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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봉산 지씨(鳳山智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봉산 지씨(鳳山智氏)의 시조 지채문(智蔡文ㆍ964~1026)은 자는 호간(浩幹), 호는 송곡(松谷)으로 고려(高麗) 때 명장으로, 그의 선계(先系)에 대해서는 고증(考證)할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는 고려 4대 광종(光宗) 15년(964년) 태어나 경종(景宗) 4년(979년) 문과(文科)에 급제, 고려 현종(顯宗) 원년(1010년) 거란(契丹)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扈從)하였다.

현종 2년(1011년) 2월 공주(公州)에 돌아온 현종은 지채문(智蔡文)에게 전(田) 30결(結)을 하사(下賜)하면서 “짐이 쳐들어오는 적을 피하기 위해 먼 길에서 낭패(狼狽)할 적에 호종(護從)하는 신하와 관료들이 도망가고 달아나지 아니하는 자가 없는데 오직 지채문이 풍상(風霜)을 무릅쓰고 산천(山川)을 두루 다니면서 말의 고삐를 잡아주는 노고를 사양치 아니하여 마침내 송균(松筠ㆍ소나무와 대나무)의 절개(節槪)를 보전하였으니 진실로 수효(殊效)가 많은지라 어찌 이보다 더한 은혜가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 시조 지채문(智蔡文)이 우상시(右常侍)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 4권 현종 7년(1016년) 12월 11일 기록과 우복야(右僕射)에 임명되었다는 ‘고려사’ 5권 현종 17년(1026년) 4월 24일 기록.

현종 7년(1016년) 상장군(上將軍)으로 우상시(右常侍)를 겸하였고, 현종 11년(1020년)에는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현종 17년(1026년) 우복야(右僕射)에 오르고 63세로 타계(他界)하였다. 다음 왕인 제9대 덕종(德宗)이 즉위함에 이르기를 “고(故) 상장군(上將軍) 우복야(右僕射) 지채문이 성고(聖考)의 남행(南行)을 당하여 홀로 충절을 다하였으니 그 공(功)이 제일(第一)에 이르러 마땅히 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추록하고 이로서 장래(將來)를 권장(勸?)할 것이라” 하였다. 이로써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을 봉산(鳳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봉산(鳳山)은 황해북도 봉산군의 지명이며, 봉주(鳳州)는 봉산(鳳山)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봉산 지씨(鳳山智氏)는 봉주 지씨(鳳州智氏)라고도 한다.

 

▲ ‘고려사(高麗史)’ 94권 열전(列傳) 7권 지채문(智蔡文) 열전.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지씨(智氏)의 본관(本貫)을 13본(本)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봉주(鳳主ㆍ봉산)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봉산 지씨(鳳山智氏)는 16세(世)에서 분파(分派)가 시작되는데, 파조(派祖) 충보(忠輔)의 평창파(平昌派)ㆍ충필(忠弼)의 제천파(堤川派)ㆍ충우(忠佑)의 제천명지리파(堤川明芝里派)ㆍ기(棋)의 장단파두학(長湍派 頭鶴)ㆍ형(亨)의 장단파(長湍派)ㆍ용운(龍雲)의 선천파(宣川派)로 분파된다.


▲ 시조 지채문(智蔡文)의 신도비와 사당인 송곡재(松谷齋).

2세 맹(孟)은 7대 목종(穆宗) 10년(1007년) 19세의 나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詩)ㆍ부(賦)ㆍ재능(才能)에 능하여 국가의 동량(棟樑)감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문종(文宗) 9년(1055년) 7월 수사공(守司空)에 올라 무직(武職ㆍ大將軍)과 겸하였고, 문종 11년(1057년) 12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지내다 늙어 퇴임을 하려 하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왕을 뵙고 아뢰기를 “몸이 70이 되어 기력(氣力)이 없어 퇴임코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한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지맹의 선조(先祖)께서 국가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 큰 공을 세웠고, 늙어도 국가의 일을 더 볼 수 있을 것이니 계속 도와주시게”라고 하면서 궤장(机杖ㆍ의자와 지팡이)을 하사했다. 훗날 다시 간청하니 왕께서 “지난날 이미 지팡이를 드려 계속 일을 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렸는데 이제 와서 허락하면 지맹을 놀리는 꼴이 되지 않겠소!” 하며 쉽게 허락하지를 않았다. 중서성(中書省)에서 다시 예를 갖추어 왕께 상주(上奏)하건데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늙은 신하가 국사(國事)를 다스리는데 부족함이 많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1년만 정사(政事)를 돌보라 하시었으나 벌써 몇 년이 흘렀나이다.”라고 말한바 그때에서야 허락을 받아 퇴임을 했다.

▲ ‘고려사(高麗史)’ 94권 열전(列傳) 7권 지채문(智蔡文) 열전 뒤에 기록된 아들 지맹(智孟)의 기록.


 

3세 우(祐)는 10대 정종(靖宗) 10년(1044년) 문과에 올랐는데, 세 아들 총연(寵延)ㆍ숙연(淑延)ㆍ녹연(祿延)을 두었다. 총연(寵延)은 고려 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고, 축하사절 단장으로 중국 요(遼)나라에 다녀왔다. 숙연(淑延)은 고려 문종 때 예빈경(禮賓卿)으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事)를 지냈다.

녹연(祿延ㆍ?~1126)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1086년 음보(蔭補)로 내알자(內謁者)가 되고 동북면 병마판관(東北面兵馬判官ㆍ종6품)으로 나갔다. 숙종 9년(1104년) 여진(女眞)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시어사(殿中寺御史ㆍ정6품)가 되었으며, 예종(睿宗) 원년(1105년) 내시지후(內侍祉侯ㆍ정5품)를 거쳐 경상도 안무사(慶尙道按撫使)ㆍ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등을 역임한 후 인종(仁宗) 3년(1125년)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ㆍ종2품)에 이르렀다.

이자겸(李資謙)이 둘째 딸을 예종(睿宗)에게, 셋째와 넷째 딸을 인종(仁宗)의 왕비(王妃)로 바치면서 국정을 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휘두르자 왕의 명을 받아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燦), 내시록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장군(將軍) 고석(高碩) 등으로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을 모살(謀殺)하려 꾀하다가 미리 알아 차린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고, 왕을 협박하여 남궁(南宮)으로 옮기며, 안보린(安甫鱗)ㆍ최탁(崔卓)ㆍ고석(高碩)과 숙위좌복야(宿衛左僕射) 홍권(洪灌) 등 17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녹연(祿延)과 김찬(金燦)을 포박하여 순천(順天) 관(館)에 가두어 잔혹한 고문 끝에 거의 죽음에 이르도록 된 몸을 이자겸의 일당인 윤간(尹幹)이 호송하여 유배되는 도중, 충주(忠州)에 이르러 병을 얻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을 사지(四肢)로 토막내어 길가에다 묻었고, 돌아와 처자(妻子)를 주군(州郡)의 노비로 삼았다. 그후 이자겸과 척준경의 반목(反目)으로 이자겸이 패하자 녹연(祿延)의 아들과 사위를 복직시킴은 물론 1계급 진급을 시키고 녹연(祿延)의 시신을 개장(改葬)하도록 하여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에 안장(安葬)하였다. 그리고 1995년 5월 묘를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일곡 선영(先塋)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이자겸 일파에게 피살된 4세 지녹연(智祿延)의 이장하기 전의 묘(上)와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일곡 선영으로 이장된 지녹연(智祿延)의 묘.

5세 지용(之勇)은 병부상서(兵部尙書ㆍ정3품)를 지냈으며, 6세 인정(仁挺)은 이부상서(吏部尙書ㆍ종5품)를 역임했고, 7세 겸(謙)은 광록대부 판군기감사(光祿大夫判軍器監事ㆍ종3품)를 역임했다. 8세 대성(大成)은 고려 신종(神宗) 때 제술과 시부(製述科時賦)에서 장원(壯元)을 했으며, 9세 장의(長義)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ㆍ정4품)을 지냈으며, 10세 보대(甫大)는 장군(將軍ㆍ정4품)을 지냈다.

11세 현(賢)은 판전용사사(判典容寺事ㆍ정3품)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3형제들은 언귀(彦貴)는 충렬왕(忠烈王) 때 호조판사(戶曹判事ㆍ정3품)를 역임했으며, 중귀(重貴)는 충렬왕 때 공조판사(工曹判事ㆍ정3품)를, 을귀(乙貴)는 비변랑(備邊郞ㆍ종6품)을 역임했다.

그리고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부사(宣川府使) 기협(奇協)의 별장(別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凌漢山城)에 들어간 뒤 별장 전세록(田世祿)ㆍ김여간(金餘幹)ㆍ계숭로(桂崇老)ㆍ임여택(任如澤) 등과 함께 선천(宣川)의 월봉(月峰)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적을 격파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첨사에 제수되고 왕으로부터 겨울 옷감을 하사받았는데, 이때 왕은 그의 충절을 잊지 않으려는 징표로 이를 하사한다고 하였다. 그후 명 (明)나라 제독(提督) 모문룡(毛文龍)의 천거로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올라 용맹(勇猛)과 지략(智略)을 겸비한 무신(武臣)으로 이름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