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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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씨(魚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함종(咸從)ㆍ충주(忠州)를 비롯하여 20본(本)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어씨(魚氏)는 함종(咸從)ㆍ충주(忠州)ㆍ경흥(慶興)의 3본으로 대다수의 어씨(魚氏)가 함종 어씨(咸從魚氏)로 알려져 있다.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중국 풍익현(馮翊縣) 출신으로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하여 동래(東來)한 어화인(魚化仁)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며,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본성(本姓)이 지씨(池氏)인 어중익(魚重翊)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사성(賜姓)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있다. 다른 한 계통(系統)은 명(明)나라 상서시랑(尙書侍郞) 석규(石奎)의 손자 계복(繼福)이 함경도 경흥(慶興)에 표착(漂着)하여 어씨(魚氏)로 사성(賜姓)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713년 천안군수 어유봉(魚有鳳)이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함종어씨세보’(4책).
함종 어씨(咸從魚氏) 시조 어화인(魚化仁)은 고려 명종(明宗) 때 인장동정(仁長同正)을 지냈으며, ‘함종어씨세보(咸從魚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본래 중국 풍익현(馮翊縣) 출신으로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하여 동래(東來)하여 처음에는 강원도 강릉부(江原道江陵府)에 뿌리를 내렸으나 다시 평안도 함종현(平安道咸從縣ㆍ지금의 강서군)으로 세거지를 옮겼다고 전한다. 함종 어씨는 7세 준량(遵亮) 대에 진주(晉州)로 세거지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2세인 영기(永寄)부터 6세 석공(石公)이 고려조에서 출세하였으므로 함종(咸從)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 함종 어씨 시조 이하 7세 준량(尊亮)까지 제향하는 경남 고성군 마암면 삼락리 선세제단(先世祭壇)
함종 어씨의 파명록(派名錄)을 보면 12세손에서 세겸(世謙)의 문정공파(文貞公派)ㆍ세공(世恭)의 양숙공파(襄肅公派)ㆍ세익(世益)의 현감공파(縣監公派)ㆍ문손(文孫)의 훈도공파(訓導公派)ㆍ사룡(四龍)의 호군공파(護軍公派)ㆍ무적(無迹)의 낭선공파(浪仙公派)ㆍ한륜(漢綸)의 사직공파(司直公派)ㆍ한종(漢宗)의 한종공파(漢宗公派)ㆍ한위(漢緯)의 한위공파(漢緯公派)ㆍ한형(漢亨)의 한형공파(漢亨公派)ㆍ복로(服勞)의 금위공파(禁衛公派)ㆍ원로(元老)의 참봉공파(參奉公派)ㆍ정언(廷彦)의 진사공파(進士公派)로 13개의 파로 분파되었다.
▲ 경남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에 자리한 면곡(綿谷) 어변갑(魚變甲)의 묘와 재사인 월곡재(月谷齋) 및 유묵.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중흥(中興)의 인물인 변갑(變甲ㆍ1380~1434)은 자는 자선(子先), 호는 면곡(綿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연(淵)의 다섯 아들 중 맏아들로서 정종 1년(1399년) 생원(生員)이 되고, 태종 8년(140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교서관(校書館)의 부교리(副校理)로 발탁된 뒤 성균관 주부(成均館注簿)를 거쳐 좌정언(左正言)ㆍ우헌납(右獻納)을 역임했다. 세종 2년(1420년) 새로 발족한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서 지제교(知製敎)ㆍ검토관(檢討官)을 겸임, 1424년 직집현전(直集賢殿)ㆍ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거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에 신숙주(申叔舟)의 아버지인 신장(申檣)과 친하여, ‘우리가 충성껏 임금을 섬기고 이름이 이룩되면 고향에 돌아가 노친(老親)을 봉양하자.’고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신장(申檣)은 약속을 저버리고 눌러 앉아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니 혼자 쓸쓸해 했다고 한다. 죽은 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고성(固城)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었다.
▲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당리에 자리한 문효공(文孝公) 어효첨(魚孝瞻)의 묘.
변갑(變甲)의 아들 효첨(孝瞻ㆍ1405~1475)은 자는 만종(萬從), 호는 귀천(龜川)으로 세종 5년(1423년) 생원(生員)이 되고, 142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해 검열(檢閱)에 등용되고 이어 집현전 교리(集賢繼校理)가 되어 젊은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서연(書筵)에서 ‘예기(禮記)’를 강(講)하며 제가(諸家)의 요설(要說)을 수집해 ‘예기일초(禮記日抄)’를 찬(撰)하고, 세종 28년(1446년)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태조실록(太祖實錄)’의 사실(史實)을 참조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도록 했다. 1449년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집의(執義)에 발탁된 뒤 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 단종 때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세조 초 이조ㆍ호조ㆍ형조ㆍ공조의 참판(參判), 대사헌,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세조 9년(1463년) 이조판서에 승진했다. 이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에 전직했다가 성종 5년(1474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러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유(大儒)로서 풍수설(風水說)을 배격하고 척불(斥佛)을 주장했으며, 의정부 영의정 함종부원군(議政府領議政咸從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
▲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당리에 자리한 조선시대 표석인 ‘함종어씨분산표석(咸從魚氏墳山表石)’ 및 문효공(文孝公) 어효첨(魚孝瞻)과 아들 문정공(文貞公) 어세겸(魚世謙)의 신도비가 서 있는 쌍문비각.
효첨(孝瞻)에게는 세겸(世謙)ㆍ세공(世恭) 두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세겸(世謙ㆍ1430∼1500)은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으로 문종 1년(1451년) 생원(生員)이 되고, 세조 2년(145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하고, 봉상시 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쳐 박사(博士)를 지낸 후 1461년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올랐다. 146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겸하고,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낸 뒤 예종 즉위년(1468년) 남이(南怡) 등이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이들을 주살(誅殺)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減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성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禮曹參判)이 되고 대사헌을 거쳐 성종 11년(1480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주문사(秦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건주위(建州衛) 정벌의 결과를 알렸다. 호조ㆍ형조ㆍ공조ㆍ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이 되었으며, 연산군 즉위년(1494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ㆍ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ㆍ영경연사(領經筵事) 등을 겸하고, 1496년 좌의정이 되었다.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궤장(凡杖)을 하사받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당리에 자리한 문정공(文貞公) 어세겸(魚世謙)과 배위 능성 구씨의 합장묘 및 부조묘(不?廟)인 문정사(文貞祠).
세겸(世謙)의 아우 세공(世恭ㆍ1432~1486)은 자는 자경(子敬)으로 단종 1년(1453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세조 2년(145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해 정자(正字)가 되고, 박사(博士)ㆍ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ㆍ공조좌랑(工曹佐郎)ㆍ병조좌랑(兵曹佐郎)ㆍ성균사예(咸均司藝)ㆍ좌승지(左承旨)를 역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특히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임명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병조판서를 지내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성종 1년(1470년) 경기도 관찰사, 1472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477년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뒤에 호조판서로 좌빈객(左賓客)을 겸했다. 이어 병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를 역임,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경학(經學)에 능하여 특진관(特進官)을 겸임했으며, 시호는 양숙(襄肅).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하당촌에 자리한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과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의 묘 및 어세공 묘에서 출토된 묘지석(황토흙에 청색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것으로 모두 4매)과 어세공의 부조묘인 양숙사(襄肅祠).
세공(世恭)의 증손인 계선(季瑄ㆍ1502~1579)은 자는 선지(瑄之), 중종 23년(1528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중종 35년(154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ㆍ박사(博士)가 되고, 중종 39년(1544년) 성균관 전서(成均館典書)ㆍ호조좌랑(戶曹佐郎)ㆍ병조좌랑(兵曹佐郎), 인종 1년(1545년) 형조정랑(刑曹正郎)ㆍ지평(持平)ㆍ헌납(獻納)ㆍ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를 지냈다. 명종 3년(1548년)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승임되었으며, 어사가 되어 북방 군민의 어려운 형편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었으며, 1560년 형조참판이 되었을 때 아선군(牙善君)에 봉군되었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거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서 오위부총관으로 전임하였으며, 1567년 명종이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제수되어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다. 그뒤 오위도총관 등을 거쳐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문벌있는 가정에 태어나 충효를 겸전한 인물로 검소한 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서예에 능하였는데, 특히 예서(隷書)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계선(季瑄)의 손자 몽룡(夢龍ㆍ1566~?)은 자는 견보(見甫), 호는 설곡(雪谷)ㆍ설천(雪川)으로 군수 선조 37년(1604년) 진천현감(鎭川縣監)을 지냈다. 오로지 매화 그림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어 이정(李霆)의 대나무 그림, 황집중(黃執中)의 포도 그림와 함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중국인 양호(楊鎬)도 그의 묵매도(墨梅圖)를 보고 화격(畵格)이 대단히 좋다고 하며 다만 거꾸로 드리운 모습이 없어 유감이라고 평한 바 있으나, 특유의 직립식 구도를 비롯하여 묵매화에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고 조선 중기 묵매의 한 전형을 이루었던 화가라 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월매도(月梅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 조선 중기의 선비화가인 설곡(雪谷) 어몽룡(魚夢龍)의 묵죽도(墨竹圖)와 월매도(月梅圖).
세공(世恭)의 10세손 유봉(有鳳ㆍ1672~1744)은 자는 순서(舜瑞), 호는 기원(杞園),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사형(史衡)의 아들로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숙종 25년(1699년) 대과(大科)에 응시했으나 부정(不正)을 보고 과거를 단념했다. 뒤에 내시교관(內寺敎官)이 되었으나 사퇴했다가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부임, 내외직을 역임하고 숙종 45년(1719년) 집의(執義)를 거쳐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전임되자 사퇴했다. 경종 2년(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스승 김창협(金昌協)이 화를 입자 유생(儒生)을 이끌고 신원(伸寃)을 상소, 영조 8년(1733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집의가 되고 1734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고, 이듬해 승지(承旨)ㆍ찬선(贊善)을 지냈다. 조선 후기의 거유(巨儒)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그의 문하에서 이천보(李天輔)ㆍ홍상한(洪象漢)ㆍ윤득관(尹得觀) 등 학자가 배출되었다.
유봉(有鳳)의 아우 유구(有龜ㆍ1675∼1740)는 자는 성칙(聖則), 호는 긍재(兢齋)로 경종(景宗)의 장인이다. 숙종 25년(169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되고, 정언(正言)ㆍ수찬(修撰)ㆍ응교(應敎)ㆍ승지(承旨)를 역임, 숙종 44년(1718년)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世子嬪ㆍ뒤에 선의왕후)에 책봉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훈련대장(訓諫大將)을 겸했고, 경종 2년(1722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이 때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이 화를 당하자 이들을 극력 변호했고, 유생(儒生) 황욱(黃昱)ㆍ김수귀(金壽龜) 등이 건의한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의 복직에 대해 반대했다. 그 후 김일경(金一鏡)의 무고로 양주(楊州)에 내려갔으며, 영조 즉위 후 여러 벼슬에 기용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시호가 익헌(翼獻).
▲ 정헌공(靖憲公) 어유룡(魚有龍)의 초상과 강릉시 옥계면 옥계면사무소에 자리한 강릉부사 어유룡송덕비.
유룡(有龍ㆍ1678~1764)은 자는 경우(景兩), 주서(注書)로 경종의 장인인 유구(有龜)의 6촌 동생이다. 숙종 36년(1740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경종 즉위년(1720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사간(司諫)으로 박치원(朴致遠) 등과 함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반대하는 소론(少論)의 처벌을 주장,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하는 조태구(趙泰耉) 등을 탄핵하는 등, 박치원ㆍ이중협(李重協)과 함께 노론(老論) 3간신(諫臣)으로 불렸으나, 경종 2년(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영암(靈巖)에 유배되었다. 영조 1년(1725년) 방환(放還)되어 사간ㆍ집의(執義) 등을 거쳐 광주부윤ㆍ황해감사를 지냈으나,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파직되었다. 1730년 복직되어 승지ㆍ강원감사ㆍ안동부사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1744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8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1754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이 해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나 치안을 유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면직되었다. 그 뒤 판돈녕 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시호는 정헌(靖憲).
▲ 관포당(灌圃堂) 어득강(魚得江)의 시문집인 ‘관포시집(灌圃詩集)’과 유묵 및 그를 제향하는 경남 고성군 대가면 갈천리 갈천서원(葛川書院).
득강(得江ㆍ1470~1550)은 자는 자순(子舜)ㆍ자유(子游), 호는 관포당(灌圃堂)ㆍ혼돈산인(渾沌山人)으로 문손(文孫)의 아들이다. 성종 23년(1492년) 진사(進士)가 되고, 연산군 1년(149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외관직을 거쳐 중종 5년(1510년) 장령(掌令), 1518년 헌납(獻納), 1521년 교리(校理), 1529년 대사간을 지냈다. 1542년 행부사과(行副司果)로서 서사(書肆)의 설립과 초시(初試)의 각 도별실시를 상소했다. 명종 4년(1549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사직한 뒤 여러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명종 5년(1550년) 81세의 나이까지 장수하였지만 죽기 전까지도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한다. 문명(文名)이 있고, 특히 농담을 잘하였다. 저서로는 ‘동주집(東洲集)’이라는 ‘관포시집(灌圃詩集)’이 있으며, 고성 갈천서원(葛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영준(泳濬ㆍ1483~1529)은 자는 언심(彦深), 호는 송정(松亭)으로 정희량(鄭希良)ㆍ이윤(李胤)의 문인이다. 연산군 10년(1504년)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관례에 따라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봉정대부(奉政大夫)ㆍ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효자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성품이 온화ㆍ강직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보다는 홀어머니의 봉양에 정성을 기울였다.
▲ 1554년 야족당(也足堂) 어숙권(魚叔權)이 편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사전 성격의 책인 ‘고사촬요(攷事撮要)’.
숙권(叔權)은 호는 야족당(也足堂)ㆍ예미(曳尾)로 문장과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으나, 세겸(世謙)의 서손(庶孫)이었기 때문에 끝내 현달하지 못했다. 최세진(崔世珍)에게 사사(師事)해 박학능문(博學能文)하여 시평(詩評)과 시론(詩論)이 뛰어난 학자로서, 이문(吏文)과 중국어(中國語)에 능하여 중종 20년(1525년)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다, 한때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1536년과 1541년에 하절사(夏節使)를 따라 중국에 다녀오고, 1537년에는 중국 사신을 수행하는 등 어학에도 뛰어났다. ‘이문제서집람(吏文諸書集覽)’ㆍ‘고사촬요(攷事撮要)’ 등의 편찬ㆍ저술에도 참여하였으며, 시평(詩評)·시론(詩論)에도 해박했으나 교서관(校書館)의 감교관(監校官)에 머물렀다. 저서에 ‘패관잡기(稗官雜記)’ 6권이 있는데, ‘대동야승(大東野乘)’ㆍ‘해동야언(海東野言)’에 그 일부가 전한다.
영담(泳潭ㆍ1532~1594)은 자는 경유(景游)로 고향이 어디인지에 대해 알려진 게 없으나 경상도 함안(咸安)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무예에 능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과거(科學)를 거치지 않고 여도만호(呂島萬戶)에 특채되고, 1564년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했다. 진해 등 여러 진관(鎭管)의 막료(幕僚)로 있으면서 해로(海路)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양현감(光陽縣監)으로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수로향도(水路嚮導)로 활약,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우리 수군이 첫 승리를 거두는데 공을 세우고, 합포해전ㆍ당항포해전ㆍ율포해전 등에서도 공적을 세웠다. 이듬해 이순신에 의하여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어선포(於善浦) 등의 해전(海戰)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난이 평정된 후 당상관(堂上官)에 올랐으나 1594년 전염병에 걸려 한산 통제영에서 죽었다.
▲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리 어재연(魚在淵) 생가(중요지정문화재 제127호)와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자리한 어재연과 아우 어재순(魚在淳)의 묘.
근세에 와서 재연(在淵ㆍ1823~1871)은 자는 성우(性于)로 헌종 7년(1841년) 무과에 급제,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인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으며,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하고 치안을 확보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아우 재순(在淳)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병조판서 겸 지삼군부사(兵曹判書兼知三軍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
▲ 충숙공(忠肅公) 어윤중(魚允中)의 사진과 유묵(遺墨).
▲ 우리나라 최초로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어윤희(魚允姬). |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청군(淸軍)을 따라 귀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텐진에 가서 한중상민수륙무역장정(韓中商民水陸貿易章程)의 초안을 만들고 돌아왔다.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되어 의주(義州)에서 청국 대표 장석란(張錫?)과 중강(中江)무역장정을, 회령(會寧)에 가서는 팽광예(彭光譽)와 회령통상장정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 뒤 승지ㆍ참판을 지내고, 1893년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가 되어 보은(報恩)에 집결한 동학교도를 해산시켰으며, 고종 31년(1894년) 김홍집(金弘集)내각의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던 중 용인(龍仁)에서 살해되었다. 1910년 규장각 대제학(奎章閣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 충숙(忠肅).
우리나라 최초로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윤희(允姬ㆍ1878∼1961)는 현중의 딸로 동학혁명 때 남편이 의병(義兵)으로 전사하고, 건양 1년(1896년) 부친이 죽자 해주(海州)를 거쳐 개성(開城)으로 이사, 융희 4년(1910년) 개성 북부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1912년 미리흠(美理欽) 여학교 기예과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고도(孤島)에서 전도했으며, 3ㆍ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분배한 뒤 시가행진의 선두에 섰다가 체포되었다. 2년 후 출옥,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서 파견한 밀사들에게 여비와 은신처를 제공하고 개성경찰서 폭파 계획에 가담했다가 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석방된 후 개성에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설립했으며, 한국전쟁 때 남하해 1953년 나이팅게일기장과 1959년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으며, 1961년 마포(麻浦)에 있는 유린보육원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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