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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연원
 

소씨(蘇氏)의 연원(淵源)은 동구이(東九夷ㆍ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로 배달 겨레의 옛 이름)의 하나인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ㆍ왕의 칭호)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국토(全國土)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을 소(蘇),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의 61세손인 풍(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ㆍ길림성)의 하백(河伯ㆍ夏伯)에 봉해졌고, 뒤에 공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대륙으로 가고,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였는데 풍(豊)의 69세손 백손(伯孫)이 기원전 209년에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고 한다.

그후 기원전 57년에 와서 백손(伯孫)의 5세손 벌(伐)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세워 신라(新羅)를 건국했고, 벌(伐)의 25세손 알천(閼川)은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 때 상대등(上大等ㆍ17관등을 초월하여 임명하던 최고 관직으로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여 다스리는 한편, 화백과 같은 귀족회의 의장도 겸했음)을 역임하고 태종 무열왕 7년(660년) 3월 3일에 진주 구시동(九枾洞ㆍ지금의 상대동)으로 낙향하여 이름을 경(慶)으로 바꾸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 진주 소씨의 가승(家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소씨(蘇氏)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를 비롯하여 12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진주(晋州)를 제외한 나머지 관향은 모두가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다.

그런데 진주 소씨(晋州蘇氏)는 시조를 ‘경자보(更子譜)’를 수간할 때까지는 문공공(文恭公) 희철(希哲)로 삼아왔으나, 1951년 발견된 창엽(昌燁)이 소장하고 있는 ‘부소보(扶蘇譜)’와 1975년 발견된 종만(鐘萬) 소장인 ‘소치선가승(蘇致善家乘)’에 의해서 문헌사적과 분묘 소재 등의 고증이 이루어져서 오늘날과 같이 경(慶)을 시조로 바로잡게 되었음이 ‘신유보(辛酉譜)’에 나타나 있다.

▲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에 자리한 시조 소경(蘇慶)의 묘와 묘비석.

 

경(慶)은 진지왕 2년(577년)에 태어나 선덕여왕 5년(636년) 백제가 독산성(獨山城)을 침입할 때 장병을 이끌고 나가 이를 물리치고 637년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으며, 638년에 칠중성(七重城ㆍ적성)에서 고구려 군을 격퇴하고 이찬 겸 각간(伊?兼角干)이 되었다. 진덕여왕 원년(647년) 2월에 상대등(上大等)에 올랐으며, 654년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여러 군신들이 공에게 섭정(攝政)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사양하며 ‘신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崇重)하고 실로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고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56년에 태종 무열왕(武烈王)이 경(慶)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경(慶)의 조상 벌(伐)을 문열왕(文烈王)에 봉하였다.

‘신유보(辛酉譜)’에 보면 경(慶)은 초명은 알천(閼川)으로 나이가 팔순이 넘도록 손이 없었는데, 어느 날 꿈에 선조인 벌(伐)이 나타나 ‘그대가 도사곡으로 옮겨 살면 반드시 9장군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 꿈을 꾼 후 656년 3월 도사곡(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으로 이사하여 결국 며느리 석씨(昔氏)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이에 그 기쁨으로 자신의 이름를 경(慶)이라 바꾸었다고 한다. 그 후 3세 복서(福瑞), 4세 억자(億滋), 5세 후준(後俊), 6세 검백(劍白), 7세 상영(尙榮), 8세 목(穆), 9세 은(恩), 10세 송(淞), 11세 격달(格達)까지 9세 9장군(九世九將軍)이 이어져 현몽의 내용과 일치했다고 한다.

11세 격달(格達ㆍ891∼983)은 자는 유달(有達), 호는 모은(慕隱)으로 신덕왕 3년(914년) 화랑이 되고 신덕왕 5년(916년) 하동(河東)에 증산산성(增山山城ㆍ고소산성)을 쌓아 후백제를 방어한 공으로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었다. 925년에 왕봉규(王逢規)가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가 되어 독립국 행세를 하게 되어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태조 9년(926년) 군사 1천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부(歸附)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927년 태조(太祖)가 강주(康州ㆍ진주)를 공략할 때 이에 참전해 왕봉규를 멸하고, 태조 17년(934년) 태조가 운주(運州)를 공략할 때 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태부(太傅)에 책록되었다. 시호(諡號)는 강평(康平).

15세 계령(繼笭ㆍ1034∼1107)은 자는 활령(活笭), 호는 순곡(舜谷)으로 문종 24년(1070년)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ㆍ신호위 상장군(神號衛上將軍)ㆍ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내고, 선종 11년(1094년) 헌종(獻宗)이 즉위함에 따라 그 딸이 헌종(獻宗)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소씨(蘇氏)가 진주(晋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 경남 하동군 옥종면에 자리한 장렬공(莊烈公) 소경손(蘇慶孫)의 묘.

 

경손(慶孫ㆍ1132∼1196)은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鄭仲夫) 집권(執織) 후 사정(沙丁)이라는 자(者)가 난(亂)을 일으켜 이 난을 평정하고 상장군 겸 개성순부사(上將軍兼開城巡撫使)가 되었다. 그후 추밀원사(樞密院事)가 되었으나 무단정치(武斷政治)로 조정이 어지럽자 낙향하였으며, 그의 아들 한공(漢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장렬(莊烈).

▲ 장렬공(莊烈公) 소경손(蘇慶孫)의 아들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강공(文康公) 소한공(蘇漢公)의 묘.

 

고려조에서 15만을 헤아리던 소씨(蘇氏)는 몽고의 침입으로 두 번째 멸문지경이 되었다가 희철(希晳ㆍ1228∼?)이 일찌기 문과(文科)에 올라 몽고(蒙古)의 침입 때 아버지 함(涵)의 순절(殉節)함을 보고 분격하여 수많은 적을 죽였고, 후에 정의대부(政議大夫)ㆍ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올라 가운(家運)을 다시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자리한 소자파(蘇自坡)의 묘와 1526년 새워진 묘비석(전북유형문화재 제148호). 묘비석은 익산지역에 남아 있는 비석 가운데 건립시기가 가장 빠르다.

 

한편 조선조 때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를 거쳐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낸 자파(自坡)의 아들 7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중 세량(世良ㆍ1476~1528)은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困菴)ㆍ병암(屛巖)으로 연산군 2년(1496년)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증종 2년(150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ㆍ대간(臺諫)ㆍ시종(侍從)을 거쳐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1520년 홍문관 수찬ㆍ지평ㆍ장령ㆍ직제학 등을, 1522년 좌부승지(左副承旨)ㆍ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1524년 대사간을 지내다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남원부사를 자원하여 내려가서 졸하였다. 글을 좋아하였고, 향리의 후배를 양성하여 크게 교화하였다.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봉향되었으며, ‘병암집(屛巖集)’이 있다.

▲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의 시문집인 ‘곤암집(困菴集)’은 1746년 초간되었던 것을 대본으로 1927년 후손들이 중간하였다.

 

자파(自坡)의 맏아들인 세온(世溫ㆍ1474~1537)은 자는 화중(和中)으로 7형제의 장형으로 시하에 상봉하솔(上奉下率)하며 많은 형제들의 공부와 출세 그리고 번거러운 가사 등 종가의 중책을 성실히 이행하다가 중부(仲父) 기파(起坡)의 웅천부사(熊川府使) 재임시에 삼포왜란(三浦倭亂)에 숙질이 참전하여 공을 세워 임치진첨절제사(臨淄鎭僉節制使)을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었다.

▲ 소자파(蘇自坡)의 아들로 대사간을 지낸 소세량(蘇世良ㆍ左)과 어모장군(禦侮將軍) 소세온(蘇世溫)의 묘.

 

▲ 문정공(文靖公) 소세양(蘇世讓)의 유묵. ?

 

세온(世溫)의 동생 세양(世讓ㆍ1486∼1562)은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ㆍ퇴재(退齋)ㆍ퇴휴당(退休堂)으로 연산군 10년(1504년) 진사(進士)가 되고, 중종 4년(150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벼슬을 거쳐 정자(正字)ㆍ주서(注書)ㆍ부수찬(副修撰)ㆍ정언(正言)을 역임하고 수찬(修撰)이 되어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릉(顯陵)에 이장케 했다.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이조정랑(吏曹正郞)ㆍ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ㆍ장령(掌令)ㆍ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사성(司成)이 되어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아 시문으로 응답, 문명을 떨쳤다.



그 후 직제학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30년 왜구(倭寇)의 침입을 당했다. 1531년 다시 승진되어 형조참판(刑曹參判)ㆍ형조판서ㆍ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1533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37년 병조판서ㆍ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 이듬해에는 성주(星州)의 사고(史庫)가 불타자 왕명으로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謄寫)해서 봉안했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大尹)인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을 받고 사직, 이 해 명종이 즉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윤임 등이 제거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益山)에 은거했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

 


 

▲ 전북 익산시 왕궁며 용화리에 자리한 문정공(文靖公) 소세양(蘇世讓)의 묘와 1564년 세워진 묘비석(전남유형문화재 제159호).

 

세량(世良)의 셋째 아들 봉(逢ㆍ1499~1563)은 자는 숙경(叔卿)ㆍ희룡(希龍), 호는 중암(仲菴)ㆍ화강산인(花江散人)으로 중종 14년(1519년) 생원이 되고 중종 20년(1525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ㆍ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ㆍ이조정랑ㆍ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27년(1532년) 선전관(宣傳官) 등으로 승진했으며, 만년에는 고향 금마에서 살았다.



▲ 전북 익산시 금마면 산북리 내산동에 자리한 중암(仲菴) 소봉(蘇逢)의 묘.

 

광진(光震ㆍ1566~1611)은 자는 자실(子實), 호는 후천(後泉)으로 세량(世良)의 증손이다. 159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說書)ㆍ한림(翰林)ㆍ홍문관 부교리(副校理)ㆍ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율곡의 문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김상헌(金尙憲)ㆍ신흠(申欽)ㆍ조희일(趙希逸)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상진(尙眞ㆍ?∼1592)은 자는 실보(實甫), 호는 서암(西庵)으로 아버지는 연포만호 규(珪)이다. 1590년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를 지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全州)에서 김성일(金誠一)을 만나 의병을 모집한 후, 영남에 갔다가 진보군수(眞寶郡守) 임계영(任啓英)의 휘하에서 별장(別將)이 되어 항시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돌격하여 적을 무찌르다가 성주(星州)싸움에서 의병 수백명으로 수천명의 적과 분전 끝에 순절(殉節)했다. 예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 전남 보성군 복내면 복내리 삼강문(三綱門)은 1724년 서암(西庵) 소상진(蘇尙眞) 등 3명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나, 뒤에 정려받은 사람이 늘어나자 1808년 현 위치로 이건하고 증축했다.

 

동도(東道ㆍ1592∼1671)는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로 찰방(察訪) 만선(萬善)의 아들이다. 광해군 9년(161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때는 벼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된 뒤 1646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나 곧 면직되었다. 이듬해 은산부사(殷山府使) 등을 지내고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청북어사(淸北御使)를 거쳐 효종 1년(1650년)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고,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어 효종 10년(1659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익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전북 익산시 봉동읍에 자리한 월주(月洲) 소두산(蘇斗山)의 묘와 재사 및 그를 제향하는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화산서원(下右).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동명(東鳴)의 아들 두산(斗山ㆍ1627∼1693)은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효종 3년(1652년) 진사(進士)가 되고, 현종 1년(166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해 전적(典籍)을 거쳐 1663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직언(直言)을 자주해서 대간들로부터 처신이 근신하지 못하다고 소위 실세들의 눈 밖에 나 외직(外職)으로 전전하였다. 현종 13년(1672년) 당시 전라감사 오시수(吳始壽)가 흉년에 구호활동을 잘한 고을 수령들을 선별하여 표창을 상신하였는데, 그도 진휼(賑恤)을 잘한 수령으로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뒤 숙종 1년(1675년) 제주목사, 숙종 7년(1681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어 동래부사(東萊府使)ㆍ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ㆍ공홍도 수군절도사(公洪道水軍節度使) 등을 거쳐 1688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디. 그러나 수령 재임 때에는 탐오(貪汚)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하며, 이듬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당할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 울분 끝에 병사했다. 이후로 소씨(蘇氏)의 중앙진출이 크게 둔화되었다.

▲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포(法聖浦) 매바위[鷹岩]에는 송시열(宋時烈)ㆍ소두산(蘇斗山) 등 4인의 이름이 각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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