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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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허씨(金海許氏)의 시조 허염(許琰)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후(許黃后)의 35세손으로 전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ㆍ문관 직위 하나로 정1품)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의 세거지(世居地)인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락군 인전파(駕洛君仁全派)ㆍ호은공 기파(湖隱公麒派)ㆍ중승공 린파(中承公麟派)ㆍ전직공 인부파(典直公仁副派)ㆍ증성군 구년파(甑城君龜年派)ㆍ판서공 언룡파(判書公彦龍公派)ㆍ상서공 상파(尙書公相派) 등 크게 7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홍재(洪材ㆍ?~1170)는 인종 12년(1134년) 문과(文科)에 장원해 의종 초에 좌정언(左正言)으로 왕과 함께 국정(國政)을 의논하였으며, 의종 18년(1164년) 좌승선(左承宣)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165년 국자좨주(國子祭酒)ㆍ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으며, 1169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ㆍ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로 승진되고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한뢰(韓賴) 등과 함께 왕의 총애를 얻어 왕의 연락(宴樂) 때마다 배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무인(武人)들의 원망을 사서 1170년 무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살해되었다.
▲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허유전(許有全)의 묘(인천광역시기념물 제26호)는 1985년 후손의 현몽에 의해 발견되었다. 1988년 6월 묘지 발굴 결과 부장품은 도굴되어 거의 다 없어졌고, 중국동전ㆍ청자잔ㆍ고려시대 질그릇조각과 무덤의 주인공 것으로 보이는 사람뼈(어른 남자의 엉치뼈) 1점이 나왔다.
유전(有全ㆍ1243~1323)은 초명은 안(安)으로 원종 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충렬왕 21년(1295년)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있을 때 폐신(嬖臣)의 무고로 순마소(巡馬所)에 갇힌 후 사형될 뻔했으나,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왕의 노여움이 풀려 석방되었다. 충렬왕 24년(1298년) 국학사예(國學司藝)로서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고, 1307년 감찰대부(監察大夫)ㆍ권수동지밀직사사(權授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지공거(知貢擧)를 겸임했고, 국학사예(國學司藝)ㆍ전조시랑(銓曹侍郞)ㆍ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ㆍ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충숙왕 1년(1314년)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충숙왕 8년(1321년)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政丞)이 되었다. 1321년 원나라 토번(吐蕃ㆍ티베트)에 귀양간 상왕(上王ㆍ충선왕)으로부터 간곡한 편지를 받고 그의 환국운동을 위해 81세의 고령으로 여흥군(驪興君) 민지(閔漬)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와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왔다. 시호는 충목(忠穆).
▲ 김해 허씨 시중공파 중시조인 충목공(忠穆公) 허유전(許有全)의 묘 아래 자리한 시중공파 재사인 두산재(斗山齋).
▲ 정헌공(正憲公) 허백기(許伯琦)의 유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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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邕)은 호는 우헌(迂軒)으로 충숙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이 되었다. 충혜왕 1년(1331년)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종유(韓宗愈)와 우대언(右代言) 이군해(李君亥)가 과거시험을 맡아보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최경(崔璟)을 부정으로 급제시키자, 이를 탄핵하여 과거의 재실시를 상소하였으나 오히려 하옥될 뻔하였으나 박련(朴連)이 간관(諫官)은 죄줄 수 없다 하므로 중지되었다. 충숙왕 복위 5년(1336년) 감찰장령(監察掌令)에서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충숙왕 9년(1340년) 낭사(郞舍)로서 앞서 부정으로 합격한 최경(崔璟)의 첩장(牒狀)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여 충숙왕을 난처하게 하였다. 뒤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며, 청렴하고 강직하였다. 문장과 덕행이 탁월하여 당시 이색(李穡)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의 은거생활을 하며 산수와 어조(漁釣)로 낙을 삼았다.
옹(邕)의 아들 계도(繼道ㆍ생몰년 미상)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14년(1365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직간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개성소윤(開城少尹)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우왕 9년(1383년)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전란이 치열할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3년간 여막(盧幕)을 떠나지 않은 사실이 알려져 고향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김해 허씨는 고려조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16명, 호당 1명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백기(伯琦)와 목사(牧使) 수겸(守謙)이 유명했다.
백기(伯琦ㆍ1493~?)는 자는 여진(汝珍), 호는 삼송(三松)ㆍ호재(浩齋), 직제학(直提學)의 정(楨)의 아들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14년(1519년)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사관(史官)을 거쳐 이듬해 주서(注書)가 되었다. 1524년 형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1526년 형조정랑(刑曹正郞), 1528년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이듬해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중종 36년(1541년) 헌납(獻納)ㆍ장령(掌令)을 역임하고 1544년 사간(司諫)ㆍ교리(校理)ㆍ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명종 즉위년(1545년) 형조참의(刑曹參議), 1553년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1562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정헌(正憲).
▲ 창주(滄洲) 허?돈(許燉)의 문집인 ‘창주집(滄洲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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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겸(守謙ㆍ1563~?)은 자는 이옥(而玉), 호는 운계(雲溪)로 아버지는 억부(億富)이다. 선조 21년(158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해 사관(史官)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자(正字)로서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했다. 1596년 부여현감으로 있을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나자 적이 오기도 전에 겁을 먹고 아랫사람들이 군기(軍器)를 적에게 실어다 주었다는 이유로 죄를 입었다. 또, 강진현감이 되었으나 1602년 사헌부에서 징렴(徵斂)을 많이 하고 중망(重望)이 가볍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으며, 외임을 주로 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이르렀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돈(燉ㆍ1586~1632)은 자는 덕휘(德輝), 호는 창주(滄洲)로 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홍재(洪材)이다. 처음 노흠(盧欽)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흘(李屹)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해군 8년(161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임명된 뒤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거쳐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그때 폐모설이 나오자 인륜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크게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와림천(臥林泉)에서 부모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여 전라도사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27년 남한산성에서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자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고암서원(古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창주집(滄洲集)’이 있다.
득량(得良ㆍ1597~1637)은 자는 국필(國弼), 호는 상무헌(尙武軒)으로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에게 수학했으며, 광해군 12년(1620년) 무과에 급제하고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ㆍ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이 되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수문장 겸 금군별장으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3등에 등록되고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 수백 명을 모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閔英)의 진에 들어가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수많은 적군과 싸우다가 6촌 복량(復良)과 함께 전사했다.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대구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제향되었다. 1842년 8대손 석화(錫華)가 그의 시문을 모아 간행한 ‘상무헌유고(尙武軒遺稿)’가 전한다.
▲ 1842년 8대손에 의해 간행된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의 문집인 ‘상무헌유고(尙武軒遺稿)’.
복량(復良ㆍ?~1636)은 호는 낙암(洛菴)으로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형 득량(得良)과 함께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閔英)의 진(陣)에 나아가 청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대구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제향되었다.
▲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과 낙암(洛菴) 허복량(許復良)을 제향하기 위해 1639년 건립되었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1920년 중창한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 용강서원(龍岡書院).
한말의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유(愈ㆍ1833~1904)는 자는 퇴이(退而), 호는 남녀(南黎)ㆍ후산(后山)으로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다. 평생을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으며, 만년인 1903년 덕행(德行)으로 천거받아 참봉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심학(心學)과 주리(主理)의 설을 굳게 따름으로써 영남(嶺南)의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이론 확립에 기여하였다.
▲ 경남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에 자리한 후산(后山) 허유(許愈)의 묘.
위(蔿ㆍ1855~1908)는 자 계형(季馨), 호는 왕산(旺山), 경북 선산(善山)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종 32년(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의병이 일어나자 1897년 이기찬(李起燦)ㆍ이은찬(李殷贊)ㆍ조동호(趙東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금산(金山)ㆍ성주(星州) 등지에서 관군과 싸우다 고종의 의병해산령에 따라 자진해산하고 귀향하였다. 고종 36년(1899년) 조정의 뜻을 따라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이 된 뒤 성균관 박사ㆍ평리원 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ㆍ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지내고, 고종 42년(1905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다. 같은 해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격문을 돌리다 투옥되어 4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순종 1년(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당하자 경기도 연천(漣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 이듬해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上)1908년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한 왕산(旺山) 허위(許蔿)에 관한 기록인 ‘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과 1908년 5월22일 경성헌병대에서 쓴 유묵(‘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 하랴’). (下)구미시 남통동 금오산에 세워진 유허비.
위(蔿)의 형 훈(薰ㆍ1836~1907)은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舫山)으로 5세 때부터 조부에게 본격적으로 글을 배우고, 10세 때는 ‘시경(詩經)’ㆍ‘서경(書經)’ 등에 통달하였다. 29세 때 당대의 석학 허전(許傳)을 찾아가 수학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유주목(柳疇睦)에게도 수학하여 근기학파(近畿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를 다시 종합하는 위치에 있었다. 장지연(張志淵)ㆍ장석영(張錫英) 등과 교유하였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고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분개하여 청송에서 창의하여 의병장이 되기도 하였다. 71세 되던 해 봄에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에 천거되자 쾌히 승낙하였으나, 72세 되던 해 8월에 감기를 얻어 사거(死去)하였다. 아우인 노(魯)ㆍ위(蔿)가 항일의병운동을 하는 동안 이들을 후원하면서 자신은 은둔생활을 통해 의리(義理)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하였다.
▲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형인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유묵.
그외 독립운동가로 병률(秉律ㆍ1888~1942)은 자는 화선(和宣) 호는 영계(潁溪)로 1917년 박상진(朴尙鎭)ㆍ채기중(蔡基中)이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9월경 양한위(梁漢緯)ㆍ권태일(權泰鎰)로부터 상해판 ‘독립신문’ 및 경고문 등을 전달받아 부호와 관공리에게 발송, 최대한의 지원을 호소하여 모금한 8,000원의 군자금을 1920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해 8월에 박용선(朴容善)ㆍ조한명(趙漢明)ㆍ이동찬(李東燦) 등과 군자금 모집을 모의하고 권총과 탄약을 휴대, 서울 서린동에 사는 엄홍섭(嚴弘燮)을 설득하여 2만원을 군자금으로 교부받아 곧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군자금모집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빈(斌ㆍ1891~1931)은 일명 성묵(聖默)으로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이다. 1919년 이창실(李昌實)과 함께 구월산에 입산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신문’을 배포,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간 복역하였다. 1922년 출옥 후 부일배 숙청공작을 전개하다가 다시 붙잡혔으며, 1924년 간도로 망명하여 용정(龍井)에서 동계중학(冬季中學)을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청년들에게 항일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25년 일제에 의하여 폐교되자 만주 닝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新民府)조직에 참여하여 교육부 위원장 및 선전부장을 지내면서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신민부 산하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설립하고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1927년 검거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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