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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연씨(延氏)는 본래 중국 남양(南陽) 계통으로 중국 홍농(弘農)에서 고려(高麗)에 들어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한 연계령(延繼笭)이 곡산(谷山)에 정착ㆍ영주(永住)하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 연씨(延氏)의 시초가 되었다.
 

 

 

▲ 충북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에 자리한 7세 연수창(延壽菖)으로부터 11세 연주(延柱)까지의 5위(位) 단비.
 

 

▲ 충북 증평군 도안면 도당리 금당서원(靖厚祠)에 봉안된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의 영정.  

 

그 후 원종 15년(1274년) 7세 수창(壽菖)이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여 고려에 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ㆍ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고 곡산(谷山)에 정착하여 이 땅에 곡산 연씨의 뿌리를 내리게 한 관향조로서 실질적인 시조에 해당한다.

그후 11세 주(柱)가 광록대부(光祿大夫)ㆍ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라 조선 태종(太宗) 때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으며, 주(柱)의 아들 사종(嗣宗)은 한성부사(漢城府事)를 거쳐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고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연계령(延繼笭)을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곡산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는 연씨(延氏)의 본관이 곡산(谷山) 외에도 36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세거지(世居地)나 분포지역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며, 현재는 곡산(谷山) 단일본으로 전한다.

수창(壽菖)의 아들 경(鏡)은 호가 암곡(巖谷)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5년(1318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과 태사(太師ㆍ임금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의 하나)를 역임한 명신(名臣)이었으며, 당대의 문장가로 ‘암곡시(巖谷詩)’를 남겼는데 그 중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風裡綠琴松籟發 / 바람결 거문고 소리 솔잎이 불어내고,
雨中紅錦海棠開 / 비 내리는 강언덕에 해당화 피었구나

곡성군(谷城君) 주(柱)의 차남 사종(嗣宗ㆍ1360~1434)은 자는 불비(不非)로 함남 함흥(咸興) 출신이다. 우왕 14년(1388년) 요동(遼東) 정벌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종군,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과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록되었다. 태종 1년(1401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정안군파(定安君派)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이 되고, 뒤에 상장군(上將軍)ㆍ호조전서(戶曹典書) 등을 지내고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다.
 

 

 

▲ (上)충북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에 자리한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의 묘. (下)연사종의 묘와 아래로 아들 연비(延庇)와 연음(延)의 묘.
 

이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태종 10년(1410년) 동북면 병마도절제사(東北面兵馬都節制使)로 야인(野人)의 침입을 방어, 이 해 길주도 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가 되어 병마절도사를 겸하였다. 1412년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병마절제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兼兵馬節制使)가 되어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하다가 1414년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해 사직했다. 1416년 등용되어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18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ㆍ중군 도총재(中軍都摠制)를 역임하고 1422년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으며, 이어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26년 3월 김도련회뢰사건(金道練賄賂事件)에 연루되어 인제에 유배되었다가 공신의 은전을 입고 풀려나와 직첩을 돌려받고 곡산부원군에 재훈봉되었으며, 그가 죽자 3일간 조례를 정파하고 예장(禮葬)하였다. 시호는 정후(靖厚).


 

 

▲ 연사종(延嗣宗)의 손자로 안동부사를 지낸 안한정(安閒亭) 연정설(延井渫)의 묘.  
 

사종(嗣宗)의 손자로 연음(延廕)의 차남인 정설(井渫ㆍ1431~1511)은 호는 안한정(安閒亭)으로 일찍이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여 옥천군수(沃川郡守)ㆍ상주목사(商州牧使)ㆍ안동부사(安東府使)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중년에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처음에 문의현(文義縣) 노산(老山)에 돌아와서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안한정(安閒亭)이라 하고 여기에서 살았으며, 안한정은 결국 그의 호가 되었다. 그 뜻은 ‘관로(官路)의 위험에서 떠났으니 (이제는) 편안하고, 문서의 번다함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한가롭다(官路之危險 轉而爲安 簿書之紛忙 變而爲閒)’는 의미라 한다.
 

 

 

▲ 1834년 세워진 충북 증평군 도안면 송정리 연충수(延忠秀) 묘갈(墓碣).   

 

충수(忠秀ㆍ1545~1621)는 자는 성백(誠伯)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청안(淸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향리(鄕里)를 지켰다. 왜적(倭賊)이 물러간 후 도보로 영모(永茅)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니 이때 선조(宣祖)가 인견(引見)하고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하였으며, 내첨사 주부(內瞻寺主簿)를 거쳐 중림도 찰방(重林道察訪)ㆍ현감(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청안현감(淸安縣監)인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은 그를 ‘효우충절(孝友忠節)’이라 칭하였으며, 찰방(察訪) 시절에도 선정(善政)을 하여 역인(驛人)이 그 덕을 칭송하고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 문장가로 유명했던 연최적(延最績)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 충효양전문(忠孝兩全門). 
 

숙종(肅宗) 때 문장가로 유명하였던 최적(最績ㆍ1663~1693)은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택로(宅老)의 아들로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숙종 8년(168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보직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올랐으나 시사(時事)의 급변으로 사직하고 권상하(權尙夏)를 따라 학문을 닦았다. 그 뒤 다시 기용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파직되었으며, 숙종 19년(1693년) 숙종의 구언(求言)에 따라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廢位)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자들의 용서를 상소하여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했다. 이듬해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충신문(忠臣門)이 세워졌으며, 그 뒤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이 더해졌다. 시호는 의민(毅愍).

근대에 와서는 의병대장(義兵大將) 기우(基羽)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병호(秉昊) 등이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자리한 의병장 연기우(延基羽)의 공적비와 장어록(將語錄). 

기우(基羽ㆍ?~1914)는 경기도 삭녕(朔寧ㆍ현 漣川郡) 출신으로 일명 봉렬(奉烈)ㆍ기호(基浩)라고도 하였다. 강화진위대부교(江華鎭衛隊副校)로 있을 때인 순종 1년(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덕물포(德物浦)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지홍윤(池弘允)과 합류하여 일본군과 싸우다 패하였다. 그 뒤 다시 의병을 모아 적성(積城)ㆍ삭녕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08년 원수부 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李麟榮)의 휘하에 합류하여 서울진격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양주(楊州)에서 패한 뒤,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연천(漣川)ㆍ이천(利川)ㆍ안협(安峽) 등지에서 역전했다. 그 휘하의 의병은 기율이 엄하고 민폐가 없어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 자리한 도명(圖明) 연병호(延炳昊) 생가. 
 

병호(秉昊ㆍ1894~1963)는 충북 괴산(槐山) 출생으로 호는 도명(圖明), 일명 병학(秉學)ㆍ동학(東學)으로 불렸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고 그리스도교인을 중심으로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임시정부에 정보제공 등을 목표로 활약하였다. 그 후 안재홍(安在鴻)을 영입, 조직을 재정비하고 외교원 직책을 띠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조소앙(趙素昻)ㆍ김구(金九)ㆍ안창호(安昌浩) 등과 세계한인동맹ㆍ한국국민당ㆍ신한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친일파 이갑녕(李甲寧)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1944년까지 8년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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