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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칠원 제씨(漆原諸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칠원(漆原)은 본래 백제의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칠제(漆隄)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ㆍ昌原)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쳐 고려 현종 9년(1018년) 김해(金海)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초기에 칠원현으로 고친 후, 선조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 때 현(縣)이 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관할의 칠원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칠원, 칠서, 칠북의 3면으로 편성되어 함안군(咸安郡) 칠원면이 되었다.

 ▲ 조선시대 진해현(鎭海縣)에 보관되어 있던 1606년 칠원 제씨 호적원부(1m×70㎝). 경남유형문화재 제140호.

 

 

 

제씨(諸氏)는 본래 복성(複姓)인 제갈(諸葛)씨에서 분종(分宗)된 성씨(姓氏)로 전한다. ‘칠원제씨세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원조(遠祖)는 중국 한(漢)나라 때 우임장군(羽林將軍)이었던 제갈영(諸葛嬰)으로, 6세손인 제갈량(諸葛亮)의 증손 제갈충(諸葛忠)이 한나라가 망하고 아버지와 형이 순절하자 13세의 나이로 신라 미추왕(味鄒王) 때에 입국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제갈영(諸葛嬰)의 34세손 제갈홍(諸葛泓)과 제갈형(諸葛瀅) 형제 대(代)에서 복성(複姓)을 각각 한 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인 홍(泓)은 제씨(諸氏)로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으며, 아우인 형(瀅)은 갈씨(葛氏)로 낭야군(瑯琊君)에 봉해져 제씨(諸氏)와 갈씨(葛氏)로 분종(分宗)되었다.

 ▲ 헌종 13년(1847년) 칠원 제씨 문중에서 한성부(漢城府) 도호부(都戶府) 호적단(戶籍單)에 접수한 칠원 제씨 한성부 호적단.

 

그후 42세손 제문유(諸文儒ㆍ제갈홍의 8세손)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서 토번(吐蕃ㆍ티베트)로 유배될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책록되어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ㆍ구산은 칠원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며, 자금옥대(紫金玉帶)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제갈영(諸葛嬰)를 원조(遠祖)로 하고 제문유(諸文儒)를 중조(中祖)로 삼아 기세(起世)하고 있다.

고성(固城)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제(諸)씨도 칠원 제씨(漆原諸氏)와 같은 본관이라 할 수 있으며,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판서공파(判書公派)ㆍ참봉공파(參奉公派)ㆍ찰방공파(察訪公派)ㆍ주부공파(主簿公派)ㆍ별좌공파(別座公派)ㆍ충의공봉사손장령공파(忠毅公奉祀孫掌令公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ㆍ학포공파(學圃公派)ㆍ참의공파(參議公派)ㆍ판관공파(判官公派)ㆍ부사공파(府使公派)ㆍ선교랑공파(宣敎郞公派)ㆍ정헌공파(靜軒公派)ㆍ만성공파(晩惺公派)로 나뉘어졌다.

 ▲ 경남 마산시 진동면 다구리 옥녀봉(玉女峰) 기슭에 자리한 충의공(忠毅公) 제말(諸沫)의 묘. 아래 사진은 정조가 하사한 양석(羊石)이 1983년 도난당하기 전 모습.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인 말(沫ㆍ?∼1592)은 1543년에 출생하였다는 기록과 1567년에 출생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출생년도가 확실하지 않다. 자는 성여(成汝), 호는 가계(柯溪)로 무과에 급제하고 총부수문장(摠府守門將)을 역임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키가 8척에 몸무게가 400근(240kg)이나 되는 거인으로 하루에 수백 리 길을 달려 적과 싸웠기 때문에 날아다니듯 빠르다 하여 비장군(飛將軍)이라 일컬었으며, 그의 눈과 수염의 위세가 너무 당당하여 왜적도 장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덤비지 않고 싸우기를 피하여 무적행군(無敵行軍)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조카 홍록(弘祿)을 비롯하여 동지 67인과 더불어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켜 웅천(熊川)ㆍ김해(金海)ㆍ정암(鼎巖) 등지에서 대승, 그 공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임진왜란 이후 그의 공적이 잘 밝혀지지 않았으나, 200년이 지난 정조 16년(1792년) 여러 기록을 다시 조사하여 왕이 하교하시기를 “제말은 곽재우와 같은 때에 왜적을 치고 순국하였으나 곽재우는 이미 포상이 되어도 제말은 그렇지 못하다. 그의 고성과 성주에서 싸운 공이 이충무공의 노량싸움에 뒤지겠는가. 이에 정승의 벼슬과 시호를 내린다” 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려 쌍충사적(雙忠史蹟)에 기록하게 하였다. 그의 조카 홍록(弘綠)과 장군의 충의를 기리어 성주와 진주에 쌍충각(雙忠閣)을 세워 이를 ‘제말제홍록숙질쌍충지지(諸沫諸弘祿叔侄雙忠之址)’라 대서특필하였고, 사람들은 이 비를 ‘제씨쌍충비(諸氏雙忠碑)’ 또는 ‘쌍충사적비’라고 하였다. 순조 12년(1812년)에는 장군의 충의에 비해 미약함을 애석히 여겨 그 공이 천추에 빛나도록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다시 내렸다.

 ▲ 충의공(忠毅公) 제말(諸沫)과 조카 제홍록(諸弘祿) 장군의 충의를 기려 세운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ㆍ경북유형문화재 제61호).

 

 

 

그의 조카 홍록(弘祿ㆍ1558~1597)은 자는 경행(景行), 호는 고봉(高峰)으로 참판(參判) 호(灝)의 아들이다. 선조 14년(1581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수문장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촌 말(沫)을 따라 의거(義擧), 웅천(熊川)ㆍ김해(金海)ㆍ정암(鼎巖)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그 명성이 이순신(李舜臣)에게 전해져 그 막하로 발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에게 포위된 진주성(晉州城)을 지원하기 위해 출전하던 도중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으며, 또 효성이 지극한 그는 홀로 된 어머니를 싸움터까지 업고 다니면서 어머니를 산속에 숨겨 두고 왜적들과 싸웠다고도 전한다. 그가 전사한 지 40여 일 후, 왜적이 물러가고 그의 동생 홍정(弘禎)이 산중에 있다가 형의 시체를 찾아 나섰다. 여름철 더운 날씨에 쌓인 군사들의 시체들은 썩어서 그 형체를 알 수 없는데, 시체더미 속에서 형이 가지고 다니던 칼집이 옆으로 튀어나와 찾아보니 형의 시체가 얼굴하나 상하지 않고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정조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충의공(忠毅公) 제말(諸沫) 장군과 조카 제홍록(諸弘祿) 장군의 충의를 기려 세운 경남 진주시 본성리 진주성내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ㆍ경남유형문화재 제3호).

 

 

▲ 경남 진주시 본성리 진주성내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탁본.

 

락(洛)은 자는 청숙(淸淑), 호는 죽림(竹林)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倭敵)을 배둔역(背屯驛)에서 대파하니 그 공으로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이르렀으며,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추증되었다.

만춘(萬春)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영 군교(慶尙右水營軍校)로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의 명을 받고 웅천(熊川)에 잠입,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오다가 영등포(永登浦)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듬해 7월 적선을 타고 탈출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진영에 도착, 죄가 논의되었으나 용서되어 이순신의 군중에서 복무하며 이순신을 도와 적정을 탐지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후 대솔군관(帶率軍官)이 되었고, 늙도록 통영(統營)에서 복무했다.

여원(汝元)은 호는 만회당(晩悔堂)으로 선조(宣祖) 때 선략장군(宣略將軍)ㆍ충무위 부장(忠武衛部將)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왜군(倭軍)을 대파하는데 공이 컸다. 그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보성(寶城)으로 낙향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며 일생을 보냈다.

경욱(景彧ㆍ?∼1812)은 자는 경식(敬植)으로 말(沫)의 6세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운총만호(雲寵萬戶)가 되어 군기(軍器)를 수리하는 등 군비에 만전을 기하였으며, 해서우후(海西虞候)가 되어 군비를 쇄신할 때 군민(軍民)의 폐를 끼치지 않았다.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관서절도영(關西節度營)의 청북소모장(淸北召募將)이 되어 절도사 이해우(李海愚)의 휘하병 200명을 인솔, 청천강을 건너가 많은 군병을 모집하였다. 정주(定州)에 이르러 현인복(玄仁福)과 더불어 선봉이 되어 정주성 남문을 포격하는 한편, 큰 도끼를 들고 성문을 찍어 성문이 거의 떨어지게 되었으나 적이 일제히 포를 쏘며 시석(矢石)을 퍼붓자 관군이 모두 달아나게 되었다. 이 모습을 보고 관군의 기율이 해이한 것을 개탄하면서 되돌아와 신도진수군첨절제사 겸 방어장(薪島鎭水軍僉節制使兼防禦將)에 임명되어 다시 선봉으로 남문에 육박하였을 때, 홍경래군의 일제사격으로 전사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氷軍統制使)에 추증되고, 난이 평정된 날에 칠의사사(七義士祠)의 단을 쌓아 제사지내졌으며, 평북 정주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양(忠襄).

그 외 안방준(安邦俊)의 문하생으로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부장(副將) 민문승(閔文昇)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회덕(懷德)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미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경창(憬昌)은 호조참의(戶曹參議) 달룡(達龍), 감찰(監察) 정로(珽魯)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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