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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해평 길씨(海平吉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길씨(吉氏)의 본관은 해평(海平) 단일본이며, 시조(始祖)는 당(唐)나라에서 고려 문종(文宗) 때 귀화해 온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길당(吉塘))으로 전한다.

‘해평길씨세보(海平吉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문종(文宗)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ㆍ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해평(海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중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그의 후손으로 고려 후기의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을 지낸 시우(時遇ㆍ자는 진신, 시호는 효문)를 일세조(一世祖)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신라 때의 인물로 길문(吉門ㆍ波珍飡), 길선(吉宣ㆍ阿飡) 등의 이름이 나오지만, 지금의 길씨와 연관이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분파(分派)로는 율리종파(栗里宗派), 불이회인파(不二懷仁派), 장흥파(長興派), 화천파(華川派), 춘천파(春川派), 영변파(寧邊派), 옥천파(沃川派), 여주파(驪州派), 선천파(宣川派), 수안파(遂安派), 김해파(金海派), 송천파(松川派), 학현파(鶴峴派), 금삼동파(金三同派)가 있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묵과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채미정(採薇亭). 언덕 위 건물은 문풍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우(時遇)의 증손으로 고려 말에 목은(牧隱) 이색(梨穡)ㆍ포은(圃隱) 정몽주(酊夢周) 등과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리워진 야은(冶隱) 재(再ㆍ1353∼1419)가 유명하다.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ㆍ금오산인(金烏山人)으로 1370년 개경에서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우왕 9년(1383년) 등과하고, 우왕 13년(1387년) 성균관 학정(成均館學正), 이듬해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교육했다. 창왕 1년(1389년) 노모 봉양을 이유로 귀향하여 선산(善山) 임천(林泉)에서 은거했다. 그 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져 정종 2년(1400년) 세자(世子) 방원(芳遠)에 의해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사퇴하고 선산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했다.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그 학통은 김종직ㆍ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다.

세종(世宗)이 즉위하매 태종이 상왕(上王)으로서 세종에게 이르기를,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니 참된 의사(義士)로다. 듣건대 그가 아들이 있다 하니 불러서 등용하여 길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니 드디어 재(再)의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서 종묘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사순(師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선생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 : 夏ㆍ殷ㆍ周)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가 범연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네가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너의 조선 임금을 섬겨라.’ 하였다.

 

 

▲ (上)1587년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구미시 오태동 오산서원(吳山書院)이 훼철되자 도량동으로 옮긴 충효당. (中)1587년 인동현감 유운룡(柳雲龍)이 길재의 충절을 가려 세운 구미시 오태동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ㆍ경북유형문화재 제167호). 처음 비석은 마모되어 1780년 다시 세운 것이다. (下)길재를 추모하기 위해 1757년 세운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청풍사(淸風祠ㆍ충남문화재자료 제16호).

 

 

 

 

세종 원년(1419년) 67세로 병이 위독하여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 내 부고(訃告)를 들은 뒤에 오는 것이 옳다.” 하고, “내가 죽거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해 상을 치루라.” 이르고는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부의(賻儀)로 쌀과 콩을 주고 또 장사에 일꾼을 보내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벼슬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절(忠節)이라 하였다.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 오산서원(吳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야은집(冶隱集)’ㆍ‘야은속집(冶隱續集)’이 있다.

 

 

▲ 구미시 오태동에 자리한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묘.  


사순(師舜)의 아들 인종(仁種)은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재직하였을 때 백성을 청렴하고 간결하게 잘 다스려 그 이름이 알려졌는데, 감사(監司) 김종직(金宗直)이 이를 추천하며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이라 하였다. 백성들도 ‘여섯 짐으로 왔다가 여섯 짐으로 돌아가니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하며 공의 청렴을 칭찬하였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손자로 청렴하기로 이름난 길인종(吉仁種)의 묘. 

 

 

▲ 효자 길창거(吉昌擧)와 아들 경회(慶會)ㆍ경연(慶延)의 효행사적을 모은 책으로, 1860년 간행된 ‘길씨세효록(吉氏世孝綠)’.  

 

회(誨ㆍ1549~1593)는 자는 가해(可海)로 성균생원 면지(勉之)의 아들이다. 선조 3년(1570년) 생원(生員)이 되고, 선조 10년(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고 1579년 잠시 관직을 떠났다가 예문관 검열(檢閱)ㆍ지평(持平)ㆍ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시로 둔 세자의 분조(分朝)에 수행했고, 피난을 가는 선조(宣祖)의 가마 앞에 엎드려 “이 근처에 왜군 염탐군이 있어 위험하니 가마 대신 말을 타고 갈 것”을 아뢰어 변을 면하게 한 공을 세웠다. 이듬해 헌납(獻納)ㆍ장령(掌令)ㆍ직강(直講)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으며, 죽은 뒤인 1603년 호종(扈從)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추록되었다. 품성이 단아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경학(經學)에 밝았다.
 

창거(昌擧ㆍ1688~1759)는 재(再)의 10세손으로 상현(尙賢)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이 7세 때 물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기 시작하였으며, 조금의 과일이 생겨도 반드시 싸가지고 부모에세 드렸으니 사람들이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자라서는 농상(農桑)을 천직으로 삼아 열심히 일하여 오로지 부모 봉양에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으로 누우니 지성으로 보살폈으며, 돌아가시자 생시와 다름없이 공경하였다.

1757년 영조 33년에 영조의 비(妃) 서씨(徐氏)가 승하했을 때는 친상과 똑같이 예를 지켜 술과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웃간의 돈목에도 힘서 기근 때에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았으며, 자식들에게도 효를 힘써 가르쳤다. 경회(慶會) 등 아들들도 효행이 뛰어나 널리 ‘인인(仁人)의 집’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순조 11년(1811년)에 나라에서 효자문을 내려 효행을 기렸으며, 아들 경회(慶會)에게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 외 학자(學者) 면주(冕周)도 철종 9년(1855년) 송내희(宋來熙)와 조상 길재의 시문(詩文)을 편교(編校), ‘야은속집(冶隱續集)’ 3권 1책을 인본(印本)으로 간행하였고, 한말(韓末) 학자인 인수(仁壽)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주(善宙)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 독립운동에 헌신한 길선주(吉善宙) 목사와 그의 유품 

 

선주(善宙ㆍ1869~1935)는 호는 영계(靈溪)로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닦으며 한의학(漢醫擧)을 연구하다가 소경이 되었다. 광무 1년(1897년)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고, 1901년 장로가 되었다. 이 해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平壤支部)를 조직했다. 융희 1년(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 목사 안수를 받아 한국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신앙 운동에 정진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힘써숭실학교(崇實學校)ㆍ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했다. 3·1운동 때에는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를 대표하여 독립 선언서에 서명, 그 후 전국을 두루 다니며 전도사업에 전심하다가 평남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중 뇌일혈로 죽었다.



해평 길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3명, 무과 1명, 사마시 5명 등 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