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 인씨(喬桐印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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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나타난 인씨(印氏)의 본관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ㆍ충렬왕의 비)를 배종(陪從)하고 들어와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원(元)나라 사람 후(候)를 시조(始祖)로 하는 ‘연안 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씨(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교동 인씨(喬桐印氏)는 중국 계통으로 ‘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 정(鄭)나라 목(穆)의 증손 7명(세칭 7목)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 조부(祖父)의 이름인 ‘자인(子印)’의 ‘인(印)’ 자를 따서 성(姓)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段)의 후손 서(瑞)가 진(晉)나라 풍익(馮翊) 땅의 대부(大夫)로서 신라 제14대 유례왕(儒禮王) 14년(297년)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아찬(阿?)과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이르러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후 33세손 빈(?)이 자는 봉약(封若), 호는 초당(草堂)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고려 인종(仁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ㆍ교수는 교동의 옛 지명)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교동(喬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옹패설(?翁稗說)’에 의하면 빈(?)은 예종ㆍ인종간의 명신현사(名臣賢士)로서 문장과 행동이 당대 선비의 으뜸이었다. 그의 오언율시(五言律詩)가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및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등에 실려 있는데, 이인로(李仁老)와 서거정(徐居正)은 그를 높이 평가하여 이태백(李太白)과 소동파(蘇東坡)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경기도 고양군 남쪽 15리 지점 호수가에 초당을 짓고 살았다고 전하며. 1506년경에 형조판서 채소권(蔡紹權)이 고증하기를, “인빈공께서는 고려의 학사(學士)로서 함창(경북 상주의 고을)에 귀양오셔서 돌아가시매 그 후 자손들이 함창에서 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 인빈(印?)의 재실인 경북 상주시 이안면 석현리 추모재(追慕齋).
빈(?)의 아들 완(完)이 고려 때 문과(文科)에 올라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손자 규(珪)가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 증손(曾孫) 현원(玄元)이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ㆍ이군의 하나인 종3품 벼슬), 그리고 현손(玄孫) 정(貞)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빈(?)의 9세손 당(?ㆍ?~1356)은 고려 충목왕 1년(1345년) 밀직사(密直使)를 지낸 후, 서북면 영만호(西北面令萬戶)로서 충정왕 3년(1351년) 이권둔(李權屯)과 함께 자연도(紫燕島)ㆍ삼목도(三木島)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서강(西江)에서 막았다. 공민왕 3년(1354년)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져 내란 중인 원나라에 원군으로 파견되었다가 평정된 후 돌아와 전라도 만호(全羅道萬戶)가 되어 왜구를 격파했고, 이듬해 정남만호(征南萬戶)로 원군(元軍)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했으며, 1356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이 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쌍성(雙城)을 수복, 이어 파사부(婆娑府)의 3참(站)을 무찔러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나 원제(元帝)가 고려의 국경 침입을 구실삼아 80만 대군으로 문책하겠다고 위협해 오자, 이에 당황한 공민왕에 의해 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당했다. 묘는 개성 북산 효청동에 있다.
당(?)의 아들 안(安)은 공민왕 3년(1354년) 원나라 각지에서 봉기한 한족(漢族)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원나라의 요청으로 군사를 보낼 때 이에 동원된 장졸(將卒)들에게 작질(爵秩)을 내렸는데, 이때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이해 7월 유탁(柳濯)ㆍ염제신(廉悌臣) 등과 함께 출정하였다가 11월 먼저 돌아와 고려군의 전투상황을 보고하였다. 공민왕 11년(1362년)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전 해에 홍건적이 경성(京城ㆍ지금의 개성)을 함락시켰을 때 항복한 죄로 감찰사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고, 자손은 금고되었다.
안(安)의 아우 해(海)는 공민왕 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고 우왕 3년(1377년) 1월 양광도 부원수(楊廣道副元帥)가 되었다. 2월 왜가 경양(慶陽)에 침구하고 드디어 평택현에 들어오매 나아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월 왜가 또 경양과 안성군을 침범하니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겁내고 싸우지 못하므로 부원수로서 양천원수(陽川元帥) 홍인계(洪仁桂)를 불러 후퇴하여 가천역(加川驛)에 주둔하게 하고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맞아 치려고 하였으나, 적이 알고 다른 길로 갔다. 11월 청주옥(淸州獄)에 내려져 이산(伊山)의 패군한 죄를 국문당하였다. 1383년 9월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을 침구하고 또 회양부와 평강현을 함락시키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西海道)의 정병(精兵)을 징발하여 호위하게 하며 전정당상의(前政堂相議) 남좌시(南佐時) 등과 함께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김화에서 패전하였다.
▲ 양광도 부원수(楊廣道副元帥) 인해(印海)가 왜구와 싸운 기록이 실린 ‘동사강목(東史綱目)’ 권16 우왕 3년(1377년) 2월조(左)와 5월조(右).
한편 당(?)의 손자 원보(原寶)가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함산군(咸山君)에 봉해지고 우왕 5년(1379년) 서북면 체찰사(西北面體察使)을 역임했고, 중보(重寶)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한편 원보(原寶)의 아들 인경(仁敬)은 자는 성직(聖直), 호는 아천(雅川)으로 조선 태종 때 통훈대부 삭주부사(通訓大夫朔州府使)를 지냈으며, 5남 진(珍)이 단종 1년(1453년) 무과에 급제한 방목(榜目)에 진(珍)의 아버지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중수(重秀),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저(著), 우왕(禑王) 때 양광도 부원수(楊廣道副元帥)가 되어 왕안덕(王安德)ㆍ홍인계(洪仁桂) 등과 함께 영주(寧州)ㆍ아주(牙州)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공을 세운 관(琯) 등이 있다.
조선조에 와서는 연산군 12년(1506년) 장령(掌令)으로 증조(曾祖) 원보(原寶)의 신원(伸寃)을 위해 누차 상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퇴관(退官)하고 귀향한 삼권(三權),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임진왜란 때 정난이등공신(靖難二等功臣)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용전(勇戰)하다 전사한 발(潑), 부총관(副摠管) 이헌(以憲), 그리고 참판(參判)을 역임한 명조(命朝)ㆍ근영(瑾英)ㆍ석신(錫信)ㆍ상혁(相赫) 등이 유명하였다. 특히 교동 인씨 중 유일한 문과급제자인 석보(錫輔)는 고종 때 경과별시(慶科別試)에 급제했으며, 문명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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