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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장흥 위씨(長興魏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장흥 위씨(長興魏氏)의 연원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晉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唐)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경(魏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위경(魏鏡)의 동래설(東來說)은 또 다른 설(說)이 있는데,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638년) 왕(王)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도 한다.

위경(魏鏡)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侯)ㆍ아찬(阿?)ㆍ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군(懷州君ㆍ회주는 장흥의 옛 지명)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신라 말(新羅末)에 대각관 시중(大覺官侍中)을 역임한 창주(菖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시조 위경(魏鏡)과 1세조 위창주((魏菖珠) 등 5현조(五顯祖)를 제향하는 전남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하산사(霞山祠)와 위경(魏鏡)의 사적비.

 

 

 

문헌(文獻)에 나타난 위씨(魏氏)의 본관(本貫)은 13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는 장흥(長興) 단본으로 전한다.

위씨는 14세인 충(沖ㆍ閤門判事)이 고려왕조 복고운동에 가담했다 귀양가고 만다. 그동안 지금의 장흥읍 장원봉 밑(지금의 장흥향교와 법원 사이)에서 성촌하며 살았던 위씨들은 충(沖)의 실각과 금고로 인해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역경을 겪는다.

그후 충(沖)의 아들 15세 덕룡(悳龍ㆍ通善郞)이 장원봉 밑 구거지를 버리고 장흥읍 평화리에 정착하게 된다. 덕룡(悳龍)은 자온(自溫)ㆍ자량(自良)ㆍ자공(自恭)ㆍ자검(自儉)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로부터 위씨의 상계분파(上系分派)가 시작된다. 자온(自溫)은 능주파(綾州派)로, 자량(自良)은 관산파(冠山派)ㆍ행원파(杏園派)ㆍ여천파(麗川派)로, 자공(自恭)은 사월파(沙月派)ㆍ관북파(關北派) 또는 함흥파(咸興派)로 분파하게 된다. 그리고 자검(自儉)은 후손이 끊겼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창주(菖珠)의 5세손 계정(繼廷ㆍ?~1107)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좌보궐(左捕闕)ㆍ지제고(知制誥)를 거쳐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러, 선종 2년(1085년) 송(宋)나라 상선(商船)을 타고 몰래 출국한 왕제(王弟) 후(煦)를 왕명으로 추적하다 실패했으며, 또 이 때 왕의 총희(寵姬) 만춘(萬春)이 집을 크게 짓는 것을 규탄하였다. 선종 7년(1091년)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서 사은사 겸 진봉사(謝恩使兼進奉使) 이자의(李資義)와 함께 송(宋)나라에 다녀왔으며, 숙종(肅宗) 때 이부상서(禮吏部尙書)ㆍ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ㆍ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등을 거쳐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렀다. 1106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수태위(守太尉)ㆍ문하시중(門下侍中)ㆍ상주국(上柱國)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며, 1107년에는 수태보(守太保)에 이르자 누차 퇴임(退任)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事)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 안항파(顔巷派) 파조 위덕후(魏德厚)를 제향하기 위해 1955년 건립한 전남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운산재(雲山齋).

 

 

 

조선(朝鮮)에 와서도 위씨(魏氏)의 가문은 더욱 번창하여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는데, 20세 진사 곤(鯤)의 다섯 아들인 덕홍(德弘)ㆍ덕의(德毅)ㆍ덕관(德寬)ㆍ덕화(德和)ㆍ덕후(德厚)를 오덕(五德)이라 일컫는다. 오덕(五德)은 덕홍(德弘)의 자손은 판사파(判司派), 덕의(德毅)의 자손은 청계파(廳溪派), 덕관(德寬)의 자손은 운암파(雲岩派), 덕화(德和)의 자손은 판서파(判書派), 덕후(德厚)의 자손은 안항파(顔巷派)로 나눠지며 크게 관산파(冠山派)를 형성하고 있다.

덕의(德毅)는 자는 이원(而遠), 호는 청계(聽溪)로 선조 6년(157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도보로 선조(宣祖)를 수행하여 왕이 직접 주부(主簿)를 제수하였으며, 이어 형조좌랑(刑曹佐郎)에 임명하였다. 그후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일생을 지냈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죽천사(竹川祠)에 제향(祭事)되었다.

▲ 판서파(判書派)의 파조 위덕화(魏德和)가 불던 피리ㆍ향로ㆍ촛대ㆍ공신녹권 등과 전남 장흥군 유치면 단산리에 자리한 신도비.

 

 

 

덕의(德毅)의 동생 덕화(德和)는 자는 화지(和之)로 선조 18년(1585년) 무과에 급제한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서울이 왜군(倭軍)에 의해 함락되자 임금을 호종(扈從), 밤에 송도(松都)에 이르렀다. 피난행렬이 민가에 머물었으나 먹을 것이 없자 그가 촌부(村婦)들에게 서숙 밥을 얻어다 임금에게 바치니 선조는 그 밥을 먹으며 팔진미(八珍味)보다 낫다고 하였다. 피난행렬이 송도를 떠나 의주(義州)에 이를 때 장흥에서 3천리를 걸어서 올라온 중형 덕의(德毅)와 극적으로 해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조와 좌의정(左議政) 정철(鄭澈)과 우의정(右議政) 유성룡(柳成龍) 등 조정관리들이 감격하였다.

1593년 참상(參上)으로 승진, 궁에서 근무했으나 왜군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각 포구를 장악, 불안이 그치지 않자 왕에게 나가 싸우기를 자청했다. 왕은 그 충성심에 감동하여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제수하니 당일로 부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596년 내직인 군자훈련정(軍資訓練正)으로 전근할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체포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으며, 그 후 1598년 신병 때문에 귀향해 요양하다 48세로 생을 마쳤다. 조정에서는 선조호종원종훈(宣祖扈從原從勳)과 아들 정철(廷喆)의 정사진무훈(靖社振武勳)을 감안해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追贈)했고,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 위정철(魏廷喆)이 방촌으로 옮겨 오면서 자리를 마련한 곳이라는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위성렬가옥(전남유형문화재 제 55호)과 사당(전남민속자료 제38호).

덕화(德和)의 아들 정철(廷喆)은 자는 자길(子吉), 호는 만회재(晩悔齋)로 선조 16년(1583년) 무과에 급제한 후 방어사(防禦使)에 이르렀으며,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고 왕명(王命)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청군(淸軍)에 대항하고져 양근(楊根)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낙향하였다.



▲ 장흥 위씨 향사우(鄕祠宇) 세 곳 중 한 곳으로 위덕의(魏德毅)ㆍ위덕화(德魏和)를 비롯해 위정훈ㆍ위정철ㆍ위정명과 위백규를 배향한 죽천사(竹川祠).


천우(天佑ㆍ1537~?)는 자는 길보(吉甫), 호는 정재(靜齋)로 선조 15년(158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저작(著作)ㆍ박사(博士)ㆍ감찰(監察)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 등을 거쳐 청양현감(靑陽縣監)ㆍ담양부사(潭陽府使) 및 경상도ㆍ전라도 도사(慶尙道全羅道都事)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함양(咸陽)ㆍ개령(開寧) 등지에서 왜적(倭敵)을 무찌르는데 공이 컸으며, 특히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출전하여 적장(敵將)을 사살하였다. 이로 인해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일찌기 홍면비장(紅面飛將) 위대기(魏大器)만 있는 줄 알았더니 또한 백면비장(白面飛將) 위천우(魏天佑)도 있구려’라고 칭찬하며 조정(朝廷)에 포계(褒啓)를 올려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책록(策錄)되었다.

▲ 행원파(杏園派) 가운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위대용을 주벽으로 위대기ㆍ위산보ㆍ위정보ㆍ위천회ㆍ위천상ㆍ위대경ㆍ위순정ㆍ위수징 등을 배향하고 있는 석천서원(石川書院).

▲ 수군절도사 위대기(魏大器) 장군의 투구.?

 

 

 

 

정보(廷寶)는 자는 자고(子固), 호는 퇴우당(退憂堂)으로 광해군 12년(1620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을 지낼 때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飾)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남포현감(藍浦縣監)에 이르렀으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대기(大器)는 자는 자용(子容)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계정(繼廷)의 후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해 해남현감(海南縣監)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조전장(助戰將)으로 전공을 세웠으며, 왜병이 금산에서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지역으로 들어오려 할 때 이치(梨峙)에서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장교(將校)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광주목사(光州牧使)였던 권율(權慄)을 도와 호남지역의 수호에 큰 공을 세웠다. 1594년 해남현감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고향에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고, 승진하고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남원에 충량비(忠良碑)가 세워졌다.

▲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가 1770년 저술한 역사지리서 ‘환영지(?瀛誌)’와 독도가 울릉도보다 크게 그려진 ‘조선팔도총도’ 및 묘와 유묵.

호남(湖南) 실학(實學)의 거두 백규(伯珪ㆍ1727~1798)는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진사(進士) 문덕(文德)의 아들로 윤봉구(尹鳳九)의 문인이다.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린 조부 세보(世寶)로부터 글을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천문ㆍ역학(易學)ㆍ지리 등을 모두 섭렵하여 당대의 석학(碩學)으로 이름났다. 정조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선공감 부봉사(繕工監副奉事)ㆍ옥과현감(玉果縣監)ㆍ경기전령(慶基殿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계항산(桂巷山)에 은거했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세철학(經世哲學)을 체계화했으며, 90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백과전서격 학문을 집대성하고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이나 앞서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그려 세인(世人)들을 놀라게 하였다.



▲ 전남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장천재(長川齋ㆍ전남유형문화재 제72호)는 원래 장천암(長川庵)이 있었다고 하며, 장흥 위씨들이 1450년경 이곳에 장천재를 세워 오랫동안 한학의 서재로 이용되어 왔다고 한다. 현 건물은 1870년경 중건되었으며, 한때 위백규(魏伯珪)가 수학하였던 곳이라 한다.


 

이외에도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공을 세우고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된 대용(大用)과 영조(英祖) 때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한 창조(昌祖) 등이 위씨(魏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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