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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연원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으로 전하는 고려개국벽상공신(高麗開國壁上功臣)인 허선문(許宣文)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 의하면 그는 공암현(孔巖縣ㆍ경기도 김포시 양천)에 대부호(大富豪)로 살면서 농사에 힘써 많은 양곡을 비축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중 군량미가 떨어지고 병마(兵馬)가 매우 피로하여 절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마필과 식량을 내어 줌으로써 왕건이 전쟁에 승리하여 고려 건국에 지대한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 공으로 왕건은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의부(義父)로 모시고 공암촌주(孔岩村主)로 봉하여 공암현(孔巖縣)을 식향(食鄕)으로 하사했다고 하며, 기록에는 99세를 넘기도록 살았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본관을 공암(公巖)으로 하였으며, 후에 공암(公巖)이 양천(陽川)으로 고쳐짐에 따라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불려지게 되었다.

 

▲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에 따라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서울 강서구 가양동 허가바위(서울시기념물 제11호).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는 삼국시대 이전에 조성된 허가(許家)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에는 가로 약 6m, 세로 약 2m, 높이 약 5m의 천연동굴이 있는데, 1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있기 때문에 ‘공암(孔岩)’이라고도 한다.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 동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에 따라 이곳이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알려졌 있다. 강서구의 최초 지명이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었는데 ‘제차’는 차례 또는 갯가, ‘파의’는 바위라는 뜻으로 보아 구명(區名)이 이곳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문(宣文)의 손자 원(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ㆍ지제고(知制誥)ㆍ태자사의(太子司議) 등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정(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재보(太子太保ㆍ동궁의 종1품 벼슬)에 이르렀고, 정(正)의 아들로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재(載)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다.

 

▲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풍곡리에 자리한 시조 허선문(許宣文) 이하 9세조까지의 제단.

공(珙ㆍ1233~1291)은 고종 45년(1258년) 문과(文科)에 급제, 승선(承宣) 유경(柳璥)의 추천으로 내시(內侍)에 소속하여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었으며, 1269년 우부승선(右副承宣)ㆍ이부시랑(吏部侍郞)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하였다. 권신(權臣) 임연(林衍)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자 제의했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받았으며,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옹립할 때 많은 조신(朝臣)들이 살해되었으나 그는 전선(銓選)을 맡을 적격자여서 중용(重用)되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올랐다. 1274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해 전함(戰艦) 300척의 건조를 고려에 명하자 추밀원 부사로서 전주도 도지휘사(全州道都指揮使)가 되어 전함의 건조를 담당했고, 충렬왕 1년(1275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밀직사사(密直司吏)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임, 이어 세자조호(世子調護)ㆍ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내고 1279년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원나라의 명으로 다시 90척의 전함을 건조하게 되자 경상도 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했다. 1284년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여 원부(元傳)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찬술(撰述), 1288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어 다시 지공거를 겸했다. 충렬왕 17년(1291년) 원나라와 함께 합단(哈丹) 공격에 출전했다가 병사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충렬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

 

 

▲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 17년(1291년)조에 기록된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졸기. “8월에 첨의중찬(僉議中贊) 허공(許珙)이 졸하였다. 공은 공암현(孔巖縣) 사람으로, 성품이 공손ㆍ검소하여 자기의 생산을 일삼지 않았고, 비록 달관(達官)에 이르러서도 먹는 것이 한 그릇에 불과하였으며, 베이불과 부들자리에 만족히 지냈고, 여러 사람과 같이 있어도 말을 삼갔다. 공은 젊었을 때 항상 종 하나를 데리고 죽은 사람의 해골이나 뼈를 매일처럼 묻어 주고, 버린 시체를 발견하면 몸소 져다가 묻어 주었다.…”

공(珙)의 증손 백(伯ㆍ?~1357)은 충목왕 즉위년(1344년)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고, 이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서연(書筵)에서 시독(侍讀)했으며, 같은 해 밀직사사(密直司使)에 올랐다. 1347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충정왕 1년(1349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공민왕 5년(1356년)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郞同平章事)가 되어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正).


고려의 의관(醫官) 종(悰ㆍ?~1345)은 검교정승(檢校政丞) 숭(嵩)의 아들로 충렬왕(忠烈王)에 의해 궁중에서 자라 충선왕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와 결혼했으며, 충렬왕 때 수사공(守司空)을 지내고 왕명으로 3년간 원나라에 가 있었다. 충선왕 때 수사도(守司徒)에 올라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지고, 뒤에 다시 원나라에 갔다가 연달아 부모가 죽자 돌아와 이 때부터 들어앉아 의술(醫術)로써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충숙왕 때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뒤에 또 충혜왕을 배종(陪從)하여 원나라에 5년간 머물다가 수춘옹주가 죽자 상심 끝에 병들어 죽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재령군수(載寧郡守) 손(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종(琮)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침(琛) 형제가 뛰어났다.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의 유묵과 허종ㆍ허침 형제의 일화가 전하는 종침교터 표석.

종(琮ㆍ1434~1494)은 자는 종경(宗卿)ㆍ종지(宗之), 호는 상우당(尙友堂)으로 시중(侍中) 공(珙)의 후손이다. 세조 2년(1456년) 생원(生員)이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해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ㆍ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ㆍ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1460년에 평안도 도절제사도사(平安道都節制使都事)가 되고, 형조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ㆍ함길도 도사(咸吉道都事)ㆍ정언(正言)ㆍ지평(持平)을 거쳐 직강 겸 예문관 응교(直講藝文館應敎)를 역임했다. 1464년 사예(司藝)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고, 세조 11년(1465년) 함길도 절도사(咸吉道節度使)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그의 후임인 강효문(康孝文)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기복(起復)하여 다시 함길도 절도사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양천군(陽川君)에 봉해졌다.

예종 1년(1469년) 평안도 관찰사ㆍ대사헌을 지낸 후 이 해 전라도에서 장영기(張永奇)가 난을 일으키자 전라도 절도사로 나가 이를 평정,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성종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이 되고 147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이를 격퇴, 우참찬(右參贊)에 이어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1481년 호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1483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임, 이어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양천부원군(陽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1491년 영안도 관찰사(永安首觀察使)로 있을 때 여진족이 북변을 괴롭히자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로 2만 4천의 군대를 이끌고 적의 본거지를 소탕, 이듬해 돌아와 우의정에 승진했다. 궁마(弓馬)에 뛰어났고 문명(文名)이 높아, 문무를 겸비한 명신으로 여러 차례 북변에 파견되어 야인의 침입을 무찔렀다.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

 

▲ ‘성종실록’ 287권 갑인조(1494년)에 기록된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의 졸기. 클릭!

종(琮)이 우의정(右議政)으로 있던 성종 10년(1479년) 계비(繼妃) 윤씨(尹氏ㆍ연산군의 생모)를 폐(廢)하려는 회의가 열렸을 때, 그는 대궐로 향하는 도중 다리를 건너다가 일부러 말에서 개울로 떨어져 희의 참석을 기피했다. 그로부터 25년 뒤인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앞서 폐비간의(廢妃諫議ㆍ윤비를, 폐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이 화(禍)를 입을 때 종(琮)은 피해를 면할 수 있었으며, 그가 떨어졌던 다리는 ‘종침교(琮琛橋ㆍ허종과 허침의 다리)’라 불리웠다. 그러나 ‘동국여지비고(東國與地備考)’에는 허종ㆍ허침 형제가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여 두 형제의 이름을 붙여 종침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종(琮)의 동생 침(琛ㆍ1444~1505)은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蓬軒)으로 세조 8년(1462년) 진사(進士)가 되고 성종 6년(1475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감찰(監察)ㆍ전적(典籍)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예문관 부수찬(藝文館副修撰)ㆍ부교리(副校理)ㆍ지평(持平) 등을 역임했다. 1482년 진현시(進賢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이듬해 보덕(輔德)으로 승진하고, 그 후 직제학(直提學)ㆍ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92년 전라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대사헌, 예조와 호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1494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刑曹參判)ㆍ이조판서ㆍ우참찬(右參贊)을 거쳐 1504년 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앞서 성종이 윤비(尹妃)를 폐하려 할 때 이를 반대했으므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를 면했으나 항상 연산군의 폭정(暴政)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 (上)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2리에 자리한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묘와 봉분이 없는 허균의 어머니 강릉 김씨의 묘표. (下)앞쪽은 양사언, 뒷쪽은 한호의 글씨인 초당(草堂) 묘표 탁본과 유묵.

엽(曄ㆍ1517~1580)은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군자감 부봉사(軍資監副奉事) 한(澣)의 아들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1년(154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1551년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혐의로 파면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으로 다시 기용되고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1562년 지제교(知製敎)를 겸임, 이 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 윤근수(尹根壽)ㆍ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허자(許磁)ㆍ구수담(具壽聃)의 무죄(無罪)를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기용되었다가 과격한 언사로써 다시 파직, 선조 1년(1568) 다시 기용되어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에 올라 향약(鄕約)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선조 8년(1575년) 동인(東人)ㆍ서인(西人)의 당쟁이 시작될 때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며,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한직(閑職)에 전임되었다가 상주(尙州)의 객관(客館)에서 죽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슬하에 성(筬)ㆍ봉(?)ㆍ균(筠)ㆍ난설헌(蘭雪軒) 4남매가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엽(曄)과 함께 4자녀는 ‘강릉의 5문장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2리에 자리한 악록(岳麓) 허성(許筬)의 묘.

엽(曄)의 장남 성(筬ㆍ1548~1612)은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ㆍ산전(山前)으로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선조 1년(1568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검열(檢閱)을 지낸 뒤 1590년 전적(典籍)으로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지적했으나 부사(副使)인 김성일(金誠一)은 침략 우려가 없다고 진술하자, 김성일과 같은 서인(西人)인데도 불구하고 그 의견에 반대해 침략의 가능성이 있음을 직고(直告)했다. 이어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응교(應敎)ㆍ사인(舍人)을 거쳐 1594년 이조참의(吏曹參議), 이듬해 대사간ㆍ부제학(副提學)을 역임,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도 통달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2리에 자리한 하곡(荷谷) 허봉(許?)의 묘

엽(曄)의 차남 봉(?ㆍ1551~1588)은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으로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선조 1년(1568년) 생원(生員)이 되고, 1572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선조 7년(1574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어 심의겸(沈義謙) 등 서인(西人)들과 대립했다. 1577년 교리(校理)가 되고, 1583년 전한(典翰)ㆍ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냈다.

 

 

 

▲ 교산(蛟山) 허균(許筠)이 지은 ‘홍길동전’과 수결(手決) 및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2리에 자리한 묘.

엽(曄)의 막내아들 균(筠ㆍ1569~1618)은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로 선조 22년(158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검열(檢閱)ㆍ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이듬해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별실에 숨기고 즐겼다는 탄핵을 받아 한때 파직되었다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ㆍ형조정랑(刑曹正郞)ㆍ사예(司藝)ㆍ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이어 전적(典籍)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지낸 후 1606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 이 때 탁월한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상의원정(尙衣院正)ㆍ삼척부사(三陟府使)ㆍ내사시정(內資寺正) 등을 역임한 뒤 숭불(崇佛)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광해군 1년(1609년)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고, 이듬해 진주부사(陳秦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天主敎)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이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부정으로 급제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태인(泰仁)에 은거하여 작품의 창작에 정진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평소 교제가 깊었던 서자(庶子) 출신인 박응서(朴應犀)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당시 권신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와 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거쳐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에 다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大北派)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 계획을 진행시켰고, 이 해 좌참찬(左參贊)에 승진, 이듬해 하인준(河仁俊)ㆍ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고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그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1613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에 희생된 서양갑(徐羊甲) 등과 교분이 있어 반란을 계획했다는 설이 있다.

 

▲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자월리 안동 김씨 문중 묘역에 자리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묘. 남편 묘는 한 칸 위에 재혼한 부인과 합장되어 있고, 허난설헌 묘 옆에는 먼저 간 두 아이의 자그만 묘가 자리하고 있다.


난설헌(蘭雪軒ㆍ1563~1589)은 자는 경번(景樊), 본명은 초희(楚姬)로 난설헌(蘭雪軒)은 호이다. 균(筠)의 누이로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짓는 등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고, 15세 무렵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고부간의 불화와 친정의 겹친 화액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시쓰기로 고뇌를 달래다 27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시 213수 가운데 128수는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심정을 읊은 신선시(神仙詩)이며, 애상적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작품의 일부는 동생 균(筠)이 명(明)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으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자리한 정민공(貞敏公) 허잠(許潛)의 묘.

잠(潛ㆍ1540~1607)은 자는 경량(景亮), 호는 한천(寒泉)으로 생원(生員) 초(礎)의 아들이다. 선조 때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등용된 뒤 선조 20년(1587년)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가 되었고, 1592년의 임진왜란 때 호가하였으며 호서지방에서 군사를 모아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595년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고, 159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중화부사(中和府事)ㆍ성천부사(成川府使)ㆍ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선조 38년(1605년)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행사직(行司直)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시호는 정민(貞敏).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자리한 향오(香塢) 허한(許?)의 묘와 허한(許?)과 아들 묵재(默齋) 허적(許積)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잠(潛)의 셋째 아들 한(?ㆍ 1574~1642)은 자는 의보(毅甫), 호는 향오(香塢), 아버지가 성주목사로 재직할 때 정구(鄭逑)ㆍ김동강(金東岡)ㆍ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광해군 7년(1615년) 음사(蔭仕)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10년(1618년) 고산현감이 되었고, 인조 14년(1636년) 12월 병조호란 때에 최명길(崔鳴吉)이 임금에게 “익위(翊衛) 허한은 나이가 많아도 제법 구변이 있다”고 천거하여 청나라 군대의 실정과 형세를 탐지하기 위하여 적진에 보내졌다.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예천군수, 이천부사를 지냈다.

 

▲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에 자리한 묵재(默齋) 허적(許積)의 묘.

 

한(?)의 아들 적(積ㆍ1610~1680)은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ㆍ휴옹(余翁)으로 인조 11년(1633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ㆍ부수찬(副修撰)을 지낸 뒤 1641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했다. 1645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647년 일본 사신 다이라(平成幸)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 그 후 다시 기용되어 효종 4년(1653년)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내고 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9년 형조판서에 전임했다. 이 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南人)으로서 서인(西人)의 기년설(朞年說)에 대해 3년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후 호조ㆍ병조의 판서를 역임, 현종 3년(1662년) 진주부사(陳秦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1664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 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秦使)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가 1668년 좌의정이 되었다.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에 송시열(宋時烈)의 논척(論斥)을 받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 1674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자의대비의 제2차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을 반대, 기년설을 주장하여 채택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 남인 집권을 이룩했다.

그 후 집권한 남인 사이에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청남(淸南)ㆍ탁남(濁南)으로 갈라질 때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領袖)가 되어 집권자로 등장했다. 숙종 2년(1676년)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秦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가 되고, 왕의 신임을 받아 궤장(?杖)이 하사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幄)을 함부로 사용하여 대죄하던 중 서자 견(堅)의 모역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金益勳)ㆍ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그의 관작을 추복하였다. 식견이 넓고 총명한 재질로서 선왕으로부터 탁고(托孤)의 명을 받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수상이 되어 자기에게 내리는 은사(恩賜)는 친구들에게 돌리고 녹봉으로 친구들을 구제하였다. 남인으로서 서인의 송시열(宋時烈) 등과 가까이 지냈다.

 

▲ (좌)미수(眉?) 허목(許穆)의 영정. (우)묵재(默齋) 허적(許積)의 영정


목(穆ㆍ1595~1682)은 자는 문보(文父)ㆍ화보(和甫), 호는 미수(眉수), 현감(縣監) 교(喬)의 아들로 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고 않고 경서(經書) 연구에 전심하여 특히 예학(禮學)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효종 1년(1650년)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가 1657년 지평(持平)에 초임(初任),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현종 1년(1660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당시 집권층인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 등이 채택한 기년설(朞年說)을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현종이 기년설을 재확인함으로써 재집권을 노리던 남인(南人)은 큰 타격을 받고 모두 숙청당할 때 그는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좌천당했다가 2년 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숙종 즉위년(1674년) 제2차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ㆍ만 9개월)을 반대하여 기년설을 채택케 하는 데 성공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이 해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가 일어나자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해야 된다고 주장, 이로 인해 남인은 양파로 갈라져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대립, 그는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9년 탁남인 허적을 탄핵했다가 파직,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했다. 글씨는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림과 문장에도 뛰어났다. 마전(麻田) 미강서원(眉江書院), 나주(羅州) 미산서원(眉山書院), 창원(昌原) 회원서원(檢原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 자리한 미수(眉?) 허목(許穆)의 묘.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84호.

준(浚ㆍ1539∼1615)은 자는 청원(淸源)으로 명의로 이름을 떨쳐 선조 때 내의(內醫)가 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년) 어의(御醫)로서 끝까지 왕을 호종(扈從)해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이 되어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으나, 중인(中人) 출신에게 당상관의 위계(位階)를 줌이 불가하다는 대간(臺諫)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한때 파직당했다. 광해군 2년(1610년) 16년의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의서(醫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으며, 의서의 국역(國譯)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죽은 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추록(追錄)되었으며, 현대까지 의성(醫聖)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 1991년 9월 30일 발견된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임진강 건너 비무장지대에 자리한 구암(龜巖) 허준(許浚)의 묘. 면적 50여 평으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 김씨의 묘로 추정되고, 허준 생모(生母)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1기가 더 있다. 발견 당시 봉분(封墳)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헤쳐졌고 묘비(墓碑), 문인석(文人石) 2기, 상석(象石), 향로석(香爐石)이 묘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묘비는 두 쪽으로 잘려졌는데, 마모된 비문 가운데 ‘양평군(陽平君)’, ‘호성공신(扈聖功臣)’, ‘허준(許浚)’ 등의 글자가 있다.

양천 허씨가 배출한 공신(功臣)

번호

휘 (諱)

내 용

세(世)

시 대

비 고

1

허추(許樞)

原從三等功臣(원종삼등공신)

16世

세종朝<i--1450>년 세종32="세종32"></i--1450년>

慈山公

2

허종(許琮)

敵氣功臣(적기공신) .勳一等(훈일등)

18世

세조朝

陽川府院君

3

허유례
(許惟禮)

敵氣功臣(적기공신).勳二等(훈이등)

17世

세조朝

吉城君

4

허종(許琮)

佐理功臣(좌리공신).勳四等(훈4등)

18世

성종朝

陽川府院君

5

허상(許?)

靖國功臣(정국공신).勳三等(훈3등)

19世

중종朝

陽山君

6

허광(許?)

靖國功臣(정국공신).勳四等(훈4등)

19世

중종朝

齊陽君

7

허준(許浚)

扈聖功臣(호성공신).勳三等(훈3등)

20世

선조朝

陽平君

8

허적(許적)

寧社功臣(영사공신).勳一等(훈1등)

21世

인조朝

陽陵君

9

허계(許?)

寧社功臣(영사공신).勳二等(훈2등)

21世

인조朝

陽平君

10

허선(許選)

寧社功臣(영사공신).勳二等(훈2등)

22世

인조朝

陽原君

11

허대인
(許大仁)

壬亂二等功臣(임란이등공신)

23世

고종朝

富寧府使
(追封功臣)

12

허원(許源)

奮武原從一等功臣(분무원종일등공신)

26世

영조朝<i--1728>년 영조4년="영조4년"></i--1728년>

淸州牧使


그 외 숙종(肅宗) 때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으로 숙종 38년(1712년) 동지사(冬至使) 김창집(金昌集)의 수원(隨員)으로 청나라에 가서 송나라 휘종(徽宗)의 ‘백응도(白鷹圖)’를 모사(模寫)한 숙(?)과 조선의 과학자로 숙종 31년(1705년)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로 청나라에 건너가 역관(曆官) 하석(河錫)에게 역법(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세초유휘(細草類彙)’를 저술한 원(遠), 노일전쟁(露日戰爭) 때 이범윤(李範允) 등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재영장(在營長)이 되어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한일합방 후 의군부(義軍府) 참모를 거쳐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3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참전한 후 시베리아 수청(水靑)에서 자결한 재욱(在旭)이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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