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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하양 허씨(河陽許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하양 허씨(河陽許氏)는 고려 현종(顯宗) 때 호부낭장(戶部郎將)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가락국(駕洛國)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末年)에 하주자사(河州刺史)가 되어 하주(河州ㆍ하양의 옛 지명)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하주(河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이후 하양(河陽)으로 개관(改貫)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강안(許康安)의 손자 작린(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ㆍ무관의 종3품 임시 벼슬)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신(愼)은 호부상서(戶部尙書)와 동정(同正) 등을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세종실록 권91 22년(1440년) 12월 8일(정축)조에 기록된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의 졸기(卒記).
 

주(周ㆍ1359~1440)는 자는 백방(伯方)ㆍ백공(伯公),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누천하여 전법정랑(典法正郎)이 되고, 우왕 11년(1385년) 지양주사(知襄州事)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 공부총랑(工部摠郎)ㆍ경기우도 염문계정사(京畿右道廉問計定使)를 거쳐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내부경(內府卿)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인척들이 조선 건국기에 고위관을 점유함으로써 조선의 거족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태조 6년(1397년) 사헌중승(司憲中丞)을 겸직하고, 이해에 노비변정도감도청사가 되어 노비소유에 대한 소송사건을 공정히 처리하였으며, 정종 1년(1399년)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이 폐지되자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ㆍ지형조사(知刑曹事)를 역임하였다. 태종 1년(1401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서 경상도 안렴출척사(慶尙道按廉黜陟事)가 되었으나 새로 개간된 토지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해 이듬해 양주에 유배되었다. 1405년 형조참의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즉위년(1418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재직중 병으로 사퇴하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공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시호는 간숙(簡肅).


  

▲ “…부음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매우 슬프게 여기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고기 반찬을 거두고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를 내렸으며, 관(官)에서 장사지내게 하였다” - 세종실록 권87권 21년(1439년) 12월 28일(임인)조에 기록된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졸기.
 

주(周)의 동생 조(稠ㆍ1369~1439)는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으로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공양왕 2년(13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좌보궐(左補闕)에 특임(特任)되고, 이어 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서 예제(禮制)의 제도화에 힘썼다. 정종 2년(1400년)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을 거쳐 완산판관(完山判官)ㆍ이조정랑ㆍ집의(執義)ㆍ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 등을 지냈으며, 태종 11년(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왕실의 의식과 일반 상제(喪制) 등을 법전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가 되었고, 그 뒤 2차례 이조판서를 지낸 뒤 세종 20년(143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에 정통하였으며, 검소한 생활과 강직한 성품으로 신망을 얻었다.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

  

▲ 1684년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를 추모하기 위해 경산시 하양읍 금락동에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가 1923년 현 위치인 하양읍 부호리로 이건한 금호서원(琴湖書院ㆍ경북문화재자료 제449호).
 

주(周)의 아들 성(誠ㆍ1382~1441)은 자는 맹명(孟明)으로 태종 2년(140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이 되었다. 그뒤 형조ㆍ예조ㆍ병조의 좌랑을 거쳐 태종 11년(1411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어 당국의 불법을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으나 곧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등용되었다. 세종 3년(1421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고, 우사간(右司諫)과 동부대언(同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31년에 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곧이어 형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낸 뒤 경기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143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임하였으며, 이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중추원사(中樞院事)ㆍ이조판서를 거쳐 1440년 예문관 대제학(藝文官大提學)에 이르러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불의를 못 참았으며, 총명함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시호는 공간(恭簡).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와 정간공(貞簡公) 허후(許珝) 부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정충각(旌忠閣ㆍ경북문화재자료 제450호).

 

조(稠)의 아들 후(珝ㆍ?~1453)는 세종 8년(142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1436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거쳐 1442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ㆍ경기도 관찰사ㆍ대사헌ㆍ형조참판을 지내고, 1448년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문종 1년(1451년) 형조판서에 올랐고, 1452년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1년(1453년)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과 단종을 보필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황보인ㆍ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후 연회를 베풀 때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수일 후 그들을 효수(梟首)하자 이를 반대하며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거제도(巨濟島)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교살(絞殺)당했다. 영조(英祖) 때 신원되었으며, 정조 15년(1791년)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정단배식(正壇配食) 32인에 함께 향사되었다.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
 

  

▲ 1816년 간행된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와 아들 정간공(貞簡公) 허후(許珝), 손자 응천(凝川) 허조(許慥)의 시문집인 ‘금호세고(琴湖世稿)’.
 

후(珝)의 아들 조(慥ㆍ1430~1456)는 호는 응천(凝川)으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의 매부(妹夫)이다. 일찍이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고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아버지가 사사(賜死)되고 세조 2년(1453年)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를 모의할 때 이에 가담하여 함께 거사하려 하였는데 배반자의 고변(告變)으로 인하여 사전에 동지들이 체포됨을 듣고 조복(朝服)을 입은 후, 사묘에서 대곡(大哭)하고 자진하여 죽었다. 금부(禁府)에서 체포하러 몰려왔다가 그 시신은 사육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고, 허연령(許延齡)ㆍ허구령(許九齡)의 두 아들도 처형되었다. 정조 14년(1790년) 종손(宗孫) 묵(默)이 탄원하여 복위되고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1792년에 아버지 후(珝)와 함께 정문(旌門)을 명하고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岩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주벽으로 여러 선현을 제향하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송동리 화암서원(花巖書院)이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56년 일부 복원된 모습(上)과 최근 새롭게 단장된 모습(下). 1738년 정간공(貞簡公) 허후(許珝), 1806년 응천(凝川) 허조(許慥)가 추배되었다.
 

계(誡ㆍ?~1502)는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척(倜)의 아들로 세조 5년(1459년) 진사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로 등용되어 집의(執義)를 거쳐 성종 6년(1475년) 장령(掌令)이 되고, 좌통례(左通禮)ㆍ부제학(副提學)ㆍ우부승지(右副承旨)ㆍ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성종 21년(1490년)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푼 공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1493년 형조참의ㆍ대사간ㆍ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글씨에 뛰어나 당시의 금석문 중에는 그의 작품이 많았다. 풍덕(豊德)에 물러나와 살면서 소를 타고 도롱이와 삿갓차림으로 물고기 낚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며, 남효온(南孝溫)이 일찍이 그를 평하기를 ‘기이한 선비다. 사람된 품이 마음이 활달하여 사뭇 모든 일에 구속받지 않고 권세나 이욕에 뜻이 없어 허씨의 가풍(家風)이 있다’고 하였다.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 허임(許任)이 1644년 찬술한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과 1981년 충남 공주군 우성면 한천리로 묘를 이장할 때 관 위에서 나온 백자접시.
 

그외 임(任)은 ‘하양허씨세보(河陽許氏世譜)’에 의하면 문경공파 21세손으로 락(珞)의 아들로 언급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관노(官奴)로 허억봉(許億逢) 혹은 허억복(許億福)이라는 이름의 악공(樂工)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침구에 뛰어나 선조 때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동반(東班)의 위계(位階)를 받았으며, 광해군 4년(1612년) 허준(許浚)과 함께 의관록(醫官錄)에 기록되었다. 광해군 8년(1616년) 영평현령(永平縣令)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양주목사(楊州牧使)ㆍ부평부사(富平府使)를 거쳐 광해군 14년(1622년)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조선에서 으뜸가는 침의(鍼醫)’라는 평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ㆍ‘동의문견방(東醫聞見方)’ 등이 있다.



 

침뜸의 대가 허임의 삶(조선은 침술 종주국이었다) / 대전MBC 방송


 

임(任)의 아버지로 기록된 억봉(億逢)은 강원도 양양의 관노로 어린 나이에 장악원(掌樂院) 악공으로 뽑혀 서울에 올라왔다. 12살부터 악기를 연주하던 그는 특히 대금을 잘 불었으며, 마침내 조선시대 악인 중 최고 위치인 장악원 전악(掌樂院典樂)이 됐다. 장악원 첨정(行掌樂院僉正) 안상(安瑺)이 ‘금합자보(琴合字譜ㆍ보물 제283호)’를 만들었는데,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가 가정 신유년(1561)에 장악원 첨정이 되었는데, 악공(樂工)을 시험할 때에 쓰는 악보와 책을 보니 문제가 있었다. 예전의 합자보(合字譜)를 버리고 다만 거문고와 상하 괘(卦)의 차례만 있으며, 손가락을 쓰는 법과 술대를 쓰는 법은 없으니, 거문고를 처음 배우는 자들이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악사 홍선종(洪善終)을 시켜 당시의 곡조를 모으고 약간의 악보를 보태어, 합자보(合字譜)를 고쳐 내게 하였다. 또 허억봉(許億逢)에게 적보(笛譜)를 만들게 하고, 이무금(李無金)에게 장구보를 만들게 하여 그 가사와 육보(肉譜)를 함께 기록했다. 홍선종은 기보법(記譜法)에 통달하였고, 허억봉과 이무금은 젓대와 장구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들이다.”  


 
▲ 허임(許任)의 아버지 허억봉(許億逢)이 적보(笛譜)를 만든 것으로 기록된 ‘금합자보(琴合字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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