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각잡기(東閣雜記)’ 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기록에 의하면, 충주 어씨(忠州魚氏)의 시조(始祖) 어중익(魚重翼)은 본성(本姓)이 지씨(池氏)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에 세 개의 인(鱗ㆍ비늘)이 있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친히 불러보고 나서 어씨(魚氏)의 성(姓)을 하사(下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충주 지씨(忠州池氏)의 시조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고려 광종 11년(960년)이라고 하므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충주 지씨(忠州 池氏) 6세조 지중익(池重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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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지씨대동보(忠州池氏大同譜)’에는 시조 지경(池鏡)의 아들에 해관(海貫ㆍ찬성사)ㆍ도관(道貫ㆍ평장사) 형제가 있고, 해관(海貫)의 아들에 윤(胤ㆍ안렴사)ㆍ영(瀛ㆍ부원수) 형제가 있으며, 영(瀛)의 아들에 득상(得尙ㆍ평장사)ㆍ응상(應尙ㆍ찬성사)이 있으며, 응상(應尙)의 손자가 지중익(池重翼), 즉 어중익(魚重翼ㆍ1061?~1132)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충주 어씨(忠州魚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와 동족이성(同族異姓)임이 분명하여 서로 통혼(通婚)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어중익(魚重翼)은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지씨천년사(池氏千年史)’에 의하면, 그가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졌다고 하였으므로 충주를 본관(本貫)으로 삼은 것이다.
어중익(魚重翼) 이후의 세대를 실전(失傳)하였으므로, 선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고려 말에 성균관 진사을 지낸 어승진(升震ㆍ1344~?)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현감를 지낸 어백평(魚伯評ㆍ?~?)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과 시중을 지낸 어호문(?~?)을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이 있었다. 그래서 어승진은 예성 어씨로, 어백평은 신충주 어씨로 각각 분관하였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밝혀져서 합의에 의하여 동행(同行)으로 합보(合譜)하였다. 성균관공파(예성 어씨) 어승진, 삭주공파(신충주 어씨) 어백평, 곤양공파(충주 어씨) 어호문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충주 어씨는 시조 어중익(魚重翼)에서부터 따져도 1천년 이상된 문중이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이름이 알려진 성씨가 아니었고 현달한 인물도 없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무성한 숲을 이루기 시작해 성종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충주 어씨는 전성기를 맞으며, 조선에 문과급제자 1명, 무과급제자 9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 들어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조선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하는데, 좌대장(左大將)으로 공(功)을 세워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예성군(蘂城君ㆍ예성은 충주의 옛 지명)에 봉해진 승진(升震)과 승진(升震)의 증손(曾孫)인 유소(有沼)가 유명하다.
▲ (上)경기도 동두천시 광암동 탑동마을 정장공(貞莊公) 어유소(魚有沼) 사당(동두천시향토유적 제7호). (下)정장공(貞莊公)이 1488년 성종과 함께 인근 어등산(御登山)에서 사냥하다 화살로 솔개를 맞혀 떨어뜨리자 동두천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두천시 생연동의 사패지 경계.
유소(有沼ㆍ1434∼1489)는 자는 자유(子游)로 득해(得海)의 아들이다. 1451년 내금위(內禁衛)에 보직되고, 세조 2년(1456년) 무과(武科)에 장원, 사복시 직장(司僕寺直長)ㆍ감찰(監察)을 역임, 1460년 야인(野人)정벌에 공을 세워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 되고, 1463년 회령부사(會寧府使)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좌대장(左大將)으로 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으며,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 해 겨울을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조선에 청병(請兵)하자 좌대장(左大將)으로 출전해 크게 공을 세워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품을 하사받았으며, 예종 1년(1469년) 함경북도 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가 되었다.
성종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이 되고, 이어 두 차례나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를 지냈다. 1476년 우참찬(右參贊)이 되어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78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479년 멍나라의 요청으로 다시 건주위 정벌을 하게 되자 서정대장(西征大將)이 되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만포진(滿浦鎭)에 이르렀으나 압록강의 해빙(海氷)으로 도하 작전(渡河作戰)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회군(回軍), 이에 명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대신들의 주장으로 양근(楊根)에 유배당했다. 이듬해에 풀려 나와 도총관(都摠管)이 되고, 이어 이조판서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영안도순찰사(永安道巡察使)를 역임, 1488년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判中樞府事兼都摠管)에 이르렀다. 1489년 10월 4일 경기도 영평에서 성종이 강무(講武)할 때 사장(射場)에서 과로로 죽었다. 시호는 정장(貞莊).
그는 100근짜리 무거운 활을 지고 다니며 북변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치장(治將)으로 유명했다. 특히 북변의 오랑캐를 잘 다스려 이름을 떨쳤는데, 오랑캐가 예물을 가지고 와서 뵈면 그는 ‘너희들에겐 취하지도 않고, 추호라도 범하지도 아니하리다’ 하며 거절하므로 야인들이 손을 들어 이마에 올리면서 ‘공은 우리 아버지시다’라고 하였다. 그가 다시 북병사로 기용되었을 때 노모를 핑계삼아 사양하니 성종(成宗)은 ‘북변을 편하게 함이 경보다 나은 이가 없어 그런 것이니 어머니는 걱정말라’ 하면서 유소(有沼)의 어머니에게 태후(太后)와 동등한 예우를 하도록 하사품(下賜品)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나라에서는 오랑캐들과 무슨 외교를 진행하면서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어령공(魚令公)을 오시게 한다’고 공갈하여 곧잘 화의를 보았으며, 그들은 ‘어령공이 정말 오시는가, 오신다면 그이는 곧 우리 아버지이니 만나 뵐 수 있을까’ 하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 경기도 동두천시 광암동에 자리한 정장공(貞莊公) 어유소(魚有沼)의 묘(동두천시향토유적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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