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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연원

금씨(琴氏)는 중국(中國) 위국(衛國ㆍ지금의 직예성 대명도 지방)에 연원(淵源)을 두고 주(周)나라 경왕(景王ㆍ재위 기원전 544∼520) 때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금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이 문장과 도학(道學)으로써 명성을 떨치고 예악문물(禮樂文物)과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법치(法治)를 보좌하였다고 하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개국 삼한벽상공신(高麗開國三韓壁上功臣)에 오른 태사(太師) 금용식(琴容式ㆍ호는 동원군)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금응(琴應)으로부터 금용식(琴容式)까지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고, 또 금용식(琴容式)으로부터 6세 내지 8세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명종(明宗)과 고종대(高宗代)에 걸쳐 명신으로 이름난 금의(琴儀)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금씨(琴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봉화(奉化)ㆍ계양(桂陽·金浦)ㆍ강화(江華)ㆍ안동(安東)ㆍ평해(平海)ㆍ문화(文化)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다 봉화 금씨(奉化琴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하며, 봉화의 옛 이름이 봉성(鳳城)인 까닭에 봉성 금씨(鳳城琴氏)라고도 하였으나 현재는 봉화 금씨(奉化琴氏)로 일원화되었다. 분파로는 부위공 미파(副尉公美派), 동래공 휘파(東萊公徽派), 군위공 계파(軍威公啓派), 장사공 척파(長沙公滌派), 관찰공 숙파(觀察公淑派), 사정공 주파(司政公柱派), 판서공 유파(判書公柔派)가 있다.

 

▲ (左)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가 졸(卒)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22권 세가(世家) 22권 고종 17년(1230년) 1월 27일 기록. (右)금학사(琴學士) 금의(琴儀)가 옥순문생(玉筍文生ㆍ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훌륭한 문하생)하였다는 ‘고려사’ 71권 지(志) 25권의 기록.

 

 

▲ 추원재(追遠齋) 입구에 자리한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의 신도비.??

 

 

‘봉화금씨세보(奉化琴氏世譜)’에 의하면 일세조인 의(儀ㆍ1153∼1230)는 금씨(琴氏) 성을 쓰는 인물 중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로, 명종 14년(1184년)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어사(御史)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고 누차 승진(陞進)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ㆍ문관의 종2품)ㆍ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 등을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한림별곡(翰林別曲)’에는 ‘금학사(琴學士)’로 되어 있으며, 고종 7년(1220년)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으로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으며, 고종 17년(1230년) 78세로 졸하니 왕이 김포(金浦) 봉황산(鳳凰山)에 예장(禮葬)을 명(命)하고 영렬(英烈)이란 시호(諡號)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김포의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그의 묘가 장릉(章陵ㆍ고려 원종의 능) 지역인 교산(喬山)의 금표내(禁標內)에 들어간다고 하여 영조 3년(1727년)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하눌재(下訥齋)에 설단(設壇)하고 매년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금의(琴儀)의 자는 절지(節之)요, 초명은 극의(克儀)로, 본래 봉화현인(奉化縣人)이나 후에 왕이 김포에 적(籍)을 내렸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용식(容式)의 후예로 생김새가 기이하고 재기와 도량이 컸다. 과거 급제 전에 청도(淸道)의 감무(監務)가 되었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니, 백성들이 가리켜 철태수(鐵太守)라 했다. 명종 14년(1184) 과거에 합격, 벼슬길에 들었다. … 금의(琴儀)는 최충헌(崔忠獻)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 … 강종(康宗)이 즉위함에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책명할 때 금나라 사신이 궁궐의 정문으로 들어오고자 하거늘 조정에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서로 힐난했다. 왕이 금의(琴儀)에게 명하여 금나라 사신을 설득케 했다. 금의(琴儀)가 금나라 사신에게 ‘만약 그대나라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어느 문으로 들어올 것인가’ 하고 물었다, 금나라 사신은 ‘황제의 출입이 정문이 아니고 어느 문이겠느냐’하고 답했다, 이 말을 받아 금의(琴儀)가 ‘그렇다면 정문은 천자의 출입문인데 감히 신하가 되어 정문으로 들어옴이 옳겠는가’ 하니, 금나라 사신이 크게 탄복하여 주장을 굽히고 서문으로 들어왔다”(고려사 기록)

 

▲ 경북 봉화군 상운면 북지리 추원재(追遠齋)와 1세조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의 단소.

 

‘봉화금씨세보(奉化琴氏世譜)’에 의하면 ‘영렬공(英烈公) 의(儀)의 본관이 김포(金浦)인데 그 자손은 모두 봉성(鳳城)으로 관적을 했으니 이것이 어느 대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였고, 또 ‘시조 금용식(琴容式)으로부터 금의(琴儀)에 이르기까지 본관을 봉성(鳳城)으로 하다가 의(儀)가 김포(金浦)로 사관(賜貫)을 받았으면 그 후손은 마땅히 김포(金浦)로 따라야 할 것인데 어째서 봉성(鳳城)으로 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의(儀)가 김포(金浦)로 적을 받았다가 당대에 다시 봉성(鳳城)으로 복관을 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의(儀)가 중앙 정계에 뿌리를 굳게 내린 후부터 고려조의 명문으로 등장한다. 그의 맏아들 기(耆)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둘째아들 규(?)는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넷째 아들 휘(暉)는 좌우위 대장군(左右衛大將軍), 다섯째 희(?)는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르렀다. 특히 고려조(高麗朝)에서 무신정권(武臣政權)의 핵심인물인 최우(崔瑀)에게 죽음으로 항거했던 휘(暉)는 노지정(盧之正)ㆍ김희제 등과 함께 억울하게 손위 당한 제21대 희종(재위기간 1204∼1211)의 복위를 모의하다 좌절한 절신(節臣)이며, 규(?)의 7세손 훈(薰)은 원종(元宗) 때 원(元)나라에 가서 제주도(濟州道)에 웅거한 삼별초(三別抄)의 토벌을 위해 원병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 금의(琴儀)가 내려와 터전을 잡고 지었다고 전하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 봉화 금씨 군위공 종택(경북문화재자료 제495호)은 수차 증개축되었으며, 봉화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인 ‘효정’이 남아 있다. 12대손인 군위공 금계(1439~1497)는 군위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이성계(李成桂)와 통혼(通婚)하여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왕자의 난에 휘말려 곤경에 처한 후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까닭에 겨우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는 데에 그쳤다.

의(儀)의 후손 인배(仁誹)가 태조의 넷째 아들 회안대군(懷安大君ㆍ芳幹)을 사위로 삼아 국혼을 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朴苞)의 거짓 밀고를 믿은 방간(芳幹)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방원에게 패하여 귀양가게 되자 처족인 금씨(琴氏)도 이의 영향을 받아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 1564년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가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청량산 축융봉 암벽 아래 세운 고산정(孤山亭ㆍ경북유형문화재 제274호)은 원래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불렀다. 퇴계 이황이 청량산 갈 때 자주 들려 빼어난 경치를 즐기며 읊은 시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조에서 맨처음 벼슬길에 오른 유(柔)는 호는 청원정(淸遠亭)으로 태조 6년(139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ㆍ대사성(大司成) 등 여러 청직(淸職)을 역임하고 세종(世宗) 때 전라감사(全羅監司)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하였으며, 성품이 청백해서 그가 호남을 안찰(按察)할 때 탐학한 수령들은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그의 아들 이영(以詠)은 문음(門蔭)으로 사관이 되었고, 세종 29년(1447년) 북부녹사(北部錄事)로서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단종 즉위년(1452년)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로 재직중에 기생을 간음한 일로 사헌부로부터 “국상중에 간음하였다.”는 탄핵 뒤 변진에 입거되었고, 이듬해 자원부처(自願付處)되었다. 세조의 즉위와 함께 복직되어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ㆍ청주판관을 역임하였고, 성종 3년(1472년) 승문원 교리로서 예종부묘사(睿宗?廟事)에 집사로 참여하여 그 노고로 1계를 가자(加資)받았다.

 

▲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의 시문집 ‘성재집(惺齋集)’과 1560년 11월부터 일기형식으로 기술한 ‘성재일기’.

 

난수(蘭秀ㆍ1530∼1604)는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ㆍ고산주인(孤山主人)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16년(156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제릉참봉(齋陵參奉)에 이어 장례원 사평(掌隸院司評)을 지내고 낙향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596년 성주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9년 봉화현감(奉化縣監)을 하루만에 사임하고 귀가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예안(禮安)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祭享)되었다.

 

▲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의 묘와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성성재종택(惺惺齋宗宅ㆍ경북문화재자료 제264호).

 

보(輔ㆍ1521~1585)는 자는 사임(士任), 호는 매헌(梅軒)ㆍ백률당(柏栗堂)으로 첨지중추부사 원수(元壽)의 아들이다. 7세에 이미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고, 성장함에 따라 문장과 필법이 크게 진보하여 인종 1년(154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인종(仁宗)이 죽고 간당(奸黨)이 사화(士禍)를 일으키자 대과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고 이황에게 수학하였으며, 남계(南溪)에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주서(朱書)를 힘써 읽었으며, 이후에 온계(溫溪)의 송내(松內)로 이사하여 여러 선비와 사귀며 더욱 학문에 힘썼다. 글씨가 극히 정묘(精妙)하여 이숙량(李叔樑)ㆍ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퇴문삼필(退門三筆)이라 불리었으며, 퇴계묘비(退溪墓碑)ㆍ도산신판(陶山神版) 등은 그의 작품이다. 저서가 많았으나 병화에 모두 소실되었고, 다만 ‘매헌집(梅軒集)’ 1질만 전한다.

▲ 매헌(梅軒) 금보(琴輔)의 시문집인 ‘’매헌집(梅軒集)‘과 그가 60세 때 지은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수운정(水雲亭ㆍ경북문화재자료 제433호).

만석군 부자였던 응석(應石ㆍ1508∼1583)은 평생 이웃을 돕는 일에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해 흉년(凶年)에는 동구 밖 느티나무 밑에 솥을 걸고 죽을 끓여 인근의 굶주린 백성(百姓)들을 구했으며, 무료로 땅에 뿌릴 씨도 나누어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그것을 알게 된 퇴계(退溪) 이황(李晃)은 그의 선행을 감사하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정자를 ‘종선정’이라 부르고 직접 정자 편액(編額)을 써 주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주부(主簿)를 지낸 금응석(琴應石)의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주민들이 세운 경북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종선정(種善亭ㆍ경북유형문화재 제264호). 현판 글씨는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응협(應夾ㆍ1526~1589)은 자는 협지(夾之), 호는 일휴당(日休堂),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아버지는 예안훈도(禮安訓導) 재(梓)이다. 명종 10년(155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 7년(1574년) 그의 행의(行義)가 조정에 알려져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을 제수받았다. 다시 경릉(敬陵)ㆍ창릉(昌陵)의 참봉,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587년 조정에서는 그를 유일(遺逸)로 뽑아서 6품직을 초수(超授)하고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제수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595년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일휴집(日休集)’이 있다.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이 후진 교육을 위해 지은 별당인 경산시 대동 일휴정(日休亭). 원래 경북 안동시 예안면 오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4년 11월 현위치로 이건해 복원하였다.

 

 

응협(應夾)의 아우 응훈(應壎ㆍ1540∼1616)은 자는 훈지(壎之)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유성룡(柳成龍)ㆍ조목(趙穆)과 교우하였다. 선조 3년(1570년) 사마시에 합격, 1594년 학행에 의하여 영의정 유성룡 등의 천거를 받아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제수되었다. 그뒤 영춘현감과 양천현감 등을 역임하고 1601년 의흥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유성룡과 조목의 요청에 따라 사직하고 ‘퇴계선생문집’ 간행실무자로 참여했다. 외관시에는 선정으로 명망이 높았고, 퇴관해서는 후진교육에 전력해 큰 성과가 있었다.

한말(韓末) 석주(錫柱ㆍ1857∼1920)는 일명 종헌(鍾憲)ㆍ종응(鍾應)ㆍ석조(錫祚)로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경북과 충청남북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6년 경북 봉화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봉화ㆍ예안ㆍ영주ㆍ순흥풍ㆍ풍기ㆍ안동의 의진과 공동작전을 펴 왜적을 공략하도록 주선하였다. 특히, 유인석(柳麟錫) 의진의 소토장(召討將)으로 있으면서 1896년 음력 6월 12일 낭천(狼川ㆍ지금의 강원도 화천) 전투에서 전사한 서상렬(徐相烈)이 이끈 의진과 제휴하여, 7대의진의 회맹(會盟)을 성립시켜 연합적 의병투쟁에 노력하였다. 그의 진중일기가 몇 해 전에 발견돼 당시 의병운동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1980년 건국포장과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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