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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탁씨(卓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광산(光山)을 비롯하여 광주(廣州)ㆍ남양(南陽)ㆍ안산(安山)ㆍ양근(楊根)ㆍ가평(加平)ㆍ용인(龍仁) 등 32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고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광산(光山) 단본(單本)으로 알려져 있다. 

 

 

 

 

 

▲ 우리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탁씨인 탁사정(卓思政)이 어사중승(御史中丞)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4권 세가(世家) 4권 현종 2년(1011년) 3월 15일과 4월 4일 기록 및 강조(康兆)의 당파로 몰려 유배되었다는  8월 기록.
 

탁씨(卓氏)는 중국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우리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탁씨(卓氏) 성을 가진 인물은 고려 경종(景宗ㆍ976~981) 때의 탁사정(卓思政)으로 추정된다. 탁사정(卓思政)은 고려 목종 12년(1009년) 왕이 병으로 정사를 보지 못하자 김치양(金致陽)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 때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 유종(柳宗)ㆍ하공진(河拱辰)과 함께 근전문(近殿門)에 상직(常直)하고 있었다. 난을 진압한 강조(康兆) 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급사중(給事中)이 된 듯하며, 현종 1년(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시 동북계도순검사(東北界都巡檢使)가 되어 서경(西京)에서 중랑장 지채문(智蔡文)과 함께 적군 한기(韓杞)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계속해서 승(僧)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000여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남쪽에서 3,000여 명의 적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법언은 전사하고 적이 대대적으로 서경을 공격해오자 서경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현종 2년(1011년) 3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4월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으나, 8월에 강조(康兆ㆍ목종을 시해하고 거란과의 싸움에서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의 당파로 몰려 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과 함께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당나라가 망한 해가 907년, 신라가 문을 닫은 해가 935년이므로 탁사정(卓思政)의 선대가 오래 전에 한반도에 들어와 신라인, 혹은 고려인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산 탁씨 대종회보에도 ‘탁사정공’으로 표현하며 시조 이전의 연원을 추정하고 있으며, 탁사정(卓思正)으로부터 시조 탁지엽(卓之葉)이 등장하기까지 90여 년 동안은 공백으로 있는데, 이는 탁사정(卓思政) 유배됐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시조 문성공(文成公) 탁지엽(卓之葉)의 묘.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시조(始祖) 탁지엽(卓之葉)은 고려(高麗) 선종(宣宗) 때 학행(學行)으로 널리 알려져 종유(宗儒)로 추대되어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탁지엽(卓之葉)의 자는 옥립(玉立), 호는 학포(學圃)로, 광산 탁씨(光山卓氏) 족보에 따르면 그 선계(先系)는 중국인으로 한(漢)나라 때 포덕후(布德侯)에 봉해진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1985년에 조사된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탁씨(卓氏)는 광산(光山) 이외에도 4개의 본관이 나타난다. ‘경자보(庚子譜)’의 서문에는 ‘관향이 다른 자는 탁신(卓愼)의 후손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탁신(卓愼)은 탁지엽(卓之葉)의 8세손이므로 관향을 다른 곳으로 삼는 탁씨(卓氏) 또한 광산 탁씨(光山卓氏)의 지파(支派)로 보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 지엽(之葉)의 맏아들 도민(道敏)은 자는 덕노(德老), 호는 남헌(南軒),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으로 고려 선종(宣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후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으며, 둘째 도집(道集)은 자는 덕성(德成), 호는 오헌(梧軒)으로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여 크게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도민(道敏)의 아들 원광(元光)은 인종(仁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선종(宣宗)의 부마(駙馬)가 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손자 종성(宗成)은 신종조(神宗朝)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해양군(海陽君)에 추봉되고, 공민왕(恭愍王)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거쳐 예의판서(禮儀判書ㆍ정3품)에 올랐다. 

▲ 1850년 후손에 의해 간행된 경렴정(景濂亭) 탁광무(卓光茂)의 시문집인 ‘경렴정집(景濂亭集)’에는 아들 탁신(卓愼)의 ‘죽정집(竹亭集)’과 증손 탁중(卓中)의 ‘죽림정집(竹林亭集)’도 실려 있다.

광무(光茂ㆍ?∼1409)는 자는 겸부(謙夫), 호는 경렴정(景濂亭)으로 충혜왕 1년(1331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하였고, 공민왕 14년(1365년) 내서사인(內書舍人)이 된 뒤 이듬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제학과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올랐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동문선(東文選)’에 여러 편의 시가 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성주(星州) 오계사(梧溪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경렴정(景濂亭) 탁광무(卓光茂)와 아들 죽정(竹亭) 탁신(卓愼)의 위패를 모신 경북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 세덕사(世德祠ㆍ경북민속자료 제37호)는 1987년 임하댐 건설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
 

그 외에 상신(相臣)의 아들로 고종(高宗) 때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에 들어가 승려가 된 연(然)은 호는 법운(法雲)ㆍ법유자(法遊子)로 필법이 매우 뛰어났으며, 상주목사 최자(崔滋)가 백련사(白蓮社)를 중창할 때 그 현판을 썼다. 또한 자는 숙장(叔章), 호는 천곡(泉谷), 시호는 문민(文愍)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한 문위(文位) 등이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냈다.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 진감국사비(보물 제313호)의 비문은 당시 문장가 이규보(李奎報)가 짓고 탁연(卓然)이 글을 썼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광무(光茂)의 아들 신(愼ㆍ1367~1426)이 뛰어났다. 신(愼)은 자는 자기(子幾)ㆍ겸부(謙夫), 호는 죽정(竹亭)으로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고려 창왕 1년(1389년) 문과(文科)에 급제했으나 부모가 연로하므로 고향에서 감지(甘旨)를 지내고, 아버지가 병사한 뒤 조선 정종 즉위년(1398년)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용담현령(龍潭縣令)ㆍ좌정언(左正言)ㆍ장령(掌令) 등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언관으로서 태종의 사위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군사를 발병한 사건에 그의 죄를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1409년 나주(羅州)에 장류(杖流)되었다. 곧 사면되어 1410년 전농시정(典農寺正)ㆍ성균사성(成均司成)에 임용되었고, 동부대언(同副代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태종(太宗) 때 지신사(知申事)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지내고, 세종 3년(1421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경학(經學)에 밝았고, 무예(武藝)와 음률(音律)에도 능했다. 성주(星州)의 오계사(梧溪祠)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순창(順昌ㆍ1495~1593)은 자는 덕승(德昇) 호는 송암(松菴)으로 진사(進士) 문상(文尙)의 아들이다. 광산 탁씨(光山卓氏) 안동(安東) 입향조(入鄕祖)로, 병서(兵書)에 심잠(沈潛)하고 무예를 닦아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왕을 호위하여 그 공으로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승진했으며, 은퇴한 뒤 안동(安東) 와룡산(臥龍山) 아래에 터를 잡아 오계(梧溪)에다 정자를 짓고 유연자적(悠然自適)했다. 

▲ 선조(宣祖) 때 훈련대장을 지낸 탁순창(卓順昌)이 임진왜란 후 낙향해 이 나무에 단을 모으고 행정계(杏亭契)를 조직하여 벗들과 함께 그늘에서 유흥을 즐겼던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는 높이 37m, 둘레 14m, 수간폭 33m로 수령 약 700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순창(順昌)이 안동으로 낙향(落鄕)하여 이 은행나무에 단을 모으고 벗과 더불어 행정계(杏亭契)를 조직하고 매년 7월에 나무그늘에서 유흥(遊興)을 즐겼다고 한다. 이 나무는 한일합방 때의 국치(國恥)를 못내 서러워 울었고, 한국전쟁 때도 울었으며, 10.26사태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서거(逝去)할 때도 울었다고 한다. 또 병마(病魔)가 퍼질 때도 울고 날이 가물어도 운다는 신목(神木)으로도 유명한데, 임하댐 수몰로 원래의 위치에서 지상 15m 높이의 축대(築臺) 위에 상식(上植)하였다. 

▲ 탁세형(卓世亨)이 편찬한 탁광무(卓光茂)와 아들 탁신(卓愼)의 시를 모은 2권1책의 ‘광산탁씨세고(光山卓氏世稿)’.
 
순창(順昌)은 길안면 구수리에 세덕사(世德祠)를 세워 광무(光茂)와 신(愼) 부자(父子)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안동에 뿌리내린 이후로는 가문이 떨치지를 못한 편이어서 아들 세형(世亨)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손자 홍례(弘禮)가 부장(部將), 홍인(弘仁)이 진사, 홍문(弘文)이 참봉, 홍필(弘弼)은 정노위(定虜衛)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