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남궁씨(南宮氏)의 유래(由來)는 중국(中國)의 고대(古代)에서 비롯된다. 본래 황족(皇族)인 희성(姬姓)이었으나 은(殷)나라에 이르러 남쪽 궁(宮)인 남궁(南宮)에 살았다 하여 남궁(南宮)으로 성씨(姓氏)를 정하였다고 한다.

남궁(南宮)의 성(姓)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남궁수(南宮脩)는 남궁씨(南宮氏)의 원조(遠祖)가 된다. 그는 본래 은(殷)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1l22년경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은(殷)나라가 멸망함을 보고 동래(東來)할 때, 기자(箕子)를 따라 조선(朝鮮)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사학계에서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부인한다. 그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 건국되자 사도(司徒)의 직책을 맡아 백성들에게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가르쳤으며, 음식의 예법(禮法)과 제사(祭祀)에는 편두[祭器]를 쓰게 하며 의관제도(衣冠制度)와 직제(職制)를 중국과 같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함열남궁씨세보(咸悅南宮氏世譜)’에는 고려 성종(成宗) 때의 대장군(大將軍)인 남궁원청(南宮元淸)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 충남 보령군 청라면 의평리에 자리한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의 묘.
 

원청(元淸)은 고려 광종(光宗) 12년(961년) 감물아현(甘勿阿縣ㆍ전북 익산군 함열읍의 옛 이름) 출신으로 경종(景宗) 원년(976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동당시(東堂試)에 급제하여 상서성(尙書省)의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김행성(金行成) 등과 함께 송(宋)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그 곳 국자감(國子監)에서 수학하고 경종(景宗) 3년(978년)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하니,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종(成宗)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성종(成宗) 10년(991년)에는 북방(北方) 국경지대에 여진족(女眞族)이 자주 도발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변방이 소란하자 대장군(大將軍)으로 출정하여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白頭山)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전공을 세워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라 감물아현백(甘勿阿縣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함열(咸悅)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원청(元淸)의 7세손인 신(信ㆍ생몰년 미상)은 충혜왕 복위년(1339년) 왕이 서모인 경화공주(慶華公主)와 수비 권씨(壽妃權氏)를 욕보이는 등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는 돌보지 않았고, 이듬해 경화공주의 밀고로 왕이 원나라로 잡혀 갈 때 호군(護軍)으로 왕을 호종하였다. 충혜왕은 원나라의 형부(刑部)에 투옥되어 있던 중 그를 미워하던 백안(伯顔)이 실각되는 바람에 석방되어 귀국하였고, 이때 그도 함께 귀국하였다. 충혜왕 복위 3년(1342년)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일등벽상공신(一等壁上功臣)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왕이 다시 원나라에 잡혀 갈 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 하여 임이도(林以道)ㆍ박양연(朴良衍) 등과 함께 함거(檻車)에 실려 함께 끌려갔다가 1344년 도주로(道州路)에 유배되었다.

판도판서 경(璟)의 아들 민(敏ㆍ생몰년 미상)은 충숙왕 복위 5년(1336년) 문과(文科)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충목왕 3년(1347년) 정치관(整治官)으로 있었는데, 기삼만(奇三萬)의 죽음 때문에 원나라에서 보내온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에게 백문보(白文寶) 등 정치관 15인과 함께 곤장을 맞고 문책을 당한 일이 있다. 벼슬은 간의대부(諫議大夫ㆍ종4품)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보(寶)와 개(玠)가 총랑(摠郞) 및 현령(縣令)을 각각 역임하여 이름을 떨쳤다.
 

 

  ▲ 창랑(滄浪) 남궁찬(南宮璨)의 시문과 전북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 묘 앞에 서 있는 석상(전북유형문화재 제 176호). 속전에 의하면 이 석상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한다.

남궁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했는데, 세종(世宗)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오른 계(啓)와 부제학(副提學) 찬(璨)이 유명했다. 특히 찬(璨)은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으로 성종 8년(1477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종 20년(148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으며, 이해에 다시 사관(史官)이 되어 왕명을 어긴 죄로 추국(推鞫)되었다. 연산군 1년(1495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ㆍ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으며, 1497년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하였다. 이듬해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가 되고, 연산군 5년(1499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ㆍ지제교 겸 승문원 교감(知製敎兼承文院校勘)으로 있으면서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에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되면서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었으며, 연산군 10년(1504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신원되었고, 이조판서(吏曹判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 전북 익산시 성당면 갈산리에 자리한 창랑(滄浪) 남궁찬(南宮璨)의 묘. 
 

찬(璨)의 장남 필(弼)은 호는 산수주인(山水主人)으로 중종 때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찬(璨)이 유배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유배길을 따라가 극진히 봉양하다가 찬(璨)이 죽자 그 묘역(墓域)을 지키며 효를 다하고,‘너희는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고 하신 선친(先親) 유지(遺志)를 받들어 오로지 예학(禮學)에만 뜻을 두어 스스로 산수주인(山水主人)이라 자칭하면서 조용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 후일 조정(朝政)으로부터 여러 차례 고창현감(高敞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 남궁찬(南宮璨)의 장남인 산수주인(山水主人) 남궁필(南宮弼)의 묘.
 

 

필(弼)의 동생 숙(淑ㆍ1491~1553)은 자는 숙부(淑夫), 중종 23년(1528년) 생원(生員)이 되고 중종 28년(153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에 보임되었다가 승문원 도제조(承文院都提調)가 무단으로 보임시켰다는 대간(臺諫)의 논란으로 사직하였다. 1536년 홍문관 부정자(弘文館副正字)에 이어 지평(持平)ㆍ사간(司諫)을 역임하였으며, 중종 39년(1544년)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재직중 청렴근면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경기도 관찰사 홍섬(洪暹)의 장계(狀啓)에 따라 가자(加資)되었다. 명종 2년(1547년)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로 발탁되고, 같은 해 진위사(陳慰使)로 임명되었다가 신병으로 교체되어 곧 상호군(上護軍)에 제수되었다.

1548년 황해도 관찰사, 이듬해 해주교생(海州校生) 안세복(安世福) 등이 선정을 베풀었으니 계속 근무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려 가자(加資)되면서 유임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유생의 상소가 실정과는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면서 가자가 취소되고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 같은 해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551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탐학이 심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체직되었다. 자질이 용렬하고 고집이 세고 학식이 얕아 명리를 탐취하였지만, 직무에는 근면하여 세인으로부터는 능리(能吏)라고 인식되었다. 특히 활쏘기에 능하였다.

 

 


 

찬(璨)의 손자로 동복현감(同福縣監) 익(翼)의 아들인 침(枕ㆍ1513∼1567)은 자는 성중(誠仲)으로 중종 35년(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544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고, 이듬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546년 지평ㆍ헌납ㆍ부수찬을 거쳐 다음해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승임되었다. 이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좌랑ㆍ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고, 1552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직제학ㆍ우부승지를 거쳐 다음해 좌승지를 지냈다.
 

▲ 1564년 이정(李楨)이 각종 시문을 모아 엮은 책인 성리유편(性理遺編)의 비용을 관찰사 남궁침(南宮枕)이 각 고을에 분담시켜 간행했다.  

 

 

명종 12년(155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진위사(陳慰使)로 명에 다녀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ㆍ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563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였고, 1564년 전라도 관찰사극 거쳐 형조참판에ㆍ함길도 관찰사ㆍ동지중추부사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죽음과 함께 외척으로 정권을 전단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이 실각되면서, 사헌부로부터 윤원형에 아부하고 그와 함께 구수담(具壽聃)을 모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뒤 곧 복직되고 1567년경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總管)으로서 명종 사망과 선조 즉위의 치안유지에 기여하였으며, 1567년 형조참판을 역임하다가 죽었다.


 

 

 

옥(鈺ㆍ1620~1699)은 자는 여상(汝常), 호는 창주(滄洲)로 관찰사(觀察使) 률(嵂)의 아들이다. 인조 24년(164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효종 3년(165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현종 10년(1669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길재(吉再)ㆍ김장생(金長生)을 제향한 서원에 사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뒤 일곱 군현(郡縣)을 맡아 다스리면서 청백(淸白)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숙종 16년(1690년)에는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承文院判校兼春秋館編修官)을 거쳤으며, 시정(寺正)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속필로 유명하였다. 작품으로 개풍(開豊) 천마산(天摩山)의 대흥사중건비문(大興寺重建碑文)의 글씨가 있다.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가인 억(檍)과 시인 벽(壁)이 유명하다. 억(檍ㆍ1863∼1939)은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로 서울 출생이다. 고종 21년(1884년) 영어학교에 1년 다닌 후 P.G. 묄렌도르프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원으로 상하이[上海]에 갔다. 1889년 궁내부 별군직(宮內府別軍職), 1893년 칠곡부사(漆谷府使) 등을 역임하고 1894년 내부토목국장이 되어 탑골공원 공사를 맡았다. 그 후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되어 러ㆍ일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1902년)을 공박했다. 1905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1906년 양양군수(襄陽郡守)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이듬해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로 9년간 재직하였으며, 1918년 강원도 홍천(洪川) 모곡(牟谷)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다. 1933년 무궁화와 한국역사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 중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다.

 

 

▲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자리한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의 묘.  

벽(璧ㆍ1894~1922)은 호는 초몽(草夢)으로 평북 출생이다.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훈(薰)의 외아들로 1912년 서울 한성고보(漢城高普)를 졸업했으며,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협회 간사(幹事)를 지내다가 귀국하여 오산중학(五山中學) 교사를 지냈다. 14세 때 당시 지도층의 각성을 촉구한 ‘애국설(愛國說)’을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발표했고, 일본에 있을 때 ‘폐허(廢墟ㆍ1920)’ 동인으로 참가하여 창간호에 ‘자연(自然)’을 발표했다. 직접 편집한 2호에는 여러 편의 시와 ‘페허잡기(廢墟雜記ㆍ1921)’ㆍ‘편집여록(編輯餘錄ㆍ192l)’, 오상순(吳相淳)의 인상기 ‘내외양면의 인상(1921)’ 등을 발표했다. 천재시인으로 촉망받았으나 28세로 요절했다.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