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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의령 옥씨(宜寧玉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옥씨(玉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淵源)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唐)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新羅)에서 국학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군(宜春君ㆍ의춘은 의령의 별칭)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ㆍ세거(定着世居)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시초(始初)가 되었다고 한다. 
 

 
 

 ▲ 경남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에 자리한 시조 의춘군(宜春君) 옥진서(玉眞瑞)의 제단과 재실인 경모재(景慕齋).

그 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었는데, 감무공(監務公) 사미(斯美)의 김해호적(金海戶籍)에 일세조(一世祖) 은종(恩宗) 이하 6세까지의 보존기록이 있음을 기하여 후손들이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ㆍ향리의 한 구실)을 지낸 은종(恩宗)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순조 4년(1804년) 족보 편찬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여(汝)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함께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응계(凝溪) 옥고(玉沽)의 ‘응계선생실기(凝溪先生實記)’에 실린 세계도(世系圖). 

 
 
▲ 경남 의령군 대의면 자굴산 아래 자리한 의령 옥씨 선조 묘역.

 

 

▲ 응계(凝溪) 옥고(玉沽)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들 모아 놓은 ‘응계선생실기(凝溪先生實記)’.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으로 전하나 이는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이 전한다. 한편 고려 말에 개성 왕씨(開城王氏)가 이성계의 탄압을 피해 옥씨(玉氏)로 변성했다고 알려진 개성 옥씨(開城玉氏)가 소수나마 현존하고 있다.


옥씨(玉氏)는 7세손 3형제대에서 파계(派系)가 갈려 사온(斯溫)의 후손은 거제파(巨濟派)ㆍ의령파(宜寧派)ㆍ자산파(慈山派ㆍ學生公派), 사미(斯美)의 후손은 의령파(宜寧派)ㆍ군위파(軍威派ㆍ校理公派), 사인(斯仁)의 후손은 선천파(宣川派)를 이루었고, 6세손 여(汝)의 후손은 해서파(海西派ㆍ黃海道派)를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사미(斯美)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규(珪)는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장경(莊敬)이다. 

옥씨(玉氏)는 조선조에서 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대표적 인물인 사미(斯美)의 아들 고(沽ㆍ1382∼1436)는 자는 대가(待價), 호(號)는 응계(凝溪)로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원시를 거쳐 조선 정종(定宗) 1년(139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ㆍ전적(典籍)을 거쳐 안동부 통판(安東府通判)을 지냈다. 
이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예조정랑ㆍ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고, 대구에 은거하였다. 학문이 광박(廣博)하고 청렴결백하여 당시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안동(安東)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과 응계(凝溪) 옥고(玉沽)를 봉향하기 위해 1687년 창건되었으나, 1869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복원된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 묵계서원(默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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