세 광원(光遠)은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내고, 3세 을충(乙忠)은 군기시 소윤(軍器寺少尹)을, 4세 하(河)는 조선조(朝鮮朝)에서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 (上)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 등을 제향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공의로 1693년 건립된 경북 상주시 공검면 역곡리 임호서원(林湖書院). (中)표연말 등 6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1701년 창건한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귀천서원(龜川書院)은 1869년 훼철되어 1983년 복원하였다. (下)상주시 함창읍에 자리한 표연말의 묘.
신창 표씨(新昌表氏)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5명, 호당 1명, 청백리 1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감찰(監察)을 지낸 5세 계(繼)의 아들 연말(沿沫ㆍ?~1498)이다. 그는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성종 2년(147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478년 봉교(奉敎)로 신임 관리로부터 주연의 대접을 받았다가 파직되었다. 1482년 복직해 14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고, 1486년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ㆍ시독관(侍讀官)ㆍ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연산군 1년(1495년) 응교(應敎)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듬해 직제학(直提學)으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했으며, 그 후 승지(承旨)ㆍ대사간을 지냈다. 소릉(昭陵ㆍ문종비 현덕왕후릉) 추복(追復)에 관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行狀)으로 유배 도중 은계역(銀溪驛)에 이르러 죽었으며,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유호인(兪好仁) 등과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뒤에 신원(伸寃)되고 함양(咸陽) 귀천서원(龜川書院)과 함창(咸昌)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연말(沿沫)의 아들 빙(憑ㆍ?∼1524)은 자는 경중(敬仲), 호는 퇴우(退憂)로 중종 8년(1513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상관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1515년 김안로(金安老)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정언, 이듬해 수찬에 이어 다시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해 의정부ㆍ이조ㆍ예조ㆍ성균관을 통틀어 50명의 사유(師儒)를 간택하였는데 김안로ㆍ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에 뽑혔으며, 노산군(魯山君ㆍ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울 것을 진언하였다. 1517년 헌납(獻納)이 되었고, 그뒤 교리(校理)를 거쳐 1520년에는 지평(持平)이 되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23년 전한(典翰)이 되어 응교(應敎)를 겸하였다. 그해 검상(檢詳)에 임명되었으나 경연(經筵)의 3품관이 5품직에 임명됨은 부당하다는 논란이 있었으며, 왜(倭)와의 싸움에서 패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패군지사추고경차관(敗軍之事推考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충청도에 다녀와 사인(舍人)이 되었다. 1524년 다시 전한이 되었고, 이어 집의(執義)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헌(憲)은 자는 숙도(叔度), 호는 심안당(審安堂)으로 선조의 어전통사(御前通事)로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고 접연(接宴)할 때 임기응변적 통역과 조치로써 왕의 곤경을 모면케 했으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에 피란 중인 왕이 명나라에 가려 함을 간(諫)하여 그만두게 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헌(憲)의 아들 정로(廷老)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宣祖) 때 명(明)나라에서 사신이 오게 되자 정로(廷老)는 원접사(遠接使)의 역관(譯官)이 되어 평안도 의주(義州)까지 마중을 나갔다. 명나라 사신은 연회석상(宴會席上)에서 은행(銀杏) 알을 불에 구워 먹다가 문득 이쪽의 실력을 떠 볼 생각으로 ‘은행껍질 속에는 푸른 구슬이 감추어져 있구나(銀杏甲中藏碧玉)’라고 시 한 구(句)를 읊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로(廷老)는 촌각(寸刻)을 두지 않고 ‘석류껍질 안에는 주사(朱砂ㆍ붉은 모래)가 점점이 박혀 있구나(石榴皮裡點朱砂)’라고 화답하니 그들은 역관(譯官)의 실력이 이렇듯 우수하니 원접사(遠接使)로 온 사람의 실력이야 어떠하겠느냐면서 그때부터 공손해졌다고 한다. 통사(通事)를 거쳐 광해군 8년(161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정준(廷俊)은 한미(寒微)한 집안에 태어나 인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 만호(萬戶)ㆍ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했다. 뒤에 현감(縣監)에 이르렀으며, 당시 대신인 김상헌(金尙憲)과 절친했다. 인조 18년(1640년) 척화신(斥和臣)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김상헌(金尙憲)이 이규(李?)의 무고(誣告)로 다시 잡혀갈 때 심양(瀋陽)에까지 수행했으며, 후에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에 의해 그의 사적(事績)이 씌었다.
▲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과 아들 표빙(表憑)의 유묵.
▲ 경기도 남양주시 천마산 아래 정경부인 회진 임씨(會津林氏)와 합장된 심안당(審安堂) 표헌(表憲)의 묘.
그 외 인물로는 참봉(參奉)을 지낸 근석(根碩)ㆍ인(仁)ㆍ명서(明瑞)와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받은 광수(光守)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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