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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담양 국씨(潭陽鞠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국씨(鞠氏)의 본관(本貫)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담양(潭陽)을 비롯하여 영광(靈光)ㆍ복성(福城ㆍ보성의 속현)ㆍ진주(晋州)ㆍ대구(大邱)ㆍ부령(富寧) 등 여섯 본(本)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담양(潭陽)을 제외한 관향(貫鄕)은 미상(未詳)이다.

담양 국씨(潭陽鞠氏) 시조(始祖) 국주(鞠周)는 원래 송(宋)나라 공경대부(公卿大夫)였는데, 금(金)나라가 송나라의 황제였던 흠종(欽宗)을 납치해 간 정란(政亂)이 발생하자 이 난을 피해 고려(高麗) 인종(仁宗) 6년(1128년) 고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 국주(鞠周)는 입국하자마자 인종을 배알하고 군신(君臣)의 예(禮)를 취하였는데, 인종(仁宗)은 크게 기뻐하면서 국주(鞠周)에게 감정관(監正官)을 제수(除授)하여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원(中原)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금나라에서 송나라를 제압하고 고려에게 군신(君臣)의 관계로 대할 것과 많은 공물(貢物)을 요구하였는데, 인종(仁宗)은 국주(鞠周)를 금국봉사(金國奉使)로 임명하여 금나라의 요구에 외교적으로 대처하게 하였다. 국주(鞠周)는 왕명을 받고 여러 번 금나라에 왕래하면서 군신관계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외교적으로 평등관계를 맺고 귀국하였다. 이에 인종은 국주(鞠周)에게 삼중대광(三重大匡) 추성군(秋城君ㆍ추성은 담양의 옛 이름)에 봉하고 담양(潭陽)을 본관으로 정해주었다. 이러한 연유로 중국에서 귀화한 국씨(鞠氏)는 담양을 관향(貫鄕)으로 세거(世居)하게 된 것이다. 

 

 

▲ 전남 담양군 담양읍 학동리에 자리한 설단(設壇). 아래 중앙은 시조단.
 

분파(分派)로는 승지공항혁파(承旨公恒奕派), 덕온공윤방파(德溫公允邦派), 우수공성범파(迂叟公聖範派), 참판공윤원파(參判公允源派), 동계공항규파(東溪公恒珪派), 참의공윤돌파(參議公允突派), 감정공성대지파(監正公聖大支派), 금성공신도파(金城公愼道派), 일성공해생파(日省公海生派), 부사공윤학파(府事公允學派), 환성공함파(喚醒公涵派), 송만공침파(松灣公沈派), 송동공홍파(松洞公洪派), 죽계공명파(竹溪公溟派), 율동공렴파(栗洞公濂派), 담참공경희파(淡參公景禧派), 수참공명원파(水參公明元派), 감찰공민파(監察公旻派), 부사공정빈파(府使公廷賓派), 참판공도성파(參判公道性派), 운천공홍도파(雲泉公弘道派), 선전공계정파(宣傳公繼鄭派), 거창선전공파(居昌宣傳公派), 참찬공기업파(參贊公基業派), 태인공계업파(泰仁公繼業派), 수사공경파(水使公瓊派), 언양공대범파(彦陽公大範派), 동주공희정파(東洲公希程派), 직장공원용파(直長公元龍派), 참의공시영파(參議公時瑛派)가 있다.


 

8세 국량(鞠樑)은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그의 아들 유(襦)는 호가 복애(伏崖)로 공민왕 18년(1369년) 탐라(耽羅)와 곡주에서 일어난 병란(兵亂)에서 부통사(副統使)가 되어 도통사(都統使) 최영(崔塋)과 함께 탐라를 토격(討擊)하고 병부상서 겸 판의금부사(兵部尙書兼判義禁府事ㆍ종1품)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사(節死)하였다.

 

 

▲ 전남 담양군 금성면 하성리 묘역에 자리한 국황(鞠瑝)의 묘와 국황(鞠瑝)과 아들 국세일(鞠世一), 손자 국태서(鞠泰瑞)의 단소.
 

유(襦)의 맏아들 무(珷)가 두 아우 성(珹)과 황(瑝)을 데리고 담양(潭陽)으로 퇴거하여 후손들이 담양(潭陽)에 세거하게 되었다. 때마침 조정에서는 고려 유신 자제들에게 관직특별임용의 기회를 주었는데 무(珷)는 두 아우들에게 벼슬길에 나가게 하고 본인은 부친의 유지를 계승해 담양에서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잘 관리하여 농사에 힘쓰는 한편 서당을 열어 인근 후학들을 열심히 훈도하여 담양 일대에서는 덕망과 학식을 겸비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었다.



무(珷)의 두 아우 중 성(珹)은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으나 후사가 없었고, 황(瑝)은 중형(仲兄)과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ㆍ대과에 함께 급제함)한 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이르렀다.

 

 

▲ 담양 국씨들이 복애(伏崖) 국유(鞠襦)를 중심으로 국함(鞠涵)ㆍ국침(鞠沈)ㆍ국명을 제향하기 위해 1871년 세우고 1995년 중건한 전북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반곡서원(泮谷書院). 
 

황(瑝)의 현손 경례(經禮)는 호가 화당(華堂)으로 문종 원년(145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세조(世祖) 때 사간(司諫)으로서 왕의 난정(亂政)을 직간(直諫)한 후 은퇴하여 학문에만 진력한 강직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세조(世祖)가 여러번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했으나 끝까지 불취했다. 그리고 경례(經禮)의 아들 거경(居敬ㆍ여양 현감을 역임)ㆍ화경(和敬ㆍ성균관 생원)ㆍ승경(承敬ㆍ능성현령)ㆍ장경(長敬)ㆍ방경(邦敬)ㆍ치경(致敬ㆍ장수현감) 등 6형제 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


 

침(沈ㆍ1567∼1654) 은 자는 심원(深源), 호는 송만(松滿)으로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수성(守成)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광해군 5년(1613년) 사마시(司馬試)에 그의 형 함(涵)과 함께 합격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5세 때 이웃집 아이가 새의 새끼를 잡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돈을 주고 사서 놓아주었다. 또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치병을 극진히 했다. 이름이 나는 것을 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경전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효종 1년(1650년) 조정에서 정려(旌閭)와 복호(復戶)의 은전(恩典)이 내려졌다. 

 

 

▲ 송만(松滿) 국침(鞠沈)의 효자 정려(旌閭).
 

 

경인(景仁ㆍ?~1592)은 본디 전주에서 살다가 죄를 지어 함경도 회령(會寧)에 유배되었으며, 회령부 아전(會寧府衙前)이 되어 부를 축적했으나 조정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숙부인 세필(世弼ㆍ?~1592)과 명천의 아전인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백성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피난와 있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그들을 호위하던 관리들과 그 가족들을 붙잡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겼다. 가토에 의해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에 임명되어 회령을 통치하면서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으며, 가토 퇴각 뒤 북평사 정문부(鄭文孚)의 격문을 받은 회령 유생 신세준(申世俊)ㆍ오윤적(吳允迪) 등에게 붙잡혀 참살되었다.



근대적 인물로 하현(夏鉉ㆍ1868~1919)은 자는 성모(聖模), 호는 송은(松隱)으로 치술(致述)의 아들이다. 1919년 3월 11일 고산(高山)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익산군 여산에 살면서 애국청년을 규합하여 조국광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고향인 고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고산으로 달려가 수백명의 시위 군중을 지휘하다 출동한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82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이밖의 인물로는 선공감정(繕工監正)을 지낸 갑손(甲孫),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낸 지선(志善), 학자인 민(旻)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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