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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연원
 

석씨(昔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제4대 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며, 본관(本貫)은 월성(月城ㆍ경주의 옛 이름) 단본(單本)이다. 1962년 이전까지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의 23세손인 석재흥(昔載興)이 시조로 알려졌으나, 공주(公州) 석덕경(昔德經) 집안에서 발견된 구보(舊譜)로 인해 탈해왕이 시조임이 밝혀졌다.

 

▲ 탈해왕(脫解王)의 탄생(誕生)에 대한 전설이 기록된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
▲ 탈해왕(脫解王)의 탄생(誕生)에 대한 전설이 기록된 ‘삼국유사(三國遺史)’. 클릭!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탈해왕(脫解王)의 탄생(誕生)에 대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왜국(倭國) 동북쪽 천리(千里) 거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ㆍ삼국사기에는 龍城國이라 함)의 임금이 여왕국(女王國)의 딸을 왕비(王妃)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했더니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려야 한다”고 하여 비단에다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 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워서 가는대로 맡겨 두었다.

궤짝을 실은 배는 처음에 금관국(金官國ㆍ6가야의 하나로 옛 변한의 땅에 김수로왕이 42년 세운 가락국) 해변에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자, 배는 다시 계림(鷄林)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下西知村阿珍浦ㆍ지금의 영일만) 어두에 닿으니 이때가 기원전 19년(신라 혁거세 39년)이었다.

이때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이를 보고 배를 매어 놓고 궤를 열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었으므로 데려다 길렀다. 장성하자 키가 9자나 되고 풍모가 뛰어났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아이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여 처음 궤가 올 때 까치가 날아와 울면서 따랐으므로 ‘까치 작(鵲)’ 자에서 ‘새 조(鳥)’를 떼어버리고 ‘석(昔)’으로 성(姓)을 삼고, 포장한 궤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

▲ 신라 왕위에 오른 석씨(昔氏) 중 유일하게 왕릉이 전하는 경주시 동천동 석탈해왕릉(사적 제174호)과 그를 제향하기 위해 1898년 군수이던 권상문(權尙文)의 제안으로 월성(月城)안에 지어진 숭신전(崇信殿ㆍ경주시문화재자료 제255호). 숭신전은 1980년 석탈해왕릉 옆인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지었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는 것을 업으로 하여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추호도 게으름을 피는 기색이 없었고, 자라면서 학문과 지리(地理)에 능통하여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신라 남해왕(南解王) 5년(서기 8년) 왕이 맏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대보(大輔ㆍ신라 초기의 최고 관직으로 재상에 해당하는 벼슬)로 등용하여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서기 57년 남해왕(南解王)의 아들 유리왕(儒理王ㆍ신라 제3대 왕)이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이나 사위를 논할 것 없이 나이 많고 어진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 하는 유언에 따라 신라 제4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다.

▲ 신라 석탈해왕의 탄강지로 알려진 아진포(阿珍浦ㆍ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자력발전소 후문 남서쪽 소나무숲에 자리한 조선 고종 때 석씨(昔氏) 문중에서 세운 석탈해왕 유허비(昔脫解王遺墟碑).

 

이로부터 석씨(昔氏)는 탈해왕을 비롯하여 신라 56왕 중 9대 벌휴왕(伐休王), 10대 내해왕(奈解王), 11대 조분왕(助賁王), 12대 첨해왕(沾解王), 14대 유례왕(儒禮王), 15대 기림왕(基臨王),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 8왕에 걸쳐 171년간 왕통(王統)을 이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탈해왕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월성(月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조에서 시랑(侍郞)을 지낸 재흥(載興)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 경남 양산시 상북면 대석마을 계단논 가운데 위치한 길이 50m, 높이 15m의 이 무덤은 석씨(昔氏) 왕들 중 가장 마지막인 왕인 제16대 흘해왕(訖解王)의 무덤이라 전한다. 당시 서라벌에서 벌어진 김씨와 석씨, 박씨간에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흘해왕은 그들 석씨의 발원지인 양산지역으로 쫓겨나 쓸쓸히 죽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라의 장군인 우로(于老)가 있다. 10대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자 16대 흘해왕(訖解王)의 아버지로 내해왕 14년(209년)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공해 오자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과 함께 가야를 구원해 주었고, 조분왕(助賁王) 2년(231년) 왕명으로 이찬(伊?)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을 정복하였고, 233년 7월 왜구가 침입해 오자 바람을 이용하여 적선에 불을 질러 전멸시켰다.

244년 1월 서불한(舒弗邯)으로 올라 지병마사(知兵馬事)를 겸임, 245년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쳐들어오자 군사를 이끌고 이를 쳤으나 실패하고 후퇴하여 마두책(馬頭柵)을 지켰고, 첨해왕(沾解王)이 즉위하자 본래 신라의 속령인 사량벌국(沙梁伐國)이 배반하고 백제에 붙자 이를 정벌하였다. 249년 왜의 사신을 접대할 때 왜의 왕과 왕비를 희롱한 것이 화근이 되어 왜인이 침입하자, 책임을 지고 왜의 진영에 나가 죽음으로써 왜군을 물리쳤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5에 기록된 신라 제10대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자 제16대 흘해왕(訖解王)의 아버지 석우로(昔于老)의 열전.

 

고려 때의 인물로는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재흥(載興)의 아들 시종(時宗)과 밀직사(密直使) 운니(運尼)의 부자(父子)가 유명했으며, 좌복야(左僕射) 한일(漢一)의 아들 정민(貞敏)은 예의시랑(禮儀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부사(府使) 상률(相律)과 판관(判官) 용진(龍眞), 부호군(副護軍) 광국(光國), 오위장(五衛將) 병권(炳權)이 뛰어났으며, 봉혁(鳳爀)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건민(鍵民)과 우성(羽盛)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여 월성 석씨(月城昔氏)를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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